778년.
제닝스 13세가 국왕으로 있는 나라.
왕국 내부의 자잘한 분열도 없어야 하며 주변 이웃 국가들과도 최대한 전쟁 없이 평화를 유지 하여야 한다는 평화주의자 국왕이 다스리는 나라.
풍족하고 덧없이 평화로운 엘로지아 왕국.
왕국 안에 각 지역을 관리하는 여러 귀족들 사이도 별다른 틀어짐 없이 유한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었다.
이런 평화로운 엘로지아 왕국은 거짓말 같겠지만 대 전쟁이란 역사가 깃든 땅이다.
400년 전, 그러니까 엘로지아가 겪은 거대하고 최악이었던 한 대 전쟁 이후로 전쟁은 400년 동안 수많은 서적들 속에 전설로 기록 되었다.
400년 전의 이야기들은 전설로 기록 된 채 왕국 전체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400년 전의 전설들은 왕국이 오늘날 자리 잡히는데 발판 같은 역할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때의 대 전쟁의 전설의 중심이었던 라페네.
즉, 엘로지아 성이 있으며 왕국 동북쪽에 위치한 최고의 도시이자 수도이다.
왕가가 있는 성이 있기도 하지만 400년 전 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오랜 혈통의 가문 중의 하나인 에를리히 가문이 관할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라페네의 또 하나의 자랑 거리인 최대 규모의 시장, 사른.
사른은 왕국의 각 지역에서 들어오는 진귀한 식재료와 물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 서 있다.
그만큼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들도 풍부한 사른의 거리를 열댓 살 가량으로 보이는 한 소년이 걷고 있었다.
흰 셔츠와 블론드 색상의 멜빵바지. 그리고 검은색 베레모를 쓴 소년의 모습은 아주 말끔하고 귀티마저 흐르는 듯 했다.
얼굴 또한 어린 소년이라 그런지 오목조목 곱상해보였다.
진녹색 빛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큰 눈망울 하며 적갈색의 그려진 듯 정갈한 눈썹, 오똑한 코, 작고 선홍빛을 띠는 입술,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까지.
소년의 눈은 화려하고 활달한 사른 이곳저곳을 흥미롭게 두리번거렸다.
한참을 직진하며 시장을 활보하던 소년의 발걸음은 즐비한 상점들 중 한 상점 앞에서 멈췄다.
옐로우트리 라는 이름이 새겨진 간판이 소년의 시선에 들어왔다.
소년의 선홍빛 입술 꼬리가 양끝으로 쭉 올라갔다. 그리고 소년의 눈빛 또한 기대에 찬 듯 반짝 거렸다.
“거짓말이 심한 거 아니야? 너?”
“그래~ 거짓말인 거 같아. 그건.”
“아우, 답답해! 거짓말 아니라니까?”
소년이 상점 문손잡이를 턱 잡자마자 소년보다 한참 더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소년이 문을 열려다 말고 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는 세 명의 남자 아이들이 옐로우트리 앞을 지나가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따지며 받아치자 그 중의 한 아이가 고사리 같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퍽퍽 쳐대고 있었다.
“어떻게 세룰리언 루멘이 이레인님 보다 더 세냐?”
“내 말이~ 책 속에만 있는 세룰리언 루멘이 미래를 보시는 이레인님을 어떻게 이겨?”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신을 타박하듯 핀잔을 주는 친구들의 반응에 아이는 속이 더 답답해졌다.
아이는 급기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계속 앞서서 걸어가는 친구들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세룰리언 루멘이 드래곤들을 소환할 수 있다니까? 그럼 세룰리언 루멘이 더 센 거라니까!”
빽빽 소리치는 아이의 외침은 그저 멀어지는 나머지 아이들이 벗어난 허공에 울리기만 할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뒤로한 채 아이는 뽀루퉁한 얼굴로 멀어진 친구들을 쫓아갔다.
잠깐 소란스러웠던 옐로우트리 앞이 잠잠해졌다.
소년은 어느새 희끗하게 멀어진 아이들의 뒷모습들을 가만 보다 옐로우트리 문고리를 힘껏 잡아 당겼다.
소년이 상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소년의 시선이 상점 계산대 쪽으로 꽂혔다.
옐로우트리 사장 필립이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주름진 그의 얼굴을 상점 안으로 쫙 퍼져 들어온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소년은 살금살금 계산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졸고 있는 그의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런 뒤 소년은 한껏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를 향해 외쳤다.
“드래곤이 나타났다!”
소년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필립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얏!”
필립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그의 머리에 소년의 얼굴이 꽝 부딪혔다. 필립을 놀래켜 주려다 소년은 자신도 필립과의 충돌에 아비규환이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얼굴 쪽에서 통증이 일었다. 필립 역시 얼얼한 머리를 손으로 부비며 정신을 차리고 이내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은 두 손으로 코 쪽을 감싸 쥔 채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공주님!”
필립은 소년을 향해 그렇게 외치다 자신의 입을 한 손으로 급하게 틀어막았다.
“으읏~”
소년은 밀려오는 통증을 꾸역꾸역 참았다. 그리고 필립을 보며 앙 다문 자신의 입술 위에 검지를 살짝 갖다 댔다.
“공! 아니, 괜찮으세요?”
필립이 걱정스런 얼굴로 소년에게 묻자 소년은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아니 성에서 몰래 나오시는 것도 모자라 매번 여기로 오시면 전 어떡합니까? 성이 발칵 뒤집어 지기라도 하면 저는 어떡하라고요? 100년의 전통을 이어온 이 가게 제 선에서 문 닫는 꼴 보고 싶으신 겁니까? 공, 아니 아가씨?”
필립의 토로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표정은 너무나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필립의 머리와 충돌한 충격으로 아직 코 쪽은 얼얼한지 소년은 코를 매만지며 그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걱정 마셔요. 온갖 진귀한 물품들 공급해주시는 사장님과 이 가게 문 닫히게 하지 않을 테니까요. 저한테 보물 창고와도 같은 이 가게 문 닫는 꼴 제가 더 못 보는 거 아시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할 수가 없네요. 제 머리로 이해하려고 한지 벌써 4년도 더 됐지만요. 보물이야 성에 더 넘쳐 날 텐데 말이지요?”
“저한테는 여기만 못해요.”
“허! 배부른 소리 하십니다요!”
소년의 말에 필립은 콧방귀를 뀌며 맞받아쳤다.
소년은 그의 말에 또 다시 히죽 웃었다. 그리고 아차 한 뒤 계산대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목소리 톤을 조금 낮추고 은밀하게 그에게 물었다.
“참, 혹시 그거 들어왔나요?”
필립은 못 마땅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소년을 곁눈질 하며 되물었다.
“그거라니요?”
“에이~ 모른 척 하실 겁니까?”
“아, 뭘 말 입니까? 공, 아니 도련님?”
필립은 소년의 말에 다시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아이참! 저 소문 다 듣고 왔어요!”
소년은 답답한 마음에 역정을 내며 필립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리고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 무슨 소문이요?”
“스칼에서 무역을 하고 돌아온 무역상들 중에서 용의 비늘을 갖고 온 자가 있다면서요?”
“그런데요? 도련님?”
“나 참! 끝까지 이러실 거 에요? 사장님? 그 무역상이 이곳에다, 그러니까 여기 옐로우트리에 용의 비늘을 팔았다는 소문을 제가 똑똑히 듣고 왔다 이 말입니다!”
소년의 다그침에 두 눈을 끔뻑거리던 필립이 잠자코 있다 입을 열었다.
“아, 그 스칼에 다녀온 무역상이요?”
“네네!”
필립의 말에 소년은 답답한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다시 기대에 차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필립을 바라보았다.
필립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무역상이 우리 가게에 와서 물건들을 잔뜩 갖다 주고 가긴 했죠? 그런데…….”
필립이 쭈뼛쭈뼛 말을 하자 소년은 다시 계산대 가까이로 몸과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필립을 올려다보았다.
필립이 그런 소년을 부담스러운 듯 힐끗 내려다 보다며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용의 비늘은 없었는데요?”
그가 무심코 뱉은 한마디에 순간 필립과 소년, 둘 사이에서 허무한 정적이 잠깐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