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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별이 흐르는 강
작가 : 윤지산
작품등록일 : 2019.11.10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소녀와 열등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소년.
소녀는 돈을 벌기 위해 남자행세를 하고 소년은 안전을 위해 그녀에게 호위를 맡기게 된다. 성별, 신분, 성격, 성장 과정 등 모든 것이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

 
3회
작성일 : 19-11-10 16:15     조회 : 180     추천 : 0     분량 : 5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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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노엘 형이 알려준 대로 목욕을 하니 피부와 머릿결이 부드러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으로 머리를 닦아내며 밖으로 나오니 리암 형이 에이든과 일방적으로 대화를 나누려 하고 있었다. 노엘 형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리암 형은 대화를 멈추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에이든은 제빨리 달려와 품에 안겼다. 어린아이의 체온이 높아서인지 에이든의 머리는 이미 말라 있었다. 부드러운 에이든의 머릿결에 감탄하고 있을 때 리암 형이 젖지 않은 천으로 머리를 닦아주었다.

 

 “빨리 머리부터 말려.”

 “제, 제가 할게요.”

 

  형의 손에서 천을 낚아채듯 뺏고는 젖은 머리를 문질렀다. 머리를 문지르면서 앞으로 쏟아져 내려온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순간 아까 머리를 감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알아차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깨에 간신히 닿았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등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에이든의 머리카락도 많이 길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지만 자신 또한 머리카락을 기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엄마와 살 때는 항상 뒷목에 닿지 않을 정도로 짧게 유지했던지라 머리카락이 등까지 길게 뻗은 것을 보자 기분이 착잡해졌다.

 

 “이제 아가씨의 방으로 갈 거야.”

 

  사색에 잠겨있던 중 형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가씨가 시키는 것만 해. 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 시키지 않는 일은 숨 쉬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해서는 안 돼.”

 

  리암 형이 굳은 표정으로 하는 충고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자 몸을 낮춰 에이든과 눈을 맞추었다.

 

 “특히 꼬맹이, 누가 네 형을 때리더라도 가만히 있어야 해. 네가 아까처럼 이 녀석을 감싸면 둘 다 죽는 거야.”

 

  형은 협박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에이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형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형은 에이든의 어깨를 잡으며 몇 번이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결국 대답이나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동하는 내내 미심쩍은 눈으로 에이든을 쳐다봤다.

  형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건물의 구조를 외우려고 노력했지만 이렇게 큰 저택에 들어와 본 것이 처음이라 기억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았다.

  안내된 아가씨의 방 앞에는 낯이 익은 시녀가 서 있었다. 자신과 에이든을 아가씨가 고른 후부터 이 시녀가 모든 거래 절차를 도맡아서 했었다. 그녀는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형에게 가라고 손짓을 하였다. 형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자신과 에이든에게 걱정의 눈길을 보내며 자리를 떠났다.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들어가서는 시키는 대로만 해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이어진 싸늘한 말투에 몸이 굳었다. 형이 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당부를 시녀한테도 받고 나서야 그녀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방안에서는 아가씨가 옷 시중을 받고 있었다. 고요한 방안에는 정적이 흐르고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천이 스치는 소리뿐이었다. 조용한 방의 상황 탓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을 수도 없어 시녀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 또한 아가씨를 지켜보며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시녀들이 복잡해 보이는 옷을 다 입혀준 후에야 아가씨는 우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가져왔습니다.”

 “딱 내가 생각한 대로잖아? 역시 내 눈은 정확해!”

 

  환성을 지르며 빠르게 다가온 아가씨는 인정사정없이 팔을 잡아끌었다. 빛이 잘 드는 곳에 끌어당겨서는 감상하듯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맘에 드는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하며 강하게 끌어안았다.

 

 “벨라. 이리 와서 이거 옆에 서도록 해.”

 

  아가씨는 꼭 친구를 부르듯이 활기차게 누군가를 불렀다. 무심결에 아가씨의 시선을 따라 고개가 돌아갔다. 창문 쪽에서 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소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자태에 자연스레 시선이 붙들렸다. 지금까지 이 소녀보다 아름다운 이는 본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귀족들이 두르는 금을 녹여서 발라 놓은 것 같았고 예쁘게 휘어진 푸른 눈동자는 화사한 그녀의 표정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쉬이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가올수록 그 미소가 아름답기만 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허공을 바라보면서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처음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졌다.

 

 “역시 닮았어. 이거라면 남매 인형으로 소개해도 되겠다!”

 

  아가씨는 자신과 벨라라는 소녀를 번갈아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조금 거리가 있던 벨라가 다가와 옆에 나란히 서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닮았다는 말에 소녀의 생김새를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자신과 같은 금발과 파란색 눈을 가졌지만 전혀 느낌이 달라 보였다. 더욱이 그녀는 한 뼘은 더 키가 컸고 체형도 여성스러웠으며 자신과 비교를 달리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깡마르고 왜소한 자신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인 거 같다는 생각에 절로 위축되었다.

 

 “너 말해봐.”

 

  밑도 끝도 없이 갑작스럽게 날아든 아가씨의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자 아가씨가 인상을 쓰며 매섭게 쏘아보기 시작하였다.

 

 “무엇을 말씀드리면 될까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조급한 마음에 되물어 버렸다. 곧이어 다가올지도 모르는 욕설이나 폭행을 생각하자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목소리도 마음에 들어. 신장만 조금 더 컸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녀는 정말 아쉬운 것인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활짝 웃고 있었다.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 데…… 벨라와 벨. 벨 괜찮지 않아?”

 

  손을 맞잡아오고 눈을 맞추며 하는 질문은 흡사 동의를 구하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냥 혼잣말이었는지 대답도 듣지 않고 에이든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럼 다음으로 네가 말해봐.”

 

  저에 대한 만족감 때문인지 에이든에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 것이 눈에 훤했다. 조금 전보다 상기된 얼굴로 대답을 바라고 있지만, 대답이 돌아올 수 있을 리 없었다. 혹시라도 에이든에게 화가 미칠까 싶어 급하게 말을 꺼냈다.

 

 “그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대답하지 않는 것보다는 대신 대답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싸늘하게 굳어지는 아가씨의 표정을 마주한 순간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말해도 된다고 하였지?”

 “죄송합니다.”

 

  아가씨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머리를 조아렸지만 바로 머리를 가격해왔다.

 

 “아가씨, 손을 쓰면 다치십니다. 이걸 사용하시지요.”

 

  시녀는 얼른 아가씨의 손에 기다란 막대기를 쥐여 주었다. 폭력이 더 이어질 것 같아 더욱 고개 숙이며 잘못을 고했다.

 

 “죄송합니다. 감히 아가씨의 질문에 제멋대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회초리가 머리를 때렸다.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처음 맞았던 부위에 충격이 가해져 피부가 아려왔다.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또 말을 하지?”

 

  화가 난 아가씨는 회초리로는 부족했는지 발길질이 이어졌다. 발에 차였지만, 성인 남성의 발길질보다는 훨씬 약한 힘에 뒤로 넘어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감히 버텨?”

 

  서늘하게 꽂혀오는 아가씨의 말에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니 소름이 끼치게 광기 어린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난 너에게 버티라고 하지 않았어!”

 

  잘못을 지적하듯 성난 목소리로 말하더니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괴상한 고함을 지르며 발길질이 이어졌다. 지속되는 발길질에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누가 손을 써도 좋다고 허락했지?”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을 걷어차였다. 팔꿈치에 가해진 고통에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소리 내지 말라고 했지!”

 

  몇 번이고 이어지던 발길질은 아가씨가 조금 진정이 되어서야 멈추었다. 더는 발길질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망가진 인형을 산 거잖아?”

 

  아직 화가 다 풀리지는 않았는지 짜증 섞인 말투였다. 언짢은 얼굴을 하며 에이든의 머리를 낚아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데다가 왜소한 에이든은 그녀의 손에 붙잡혀 버둥거렸다. 아무리 쥐고 흔들어보아도 에이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외마디 비명뿐이었다.

  아가씨는 흥미를 잃었는지 혀를 차고는 이내 에이든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뭐, 됐어. 하나는 맘에 드니까 이건 처분해.”

 

  그녀의 말에 따라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에이든을 시녀들이 방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였다. 처분하라는 말이 단순히 눈앞에서 치우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만요, 아가씨.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다시 한 번만 생각해주세요!”

 

  끌어내려는 에이든을 끌어안고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시녀들은 숨을 들이켜며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다시 이어질 발길질이나 구타가 이어질 것을 생각하며 닥쳐올 고통을 대비하였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까의 상황과는 다르게 이상하리만치 주위가 조용했다.

  상황을 알기 위해 고개를 조금 들자 아가씨의 걸음이 문 옆에 있는 서랍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의 행동에 맞춰 시녀들도 뒤로 물러났다.

  무언가가 나무에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가씨의 구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걷어차이던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한참이 지나도 잠잠해지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을 때 아가씨가 무언가가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 * *

 

  맞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헉! 하고 숨을 뱉어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을 꾸고 난 다음의 서늘함과 축축이 머리를 적시는 식은땀에 몸이 잘게 떨렸다. 반사적으로 꽃병에 맞았던 이마를 떨리는 손으로 쓸었다. 나은 지 6년도 지난 상처가 남아있을 리 없다.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당시에는 이대로 죽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팠고 무서웠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잃지 않았던 것이 불행이면서도 다행이었다.

  에이든을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에 시녀들은 다친 환자에게서 억지로 아이를 떼어낼 수 없었다. 덕분에 에이든에 대한 것이 흐지부지되었고 굳이 시녀들도 에이든을 어떻게 하려고 들지 않았다.

 

 “머리 아프니?”

 

  노엘 형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형의 질문에 자신이 아직도 이마를 매만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식은땀에 젖은 이마와 머리를 쓸어주었다. 형의 걱정은 과보호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열은 내린 거 같은데 얼굴은 아직 창백하네.”

 “괜찮아요. 어제보다 많이 나았어요.”

 

  어제저녁에 느꼈던 어지러움을 떠올리니 진저리가 쳐졌다. 아직 몸이 조금 무겁기는 했지만, 아프다고 쉬거나 약을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수밖에 없다. 괜히 아픈 티를 내서 형들한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다.

 

 “일어났냐, 비실이.”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리암 형이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다가왔다. 표정과는 다르게 걱정이 되었는지 손이 자연스럽게 이마에 닿았다. 형은 자신의 이마와 번갈아가며 손을 얹어보고는 손으로 머리를 꾹 눌러왔다. 매섭게 내려다보는 눈빛에 눈을 흘기며 시선을 피했다.

 

 “열이 내렸으니 다행이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날씨에 물에 들어가서 이 난리야.”

 

  무섭게 날아드는 힐책과는 다르게 버릇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다정해서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습이 내려다보던 리암 형이 어금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웃음이 나오냐?”

 

  형의 화난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양손이 머리를 감싸더니 힘이 실렸다.

 

 “악. 아파요. 아파요. 잘못했어요.”

 

  형은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손에 힘을 풀더니 주먹으로 꿀밤을 때렸다.

  노엘 형은 우리의 소란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아직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는 에이든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는 가만히 이마를 쓸어주었다.

 

 “에이든은 어때요?”

 “……괜찮은 거 같아. 에이든은 오늘 하루 재워두면 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도 늦지 않게 준비하고 가보도록 해.”

 “오늘은 그 여자애도 없잖아. 빨리 가.”

 

  그제야 준비할 시간이 빠듯하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숙소를 나가기 전 곤히 잠든 에이든의 이마를 쓸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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