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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너에게 가는 길
작가 : 사파이어
작품등록일 : 2019.11.10

우주에는 ‘넵툰’이라는 청록색의 신비로운 행성이 있다. 그 곳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의 딸 ‘라미아’가 거대한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
우주에서는 삶이 무한하고, 아름다움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에 우울증에 빠진 ‘라미아’가 아버지에게 ‘지구’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데,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를 하다 결국 3년 안에 돌아오라는 약속을 하며 허락한다.
‘라미아’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어떤 범상치 않는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4회
작성일 : 19-11-10 23:10     조회 : 177     추천 : 0     분량 : 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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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순간이 있다. 보지 않아도 보이는 느낌,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느낌, 처음 본 누군가가 무겁게 스치고 가는 느낌, 불현듯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나를 스칠 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하는 순간이.

 편의점 근처에서 동일한 번호의 동일한 차를 발견했을 때 김정기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의 주변에,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김정기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해도 쉽게 찾아갈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순간에 김정기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그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원망’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사실 그녀의 눈빛은 그에게 그 이상의 다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왠지 그녀를 찾아가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만나야 될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일까? 어딘가로 피하거나 숨을 틈도 없이 그녀가 멀리서 김정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백화점에서 같이 있었던 남자와 함께였다. 그녀는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아름다운 외모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그녀에게서 쉽게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김정기는 꿈에서도 늘 바다가 나오는 꿈을 꿨다. 그리고 그는 어린 시절, 바다를 지키는 여신이 있다고 믿었다. 김정기의 증조 할머니는 자연의 특정 장소나 나무, 샘 등에 정령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자연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처럼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상상했던 바다의 여신이 진짜 존재한다면,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녀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파란 바다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고향이 떠올랐다. 그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김정기는 편의점 앞에서 빗자루 질을 하다 말고 그녀를 멍하니 쳐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라미아의 환한 웃음을 보며 김정기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김정기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삼라바였다. 삼라바는 표정이 굳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라미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삼라바를 쳐다봤다.

 “갑자기 왜 그래?”

 “그만 돌아가자.”

 “왜? 무슨 일인데?”

 라미아는 주변을 살피다 김정기를 발견했다.

 “저 남자……”

 “어서 가자.”

 삼라바는 힘을 주어 라미아를 반대쪽으로 돌려 세웠다. 하지만 그녀는 삼라바의 말을 순순히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삼라바. 우리 저 남자한테 가보자. 무슨 이야기라도 해봐야 할 것 아니야.”

 “무슨 이야기?”

 “도대체 정체가 뭔지…...”

 라미아는 말 끝을 흐렸다. 사실 삼라바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라미아는 불현듯 그녀가 쓰러지던 순간에 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던 그의 머리에서 창이 넓은 검정색 모자와 반짝이는 장식이 겹쳐 보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장식은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햇살에 비쳐 눈이 부시게 반짝거렸다. 라미아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특별한 유리 장식이 그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저 남자가 너한테 특별히 해코지를 하지 않더라도……”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니야?”

 “아니야, 뭔가 이상해. 그냥, 그냥 저 사람이 뭘 어떻게 하지 않더라도 저 사람이랑 있으면 네가 다치게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왜?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니야.”

 “나도 아직은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어. 그걸 알아내야지. 하지만, 너도 느꼈잖아. 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네 온 몸이 저 사람 곁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하잖아. 절대 저 사람과 만나지마. 내가 없을 때 저 남자를 만나면 아주 멀리 도망쳐, 라미아. 알겠지?”

 라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미아, 어서 약속해. 내가 포세이돈 앞에 무릎 꿇는 일이 없게 해줘.”

 “알겠어. 알겠다고…...”

 라미아는 삼라바의 손에 이끌려 방향을 바꿔 왔던 길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는 김정기의 눈에는 마치 그녀가 남자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김정기는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라미아와 삼라바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삼라바는 편의점이 있는 도로의 반대쪽 끝까지 다 갔을 무렵에서야 라미아의 손을 놓고 먼저 차에 올라탔다. 김정기가 출근길에 봤던 포르쉐였다. 라미아는 차에 타지 않고 밖에서 한참을 서있었지만, 김정기는 망설이다 끝내 다가가지 못하고 다시 편의점 쪽으로 돌아섰다.

 화려한 그녀의 외모처럼 아무래도 그녀는 그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인 듯 했다. 설령 저 남자가 그녀를 강압적으로 데리고 가는 상황임이 확실하다고 해도, 그와 함께 있는 편이 어떤 면에서 보나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의 일주일은 팍팍했다. 김정기는 어느새 비어버린 생활비 통장을 보며 이번 주는 쉬지 말고 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백화점 주차 요원 아르바이트도 쉬는 날 없이 나가고 있었던 것인데, 그녀를 만나 일이 터지는가 싶더니 정작 진짜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고객님, 차 키 여기 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김정기는 어느 때보다 정중하게 꾸벅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전 날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기도 했지만, 워낙 백화점 주차 요원에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더러운 일들을 보고 듣다 보니 매일 같이 매뉴얼에 적힌 인사말을 반복하면서도 속으로는 ‘제발 아무 소리 말고 빨리 나가라. 빨리 가.’를 주문처럼 되뇌고 있었다. 오늘 이 손님은 특히나 인상이 험상궂게 생겼다.

 “아니, 이 새끼야, 이거 뭐야?”

 “네?”

 “이거 보라고, 이거 주차하다가 긁은 거 아니야?”

 다짜고짜 욕을 하는 차 주인이 가리킨 곳에는 선명한 스크래치가 여러 겹으로 나있었다. 누가 보아도 지하 주차장 같은 곳에서 모퉁이를 돌다가 벽에 쓸린 자국임이 분명해 보였다.

 “이건 제가 그런 게 아닌데요?”

 “뭐? 뭐라고 이 자식아? 그럼 뭐야? 네가 내 차 주차했어? 안 했어? 그럼 누가 그랬다는 거야?”

 “네, 제가 주차한 것은 맞는데요. 저는 외부 주차장에 주차를 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여기서 곧장 나가면 있는 은행 건물 바로 앞에다 주차를 했는데 그러면……”

 “아니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야? 네가 책임 못 지겠다 이거야?”

 인상이 험상궂게 생긴 차 주인은 김정기에게 받아 든 열쇠로 그의 한 쪽 어깨를 기분 나쁘게 툭툭 밀면서 말했다.

 “야, 여기 책임자 나오라 그래. 당장 나오라고.”

 남자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 지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김정기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사람들의 눈빛에 기가 눌려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백화점 안에서 검정색 양복을 입은 박팀장이 뛰어나왔다. 이번에는 박팀장 혼자였다.

 “고객님, 무슨 일입니까?”

 “당신이 여기 책임잡니까?”

 “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인지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아, 그것보다 더운데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사무실에서 이야기하실까요?”

 “뭐 그러죠.”

 차 주인은 약간은 누그러진 말투로 대답하며 박팀장 뒤를 따랐다.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왔다. 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김정기는 사무실을 나서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김정기를 향해 걸어 오는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박팀장은 김정기의 어깨를 툭 치더니 타이르듯 말했다.

 “자네, 고객님에게 정중하게 사과 드리게.”

 “네? 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자신에게 다짜고짜 욕부터 한 이 사람 앞에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 곳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하다는 식의 인사는 앵무새가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따라 하는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없는 속 빈 말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면 죽는 시늉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그러자 차 주인의 얼굴에 조금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김정기는 이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젊은 사람이 말대꾸를 꼬박꼬박 하고 말이야. 거, 앞으로는 조심하게.”

 “네, 안녕히 가십시오.”

 박팀장과 김정기는 달리는 차의 뒤꽁무니에 대고 인사를 했다. 이제서야 김정기도 옅은 미소를 보였다. 박팀장은 옆에 있는 김정기를 툭툭 치더니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여기로 50만원 입금해.”

 “네?”

 당황한 김정기에게 박팀장은 오히려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내가 최대한 이야기를 잘 해서 그 정도로 마무리 된 거니까 고마운 줄 알라고.”

 “저…… 저는 그 돈 보낼 수 없습니다.”

 “자네, 일 그만 두고 싶나? 자네가 못하면 자네 회사에서 이 돈 내야 돼. 그럼 자네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지?”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박팀장은 김정기 말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김정기는 그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박팀장을 향해 소리쳤다.

 “CCTV 돌려 보면 되지 않습니까? 저 사람 꾼이에요, 사기꾼. 지상에 주차를 했는데 저런 스크래치가 나는 게 말이 됩니까? 저기 은행 앞에도 CCTV 있을 거고요. 저는 절대 그 돈 못 줍니다. 저 사람 고소할 거에요. 빨리 CCTV 돌려보세요.”

 “뭐? CCTV? 아무한테나 CCTV 보여주는 줄 알아? 좋게 이야기 할 때 빨리 돈이나 부치고 조용히 해결해. 안 그럼 자네 당장 해고야.”

 억지스러운 말을 쏟아 내는 박팀장의 눈이 맹수처럼 충혈되어 있었다. 결코 당해내지 못할 강렬한 목적의식이 느껴졌다.

 “네, 그럼 관두겠습니다. 힘 없는 일개 협력 회사 직원한테 책임 떠넘기려 하지 마시고, 직접 알아서 해결하세요.”

 김정기는 입고 있던 조끼를 바닥에 벗어 던졌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강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해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오히려 무단으로 결근하거나 근무 태만인 동료들 대신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한 적 없었던 그였다.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고,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한 노력에 정당한 대가를 주는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서도 그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누군가 따라 나와 그를 붙잡고 마구 화를 내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완전히 그 곳을 떠나기 전까지 꽤 한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아무에게도,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이대로 나간다면 지난 일주일 동안 일한 돈은 틀림없이 한 푼도 받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억울하게 지불해야 할 돈이 받지 못한 돈의 액수보다 더 크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한 현실이었다. 가슴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그래도 어쩐지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적어도 그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드라마의 주인공쯤은 된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또다시 낮에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구하기 전까지 이제 김정기는 밤에만 편의점에서 일하면 된다. 그는 이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야간에 일을 하고 낮에는 다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보는 것이다. 일단 마음에 여유가 생길 만큼 어느 정도 돈을 벌어 놓고 공부하자고 다짐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루빨리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

 하지만 새로운 결심을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평소처럼 편의점에 출근한 김정기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오늘은 어쩐지 이 시간에 편의점 점장이 계산대를 지키고 있었다. 점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계산대 위에 놓인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왔어?”

 “안녕하세요, 점장님.”

 가끔 일하는 직원에게 사정이 생기면 다른 직원이나 점장이 대타로 근무를 하는 경우가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아무 낌새도 없이 점장이 불쑥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이유로든 점장이 출근하는 일이 생기면 직원들 간에 서로 귀띔이라도 해주는데, 오늘은 아무 연락도 받은 게 없었다. 더구나 김정기는 얼마 전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길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계산대 주변에 서서 한동안 점장의 눈치를 살폈다.

 “준혁이는요? 오늘 근무 아니에요?”

 “아, 그 친구 일이 생겨서 오늘 못 나왔어.”

 점장은 여전히 김정기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그나저나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무슨……”

 그는 김정기를 슬쩍 한 번 쳐다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정기군도 잘 알다시피 요즘 우리 지점 매출이 너무 떨어지고 특히 밤에는 거의 매출이 안 나오잖아. 이러다가 폐업하기 직전이라고. 그거 알아? 전국 편의점 폐업률이 50%래. 2개 중에 하나는 망하는 거야. 그런데도 누구는 폐업하는 판국에 누구는 또 새로운 편의점을 개업하고 있으니. 그냥 나 혼자 다 하는 게 비용이나 효율 면에서 가장 좋은 일이기는 하지.

 뭐 그렇다고 이게 김정기군 탓이라는 건 절대 아니야. 김정기군은 아주 잘 해줬어. 물류 작업도 잘했고 그렇다고 계산이나 현금 시재 이런데 특별한 실수도 거의 없었고 말이야. 매일 청소도 꼼꼼하게 했고.”

 김정기도 이런 편의점의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편의점은 버스 정류장 근처의 큰 길가에 위치해있어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최근 들어 사람이 뚝 끊겨 버렸다. 바로 옆에 학교도 있고, 주변에 경쟁이 될만한 편의점도 없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쟁자가 될 뻔 했던 맞은편 편의점이 지난 달에 폐업을 하고 이미 없어졌다. 그런데도 편의점은 손님이 점점 줄어 들었고, 밤에는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로변의 가로등과 편의점의 환한 불빛에도 밤에는 지나다니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며칠 전에 재건축 중이던 상가 건물 하나가 무너져 편의점 근처의 인도까지 공사 구조물들이 덮쳐 일대가 마비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고, 차도를 막았던 건축 자재들은 모두가 급히 나서 치우면서 교통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서로의 시시비비를 다투느라 한쪽 인도를 막는 쓰레기들은 여전히 방치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반대 방향의 도로는 문제 없이 통행이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편의점이 갑자기 잘 안 되게 된 이유로는 어쩐지 납득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건물이 쓰러지게 된 정확한 이유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점장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뭔가 찔리는 사람처럼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중간에 김정기를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점장은 말을 하는 내내 김정기의 눈을 한 번도 쳐다 보지 않았다. 반대로 김정기는 점장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지 몹시 궁금해하며 그의 입만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김정기의 눈은 초점을 잃고 텅 비어갔다.

 “그런데 말이야. 김정기군이 아주 성실하게 일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밤에는 사람이 없다는 거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이 동네는 어떻게 된 게 사람이 없어, 사람이.

 그래서 여하튼 내가 김정기군과 상의하고 싶은 건 이거야. 아직 편의점을 폐업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은 24시간 영업을 중단하는 걸 생각하고 있는데, 김정기군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러면……”

 “그러면 오전 6시부터 밤 12시까지만 하는 거지.”

 “그러면……”

 “음……. 그러니까 그러면 일할 사람은 오전, 오후 2명이면 충분할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돼서 김정기군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말이야…… 만약 그렇게 되면 아쉽게도 야간 근무는 이제 그만 해도 되는 거지. 그래,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건데 말이야. 괜찮겠어?”

 김정기는 점장이 진짜 자신에게 묻는 건지 잠시 헷갈렸다.

 “그러면 당장 내일부터 야간 영업을 안 하게 되는 건가요?”

 “음…… 그건 아니지만 원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어. 그건 점장 마음이기는 하지. 하지만 나는 김정기군의 사정을 생각해서 김정기군이 원한다면 한 달, 아니 한 달은 좀 힘들 거 같고, 이번 달, 그래 이번 달까지는 나올 수 있게 해줄게.”

 김정기는 점장이 처음부터 거창하게 늘어놓았던 그에 대한 칭찬이라든가 수고했다는 말들이 결론적으로는 아무 소용 없는 이야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혁이나 민아 누나였나, 아무튼 그 분이 일을 그만하게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아, 정기군한테 이야기하기 전에 그 친구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눈치를 챈 거 같더라고. 내가 중간중간 나올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아무래도. 내가 밤에는 가게에 잘 안 나오긴 했잖아. 그 말이야.

 하지만 내가 하나는 약속하지. 혹시나 나중에라도 그 친구들이 그만 두게 되면 김정기군에게 꼭 연락을 할게. 아, 물론 그 전에 꼭 좋은 직장을 구하길 바라겠지만.”

 점장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어쩌면 점장은 김정기가 자신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정확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모르거니와 딱히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만한 말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자신이 뱉은 수많은 말들 중에서 김정기가 우연히 실낱 같은 긍정의 의미를 발견하기만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김정기는 이제야 비로소 점장이 퍼즐 조각처럼 늘어놓은 말들 사이에서 진짜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너를 해고해야겠다. 하지만 너는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나도 너를 위로할 생각은 없다. 네가 일을 더 잘했다면 이런 일까지는 안 벌어졌을지 모르겠지만, 썩 잘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그나마 좋게 말할 때 너도 웃으면서 가라.’ 라고 말이다.

 “그러면 저는 지금 당장 그만 둘게요.”

 김정기는 점장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짐을 느꼈다. 이런 자신을 한 번도 이해한 적 없으면서 겉으로는 엄청 배려하는 척, 고상한 척 하는 점장을 자신보다 더 괴롭게 만들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복수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잘리기 전에 단 하루라도 스스로 먼저 그만 두는 것, 그리고 당장 자리를 박차고 보란 듯이 문 밖으로 나간 자신 때문에 점장이 밤새 일을 해야 한다는, 고작 그 정도의 일뿐이었다.

 “어제까지 일한 돈은 정확히 계산해서 계좌이체해주세요.”

 “그래. 잘 가.”

 점장은 미련도, 원망도 없다는 말투였다. 김정기가 나가고 난 이후에도 점장은 아무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점장은 속으로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아침부터 무거웠던 짐을 이제야 비로소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내일 아침까지 퇴근하지 못하고 계속 일해야 하지만, 이 정도쯤은 하찮게 느껴졌다. 아르바이트생을 해고하는 일이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반면에 주저 없이 편의점을 나온 김정기는 집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자신이 사는 원룸으로 들어오자마자 긴장이 풀려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매일 밤, 오늘 딱 하루만 출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밤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푹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했었고, 진짜로 그런 날이 왔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늘 밤에는 도통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빈 천장을 바라보던 김정기는 별안간 벌떡 일어나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통장에 남은 잔고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안 좋았다. 김정기는 가방에 닥치는 대로 짐을 쌌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고향에 간다고 딱히 좋은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고향은 언제나 그에게 엄마 품 같은 곳이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잘 왔다며 손 내밀어줄 수 있는 유일한 곳. 그는 막연하게나마 이번에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정착할 계획까지 세웠다. 도시에서의 모든 일들에 신물이 났다. 그는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꿈을 꾸며 서울로 갔지만, 어느 순간 그의 꿈은 도시 사람들의 삶 속에 덕지덕지 끼어 있는 검은 먼지처럼 흑백이 되어 버렸다.

 “남해 1명이요.”

 그는 터미널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늦은 밤이 다 되어 가는데도 터미널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새벽이나 밤 늦은 시간이나 너무 어두운 시간에 어디론가 떠날 차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행에 대한 설렘이란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 시간에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일상의 고단함이 엿보일 뿐이다. 김정기는 마른 침을 삼켰다.

 유리문을 통해 그가 탈 버스가 승차장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이제 진짜 떠나야 할 시간이다. 남은 집을 정리하고 월세 보증금을 받아 가려면 적어도 한 번은 다시 와야 하지만, 어쩐지 이게 진짜 마지막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정기의 머릿속에 문득 여자가 떠올랐다. 김정기의 인생에서 다른 어떤 것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이제 그녀를 다시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백화점이나 편의점을 박차고 나와 훌쩍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의 감정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짧았던 그녀와의 기억이 그에게는 도시 생활에서 남은 전부인 것처럼 강렬했다. 한편으로는 문득 그녀를 만나고 자신의 모든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김정기는 시계를 한 번 보고는 승차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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