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은 창현을 부축하고 건물 밖으로 움직였다. 집에 도착한 뒤에도 창현의 머릿속에는 남자의 음성이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남자의 다른 말들은 모두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었다.
‘우린 악이 아닙니다. 우리를 악이라 정한 것은 그저 자신들은 갖지 못한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우리를 시기한 사람들입니다. 혹시 NSR에서 우리와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 말은 그대로 사실이었다. 무어라 마음속으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파수꾼을 제외한 NSR의 일원들 중 그 누구도 파수꾼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NSR의 관리자급들은 모두 일반인들이다. 미래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 ‘파수꾼’이라는 단어 아래 그들의 관리하에 있었다.
‘왜 우리는 우리보다 못한 존재들의 수단이 되어 그들 대신 목숨을 잃고, 그들의 개가 되어 가족들에게도, 친한 친구에게도 나란 존재를 밝히지 못한 채 자유를 잃어야 하는 것입니까?’
표현이 조금은 거칠었지만, 역시나 틀린 말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일반인들의 휘하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내 창현은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자신의 볼을 양손으로 두드렸다. 정신 차려야 했다. 이것이 훈련소에서 그토록 들었던 저들의 공격이었다. 창현은 지금 저들의 말도 안 되는 말에 현혹되어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황급히 고개를 휘젓고 정신을 차렸다. 그림자는 살인자 집단이다. 10여 년 전 수천의 사람을 건물 아래서 참혹하게 죽게 만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지금까지도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자신들의 말도 안 되는 신념을 위해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고 있는 집단이었다. 창현은 스스로 품었던 의문에 대해 창피함과 그리고 이내 투지가 불타올랐다.
*****
동식은 자신의 앞에 놓인 국밥 그릇을 아예 들고 마시기 위해 집어 들며 말했다.
“형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뭐라고 했지?”
“왜 그렇게 생각하냐니까?”
“아 맞아 그래. 그날 뭔가 이상했어. 서혜진이 사건 현장을 바라보던 그 눈빛은 죄책감? 연민 같은 느낌이었어.”
동식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에이. 말도 안 돼. 형. 걔들은 그림자야 잊었어? 사람을 몇이나 죽였는데 걔들한테 과연 감정 같은 게 있을까? 난 그게 더 궁금한데.”
동식의 말에 창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과연 저들에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남아있을까. 하지만 창현이 그날 보았던 서혜진의 얼굴은 분명 슬픔에 잠겨있었다. 마치 아는 지인이라도 죽은 것처럼.
동식은 자신의 맞은편 창현의 뒤쪽에서 연신 떠들어대고 있는 TV를 바라보며 말했다.
“백날 경찰 욕만 하면 뭐하나. 진범은 다른 곳에 있는데. 하긴 경찰도 아무것도 모르니 답답하겠다. 만약 나도 일반인들과 같았다면, 경찰 욕이나 하고 있겠지? 막 이랬네 저랬네 하면서?”
“너만 그렇겠냐. 아마 나도 그러고 있었을걸. 그나저나 걱정이다.”
“뭐가?”
“부모님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제비한테 공무원 합격 원서라도 보내 달라고 해. 그럼 믿으시겠지.”
“학교도 아직 졸업 못 했는데 갑자기 무슨 공무원.”
“뭐 우리가 못할게 뭐 있나. 자리야 만들면 되는 거지 뭐. 혹시나 말이나 해봐. 그게 제일 쉬운 방법일 것 같은데.”
“그래 봐야겠다.”
창현과 동식은 붐비는 서울의 한 식당에서 나오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섰다. 맛집으로 유명한 국밥집에는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이 시간에도 꾸역꾸역 사람들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창현은 계산을 마치고 입구를 향해 돌아서다 웬 남자와 부딪혔다. 사과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이 나가고 밀고 들어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창현과 동식은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한창 더울 오후 2시. 숨이 턱 막히는 한여름의 공기와 녹일 듯 내리쬐는 햇볕은 사람의 진을 빼는데 한몫을 했다. 이제 한 시간만 더 돌면 오늘의 일과도 끝이었다.
창현은 오늘 아침 순찰을 끝마치고 본부로 오라는 용현의 지시를 받았다. 아마도 어제 용현이 말했던 고원욱 본부장과의 데이트가 잡혀 있는 것 같았다. 이 날씨에 고원욱 본부장에게 훈련을 받는다면 아마도 본부 어딘가에서 녹아버릴 것이었다. 이 지옥 같은 날씨에도 차라리 이곳에 있으라면 그것이 훨씬 나을 것이었다. 창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세워둔 차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 길이 원욱을 향해 가는 것만 같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일그러지듯 웃고 있는 원욱의 모습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동식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을 재촉했다.
“얼른 가자. 빨리 끝내고 드라마 재방송 봐야 한단 말이야.”
점심 이후 순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다. 꿈을 꾸지 않았기에 특별한 일 역시나 일어나지 않았고, 원욱을 만나러 가야 할 시간만 다가오고 있었다. 창현은 계속해서 계기판에 나와 있는 시계에만 눈을 힐끔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동식은 옆에서 아무런 말없이 창밖으로 서울의 풍경과 잔뜩 인상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보이는 거대한 사거리를 기점으로 좌회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면 오늘 할 일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창현은 곧장 수원 본부로 향해 고원욱 본부장을 만나야 할 것이었다.
결국 순찰은 아무 일 없이 끝났다. NSR에서 마련해준 집으로 돌아가기 전 편의점을 들러야 한다는 동식이의 칭얼거림에 집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빼곡하게 들어찬 서울의 건물들 한켠에 자리 잡고 있는 편의점 앞에 차를 세운 창현은 동식에게 말했다.
“조금만 사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잖...”
하지만 동식은 이미 차 문을 열고 나가 편의점 문을 열고 있었다. 창현은 동식의 행동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동식이 편의점을 동네 놀이터마냥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던 창현은 눈을 감고 라디오를 켰다. 나른한 오후를 깨워주는 신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원욱과의 개별 만남 덕분에 우울했던 창현의 기분을 잠시나마 풀어주었다. 잠시 뒤 노래가 끝나고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57분 교통정보입니다. 날씨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겠...’
여자의 목소리 중간에 무언가 차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툭’
‘후두두둑’
갑자기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에 창현은 절망했다. 이 상황에서 비까지 온다면 정말 최악이 아닐 수 없었다. 눅눅한 공기에 높은 온도. 상상만 해도 짜증스러웠다. 창현은 한숨을 내쉬며 감았던 눈을 떴다. 하지만 이내 창현은 숨을 들이켜 마셔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