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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너에게 가는 길
작가 : 사파이어
작품등록일 : 2019.11.10

우주에는 ‘넵툰’이라는 청록색의 신비로운 행성이 있다. 그 곳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의 딸 ‘라미아’가 거대한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
우주에서는 삶이 무한하고, 아름다움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에 우울증에 빠진 ‘라미아’가 아버지에게 ‘지구’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데,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를 하다 결국 3년 안에 돌아오라는 약속을 하며 허락한다.
‘라미아’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어떤 범상치 않는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8회
작성일 : 19-11-10 23:12     조회 : 158     추천 : 0     분량 : 1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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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나는 집을 등진 채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파도가 엄청 거세게 몰아붙였지만, 그녀에게는 닿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날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도 했지만, 채지나의 주변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이 느껴졌다. 라미아는 소름이 끼쳤다.

 “라미아라고 했나요?”

 채지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라미아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설령 소리가 들렸더라도 지금 같이 거센 파도 앞에서는 어떤 소리도 쉽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채지나는 라미아가 자신을 따라 나올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라미아가 따라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라미아……”

 채지나가 고개를 돌려 라미아를 바라봤다. 라미아는 채지나가 자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것이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긴장한 채로 잔뜩 날이 서있는 라미아와는 달리 채지나는 한껏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상대가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채지나의 얼굴에는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미소가 드러나 있었다.

 “포세이돈의 23번째 딸이 아버지를 쏙 빼 닮았다고 하던데, 겉모습만 봐서는 전혀 모르겠군.”

 라미아는 당황했다. 라미아의 예상대로 지금 자신의 앞에 서있는 이 여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알지?”

 “글쎄…...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신보다 내가 당신을 더 잘 알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으려나.”

 채지나는 뒷짐을 지고 물러섰다. 스스로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라미아는 혼란스러웠다. 채지나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미아, 아버지가 김정기를 절대로 만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 아버지 포세이돈? 아니 그런 말을……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당신, 당신 도대체 누구야?”

 “위대한 전쟁의 신, 아레스의 손자이자 오이노마오스의 아들, 레우키포스.”

 “레우키포스?”

 라미아는 바로 앞에 선 상대를 다시 집중해서 쳐다봤다. 그의 옆구리쯤 어딘가에서부터 까만 빛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마치 그의 온 몸이 컬러에서 흑백으로 변하듯이 채지나의 모습에서 본래의 레우키포스로 순식간에 변했다. 이제야 레우키포스의 본 모습이 라미아에게도 또렷하게 보였다.

 레우키포스의 존재감은 강렬했다. 그는 몹시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지만, 그에 비해 유난히 마른 몸은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특유의 어두운 기운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정색인 그의 옷을 뚫고 몸 주변까지 뿜어져 나왔다.

 눈 주변이 움푹 들어가있어서 그런지 그의 눈동자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소름 끼치도록 하얗고 투명한 피부와 대조적으로 유난히 까맣고 풍성한 머리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얇은 입술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라미아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레우키포스.”

 라미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정확히 기억도 안 날만큼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라미아가 이렇게 컸다니 몰라 보겠어. 포세이돈은 안녕한가?”

 포세이돈의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부르는 자는 온 우주에서 이 자밖에 없을 것이다. 라미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았다. 레우키포스에게서 나오는 기운 때문인 건지 그들이 서있는 곳의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다. 라미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어두운 기세에 눌려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랜만에 레우키포스를 다시 만난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왜 그렇게 넵툰을 떠났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는 마냥 반가운 상대만은 아니었다. 라미아가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 레우키포스에 대한 첫 인상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그에 대한 기억이었다. 넵툰의 평균 온도는 지구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훨씬 더 낮았지만, 레우키포스에게서 느껴졌던 차가움은 라미아가 당시에도, 심지어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한기를 느끼게 했다.

 처음 만난 라미아 앞에서 레우키포스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라미아는 레우키포스가 미소라는 것을 지을 수 없도록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그 차가운 몸 어디에서 생겨났을 지 모를 거대한 불을 내뿜으며 화내는 모습을 자주 보곤 했었다.

 “라미아, 지구에는 오랜만이네. 그렇게 떠났을 때 다시는 지구에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내가 지구에 왔을 때 레우키포스도 함께 왔었나?”

 “함께 왔다기보다는 네가 지구에 다녀가는 걸 보고 있었다는 것이 정확하겠지. 내가 지구를 지키고 있었던 세월도 벌써 천 년이니까 이제 지구가 내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테지.”

 “내가 마지막으로 지구로 왔던 게……”

 라미아는 레우키포스 앞에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지만 아무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무 어렸을 때니까 기억을 못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레우키포스도 그렇게 생각할까, 라미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400년 전쯤일 거야, 아마.”

 “400년? 그러면 내가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잖아.”

 “기억을 못한다? 그렇다면 이유가 따로 있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누군가 일부로 기억을 지웠다거나?”

 라미아는 레우키포스의 눈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이 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기억인지 모를 무언가를 일부로 지웠다는 이야기는 삼라바도 은연 중에 말한 적이 있었다.

 “레우키포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어리석은 자여, 네 자신의 일에는 정작 마음이 약해져 갈피도 잡지 못하면서 네가 누구를 다스리고 누구와 맞설 수 있다는 말이냐.

 애당초 김정기와 맞서지 못하고 쓰러졌을 때 넌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어야 한다. 기억이 지워졌다고? 이미 네가 본능적으로 그걸 기억해서 지구에 온 것 아닌가?”

 “김정기가 도대체 누군데? 김정기가 요주의 인물이라는 건 나도 알아. 다만, 다만 그에게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을 뿐, 나는 그를 한 번도 완전히 믿은 적 없었어.”

 레우키포스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라미아는 자신도 모르게 레우키포스 앞에서 김정기와의 관계에 대해 변명 같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레우키포스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레우키포스가 라미아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믿음이라는 게 참 신기하지. 몇 번의 400년을 한결같이 기다리게 만들 수 있다니.

 하지만 불쌍한 라미아,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심 어린 충고 하나 해줄까? 더 늦기 전에 저 자식으로부터 도망쳐. 영원한 사랑은 없어. 사랑은 언젠가 뒤돌아서 널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네 기억이 되돌아 올 때 잘 들여다봐. 사실 너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자가 바로 저 자니까. 너를 애가 타게 하고, 너를 기다리게 만들고. 이번에도 네가 죽거나 그가 죽거나 언제나 결론은 하나야.”

 라미아는 마치 자신을 지옥으로 한없이 끌고 들어가는 것만 같은 낮고 어두운 레우키포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이 몽롱해짐을 느꼈다. 까만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번개 한줄기가 번쩍였다가 사라지는 순간, 레우키포스는 갑자기 까만 색 옷 속에 숨겨 두었던 거대한 낫을 꺼내 라미아의 가슴을 내리쳤다. 대낫은 커다란 S자 모양을 그리듯이 레우키우스의 품 속에서 미끄러져 나왔고, 얇고 날카로운 낫의 끄트머리는 순식간에 아주 정확하게 라미아의 심장의 위치에 가서 맞았다. 라미아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해변에 주저 앉아 버리고 말았다.

 라미아는 그 순간 상대가 내리친 쇳덩어리 같은 어떤 것이 자신의 가슴에도 똑같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두 쇳덩어리가 맞부딪혀 나는 듯한 둔탁한 울림이 들렸다. 가슴의 통증은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가슴에 갇혀 있던 응어리 같은 것들이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라미아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오늘 진실로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라미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회색의 수염이 얼굴 전체를 감싼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깊은 눈으로 라미아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라미아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우리가 다시 만났구나, 안도감이 들었다.

 “라미아.”

 라미아가 쓰러지기 직전, 김정기가 달려와 라미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김정기는 라미아를 안고 오열했다. 눈물이 갑자기 너무 많이 쏟아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김정기는 무슨 이유인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은 상황에서 왜 이렇게 많은 눈물이 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라미아는 김정기의 뺨을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김정기는 라미아를 안고 그대로 집으로 달려갔다.

 “레우키포스!”

 레우키포스는 단연코 지구에서 이런 무시무시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 들었으면 고막이 터져 나갔을 정도로 크고 굵은 목소리는 레우키포스조차 찰나의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삼라바는 레우키포스 바로 뒤에 서있었다. 삼라바의 목소리는 바다 전체를 뒤흔들었다. 레우키포스는 인간들과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 가짜 삼라바가 아닌 넵툰에서 봤던 진짜 삼라바가 그의 앞에 나타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마른 하늘에 천둥이 치는 소리를 들었다. 별안간 바다에 몹시 심한 돌풍이 불며 쉴새 없이 파도가 치고, 하늘에는 뇌성과 번개가 끊임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레우키포스가 뒤를 돌아보자 삼라바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아주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삼라바는 레우키포스를 당장이라도 집어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삼라바, 오랜만일세.”

 레우키포스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를 맞이했다.

 “레우키포스,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잠깐, 잠깐만 기다려보게, 삼라바.

 라미아는 금방 일어날 거야. 물론 아주 무시무시한 꿈으로만 끝났으면 좋았을 현실을 마주하게 되겠지만. 이제 라미아도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다면 혹시?”

 “라미아가 단꿈에서 깨면 그 때 다시 오지.”

 레우키포스는 삼라바가 라미아 이야기에 흔들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레우키포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삼라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삼라바는 라미아가 있는 김정기의 집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라미아는 정말 꿈을 꿨다.

 라미아는 울면서 하염없이 길을 걷다가 아득히 햇빛이 비추는 통로를 발견하고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 라미아는 아주 멀리서 어린 아이 한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동그랗고 잘생긴 소년이 마당에서 원을 그리며 뛰어 다니고 있었다. 지금의 지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집과 뒷동산의 풍경이 낯설었지만, 한 편으로 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라미아는 소년이 매우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계속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년은 빠르게 자라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었다. 멀리서 숨어 있었던 라미아는 이제 청년의 앞에 나타났다.

 “라미아.”

 “이순신.”

 이번에 아카마스가 이순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그를 정의하는 이름과 가문, 민족, 역사, 기후, 환경 등 매번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그의 외모만큼은 미세한 변화를 제외하고는 그대로였다. 약간은 거무스름한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떡 벌어진 어깨 때문에 몸은 더욱 다부져 보였다. 강렬한 눈빛에서는 카리스마가 느껴졌지만, 그의 미소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이순신은 수백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다정한 말투로 라미아의 이름을 부르며, 라미아의 손을 잡고, 라미아를 꼭 끌어안았다. 라미아는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느꼈다. 이순신과 함께 있는 것이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유일한 행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순신은 갑옷을 입고 라미아 앞에 나타났다. 라미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해상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이순신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때마다 라미아는 늘 바다에서 그를 지켰다. 바다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가 다치는 것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이내 한계를 느꼈다.

 적은 외부에서 침입해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부에도 있었다. 아주 가까이에도 있었다. 이순신이 신처럼 믿고 지키던 존재도 실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들의 욕심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끝내 아무것도 없었다.

 “이순신, 당신을 버렸던 나라, 임금이 버렸던 나라를 위해 왜 끝까지 싸우려고 하는 거에요? 이미 당신은 당신의 역할을 다 했어요.

 “라미아, 내 역할은 내가 죽는 순간까지 끝이 나지 않을 거에요. 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바다를 지키고, 나라를 지킬 거에요. 내가 왕이든, 신하이든, 노비이든, 천민이든 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면 얼마나 원통하겠어요? 그래도 내게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게 다행이잖아요.”

 이순신은 라미아를 바라보며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 지었지만, 라미아는 좌절했다. 라미아는 이순신의 신념을 꺾을 방법이야말로 그녀 손에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라미아,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라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았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때의 온전한 내 나라에서 마음 편하게 살게 된다면, 당신을 만난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당신 곁을 지킬 거에요. 넘어지지 않게, 다치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온 마음을 다해 정말 소중하게 말이에요.”

 라미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순신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지독히도 잔인한 운명이 먼저 그들을 향해 돌진할 것이다.

 라미아는 이번은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400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기다렸던 그였다. 그와 이렇게 빨리 이별할 수는 없었다. 라미아의 다음에, 다음에 하는 간절한 외침에도 시한부 같은 시간은 덧없이 흐르고 있었다.

 딱 7년이 되었을 무렵의 어느 날, 이순신은 커다란 배의 갑판 위에서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물결이 되어 멀리멀리 퍼졌다. 라미아가 손 쓸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순신이 쓰러져 차가운 갑판 위로 부딪히는 순간, 그의 품에서 묵직한 뭔가가 떨어져 나와 바닥으로 데굴데굴 속절없이 굴러갔다.

 옥색 빛의 둥그런 장식은 라미아에게 낯 익은 물건이었다. 바로 라미아가 이순신에게 만들어줬던 옥로였다. 연꽃 잎에 쌓인 세 마리의 해오라기 모양의 옥로는 원래 갓을 장식하는 것이었지만, 이순신은 모자에서 장식을 떼어내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

 라미아는 주변의 남자들이 옥으로 장식을 만들어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순신에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장식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라미아는 곧장 넵툰으로 달려갔다. 라미아는 넵툰에서 옥과 가장 비슷한 빛을 내는 투명하고 아름다운 보석을 찾아 가져왔다. 그리고 보석을 직접 깎고 다듬어 완성된 옥로를 이순신에게 선물했다.

 “와, 이게 뭐에요?”

 “이 옥로가 당신을 지켜줄 거예요.”

 이순신은 옥로를 받아 들고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옥로는 햇빛에 비춰 무수히 많은 색깔로 빛이 났다. 라미아는 이순신이 처음으로 갓을 쓰던 날에 그의 모자에 옥로 장식을 달아 주었다. 이순신은 라미아를 만나는 날에는 항상 갓을 쓰고 나와 옥로를 단 갓 머리를 라미아에게 뽐내곤 했었다. 라미아는 옥로를 보며 그녀의 바다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영원히 지켜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라미아는 그녀의 간절했던 믿음과 함께 바닥에 내던져진 옥로 조각을 집어 들고 이순신에게 달려 갔다. 가슴을 정통으로 통과한 총알은 이순신의 등 뒤를 뚫고 나갔다. 아무리 울면서 이순신을 잡고 흔들어도 이순신은 끝내 깨어나지 않았다. 라미아는 눈물을 흘리며 옥로를 다시 이순신의 품 안에 넣었다. 굴러 떨어지며 깨져 나간 날카로운 부분에 라미아는 손을 베고 말았다. 하지만 라미아는 아무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라미아의 세상이 멈춰버렸다. 라미아의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라미아의 귀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음절이 반복적으로 라미아의 귀를 날카롭게 뚫고 지나갈 뿐이었다. 어느 순간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멈춘대도 이순신의 가슴에서 솟구쳐 나오는 피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것만은 그녀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매서운 현실에 라미아의 세상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무심한 현실은 계속되고, 라미아는 이순신의 가슴을 더 세게 부여 잡으며 울부짖었다.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남해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라미아는 그가 떠난 남해 앞바다에서 수십 년을 보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라미아의 태양이 졌다. 라미아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사라졌다. 라미아가 온 몸으로 지키고 있던 어떤 것이 꺼져 버렸다. 라미아는 그 자리에서 아카마스가 다시 나타나기만을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라미아는 넵툰에 있었다. 라미아는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아버지, 저를 다시 지구로 보내주세요.”

 “라미아, 네가 지구에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게 되면 너는 결국 소멸해버리고 말 것이다.”

 어머니 리비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계속 울고 있는 라미아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었지만, 라아에게는 아무 위로가 되지 않았다.

 라미아가 식음을 전폐하자 포세이돈은 삼라바를 넵툰으로 불렀다. 포세이돈은 라미아가 가장 믿고 따르는 존재이자, 어느 형제, 자매보다도 라미아가 마음을 열고 기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삼라바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삼라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라미아 곁을 지켰다. 라미아가 자신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포세이돈이시여, 저는 자연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자연에서 살면서 아카마스와 함께 태어나고 죽을게요. 더 이상 아카마스가 없는 세상에서 그를 기다리며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럴 수 없다. 라미아, 너의 운명을 받아 들여라.”

 “저는 너무 괴로워요. 너무 괴로워서 살 수가 없다고요.”

 “그렇다면 아카마스를 없애거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라미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포세이돈과 옆에 있는 삼라바를 번갈아 쳐다봤다. 삼라바는 아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도 이제 널 가만히 두고 보지는 못하겠다. 네가 못하겠다면 내가 직접 나서 그 자를 네 생에서 아예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 네가 스스로 못하겠다면 내가 널 대신해서 해주겠다는 말이다.”

 “포세이돈이여, 인간 세상에 개입하는 우를 범하지 마시옵소서. 대신 라미아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그저 라미아의 기억에서 그 자만 도려낸다면 라미아가 진정한 그녀의 길을 찾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라미아를 지켜보던 삼라바가 차분한 목소리로 포세이돈에게 말했다. 라미아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라미아는 아카마스가 눈앞에서 죽어가던 순간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아무 감각이 들지 않았다.

 그를 기억에서 지운다? 그것은 라미아에게 마치 몸의 일부분을 잘라내라는 말과 같은 말이기도 했다. 고통은 왜 내 몸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일까? 고통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과연 누구란 말일까? 분명한 것은 나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는 것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내 자신 또는 내 자신의 일부, 나에게서 가장 가깝다고 느꼈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떤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내 몸의 일부분이라도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불쑥 내 삶에 찾아온다는 것은 몹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말 내 몸의 일부분을 잘라낼 수 있을까? 고통이 멈추면 그제서야 내 몸에서 뻥 뚫린 부분이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현실은 어떨까? 고통이 없으니 진정으로 행복해질까, 아니면 다시는 채워질 수 없는 구멍을 바라보며 후회하는 순간이 오게 될까?

 라미아는 궁금해졌다.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나왔던 눈물이 서서히 마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잠깐 눈을 떴을 때 라미아는 심장이 아파왔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라미아는 누운 채로 아픈 부분을 만져 봤다. 심장 대신 단단한 얼음 조각이 가슴 깊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이 멈추니 이제는 눈 안쪽이 아프기 시작했다. 마치 꼭 있어야 할 것을 억지로 없애버린 데에 대한 부작용 같았다.

 한 번 얼어버린 심장은 다시 원래처럼 따뜻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는 영원히 냉혹한 겨울만이 존재할 뿐,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라미아의 심장을 녹일 수 있는 존재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라미아.”

 “라미아.”

 라미아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목소리였다. 그가 라미아 대신 어떤 결정을 해주기 위해 온 걸까? 혼란스러운 라미아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방 천장의 따뜻한 색깔의 벽지가 가장 먼저 라미아의 눈에 들어 왔다.

 “아카마스.”

 라미아는 김정기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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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회 2019 / 11 / 10 186 0 7214   
11 11회 2019 / 11 / 10 200 0 9677   
10 10회 2019 / 11 / 10 168 0 8765   
9 9회 2019 / 11 / 10 194 0 12411   
8 8회 2019 / 11 / 10 159 0 10186   
7 7회 2019 / 11 / 10 199 0 10940   
6 6회 2019 / 11 / 10 199 0 8744   
5 5회 2019 / 11 / 10 180 0 11961   
4 4회 2019 / 11 / 10 178 0 10204   
3 3회 2019 / 11 / 10 172 0 10052   
2 2회 2019 / 11 / 10 196 0 10243   
1 1회 2019 / 11 / 10 341 0 8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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