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열 시. 다희는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켰다. 두 번째 기상이었다.
“하아아암…….”
오늘은 3학년 2학기 수강 신청을 하는 날이다. 여덟 시에 시작하는 신청에 대비해 여섯 시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마우스 쥔 손을 덜덜 떨며 한 과목 한 과목 선택을 하는데, 이 짓을 여섯 학기째 하는데도 떨리는 건 여전하다.
-어떻게 됐어? 이 언니는 전승!-
10분 정도 지났을 때, 수빈에게서 문자가 왔다. 미리 짜둔 시간표 대로 수강 신청을 하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뭐, 큰 문젠 없을 듯.-
다희는 덤덤한 표정으로 답장을 썼다. 듣고 싶었던 전공 수업 하나를 놓친 것 빼곤 나름 괜찮은 결과였다. 나름 고학년에 속하니, 첫 번째 강의 시간에 초안지를 제출하면 들을 수 있을 거라 낙관했다.
그렇게 다시 침대에 누워 두 시간 더 눈을 붙였다. 리듬이 깨져 수면의 질이 좋지 못했다. 게다가 그 악몽!
‘시험 보는 날 지각하면 어떡하니?’
고3 때 담임 선생님이 호통으로 시작하는 악몽은 늘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시험 당일 지각을 해 겨우 자리에 앉았는데, 문제가 너무 어려워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전개. 어찌나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지 깨고 나면 꿈이었구나, 하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다희는 램 수면 상태에선 곧잘 이런 류의 악몽에 시달렸다. 그녀가 받는 학업 스트레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침 먹었으려나?”
딱 하룻밤 묵었을 뿐인데, 현호가 왔다 간 뒤로 침대만 보면 그 애 생각이 난다.
‘말끝마다 남 탓하는 인간, 밥맛이야.’
실망한 눈치였다. 멋대로 군 것도 맞고, 그 애 말처럼 비겁하게 수빈이 탓한 것도 맞지만 ‘밥맛’이란 말에 기분이 상해 사과조차 못하고 집으로 왔다. 수강 신청이 그 다음날이라 다행이었다. 신경을 딴 데 팔고 있으니 현호 생각을 잠시 안 할 수 있었다. 이렇듯 하루를 채 못 갔지만.
“동글아, 너네 오빠 아직 화 안 풀렸을까?”
다희는 발치에 있는 로봇 청소기에게 말을 걸었다. 현호에게 핀잔을 받고 나오는 길임에도 그를 위해 챙겨 나온 것이었다.
“안 되겠다.”
다희는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멘토란 사람이 무책임하게 멘티를 이리 방치해서 쓰나, 가서 잘 있나 들여다 봐야지.
어젯밤 샤워를 다 하고 잔 터라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와 양치만 하고 나왔다. 민들레꽃이 그려진 오버롤 원피스 안에 흰 티를 받쳐 입었다. 허리에 달린 리본을 묶으니 잘록한 허리선이 드러났다. 무릎을 겨우 넘긴 치맛단이 움직일 때마다 살랑살랑거렸다.
옷을 갈아입은 다희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먼저 부스스한 머리를 빗으로 슥슥 빗은 뒤, 아직 물기가 남은 피부에 스킨을 발라 찹찹찹, 하고 흡수시켰다. 그 위에 로션, 에센스, 크림을 소량씩 얹어 얇게 펴 발랐다. 찹쌀떡처럼 쫀득쫀득해진 피부가 작열하는 태양에 상하지 않게 손등 위로 선크림을 듬뿍 짰다. 유기자차라 그런지 여러 겹 발라도 백탁 현상 없이 피부 톤이 환해졌다. 끝으로 갈수록 숱이 없는 눈썹도 자연스럽게 채워 그리고, 생기 없는 입술 위에 핑크색 틴트도… 잠깐, 왜 이렇게 열심히 화장하는 건데? 다희는 틴트 바르던 손길을 멈추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어이없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아침부터 꽃단장이야, 그녀는 바르던 틴트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가슴 위에 올렸다. 나, 설레고 있니?
띵동-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초인종을 눌렀다. 저번처럼 다급한 상황도 아니고, 룸메도 못 되었으니 이렇게 하는 게 예의였다. 초인종 벨소리가 멎을 때까지 안에서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집에 없나, 하고 다희는 다시 한 번 초인종 가까이 검지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아…….”
이틀 만에 보는 현호는 나날이 그 미모를 갱신하는지 아주 멀쑥한 모습이었다. 넝마를 걸쳐도 멋있을 녀석이 딱 봐도 고급스러운 느낌의 옷을 입고 있었다.
“어디… 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현호의 차림새를 살핀 다희가 물었다.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차려 입었어?”
“원래 이렇게 입어.” 들어와, 하고 현호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다희는 원숭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부잣집 도련님이었지, 참.
“이게 다 뭐야아?”
거실로 들어선 다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게, 이름만 들어도 입이 딱 벌어지는 명품 브랜드의 종이백들이 거실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옷부터 시작해서 손목 시계, 구두, 가방까지! 백화점 한 층을 다 휩쓸고 온 흔적이 역력했다.
“스케일 장난 아니다…….”
현호는 뭐 이 정도 갖고 놀라냐는 듯, 다희를 무심히 쳐다봤다.
“지내는 동안 필요할 것 같아서.”
“돈 엄청 들었겠는데.”
“별로. 여긴 뭐든 다 싸니까.”
“싸다고?”
“가방 하나에 백만 원밖에 안 하던데? 애들 소꿉 장난도 아니고.”
백만 원밖에? 재벌은 다 이렇게 낭비벽들이 심한가, 다희는 현호가 오늘따라 멀게 느껴졌다. 심지어 그가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뭐 나름 재미있었어. 100년 전 물가에 대해 공부도 하고.”
“100년 전 물가?”
아! 현호의 말에 다희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70년대엔 짜장면이 200원이었단 얘기가 번뜩 떠오르며 현호의 남다른 소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설마, 1억도 껌값이란 건가? 다희는 터무니없이 큰 액수의 장학금도 미래에선 제법 합리적인 금액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대쉬 보드 위의 인형처럼 고개만 연신 끄덕이고 있는 다희를 지켜보다, 현호가 말문을 뗐다.
“무슨 일로 왔는데.”
“어? 아, 그게…….”
다희는 우물쭈물하며 현호의 눈치를 살폈다. 대하는 게 평소와 다름이 없다. 늦은 사과를 전하는 게 오히려 민망할 정도로.
“밥, 먹었어?”
아차! 아침, 식사, 끼니, 하고 많은 단어 중에 하필 ‘밥’을 꺼내다니. 돌머리. 혼자 말하고 혼자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다희를 보며 현호가 핏, 웃었다.
“아니, 아직.”
“아, 진짜? 시간 많이 지나서 먹었을 줄 알았는데.”
“도통… 밥맛이 없어서.”
웃는 얼굴로 사람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다희가 얼굴을 굳히자, 현호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비빔밥, 이번엔 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