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
끼익-.
온몸에 기분 나쁜 전율이 일었다. 흐릿한 기억 속, 누군가 도로 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아무것도…….”
‘이 기억은 대체 뭐지.’ 시온은 식은땀을 흘렸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는 시온의 심장이 방망이질하며 둔탁한 울림을 만들었다.
“……유정원.”
선명해진 시야에 정원이 들어왔다. 시온은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움직였다.
“유정원! 내 말 들려?” 쓰러진 정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원은 다행히 의식이 있었다. 어깨를 건드리자 으으으, 하고 신음을 흘렸다. 오른쪽 어깨에 총상이 있었다. 부르르 떨리는 시온의 손이 정원의 어깨 위에서 헤맸다. 눌러 지혈을 도와야 하나, 그럼 아프지 않을까, 우유부단의 극치를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사람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모습에 시온은 정신이 아찔하였다. 둘 중 하나는 현실이 아닐 거라고, 그럼 지금 이 상황이 진짜가 아니었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병원, 병원부터 가자.”
“아니야.”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단호했다. 정원은 몸 일으키는 걸 도와달라는 듯 시온에게 손을 뻗었다.
“왜. 병원에 가야지, 이렇게 다쳤는데!” 정원을 일으키는 조심스런 손길과 달리 목소리는 사나웠다. 정원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치의한테 보여주면 돼. 소리 지르지 마, 골 울려.”
시온은 금세 목소리를 낮췄다. 걱정하는 투는 여전했지만. “주치의?”
“응, 지금쯤 호텔에 와 있을 거야. 나 좀…….” 정원이 왼쪽 팔을 뻗어 부축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시온은 그 손을 잡아, 손등 위를 살폈다. 이제 보니 타박상도 입었다. 이맛살을 모은 채 시온은 엄지로 상처 위를 살살 문질렀다. 정원은 가슴 한쪽이 간지러웠다. 그가 문지르고 있는 건 분명 손등 위인데 말이다. 고개를 든 시온이 이번엔 정원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 코, 입을 하나하나 훑고 내려오는 시선에 왠지 부끄러워졌다. 이마와 광대에 긁힌 상처를 보며 시온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업혀.” 시온이 등을 내보인 채 정원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오버하지 마, 다친 덴 다리가 아니야.”
“골 울린다며. 바닥에 쓰러져서 정신도 못 차렸던 애를 어떻게 걸려. 업혀, 얼른.”
정원은 하는 수 없이 몸의 중심을 시온 쪽으로 옮겼다. 널찍한 등에 올라타,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붙들자 시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팔, 목에 둘러. 내가 불안해.”
“알았어.”
정원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왼팔로 시온의 목을 두르자, 그가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몰라.” 정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시온의 등에서 부드러운 머스크 향이 났다. 그 향이 마취제인 양, 정원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차에 탄 남자는 속도를 내어 달렸다. 백미러로 정원을 발견하곤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분명, 도망치는 이의 모습이었다. 정원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차의 속도를 따라잡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쯤 개의치 않았다. 남자는 정원에 대해 알았다. 정원 자신보다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차의 보닛 위로 가볍게 뛰어오른 정원이 차창을 두드리며 말했다. “차 세워!”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검은 마스크까지 착용했다. 얼굴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텅 빈 도로 위, 그는 핸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정원을 떨어뜨리려 했다. 정원은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었다. 차를 세우려면 어떻게든 차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정원은 보조석으로 눈길을 돌렸다. 팔꿈치로 창문을 깨부수면 잠긴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보조석 쪽으로 넘어가, 어렵게 문에 매달려 있던 정원이 오른쪽 팔꿈치를 들어올렸다.
탕-. 남자가 품에서 리볼버를 꺼내 정원을 향해 쐈다. 차에서 떨어진 정원은 시계탑 앞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왜……?’
헛수고는 아니었다. 한 가지 소득이 있었다. 아빠의 다이어리를 전한 이 남자는 우리와 같은 편이 아니다.
“정원아!”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성이 시온과 정원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유정원 주치의가 당신이었어.’
미성은 1년 전 부친인 청준과 함께 멘탈 전문 코치로 대표팀에 부임했다. 정신과 의사인 그가 이른 나이에 심리 상담 분야의 권위자가 되었단 사실은 축구 협회가 작성한 보도자료에서 특히 강조된 부분이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실패 이후 제작된 <월드컵 백서>, 거기서 문제점으로 지적된 ‘심리 전문가 부재’의 숙제를 풀었다고 홍보하려는 심산이 컸다.
시온이 그를 보고 처음에 든 생각은 기생 오라비, 였다. 쌍꺼풀 없는 눈매와 까만 눈동자, 백옥 같이 흰 피부에 호리호리한 체형. 선수들 사이에 있으면 유독 더 튀는 미모가 시온은 불편했다. 상담 받으면서 좋다고 해죽거리는 나이롱환자 꽤나 거느리고 있겠군.
“어떻게 된 거야?” 미성은 곧장 그의 등뒤로 가 정원의 상태를 살폈다. 그에게 시온은 완전히 투명인간이었다.
“왜 나와 있어.”
“네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아, 전화.” 정원은 도로 위 어디에선가 산산이 부서져 있을 전화기를 떠올렸다. “잃어버렸나 봐.”
“피…… 이거 설마 피야?” 주변이 어두운 탓에 정원의 상처를 이제야 발견한 미성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별거 아니야.”
“길 한복판에 쓰러져 피 흘리고 있었으면서, 별게 아니야?” 애틋한 두 사람의 대화에 시온이 껴들었다. “설마설마했는데……, 그때 내가 찾으러 안 나섰으면 넌 거기서 그대로 과다 출혈로 죽었어. 내일 아침에서야 사람들한테 발견되겠지. 신원 불명의 젊은 한국인 여성, 총에 맞아 의문사함! 이 지역 신문에 대서특필로 다뤄질걸? 이런 데도 별거 아니란 소리가 나와?”
“총?” 미성이 처음으로 시온에게 눈길을 주었다.
“IRA 짓이야, 뻔해.”
“네가 경찰이야? 그걸 어떻게 알아? 병원도 가기 싫다, 경찰에도 알리기 싫다, 무슨 배짱이냐고 대체!”
“생명 부지했음 됐어. 일 복잡해지는 거 싫단 말이야.”
미성의 눈에 두 사람이 꽤 친근해 보였다. 정원이가 정시온을 알았던가?
“이리 와.” 미성이 두 팔 벌려 정원을 안으려 했다. 정원도 시원의 목에 두른 팔을 풀며 내릴 준비를 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방까지 데려다 줘도.”
시온은 정원을 미성에게 내주지 않았다. 미성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시간도 늦었는데, 정 선수는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이미 늦은 거, 몇 분 더 늦죠 뭐.”
두 남자의 쓸데없는 실랑이에 정원만 난처해졌다. 내리려고 하면 시온이 가만히 있으라는 듯 허벅지를 받쳐든 팔에 힘을 주었다.
“유정원.” 미성이 제법 엄한 소리를 냈다. 정원이 알았다는 듯 시온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려놔. 그리고 얼른 가서 자.”
“그놈의 자란 소리 좀 안 할 수 없어?”
“너 내일 늦잠 자고 내 탓이라고 할 참이지? 됐으니까 얼른 내려놔.”
정원이 발을 동동거렸다. 그러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는지 “아아……”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결국 시온은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었다.
정원을 내려주자마자, 미성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았다. “가자.”
미성의 부축을 받아 호텔 안으로 걸어가면서, 정원은 고개를 돌려 시온을 쳐다봤다. ‘고마워, 잘 쉬어’라는 말 대신 진한 여운을 남기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미성의 뒤통수를 응시하는 시온의 얼굴에 패색이 짙었다. “사촌 오빠면 다야?”
정원을 마지막으로 보고 오늘에서야 진정한 의미의 재회를 했다. 그에 비해, 미성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정원의 곁을 지켰다. 미성이 기득권을 주장하고 나서면 시온은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직은.
“근데 어떻게 거기에 있었지?” 차마 물어보지 못한 질문이 뒤늦게 입 밖으로 나왔다.
EPL 최고의 스프린터인 자신도 10여 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던 곳까지, 정원은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동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