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강민호의 입에서 튀어나온 신음과 같은 나지막한 말과 함께 그의 오른쪽 어깨에 매달린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삐빅- 베타 원지발견 진압 시작하겠음’
곧이어 연달아 무전기가 울려댔다.
‘삐빅- 감마 진압 시작하겠음’
‘삐빅- 델타 진압 시작하겠음’
그리고 창현이 탄 차 역시 눈앞에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는 폐드럼통을 발견했다. 남자들은 일사불란하게 내려 바람을 등지고 소화기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나머지 두 명은 차 트렁크에서 꺼낸 삽으로 흙을 퍼다 원형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창현과 동식은 할 게 없었다. 그들 손에 돌아올 삽자루도 소화기도 더 이상 없기 때문이었다. 둘은 그저 불이 더 번지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동식은 창현 옆에 바짝 붙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근데 서혜진이 여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왜 코빼기도 안 보여? 본 거 확실해?”
“꿈에선 직접 봤어. 근데 안 보이네. 뭐 우리가 막아냈으니 내뺀 거겠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사람이 몇 명이 죽을 뻔했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형. 그림자야. 이것보다 더한 짓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는 애들이라고. 몰라?”
창현은 대답 대신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훈련소 벽면에 떠올랐던 수많은 그림자의 일원들. 그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무자비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가져야 할 감정들을 모두 잊어버린 걸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무고한 사람의 목숨 따위야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인가. 창현은 다시금 그림자라는 집단에 대한 적개심이 자신의 눈앞에서 치솟는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소화기는 점점 힘을 잃어 이젠 곧 자신이 끝날 것이란 걸 예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길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일렁대며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진즉에 다 써버린 작은 소화기를 들고 있던 대원들은 삽질을 교대로 해가며 최대한 많은 흙을 불길을 향해 뿌려대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잠깐이지만 하던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왔다!”
누군가의 외침에 대원들은 더욱 바삐 그리고 힘차게 삽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사이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빛을 사방에 뿌리며 빠른 속도로 다가온 소방차 3대가 나타난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멈춰 불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소방차 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응급차가 창현과 동식의 옆에 멈춰 섰다. 주황빛 옷을 입은 남자가 내려 창현에게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응급대원의 질문에 창현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그럼 먼저 돌아가 봐야겠군요. 응급 대기가 많아서...”
구조대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불길 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퍽!’
이어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위협적인 불길에 뒤로 물러났다. 창현 옆에 서 있던 구조대원은 창현에게 하던 말을 마저 하고 차에 올라탔다.
“그럼 수고하세요. 이창현 씨.”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커져가는 불씨와 소방대원들을 구경하며 건성으로 인사했다.
“네. 고생이 많으시네요. 수고하세...”
무언가 떠오른 창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응급차는 이미 출발해 저 멀리 가버린 뒤였다.
“내 이름을 말했어..? 내 이름을 어떻...”
이내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며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색을 검은색으로 바꿨지만, 창현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서혜진이었다. 서혜진이 창현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동시에 사이렌 소리가 여러 개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창현이 크게 외쳤다.
“그림자! 서혜진입니다!”
창현의 외침에 NSR 대원들은 창현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상황 파악을 한 타격대원들이 차에 황급히 올라탔지만, 그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나타난 소방차들이 2차선 양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멀어져가는 서혜진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다.
*****
그리 크지 않은 강당엔 많은 수의 남자들이 앉아있었다. 그들은 모두 터질듯한 근육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상 위에는 창현과 동식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한 올도 빠트리지 않고 정갈하게 뒤로 쓸어 넘긴 머리. 얇은 직사각형의 안경. 최용현이었다.
“너희들 덕분에 여기 많은 인원이 목숨을 건졌다. 뭐 당연히 너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지만. 그래도 아직 정식으로 발령받지 않은 상황에서 해낸 일치고는 큰 성과였다.”
‘짝짝짝’
한차례 박수가 지나가고 다시 최용현이 입을 열었다.
“원래 이렇게 거창하게 임명식을 하진 않지만, 오늘 너희들이 한 일이 있기에 겸사겸사하도록 하지.”
최용현의 얼굴은 달갑지 않다는 듯 떫은 표정이었지만, 단상을 보고 있는 남자들을 뜨거운 눈빛을 느꼈는지 입을 열었다.
“제 1113기 이창현. 이동식. 너희들을 현 NSR의 파수꾼으로 임명한다. 이 시간부로 NSR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게 되며, 그 권한을 국가안보와 국익의 상황에 한하여 사용할 수 있음을 알린다.”
그리고 손에든 네모난 무언가를 건넸다. 마치 신용카드같이 생긴 그것은 언젠가 훈련소에서 찍었던 증명사진이 오른쪽 상단에 박혀있었다. 그리고 그 왼쪽으로 이름과 소속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제일 아래 눈길을 끄는 커다란 검은색 글자.
‘대한민국 청와대’
최용현은 감탄하고 있는 창현과 동식을 향해 말했다.
“이것을 들이밀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운영하는 기관은 어디든 통과할 수 있다. 2년간의 훈련과정을 잘 견뎠다. NSR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한다.”
다시한번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희는 내일부터 약 10일간의 휴가가 주어진다. 그 뒤로 다시 복귀해서 정식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임무 수행과 규칙 등 자세한 것들은 휴가 복귀 뒤에 교육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내일 휴가 출발 전 고원욱 본부장에게 보고하고 가도록.”
고원욱이란 이름에 창현과 동식의 고개는 꺾어지듯 튀어 올랐다. 동식의 살짝 벌어진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이 흘러나왔다.
“그 근육돼.. 아니 고원욱 조교가 NSR의 본부장이라고요?”
“그렇다. 이제 내려가 보도록.”
최용현은 표정 없는 얼굴로 동식에게 말한 뒤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타격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 NSR은 우리의 집이자 반드시 지켜내야 할 대한민국의 심장이다. 그런데 오늘 우린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비록 이 둘의 파수꾼이 지켜냈지만, 저들은 이미 우리의 발아래까지 왔다. 이대로 한심한 대처가 계속된다면 저들은 언제든 쳐들어와 우리 대한민국의 심장을 더 이상 뛰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내일부터 고원욱 본부장이 그대들의 그 안일한 마음가짐을 고쳐줄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오늘 있었던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충분히 반성할 수 있도록. 이만 해산.”
최용현의 말에 웃음기 있던 장내의 분위기는 꽁꽁 언 얼음판 같이 변해버렸다. 최용현이 강당 밖으로 나가버리자 타격대원들의 얼굴에는 고원욱이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감을 여실히 보여주기 시작했다. 곧이어 대원들까지 모두 나가버리자 창현이 말했다.
“너도 오늘 느껴서 알겠지만, 우리한텐 개꿈이라는 건 없나 봐. 앞으로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그림자에 관련된 거라면 보고하도록 하자.”
동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무룩해져서는 대답했다.
“미안해. 내가 진작 보고했으면 형이 목숨 걸 일도 없었을 텐데.”
창현은 동식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너라도 그렇게 했었을 거야. 내가 먼저 꿈에서 본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동식은 여전히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내가 정말 형처럼 할 수 있었을까?”
“그럼. 물론이지. 어서 가자.”
창현과 동식이 문을 열고 나가자 타격대원 하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창현과 동식을 처음 만났던 경비초소에 있던 대원이었다.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원을 따라 중앙 반짝이는 대리석이 가득한 홀 뒤편에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은 아래층과는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계단과 복도는 여전히 대리석이긴 했지만, 벽면은 분홍빛의 푹신한 소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소리를 크게 외쳐도 모두 흡수해 버릴 것 같은 그런 소재였다.
아래층 홀이 있을 위치엔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모양의 의자가 놓아져 있었다. 왼쪽 벽면에는 책과 잡지 등이 꽂힌 책장들이 있었고, 그 옆으로 음료 자판기와 커피 자판기가 위치해 있었다. 그 맞은편 벽면엔 커다란 TV가 벽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대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창현과 동식을 발견하자 제일 고참으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경례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현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반면 동식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창현은 자신의 옆에 있는 대원에게 황급히 말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빨리 좀 쉬고 싶은데.”
하지만 TV를 보고 있던 대원들 중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