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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너에게 가는 길
작가 : 사파이어
작품등록일 : 2019.11.10

우주에는 ‘넵툰’이라는 청록색의 신비로운 행성이 있다. 그 곳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의 딸 ‘라미아’가 거대한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
우주에서는 삶이 무한하고, 아름다움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에 우울증에 빠진 ‘라미아’가 아버지에게 ‘지구’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데,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를 하다 결국 3년 안에 돌아오라는 약속을 하며 허락한다.
‘라미아’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어떤 범상치 않는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7회
작성일 : 19-11-10 23:11     조회 : 198     추천 : 0     분량 : 1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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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미아와 김정기는 바닷가 백사장에 나란히 앉았다. 날이 어둑해지자 주변의 불빛들이 더욱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스름 속에서 파도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다 사라졌다. 김정기는 라미아에 대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당신에서 빛이 난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주 멀리서도 당신의 얼굴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거든요. 하지만 어쩌면 그 이유가…… 당신이 입고 있는 파란색 가운 같은 옷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느꼈어요. 왜냐면 파란색이 아주 강렬하고 또 예뻤거든요.”

 김정기는 옅게 미소 지으며 라미아를 똑바로 쳐다봤다. 김정기와 라미아는 서로의 눈을 보고 있었지만, 눈 앞이 흐려지며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기는 계속 말했다.

 “사람들은 고향이 바닷가라고 하면 엄청 부러워해요. 그런데 사실 바닷가에 오래 살다 보면 바다에 대한 환상은 없어지고, 장점보다 단점을 더 많이 알게 되거든요. 그리고 지긋지긋한 바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요.

 그런데 당신의 파란색 옷은 나에게 바다를 떠오르게 했어요. 그리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의지 같은 게 샘솟게 했어요. 사람들이 바다를 보면 꿈꾸는 이유가 이런 거구나 알게 되었죠.”

 “그래서 지금 내 옷이 어떻게 보인다는 거예요?”

 “음……. 일단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면 눈이 아플 정도로 아주 새파랗고, 두루마기 같이 얇은 재질이 몇 겹으로 둘러져 주름져있고, 마치 고정하는 부분은 따로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렇게 왼쪽 어깨에만 한 쪽 천이 둘러져 있고, 반대편은 이렇게…….”

 김정기는 라미아의 어깨 부위를 따라 그에게 보이는 그대로 모양을 그리다가 화들짝 놀라 라미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둘의 얼굴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실제 라미아의 양 쪽 어깨에는 하얀색의 블라우스가 걸쳐져 있었지만, 김정기에게는 드러난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그대로 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김정기의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라미아는 두 팔로 김정기의 양쪽 어깨를 밀어냈다. 김정기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라미아의 얼굴로 아주 가까이 다가온 김정기의 얼굴에 갑자기 낯선 남자의 모습이 겹쳐 보이며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놀란 라미아가 다시 고개를 들어 김정기를 쳐다 봤을 때, 낯선 남자의 형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본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나이가 제법 든 남자였다. 회색의 수염이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었고, 눈물을 흘리며 깊은 눈으로 라미아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라미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신만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 이런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는 걸까?

 “미안해요. 갑자기 다른 생각을 하다가.”

 “아니에요. 괜찮아요. 우리 그만 일어날까요?”

 김정기는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앉아 있던 평온했던 바다는 좀 전부터 파도가 거칠게 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파도는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덮치고 말 것 같았다. 마치 파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라미아는 김정기를 더 이상 그 자리에 두면 안 될 것 같다고 직감했다.

 먼저 일어 선 김정기가 라미아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라미아는 망설였다. 그와 손 끝이 닿았을 때 라미아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맥없이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지금은 라미아 혼자니까 정신을 잃으면 김정기에게 아주 쉬운 먹잇감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니, 라미아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절대로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라미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서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아.”

 소리를 지른 것은 김정기였다.

 “왜 그래요?”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자, 천천히 일어나요.”

 아주 조심스럽게 라미아의 손을 잡았던 김정기는 덥석 그의 큰 손으로 라미아의 양 손을 포개어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라미아의 손 등을 두 손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김정기의 손의 온기가 라미아에게 전해졌다. 잠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의 손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라미아는 가슴에 살짝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참을 만 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어디로 가요? 바로 서울로 올라가는 건 아니죠?”

 라미아가 쑥스럽다는 듯 손을 빼자 김정기가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미처 대답을 생각하지 못한 질문에 라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우리 집으로 갈래요? 오래 전에 민박도 해서 방이 많거든요. 지금은 부모님이 동해에서 펜션을 운영해서 남해 집에는 저 밖에 없어요. 원하면 편하게 사용해도 돼요.”

 김정기는 오해는 하지 말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여전히 멋쩍게 웃고 있었다. 라미아도 미소 지었다. 김정기의 표정이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를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었다.

 바다는 어느덧 칠흑같이 어두워졌지만, 마을이 모여 있는 곳은 바다와는 대조적으로 대낮같이 밝았다. 바닷가 마을의 불빛을 따라 앞서 걸어가던 김정기가 걸음을 멈췄다. 낮은 동산 옆으로 좁게 난 방파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오자 어떤 질서나 큰 특징 없이 서로 비슷해 보이는 여러 집들이 대중없이 서있었다. 그 중에서 김정기의 집은 약간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위치해있었다.

 좁은 도로는 짧게 경사져 있었는데, 김정기가 먼저 그 앞에 엉성하게 만들어 놓은 계단 모양의 구조물을 밟고 올라섰다. 좁은 도로에 딱 맞는 크기의 대문은 한 짝뿐이었다. 낡고 색이 벗겨진 초록색의 철제 대문은 사실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았지만 대문 안쪽으로 들어가자 예상보다 넓은 마당이 펼쳐졌다. 대문에서 현관문까지 이어지는 옆으로 널찍한 마당 벽을 따라 크고 작은 화분들이 줄 지어 서있었다. 하지만 식물들은 잎이 거의 없거나 다 말라 있었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상태로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것 같았다.

 집 안의 풍경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에 놓여 있는 낮은 신발장 위에서부터 소파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 안쪽 주방 안에 있는 식탁 위 여기저기에 쌓여있는 가족들의 물건들이 시선을 끌었다. 누군가 예민하게 집 안을 꾸미고 관리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지럽혀져 있는 집 안 분위기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균형감이 느껴졌다.

 라미아가 살고 있는 집과는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라미아의 집은 매우 크고 쾌적했지만, 오히려 집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은 별로 없었다. 지구에 잠시 머물다 가는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이랄 것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언젠가 훌쩍 떠나려면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무언가를 남기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라미아는 각종 물건들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집을 보며 지구에 와서 처음으로 어떤 감정을 느꼈다. 욕심이나 집착 없이 모든 것을 그대로 비우는 삶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것들로 하나하나 채우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지금까지 정의해왔던 자신의 삶에 물음표가 하나 생겼다.

 “조금 지저분하지만 그래도 봐 줄만 하죠? 여기 내 방에서 자요. 그래도 이 집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늑한 공간이에요.”

 “그런데 이건 뭐에요?”

 라미아는 김정기의 방 창틀에 놓인 옥색의 장식을 가리켰다. 오래된 장식이기는 했지만, 방에 달린 전등 불빛에도 7가지 빛깔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연꽃 잎에 쌓인 세 마리의 새 모양이 눈에 들어 왔다. 한 마리의 모양이 약간 엉성하긴 해도 세월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새에요?”

 “해오라기라는 새예요.”

 “아…… 신비롭고 예쁜 새네요.”

 라미아는 자신도 모르게 장식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늦었으니 좀 쉬어요.”

 김정기는 라미아가 있는 방 문을 살짝 닫고 나왔다. 김정기는 집 안의 모든 불을 끄면서 거실 구석에 놓인 이동식 전등 하나를 켜뒀다. 혹시라도 한밤 중에 거실로 나온다면 불편할 지도 모를 라미아를 위한 배려였다. 김정기는 오늘 밤에는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모든 불이 꺼지고 집 전체가 고요해지자 라미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대문 밖으로 나오자 거친 파도 소리와 함께 진한 바다의 향기가 코 끝에 느껴졌다. 김정기의 집은 정말이지 바다 바로 코앞에 있는 집이었다. 라미아는 방파제를 가볍게 뛰어 넘어 방파제 너머로 얕게 깔린 모래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김정기가 준 헐렁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다.

 “라미아.”

 “삼라바.”

 라미아를 부르는 낮은 음성이 바다 깊숙이 울려 퍼지자 라미아는 소리의 정체를 바로 알아챘다. 그리고 마치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라미아는 그녀의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삼라바를 태연하게 쳐다봤다.

 “라미아, 어떻게 된 거야? 왜 저 자식이랑 같이 있어?”

 평소의 삼라바답지 않게 화가 난 감정이 말투에 그대로 담겨 라미아에게 전해졌다. 라미아도 짐짓 놀란 눈치였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분노가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그것은 이번 일이 평소보다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고, 어쩌면 지금까지 조용히 쌓아왔던 것들이 일시에 폭발하기 직전임을 의미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야 할 거 아냐. 그래야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도 알 거고.

 그런데 삼라바…… 어쩌면 저 사람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아니,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보자는 거지. 잘못된 판단으로 오히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라미아는 주눅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렸을 때 자신을 호되게 가르치던 스승 삼라바 앞에 선 어린 소녀로 되돌아 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라미아, 포세이돈이 나를 호출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왜? 무슨 일인데?”

 사실 라미아도 짐작하고 있었다. 아버지 포세이돈은 이미 라미아에게도 여러 번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포세이돈의 메시지는 바람을 타고 파도를 타고 라미아의 온 몸에 전해졌다. 자연의 바다는 수십만 종의 생명체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지만, 포세이돈이 일으키는 거대한 파도에는 어떤 생물도 살지 못했다. 포세이돈이 분노할 때마다 라미아는 그런 바다 생명체들을 다스리고 위로해주곤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 포세이돈이 다른 누구도 아닌 라미아에게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이번이,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어쩌면 삼라바가 넵툰으로 떠나기도 전에 아버지 포세이돈이 이미 김정기 앞에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라미아는 나무에 강하게 새겨져 있었던 날카로운 흔적을 떠올렸다.

 “그런데 저 사람, 나쁜 사람이 아닌 거 같아. 오히려 그 반대야. 이렇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왜 나쁘다고 하려는 거지? 내 느낌이 틀린 걸까?”

 “라미아, 너의 판단이 한 쪽으로 치우친 거라면?

 너의 태도도 그렇고, 무엇보다 내 눈에도 저 사람의 정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주 불길해. 누군가 억지로 지워서 보이지 않는 거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저 사람이 그 자라는 걸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누구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언젠가부터 라미아와 삼라바가 서 있던 바다 위로 폭우가 거칠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 삼라바의 불안한 마음과 울분이 그대로 느껴졌다. 라미아는 자신을 걱정하는 삼라바의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라미아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유리 장식. 어디서 본 적 있었던 것만 같았던 김정기의 유리 장식이 불현듯 라미아가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라바, 나 일단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어. 우리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라미아.”

 삼라바의 애타는 부름을 뒤로 하고 라미아는 서둘러 다시 김정기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방 창틀에 있던 옥색의 장식을 집어 들었다. 다시 보니 조각의 한 부분이 이상하게 변형된 것이 아니라 새 한 마리의 몸통 부분이 통째로 깨져 나간 것이었다.

 라미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라미아는 품 속에서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해 온 유리 조각을 꺼냈다. 작은 조각에 조명이 반사되어 7가지 빛깔로 빛이 났다. 라미아는 유리 장식의 깨진 틈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조각을 맞춰 보았다. 정말이지 딱 들어 맞았다. 심지어 라미아가 접합된 부분을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마술처럼 완벽하게 하나의 장식이 되었다.

 라미아는 옥색의 장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빛에 따라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옥색깔의 크리스탈은 넵툰에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넵툰에서 만들어진 장식이 어떻게 김정기에게 있는 것일까?

 라미아는 급히 자리를 박차고 다시 바다로 갔다.

 삼라바는 김정기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라미아가 다시 밖으로 나갔을 때 삼라바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새벽녘, 아직은 어스름한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상념에 빠져 있던 라미아는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라미아를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온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아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라미아는 동작을 멈추고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상대를 마주했다.

 하지만 바로 뒤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상대는 사실 김정기 집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화장기도 하나 없는 얼굴에 순진무구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라미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서야 라미아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여기 김정기네 집 아니에요?”

 “누구시죠?”

 “아, 저는 정기 친구 채지나라고 합니다. 정기가 부탁한 게 있어서 왔는데……”

 김정기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뒤척이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소파에 살짝 기댄 채로 잠에 들었다. 김정기는 한밤중에 라미아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듣고 거실로 나와 그 때부터 한참을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채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라미아를 바라보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러다 한 남자가 라미아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아주 조용히 라미아를 향해 가더니 라미아의 귀에 징그럽게 긴 혀를 날름거렸다. 남자가 라미아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목소리가 들릴 것 같기도 했다. 그 때 김정기가 잠에서 깨어났다.

 김정기는 자신이 들었던 목소리가 단지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정기의 집 밖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정기는 곧장 대문 밖으로 나왔다. 누가 봐도 막 자다 깬 얼굴 그대로였다. 김정기는 라미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어 슬리퍼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 나왔다.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 여전히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두 여자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지나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니, 그 때 부탁했던 거, 단기 사무직 말이야.

 오늘이 서류 접수 마지막 날인데 사진 붙은 이력서가 필요하다고 해서 너한테 급히 받아 가려고.”

 “아, 사진이 필요하구나. 잠깐만. 내가 얼른 가지고 나올게.”

 김정기는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허둥지둥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라미아는 여전히 순진한 얼굴로 서 있는 채지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채지나는 라미아가 쳐다보는 시선을 피한 채 마치 순수한 호의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지만, 전화로 이야기하거나 김정기에게 직접 해결하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이런 새벽에 그를 만나러 오는 것은 어느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채지나의 눈빛이나 행동이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김정기는 봉투를 하나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거 내가 직접 제출해도 되는데……”

 “내가 해결할게. 내가 소개해준 일이니만큼 내가 마무리하는 것이 보기에도 좋잖아.”

 채지나는 김정기를 향해 활짝 미소 짓고 있었지만, 김정기도 그녀가 왠지 평소와는 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마워, 지나야. 혹시 아직 아침 식사 전이면 같이 먹고 갈래?”

 “아니야, 나 이만 갈게. 저 실례가 많았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라미아는 여전히 채지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채지나는 이번에도 라미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더니 돌아섰다.

 “오늘 저녁은 어때? 그 때 식사 대접 받고 싶은데.”

 돌아서던 채지나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김정기와 라미아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갑자기 변한 채지나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라미아였다. 라미아는 가늘게 빛나고 있는 채지나의 눈빛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김정기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라미아를 슬쩍 쳐다봤다. 라미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식사? 저 여자는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라미아는 그 의도를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알겠어. 그럼 이따 보자.”

 김정기의 대답에 만족한다는 듯이 채지나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채지나의 한 쪽 입 꼬리가 유난히 올라가 있었다. 채지나가 멀리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김정기와 라미아는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길 끝 모퉁이를 지켜 보고 서있었다.

 김정기와 라미아는 그 날 하루 종일 함께 집 주변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제 김정기의 집 대문은 파란 색으로 변해 있었다. 김정기가 도와주겠다고 하는데도 라미아는 끝까지 혼자서 페인트를 칠했다. 동네 근처에만 와도 저 집은 누구네 집인지 궁금해하며 한 번쯤 들여다볼 정도이기도 했고, 누가 언제 찾아오더라도 김정기의 집이 어디인지 알 정도로 새파란 색이었다. 대문만 바뀌었을 뿐인데 집 분위기가 전혀 딴판이 되었다.

 라미아는 마당에 있던 시든 식물들도 모두 버리고 새로운 화분을 놓았다. 식물의 종류나 화분의 색깔은 제각각이었다. 라미아는 너무 일률적이거나 통일되지 않는 물건들이 오히려 이 집에 더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라미아는 처음으로 직접 하는 일들이 그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지구에 와서도 해본 일이 거의 없었다. 라미아는 생각만 하고 있으면 그녀의 눈 앞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 생각만 해도 어느새 그 앞에 가 있었고, 가지고 싶은 물건들이 눈 앞에 나타나 자신이 원하는 배치대로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 포세이돈은 어렸을 때부터 라미아에게 가지고 있는 힘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처음 지구에 왔을 때 삼라바는 그녀에게 경고했다. 인간들은 생각보다 훨씬 약한 존재이니 그들과 상대하는 일에는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또 반대로 인간들을 얕잡아 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도 했다.

 삼라바와의 대화의 결론은 항상 어떤 방식으로든 절대 인간과 엮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들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정말로 악한 인간들이 있다면 라미아는 적당한 응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주 살짝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삼라바는 라미아가 아직은 가보지 못한 어떤 세계를 경험한 것이 틀림 없었다.

 집 주변 정리를 끝낸 라미아는 김정기와 함께 그의 주방에서 음식 준비를 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함께 집을 정리하고 함께 요리를 하다 보니, 마치 둘의 사이가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둘 사이에 공공의 적이 생겼다는 사실이 둘의 심리적 거리까지 밀접하게 만든 느낌이었다.

 김정기는 라미아 앞에서 채지나의 행동이 지나치게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채지나가 나타나던 순간의 꿈 속 장면이 계속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김정기의 귓가에 들렸던 목소리는 분명히 채지나의 것이 아니라 어떤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잠이 덜 깬 상태라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혹시라도 채지나가 라미아에게 불필요한 오해라도 만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라미아는 채지나가 김정기가 아닌 자신을 찾아 왔음을 직감했다. 채지나는 아주 멀리서부터 자신을 향해 곧장 걸어왔다. 김정기라는 사람이나 집은 핑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왜 자신을 찾아 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자가 진짜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누구를 찾아왔든, 여자가 가진 기운이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보이는 것처럼 연약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라미아는 여자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했고, 삼라바의 말이 떠올라서 더 괴로웠다.

 “김정기, 나 왔어.”

 채지나는 아까보다 한 톤은 더 높아진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집의 파란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채지나는 화분을 들고 있었다. 진한 녹색 잎이 무성하게 달린 나무 화분이었다. 여자 혼자 들기에는 제법 큰 화분이었다. 라미아는 한 눈에 무슨 나무인지 알아챘다.

 “월계수 나무네요.”

 “집 마당에 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고마워, 지나야. 거기에 두고 이 쪽으로 앉아.”

 김정기는 채지나를 주방 쪽에 있는 식탁으로 안내했다. 식탁 위에는 이미 여러 가지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허브를 뿌린 스테이크에 로메인상추로 만든 샐러드를 곁들이고, 마요네즈에 버무린 감자 샐러드와 간장으로 조린 두부 요리가 정갈하게 접시에 담겨 있었다. 라미아는 공기에 밥을 푸고, 김정기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마지막으로 식탁으로 옮겨 놓았다.

 “와, 뭐가 이렇게 많아? 준비하느라 고생했겠다.”

 “아니, 나보다……. 많이 도와줘서 금방 끝냈어.”

 김정기는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라미아를 살짝 쳐다봤다.

 “그나저나 누구야?”

 김정기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김정기는 아직 그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정기 친구에요, 라미아.”

 라미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발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채지나 앞에서 김정기와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고 싶다는 의도가 담겨 있는 행동이었다. 김정기도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나미아요? 이름 예쁘네요.”

 “라미아예요.”

 그녀의 이름이 김정기의 가슴에 새겨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예쁘고 신비로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라미아에게 관심을 가졌던 채지나는 듣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인지,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인지,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김정기와 라미아가 식탁을 치우는 사이 채지나는 소리 소문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라미아는 김정기를 도와 식탁의 식기들을 개수대로 옮겨 놓으면서도 채지나가 문 밖으로 나가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거실에 난 커다란 창문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김정기는 설거지를 하기 시작하면서 주변 상황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라미아는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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