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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너에게 가는 길
작가 : 사파이어
작품등록일 : 2019.11.10

우주에는 ‘넵툰’이라는 청록색의 신비로운 행성이 있다. 그 곳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의 딸 ‘라미아’가 거대한 왕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
우주에서는 삶이 무한하고, 아름다움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에 우울증에 빠진 ‘라미아’가 아버지에게 ‘지구’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데,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를 하다 결국 3년 안에 돌아오라는 약속을 하며 허락한다.
‘라미아’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어떤 범상치 않는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3회
작성일 : 19-11-10 23:09     조회 : 171     추천 : 0     분량 : 1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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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미아와 삼라바의 집은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있었다. 한강이 보이는 곳이라면 서울에서도 가장 중심지의 화려한 저택들이 먼저 떠오르지만, 그 곳은 오히려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흔히 산동네나 달동네로 불리는 높은 지대에 빼곡하게 집들이 모여있는 동네에서도 유난히 높고 가파르게 튀어나온 지형 위에 아슬아슬하게 집 한 채가 서 있다.

 이제는 버려지고 방치된 집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아주 좁은 길만 내어 놓는다면 누구든 닥치는 대로 살 공간을 찾아낸 것만 같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낮은 언덕 위 공간만큼은 넓은 반경을 두고 격리되어 있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그 곳은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 주변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지저분하게 노출되어 있는 암석들과 그 사이로 듬성듬성 자란 풀과 나무들이 몹시 흉물스러웠다. 이미 버려진 그 곳에 쌓여가는 쓰레기 더미와 악취가 더해져 불순한 의도로 찾아오던 사람들마저 어느새 발길을 끊어 버렸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런 곳에 집이 있으리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가혹한 주변 환경이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 되어 주었다. 정리되지 않은 나무들이 집 주변에 뒤엉켜 집의 존재를 완벽하게 감춰버렸다. 회색 빛으로 페인트 칠해진 벽은 새 것과 같이 깔끔했지만, 햇빛이 비춰도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색깔이었다. 나무들 사이로 하루 종일 드리운 그림자와 어두운 외벽은 집을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비밀의 장막처럼 집을 철저하게 가리고 있는 주변의 방해물들을 모조리 걷어낼 수 있다면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것만 같은 신비로운 모습에 감탄하고 말 것이다. 집은 산동네의 가장 꼭대기 부근에서 한 쪽으로 튀어 나온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두고 있었다. 8개의 크고 단단한 기둥이 절벽 쪽에서 집의 한 쪽 면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고급스러운 건물의 외관은 바로 밑이 깎아지른 절벽만 아니라면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대저택이나 별장쯤으로 보였다. 기둥을 비롯해서 집 전체가 광택이 나는 진한 회색 빛이었고, 절벽을 향해 사선으로 돌출되어 있는 이중 구조의 단면만이 삼나무와 같은 적갈색이었다. 그리고 그 벽면을 따라 앞면이 통 유리 창으로 둘러져 있었다.

 집의 기둥이나 모서리에는 음각으로 다양한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는데,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에 와보면 어찌나 촘촘하게 조각되어 있는지 그 개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각각의 모양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조각은 바다 속 조개나 산호초 모양 같기도 했다.

 북쪽으로 난 철제 대문마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었다. 집 크기에 비해서도 유난히 큰 문은 무겁게 닫혀 있었는데 어떻게 열고 닫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집 구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짙은 파란색을 띠고 있는 문은 어둠 속에 숨어 있었지만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신비로운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라미아와 삼라바는 집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늘 창가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시야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발 아래로는 한강이 흐르고 멀리 도심의 불빛들이 펼쳐졌다. 통 유리 창 바로 아래는 90도로 꺾인 절벽뿐이었다. 어떤 날은 벽 너머로 흙더미가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 집은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삼라바는 오랜만에 한밤중에 집 밖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밤만 되면 깊은 물 속으로 숨어 버렸던 라미아는 그 사건 이후 며칠 째 삼라바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녀가 잠든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삼라바는 밖으로 나왔다.

 둘은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지만, 삼라바는 그 때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그 때의 사람들, 오고 갔던 이야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공기까지 하나하나 그의 숨결에 살아났다. 지구에 온 후 느슨해졌던 경계심이 한순간에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했다. 그는 딱 1년 전 라미아의 수호를 명하던 포세이돈의 얼굴을 떠올렸다.

 삼라바는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남자가 포세이돈이 말했던 바로 그 자인지 말이다. 하지만 그의 생년월일은 포세이돈이 말해준 날짜와 일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라바는 께름칙한 기분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남자의 전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의 많은 것들이 삼라바의 손 사이로 빠져나가 잡히지 않고 있었다.

 이번 생에 처음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도 아무래도 이상했다. 어쩌면 그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포세이돈도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위험 인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포세이돈과 그의 자식들을 위협하고 있는 어둠의 존재와 같은 인물로 보기에는 그에게서 어떤 악의나 위선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남자에 대한 최악의 예상들이 빗나갈수록 그의 정체는 더욱 미스터리로 남았다.

 밤 공기는 제법 스산했다. 한강변이라 살갗에 내려앉는 바람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지만, 삼라바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저 지나다니는 사람이나 차가 별로 없는 이 시간에 걷는 길이 편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지구의 밤에는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난다. 어제는 교통사고가 두 건 있었고, 오늘은 유흥주점이 즐비한 거리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한 남자는 이미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 차가운 아스팔트 도로 위에 쓰러져 있었다. ‘명인가든’이라고 쓰여있는 큰 간판 뒤에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공터였지만, 새벽 시간이라 그런지 구석에 세워진 차 두 대뿐이었다.

 “내가 네 동생한테 그런 거 아니라고 했지. 네 동생이 병신같이 죽은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서있는 남자가 쓰러진 남자를 향해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남자는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큰 몸집에 아주 딱 맞는 티셔츠 소매 사이로 팔뚝 전체에 새겨진 거대한 문신이 두드러졌다. 그 앞에서 쓰러진 남자가 몸 뒤쪽으로 팔을 지탱하며 상반신을 겨우 일으키고 있었다. 문신한 남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두 명은 남자가 쓰러져서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고는 이미 옆에 있는 술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쓰러진 남자는 왜 혼자 왔을까, 비록 왜소한 몸이지만 만약 서있는 남자가 혼자였다면 그래도 거대한 체구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삼라바는 생각했다. 하지만 삼라바는 여전히 변화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들과는 아무 상관도, 관심도 없다는 듯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앞만 보고 걸어갔다.

 문신을 한 남자는 이제는 할 말도 없다는 듯 쓰러진 남자의 얼굴 바로 옆쪽 바닥을 향해 가래침을 뱉더니 돌아섰다. 그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는 상대로부터 등을 돌렸다.

 쓰러져 있던 남자가 그제서야 눈을 치켜 떴다. 그는 갑자기 번개처럼 일어나며 몸 안 쪽에서 희번덕거리는 날카로운 물건을 꺼내 들었다. 지금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그의 조급한 마음 때문인 건지, 그가 품은 독기 때문인 건지, 그의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 눈가를 적셨던 피는 이미 말라 있었다.

 “으악.”

 삼라바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의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알 것 같았다. 삼라바의 등 뒤로 비명 소리가 울렸다. 둔탁한 비명 소리가 분명 범상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새벽 시간이라 그런지 불빛이 잠들지 않는 유흥 거리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일행들이 있는 술집에는 저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만한 다른 것들로 이미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시시해질 무렵에야 비로소 그들은 친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삼라바는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다. 더없이 차가운 표정이었다. 인간 세상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문신한 남자의 말처럼 그는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 남자의 지속적인 학대와 수모가 동생의 피를 말리고 있을 뿐이었다. 동생은 세상에는 두 가지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모두가 알고 있는 보통의 죽음과 나 혼자 외로이 아주 천천히 맞이하는 죽음. 단숨에 죽는 것이 어떤 고통을 준다고 해도 그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고, 26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소방관이 되겠다던 꿈이나 희망 같은 것들은 그의 자존심과 함께 짓밟히고 뭉개져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마지막으로 남자가 찾아왔던 날, 동생은 남자를 피해 뒷걸음질치다가 무언가를 잡을 틈도 없이 한순간에 뒤로 고꾸라졌다. 차가운 바닥에 무기력하게 넘어지던 순간, 동생은 비로소 진정한 죽음의 공포를 온 몸으로 맞이했다. 동생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다 한줄기 빛을 보았다. 그는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오래 전의 삼라바는 동생이 아직 살아만 있다면 형제는 분명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삼라바가 생각했던 것만큼 현실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내가 죽든지 상대가 죽든지, 세상은 점점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누군가 죽든 다시 살아나든 삼라바가 참견할 일이 아니었다. 가끔은 삼라바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원망이 되어 돌아왔다. 미래에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선택이라고 해도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그들은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 작지만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희망을 빨리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했다.

 삼라바는 자신이 믿어왔던 최선의 노력을 그만두기로 했다. 누군가의 행복을 내가 만든 자로 재단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신이라고 해도 인간의 선택을 강요하거나 조정할 권한은 없었다.

 어제도 삼라바는 그의 눈 앞에서 할머니를 치고 그대로 달려가는 차를 발견했지만,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지금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얼마 못 가 음주 운전자가 횡단보도 근처에 서있는 전봇대를 박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으며, 우연히 지나가던 구급차에 의해 할머니가 구조되어 인근 병원에 옮겨지는 걸 멀리서 지켜봤을 뿐이었다.

 삼라바는 오늘도 한강대교에서 습관처럼 가던 장소로 향했다. 노들섬을 지나 두 번째 아치가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삼라바는 그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늘 보던 풍경에서 미세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했다. 한강대교를 지나가는 차들도 많지 않은 새벽 시간에 삼라바가 걸어오던 다리 반대편 쪽에서 난간에 기대고 서있는 여자를 발견한 것이다.

 삼라바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 위 구조물 사이로 숨어 들었다. 그가 세운 원칙대로라면 그는 또 아무 동요 없이 그냥 지나쳐야 했겠지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어두운 새벽, 무방비 상태로 혼자 서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삼라바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한강을 바라봤다. 그녀가 바라보는 한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저 흐르는 강물에서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삼라바는 그 후로 며칠 동안 매일 그 곳을 찾는 여자를 계속 지켜봤다. 여자는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표정으로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옷도 변함이 없었다. 무언가 변한 것 같기도 했지만, 항상 어두운 색이었다. 어두운 옷 색깔 때문에 어둠 속에서 그녀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고, 그녀의 가녀린 몸이 더 왜소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오늘도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마치 어느 순간 중대한 결심이 들었을 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고, 어디론가 자유롭게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삼라바는 오늘은 기필코 그냥 지나가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 시간에 한강을 찾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혹시라도 인간의 삶의 개입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삼라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삶을 읽어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삼라바는 축 늘어진 여자의 어깨를 짐짓 의식하지 않고 걸어갔다. 삼라바가 그녀의 등 뒤를 걸어갈 때 비로소 그녀는 누군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잔뜩 장전해놓은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일이 되었던 것인지, 삼라바가 지나가자 그녀는 조심스레 난간을 넘었다.

 삼라바는 이번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자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 건지 모든 사람이 다 안다고 해도 삼라바에게만큼은 모르는 일이 되어야만 했다.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야 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야 했다. 삼라바의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여자는 난간을 넘어가 강을 마주 보고 섰다. 강물은 늘 그렇듯 한 방향으로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쉴새 없이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줄거리도 없는 이야기이고, 두서 없는 이야기이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강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고,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흘러도 주변의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여자는 이제 난간을 쥐고 있는 양 팔을 몸 뒤쪽으로 쭉 폈다. 그녀 앞을 막던 난간 하나만 사라진 것뿐인데도 훨씬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닿은 찬 바람에 강물의 비릿한 냄새가 함께 섞여 왔다.

 “안돼요.”

 그 순간 삼라바는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좀 전에도 그 곳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긴 했지만, 사실 그의 존재는 그녀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저만치 사라졌을 것이라 짐작했던 남자가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 앞에 서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인생에 아무 의미를 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마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삼라바는 여자의 가느다란 팔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삼라바는 거침없이 그녀를 그대로 들어 올려 난간 안 쪽으로 내려 놓았다. 그의 왼쪽 뺨이 그녀의 오른쪽 뺨에 살짝 맞닿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더니 힘없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앉았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에요?”

 여자는 눈을 질끈 감고 삼라바에게 소리쳤다. 삼라바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기로 그렇게 다짐해놓고, 그리고 어떤 일촉즉발의 순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그가 그녀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진 사실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삼라바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다시 쳐다봤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다프네……”

 “네?”

 “다프네, 다프네 맞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프네? 뭐요?”

 삼라바는 정말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순수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그제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아니, 아닙니다. 도대체 왜 죽으려고 한 겁니까?”

 “죽으려고 한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투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러면요?”

 “그냥…… 그냥 강을 보러 간 것뿐이라고요. 조금 더 자세히, 그냥이요.”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이유 없이.”

 삼라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돌아왔던 길로 다시 걸어가던 삼라바는 문득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녀를 돌아보더니 덧붙였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요. 그리고, 그리고……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마요.”

 그 날 밤, 삼라바는 자신이 했던 말이 진심인지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물어봤다. 그리고 습관처럼 다음 날에도 같은 시간에 다시 한강대교를 향해 가고 있었다. 삼라바가 경고한대로 그녀가 이 곳에 다시 오지 않는지 확인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래야만 그 역시 그의 시간을 다시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삼라바의 예상대로 여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다른 장소에서 또다시 어리석을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된 삼라바가 한강의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잠시, 삼라바는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흘쯤 됐을 무렵, 한강대교의 복잡한 구조물 사이로 난간 쪽에 서있는 여자가 삼라바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어두운 색이 아닌 밝은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존재 자체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가 강 쪽이 아닌 삼라바가 떠났던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라바는 여자가 바라보고 있는 곳 반대편에서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드디어 오셨네요.”

 삼라바는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목소리가 지난 번보다 차분하게 느껴졌다.

 “항상 오는 것 같은데 언제쯤 올지 몰라서 초저녁부터 계속 기다렸어요.

 다른 게 아니라……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상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게 도와줘서 고마워요.”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그냥…… 나를 놔버리고 싶었어요.

 정말 힘들 때는 내가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죽을만한 용기도 없어요. 그냥 우연처럼 나를 찾아와줬으면 하죠. 사는 고통도 죽는 고통도 없이 가만히 나를 찾아와줬으면.”

 “이해가 되지 않네요. 어떻게 보면 내가 당신의 결정을 방해한 거 아닌가요? 당신의 결정의 순간을 내가 망쳐 버렸잖아요.”

 “그런데 이상했어요. 바람에 나를 맡겨 다리가 떨어지려는 순간 정말이지 갑자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과 1초 전만 해도 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되든 정말 아무 상관 없다 분명히 이렇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왜 내 생각이 바뀐 걸까요?”

 삼라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래서 아무도 죽는 순간의 경험을 말해주지 않는다. 내가 원했던 죽음 앞에서 정말 행복을 느꼈는지, 혹시 후회를 했다면 그게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 또는 어떤 존재가 그 사람의 가장 마지막에 함께 해주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경험을 자세하게 이야기해준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죽으려던 사람이 죽지 않거나 죽지 않으려던 사람이 죽는 일이 일어나겠냐는 것이다. 삼라바의 경험 상 인간은 죽었다가 살아난 존재의 말이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해보고 그제서야 후회를 할 테니까.

 “어쨌든 죽었던 정신이 살아나게 해줘서 고마워요. 나…… 정신이 죽었는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을 신경 써줘서요.”

 여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삼라바를 똑바로 쳐다봤다. 삼라바는 그녀가 하는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별 일 아니라고 버릇처럼 말했지만, 내가 지나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느껴지는데, 그게 정말 별 일 아닌 건가요? 내가 봐도 끔찍한데, 남들은 오죽하겠어요.

 그런데 결점투성이인 나 같은 사람한테도 누군가 생겼다는 게 정말 행복했어요.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 나를 봐주고, 사랑해준다고 느꼈죠. 하지만 영원한 사랑은 정말이지 이 세상에 없나 봐요. 그가 나를 배신하고 떠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신 당했다는 말이에요? 그럼…… 남자한테 차였다는 거에요?”

 “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불필요한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이 남자는 분명히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또다시 누군가에게 우스운 존재가 되었다니, 지금까지 그에게 보였던 모든 행동들이 후회될 정도였다.

 “지금 남자한테 차였다는 사실이 중요한 건가요?”

 “아니요, 아니에요, 그건.”

 삼라바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인간의 생명에 위협을 끼칠 만큼 중대한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 놀라워서요. 뭐 저도 그런 인간을 한 명 알기는 하지만.”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그랬다는 사실이 재미있네요.”

 “왜요? 뭐가요?”

 그녀는 발끈했지만 이제 삼라바의 태도에는 여유로움마저 느껴졌다.

 “다프네가 남자한테 차였다? 그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불가능한 일인 것 같은데.”

 “다프네?”

 “당신은 당신을 모르는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람 이름이에요? 저는 다프인가 뭔가가 아닌 홍채현이라고요.”

 “당신은…… 당신은 그냥 평범한 인간이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의 특별함을 모르는군요. 그렇다면 정말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에요. 적어도 진짜 당신이 누구인지는 알고 죽어야 억울하지 않죠.”

 “그게 무슨?”

 “홍채현이라고 했죠? 당신이 모른다면 지금부터 내가 알려줄게요.”

 삼라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삼라바를 가만히 바라보던 홍채현은 그의 눈에 빠져 들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늘 그녀를 위로하고 달래주었던 파란 물결이 그의 눈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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