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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한 잔 받으시지요.”
홍월은 빠드득 이가 갈리는 속마음을 애써 감춘 채, 이상환의 술잔에다 송화주를 듬뿍 따랐다.
‘……애초부터 내 창(唱) 따윈 들을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렷다?’
심지어 청한 당사자인 주제에 뻔뻔하게도 말이지. 따라 준 술을 넙죽 잘도 받아 마시는 그를 보며 홍월이 고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허허, 고맙구나.”
“모자라면 더 말씀하시지요.”
더군다나 오늘 처음 객맞이에 들어선 기녀를(심지어 다른 누구도 아닌 세자마마를) 저 따위로 대하는 건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허리부근이라곤 하나, 마구 주물럭대는 꼴이라니…….’
홍월이 제때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저 거침없는 손길이 세자마마의 은밀한 부위까지 침범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약한 인간이로고…….’
물론 홍월이 그의 음심(淫心)에 대해 경각심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을 때만 하더라도 몇 차례나 그의 ‘못된 손’이 그녀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대질 않았던가. 다만, 설마하니 오늘 첫 객맞이에 들어선 기녀에게까지 그 마수를 뻗칠 줄은 몰랐을 뿐이다.
본래 첫 객맞이에 나선 기녀를 들이게 될 경우, 객에게도 암묵적으로 따라야할 관례라는 것이 있다.
첫째, 우두머리의 옆에 앉히지 말 것.
둘째, 술을 주지 말 것.
셋째, 접촉하지 말 것.
넷째, 욕하지 말 것.
특히나 욕설과 추행은 그 중에서도 가장 금기시되는 것이었다.
물론, 주가(酒家:술집)이다 보니 이를 지키는 이들이 그렇게까지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지키려는 시늉정도는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관례를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건…….
‘분명 기녀를 죄다 자기 아랫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 ‘무례함’에 대해선 이미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기방관리를 담당한다는 자가 기방의 관례까지 무시할 줄은 몰랐기에, 홍월로서도 이에 대한 대처법까진 교육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경솔함에 화가 났고 곤혹을 겪은 세자마마께 죄송했다. 홍월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시금 눈앞의 이상환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좋게 볼 수가 없는 양반이로군.’
첫 이목구비부터 마음에 들지 않더라니, 이건 뭐 갈수록 가관이질 않는가. 노래를 청하는 척 자신은 보내버린 뒤, 곧바로 세자마마를 불러다 옆에 끼고 노는 꼴이라니. 맞서지 못하는 약자만을 노리는 교활한 이리 같은 자…… 홍월이 새삼 분노해 마지않는 인간 유형이었다.
홍월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그냥 넘어가긴 싫었다. 오늘은 세자마마의 첫 객맞이날 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기녀에 복귀한 첫날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를 망치려 드는 저 짝눈의 두꺼비를 그냥 두고 보기만 한다?
‘그럴 순 없지.’
생각을 마친 홍월이 그즈음 이안을 슬쩍 쳐다보았다. 자신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복수해드릴게요!
이안이 ‘오해’한 바로 그 시선이었다.
*
기녀의 복수라 하면 흔히들 여러 양반네들과 난잡하게 얽힌 야화야사(夜話夜事)를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훨씬 더 얕고 소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술에 물을 좀 탄다거나, 옆에 앉은 이 이외의 사람을 칭찬한다거나, 못들은 척 객의 말에 대답을 잘 해주지 않는다거나…….
‘기녀 골리기’에 비하면 한참이나 약한 정도의 ‘손님 골리기’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애당초 객들과 기녀들 간 신분차이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데다, 또한 워낙에 개차반인 인간들이 많기에 굳이 ‘복수’와 같은 행위를 계획하면서까지 감정을 소모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고작해야 이런 정도로는 ‘감히’ 세자마마와 자신을 분노케 한 값으로 족하다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안 되지, 안 돼. 안 되고말고.’
홍월은 이 두꺼비 닮은 짝눈의 사내에겐 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 내려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떠올린 것이 바로…….
“나리…… 한 잔 더 하시겠어요?”
“허허, 방금 네가 따라주지 않았더냐?”
“아……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제가 나리의 주량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까닭에…… 송화주가 독하다는 걸 제가 깜빡하여…….”
“……응? 아, 굳이 독해서 그렇다는 건 아니…….”
“서리께선 잠시 쉬시겠다고 하시니 혹, 제 술을 받아줄 다른 나리 안 계십니까?”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홍월의 말에 이상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허,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내 쉬려 마시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내 한성 바닥에서도 알아주는 주당(酒黨:술꾼)이거늘, 고작 이 정도에 취기가 오르겠느냐. 네가 따라준 술을 곧장 마시지 않은 까닭은 다른 이들과 함께 즐기기 위함이었다. 혼자 달려 나가면 그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그럼, 이 서리야말로 알아주는 술꾼이지.”
“그렇지. 고작해야 송화주 몇 잔에 말이야…….”
중년인들의 맞장구에 거보라는 듯 금세 의기양양해진 그의 표정에, 홍월은 기다리던 순간이 왔음을 알아차렸다.
“혼자 달려 나가는 게 싫어 마시지 않았다…… 그럼 혹, 소녀와 함께라면 어떠시겠습니까?”
“오, 너와 말이더냐?”
“예, 저도 송화주를 꽤나 즐기는 편인지라…….”
“허허, 네가? 그 말이 참이렷다?”
홍월의 말에 이상환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본래 기녀들이 객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나, 그래봐야 그리 독하지 않은 술 몇 모금 홀짝이는 게 대부분이었다. 밤늦게까지 여러 객을 맞이해야 하는 기녀들이 술에 쩔어 있을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옥과 같은 ‘악(樂)’기방의 경우, 더 나은 연주와 소리를 위해 그조차도 최대한 자제하는 게 보통이었다.
‘지,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작은 스승님?'
이안의 두 눈동자가 의혹에 차기 시작했다.
“허허, 홍월이의 객 대접이 아주 제대로구나!”
“청화야, 너도 홍월이를 많이 본받아야 된단다.”
“그럼, 술이 더 필요하겠지?”
독한 술들은 오히려 객들이 기녀에게 못 먹여 안달이었는데, 이는 그녀들을 최대한 흐트러뜨려 어떻게 한 번 해보려는 그들의 음탕한 욕망 때문이다. 하여 매번 술상머리에선 술을 먹이려는 객들과 이를 거절하는 기녀들의 심리전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 와중에 자기가 먼저 나서서 술을 달라 하는 기녀가 있다? 어찌 이를 환영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의 무리들도 히죽히죽 웃으며 이를 부추겼다.
“아니, 저…….”
돌아가는 꼴이 왠지 심상찮은 듯해 이안이 뭐라 말을 꺼내려 할 참이었다.
“술은 이미 오래 전에 구비해놓았지요. 걱정 말고 즐기시면 됩니다.”
홍월이 선수치듯 그의 말을 잘랐다. 이어 그녀는 이안을 슬쩍 돌아보았는데, 여유로운 눈빛이 마치 그에게 괜찮으니 그저 지켜보기나 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한 잔 따라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