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
 1  2  3  >>
 
자유연재 > 일반/역사
광무의 꿈
작가 : 백두혼
작품등록일 : 2019.10.22

대한제국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홍종우의 삶을 보면 된다.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로 건너가 근대화를 통한 조국 조선의 부국강병의 길을 도모한 자. 김옥균 등을 수괴로 한 친일 매국노들과 벌인 흉험한 싸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밀사는 이용익이었고 그의 곁에는 홍종우가 있었다. 근대사 전체를 통째로 뒤집는 위험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16. 제국의 꿈
작성일 : 19-11-08 18:58     조회 : 290     추천 : 0     분량 : 9956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16. 제국의 꿈

 

 

  정동 언덕 위에 높이 자리 잡은 하얗고 커다란 서양 건축물이 지금 조선의 국왕이 거처하는 왕궁이었다. 공사관의 입구에 하얀 군복에 각반을 찬 러시아 수병들이 소총을 들고 섰고 정문의 양편에는 대구경의 대포가 경운궁 쪽으로 포구를 열어두고 있었다.

  이범진을 통해 그는 고종의 기별을 받았다. 그는 조선의 관복을 갖춰 입고 정문을 지나 그의 군주가 거처하는 별관으로 향했다. 접견실 옆에 네 평 규모의 작은 대기실이 있었다. 그 곳에는 이미 이범진과 몇몇 대신들이 궐련을 태워 물고 커피를 마시며 환담 중이었다. 이 작은 대기실이 지금 조선의 조정이었다. 그가 들어서서 대신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자 중년을 넘어 보이는 서양 여자가 서툰 조선말로 인사를 건네 왔다.

 

 "커피를 드릴까요? 나으리는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저는 손탁이라고 합니다."

 

 정동 구락부와 더불어 이야기는 많이 들었던 여인이지만 얼굴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곳 아관에서 대군주 전하를 지근에서 보필하며 모든 수라와 음료를 챙기고 있다 들었다. 그로서는 파리에서 흔히 보던 서양의 중년부인이었다.

 

 "홍종우라 합니다. 커피 감사합니다. 근데 아라사 분이시오?"

 

 그녀는 싱긋 웃었다. 서툰 조선어가 오히려 듬직했다.

 

 "지금은 독일 사람입니다. 원래는 프랑스 사람입니다."

 

 그러자 그가 정확한 프랑스 어로 대꾸했다.

 

 "프랑스 사람이 독일인이 됐으면 부군께서 독일 분이신 모양이군요."

 "올랄라. 프랑스 어를 하실 줄 아는 분이군요. 제 이름은 마리 앙뚜완느 손탁이에요. 결혼은 한 적이 없으니 마드무와젤 손탁이라고 불러 주세요. 제가 태어난 곳은 알자스랍니다. 원래 프랑스였다가 지금은 독일인 곳이죠."

 

 손탁은 참으로 놀라고 반가워했다.

 

 "알자스라면 지금은 독일이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알자스의 백포도주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리슬링도 좋지만 게뷔르츠트라미네는 얼마나 맛있는지. 그리고 미라벨 자두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는 히야신스 신부와의 만찬이 떠올랐다. 그립고 아련한 추억이었다.

 

 "세상에. 미라벨 자두 맛을 알고 게뷔르츠트라미네를 아는 분이 조선에 있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죠?"

 "파리에서 약 3년간 놀고 왔답니다. 기메 박물관 일을 하면서요. 나중에 프랑스 어로 된 소설도 갖다 드리죠. 파리에 있을 때 춘향전과 심청전을 프랑스 어로 냈답니다."

 

 두 사람이 불란서 말로 대화를 이어가자 주위의 대신들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일찍이 불란서 유학을 다녀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완벽한 불란서 말로 서양인과 대화하는 조선인은 듣고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손탁 아가씨의 자두 타르트를 한번 먹어 봐야겠군요. 가능할까요?"

 

 그의 부탁에 손탁 여사는 눈을 찡긋했다.

 

 "좋아요. 뭘 아시는군요. 제가 제일 자신있는 게 타르트 종류들인데. 공사관 뒤편에 제 집이 있어요. 거기 많은 신사 숙녀 분들이 모이니까 거기로 오시면 맛보실 수 있답니다. 거기 이범진 대감이나 민영환, 박정양 대감들은 자주들 오십니다."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정동구락부는 한양에 와 있는 여러 외교 사절과 조선 정부의 고관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춘생문 사건과 이번의 아관 피난에도 그들의 역할은 상당했다. 이범진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관직이나 비중은 그들에 도저히 견줄 수 없었다. 이용익이야 그를 친우로써 대하고 있지만 그 외의 조정 대신들의 눈에는 김옥균 사살의 공으로 그저 한 자리 차지한 말직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에게는 문벌이나 척족이나 아무런 배경이 없었다. 조정이라는 곳은 엄혹한 밀림의 세상이다. 문벌과 척족의 위세를 업어야만 겨우 출사하고 칙임을 받고 생존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 당시 한양 주재 외교관들과 조선 정부의 최고위직 인사들이 모이는 정동의 손탁 사저에 출입할 자격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설명을 할 수 없었고 그저 웃고 말았다. 손탁의 눈치는 굉장히 빨랐다.

 

 "따로 구워 드릴께요. 저쪽 신사 분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다시 한번 눈을 찡긋하고 방을 나갔다.

 

 

 러시아식 다탁을 앞에 두고 앉은 군주 폐하께 대례를 올리고 섰으나 그의 두 눈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1894년 겨울 이후 처음 배알하는 그의 군주였다. 지난 일 년 동안 고종에게는 실로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고 그 역시 북관의 변경과 한양과 상하이를 오가되 목숨을 내놓고 다녔던 세월이었다.

 

 “경들의 충성으로 짐을 살리고 종묘사직을 살렸도다. 이범진을 법무대신과 경무사에 봉하노니 왜적들에게 빌붙어 짐을 능멸하고 중전을 살해한 역적 무리를 결코 용납치 말고 발본색원하라. 홍종우는 들어라. 그대의 노고를 익히 들어 알고 있노라. 경을 임시로 시종에 임명하니 무시로 드나들며 짐의 수족이 되어 짐의 뜻이 원활히 수발되도록 책임을 다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범진과 그는 엎드려 절하여 고종의 명을 받들었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이 선명해졌다. 갑오년 7월부터 지금까지 종왜 역적무리들이 저지른 모든 폐악을 일소하고 그 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것이 그 첫 번째요. 국모를 시해한 만고의 패역악적들을 끝까지 추포하여 남김없이 징벌하는 것이 두 번째요. 땅에 떨어진 군주의 권위를 선양하여 나라 안팎으로 조선의 국체를 정연하게 가다듬는 것이 세 번째요. 세정과 군제를 정비하여 부국강병의 기틀을 만드는 것이 네 번째요. 외국의 좋은 문물을 시급히 받아들여 일본에 뒤지지 않는 국력을 기르는 것이 다섯 번째요, 외세의 간섭을 일체 배제하여 자주 독립국가의 틀을 다지는 것이 그 여섯 번째였다.

 

 그는 새로이 구성된 정부에 몸을 담지는 않았으나 근왕 시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소임을 다했다. 유세남, 이종연, 한재심, 이상일 등 종왜 간신들을 체포하여 숙청하는데 혼신을 다했고 일본으로 도망간 박영효, 유길준, 조희연, 우범선, 이두황, 서광범 등 천하의 흉적 역신들을 귀국시켜 처벌하는 일에 노력을 경주했다. 또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국가 체제와 정국을 고종에게 아뢰어 제국주의 외세의 실상과 그들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자문을 했다.

 

 

  그는 수전 여사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자두를 올려 구운 타르트 한 조각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백설탕을 넣고 채로 쳐서 잔뜩 거품을 내 부풀린 크림도 얹어졌다. 러시아 공사관의 주방이었다.

 

 “자두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 자두는 어찌 된 것이오?”

 “작년 자두 철에 손질하여 설탕에 조려 살균한 유리병에 간수해 놓은 거예요. 자두 만이 아니라 복숭아, 살구 등등 여러 과일이 늘 준비되어 있답니다.”

 “그렇군요. 프랑스에서 병에 든 과일들을 많이 봤었죠. 조선 땅에서 초봄에 자두를 올린 타르트를 먹게 되다니 참 별일이오.”

 “어제 미스터 필립 제이슨이 왔었어요.”

 “그 서재필인지 제이슨인지 하는 검은 머리 미국인말입니까?”

 “무슨 신문을 만들겠다고 하던데요?”

 “신문이야 필요하긴 하지만 그자가 만들겠다는 신문이 무슨 의도를 가진 것인지는 좀 들여다 봐야겠지요.”

 “제호를 독립신문이라 정하고 청나라 사신을 맞던 영은문을 허물겠답니다. 무슨 독립문이라는 것을 세운다고도 하고요. 그런데 나에게는 참 다정하고 예의를 잘 갖추던데 대체 왜 조정 대신들한테는 그렇게 무례한지 모르겠어요.”

 “손탁 여사는 서양인이니 그렇지요. 그자는 심지어 군주폐하께도 불경스러운 놈입니다. 군주 폐하 앞에 안경을 쓰고 나타나 다리를 꼬고 앉아 궐련을 피워대는 놈이니 사람 종자가 아니라고 봐야 하지요.”

 “그러게 말이에요. 독일 고문인 뮐렌도로프씨도 군주 폐하 안전에선 안경을 벗고 두 손을 모으는 건 물론이고 서양의 외교 사절조차 왕실의 법도를 존중하는데 제이슨 그 사람은 제가 봐도 불손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더불어 일전의 갑신년 난리를 벌인 원흉 주제에 작년의 종왜 내각의 부름을 받고 들어와 고문의 자리를 꾀어 찼으니 그 위세가 제법 등등합니다. 더구나 미국 국적을 얻고 미국 부인까지 거느리고 미국 경호원까지 옆에 둔 신분이니 이 조선에서 어느 누가 그놈의 위세를 꺾을 수 있겠소.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오. 그 역적 놈을 그대로 감수할 우리 조선이 아니오. 그 놈의 흉심과 마수가 드러나면 내 반드시 그 놈을 처단하든지 추방할거요. 그놈의 조국 미국으로 말이오. 그 자가 주장하는 독립이라는 것이 일본을 포함한 모든 외세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을 뜻하는 것은 아닐게요. 그자의 배경과 사상을 들여다 보건데 그자의 독립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고 친일적인 독립일 것이오. 또한 친미적인 독립일 것이고. 청나라는 이미 기울어져 망해가는 상황이오. 지금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더구나 미국식 문물에 물들어 미국식 공화정에 대한 신념이 확고할 텐데 우리의 군주제를 그 자가 어떻게 용납하겠소? 그자가 지금 군주께 범하는 불경스러움 자체가 군주제에 대한 그자의 심정인 것이오.”

 “그야 두고 보면 알겠지요. 저의 사저에 모이는 정동구락부 사람들 모두 그 독립신문이라는 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 협회가 구성되면 참여하겠다는 모양이에요. 홍공도 참여하는 것이 어때요?”

 “나는 그 머리 검은 미국인, 머리 검은 러시아인, 얼굴 모양은 조선인이되 겉은 서양인이고 속은 일본인인 족속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 대신이라는 자들 태반이 어느 외국의 세력이든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고 배경이 될 세력이면 종묘사직이라도 배반하여 붙어먹을 작자들이오.”

 

 그때 러시아 식 제복을 갖춰 입은 조선인이 주방에 들어섰다.

 

 “홍공은 불란서 말로서 손탁 여사와 참으로 친해지셨소이다. 허허..”

 “노고가 많으시오. 불란서 말도 자주 써야 잊어버리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되새겨 보고 있소이다.”

 “홍공 만큼은 아니나 소생 또한 불란서 말을 좀 할 줄 아니 손탁 여사와 더불어 같이 불란서 구락부나 열어야겠소.”

 “구락부야 정동 구락부로 충분하지 않소이까?”

 

 그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통역관으로 들어와 일전의 춘생문 사건과 이번의 아관파천에도 크게 관여하여 군주 폐하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김홍륙이었다. 고종의 시종 역과 칙사 역을 겸하고 있는 홍종우와 더불어 시종원 시종으로서 언제든지 고종의 거처에 드나들 수 있는 측근 중의 한명이기도 했다. 더구나 러시아 공사관에 거처하는 고종으로서는 러시아 공사의 공식 통역관인 김홍륙의 존재는 절대적이라 할 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그는 이 김홍륙을 믿지도 않거니와 꽤나 경계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미국 물 먹고 미국인이 된 서재필이나 일본 물 먹고 일본인이 된 박영효, 서광범과 같이 러시아 물 먹은 검은 머리의 러시아인일 뿐이었다. 충심으로 조선의 군주를 보필하여 조선을 자주적 근대 국가로 발전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러시아 세력을 등에 업고 일신의 부귀영화를 도모하려는 또다른 외세의 기생충인 것이다. 이 나라에는 기생충들이 참으로 많고도 많았다.

 

 “홍공은 불란서 영사관으로는 별로 왕래를 않더군요.”

 “사적으로 무슨 볼 일이 있겠소이까? 폐하께서 하명하시면 언제라도 통지하여 교류하겠소만 사적으로 그들과 교류할 생각은 없소이다. 더구나 지금 이폴리트 프랑뎅 공사는 이임하였고 후임 빅토르 꼴렝 드 플랑시 공사는 아직 당도하지 않았으니 별 일이 더구나 없을 수밖에.”

 “듣기로는 홍공과 그 신임 공사가 초면이 아니라 들었는데 나중에 그 꼴렝 드 플랑시 공사가 도착하면 이 사람도 잘 소개해 주시오. 내 홍공을 베베르 공사께 인사시켜 드리겠소.”

 “그러실 필요 없소이다. 군주 폐하께서 베베르 공사를 알현하실 때 옆에서 늘 배견하고 있지 않소이까?”

 “그것이야 그야말로 페하 면전이니 무슨 인연을 만들겠소? 그러지 말고 우리 좋은 인연을 좀 만듭시다. 이렇게 우리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하고 있고 향후에도 이런 관계가 계속 될 텐데 홍공께도 손해될 일이 없을게요.”

 “하하하...김공의 후의에는 감사드립니다만 소생은 그저 군주 폐하의 어리석은 시종에 불과하여 무슨 별다른 인연이니 뭐 이런 것들은 알지를 못하외다.”

 “참으로 답답한 분이구려.”

 

 김홍륙이 혀를 차며 나가버리자 조용히 듣고 있던 손탁 여사가 그제야 말을 꺼냈다.

 

 “조선 말이지만 다 알아 들었어요.”

 “허허. 손탁 여사는 이미 조선분이 다 되었군요.”

 “저 사람은 너무 욕심이 많아요. 베베르 공사는 진심으로 군주 폐하를 사랑하십니다. 홍공께서 두 분의 사이에 저런 욕심쟁이가 끼어들어 양국의 이해를 흐트리지 않도록 지켜봐 주세요.”

 “커피와 타르트 잘 먹고 마셨습니다. 이제 군주 폐하의 저녁 수라를 준비하실 때가 된 것 아닙니까?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그는 주방에서 나와 고종의 알현실에 들어섰다. 그는 언제든지 별도의 기별 없이 고종을 배알할 수 있는 시종의 위치였다.

 

 “대군주 폐하. 이제 곧 저녁 수라가 준비되옵니다.”

 “그렇군. 경도 퇴청하려는가?”

 “내리실 하명이라도 있으시온지오?”

 “오늘 특별한 정사가 없으니 그대와 더불어 공화정에 대해 논해보고자 하네.”

 “분부 받들겠습니다. 수라 마치실 때까지 대기하겠사옵니다.”

 “아니 그럴 것 없이 경과 함께 할 것이니 수라를 두 사람 분으로 준비하여 올리라 명하게.”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감히 폐하와 더불어 겸상을 하다니 망극하옵니다. 명을 거두어 주시고 나중에 소신을 불러 주시옵소서.”

 “어차피 서양식으로 먹을 것 아닌가? 우리 식의 겸상이 아니고 서양의 법도에 따르는 것이고 오히려 경과 더불어 서양의 예법도 익혀보려 하니 그대로 시행하라.”

 

 그는 군주의 앞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손탁 여사는 여지없이 이 인분의 포크와 나이프, 유리잔 등의 기물을 차렸고 표고버섯을 버터에 볶아 갈아내 걸쭉하게 끓인 포타쥬를 시작으로 수라상을 올렸다.

 

 “이 포도주가 불란서에서 온 것이라 하던데 경은 알겠는가?”

 

 수라상에 오른 포도주는 보르도 지방의 적포도주 중에 이름 높은 것 중 하나였다. 불란서 공사관 측에서 시시때때로 보내는 선물 중 하나였다. 손탁 여사가 일부러 불란서 포도주를 올린 것이 틀림없었다.

 

 “사십 년 전 불란서의 황제인 나폴레옹 3세 폐하께서 개최하신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불란서 포도주의 품평을 명하셨고 그에 따라 불란서 보르도 지방의 몇몇 포도주를 명산품으로 지정하신 일이 있사옵니다. 그 중 이것은 샤토 마고라 하여 최고의 포도주로 정해진 불과 몇몇 중 하나라고 알고 있사옵니다. 소신은 물론 전에 마셔 본 바가 없사오니 오늘 크게 성은을 얻게 되었나이다.”

 

 두 사람은 포도주를 마셔가며 식사를 시작했다.

 

 “나폴레옹 3세는 어찌하다 그리됐는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 패하여 그렇게 된 것은 틀림없으나 이미 그 결말이 어느 정도 예상된 바라고 소신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 예상을 고해보게.”

 “나폴레옹 3세 폐하께서는 천하의 풍운아셨던 나폴레옹 1세 황제 폐하의 조카셨지만 황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옵니다. 나폴레옹 1세의 몰락으로 공화정으로 이행한 불란서 정국에서 공화정의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었던 것입니다. 불란서 민중들은 일견 나폴레옹 1세의 위세와 후광을 기대하며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 폐하를 옹립했지만 이미 불란서라는 나라는 군주 일인에게 모든 국권을 일임하는 군주정에 대한 반감이 강했사옵니다. 더구나 프러시아에는 비스마르크라는 걸출한 재상이 있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정병을 강화하여 호시탐탐 불란서를 노려 왔으니 어찌 당하였겠습니까?”

 “경은 그 공화정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우리 조선에도 그런 사상을 가진 자가 분명 있을 테고 앞으로 또 생겨날 텐데.”

 “망극하옵니다. 그 공화정이라는 체제는 사회계약설이라는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사옵니다. 국왕의 왕권은 절대적이거나 신성한 것이 아니고 국가를 이루는 민중들이 그들의 이익에 따라 위임한 것이므로 그들의 뜻이 다르다면 왕권은 무의미하여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옵니다. 하여 민중 개개인이 동일한 권리를 갖고 그들의 대표를 뽑아 국가를 경영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옵니다. 소신의 언사가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경은 너무 예를 갖추지 말라. 이는 곧 경연과 마찬가지니 군신의 예의는 있으되 경국의 도에는 예의가 없도다. 기탄없이 이야기하라.”

 “소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대가 다녀 온 불란서나 지금 서재필이가 살다 온 미국이 바로 공화제를 시행하는 나라들 아닌가? 두 나라 공히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나라들 아닌가? 공화제가 그 신민들을 부강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공화제를 해서 부강해지는 것이 아니오라 오히려 부강해서 공화제가 가능하다고 신은 사료되옵니다. 세계를 둘러봐도 가장 부강한 두 나라가 공화제를 시행하고는 있사오나 그에 버금가는 나라조차도 공화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없사옵니다. 오히려 미국이라는 나라는 영국에서 무력으로 독립한 것이니 제외하고도 이 세상에서 자력으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서양 제국 열강 중에도 불란서 밖에는 없으니 불란서라는 나라만의 예외적인 체제라 여겨도 틀림이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그렇다고 봐야겠군. 그런데 공화제를 획책하는 인사가 우리 조선 땅에도 나타날 것 같은가?”

 “물론 나타날 것이옵니다. 우선은 미국 사람 행색으로 나타나 미국인 행세를 하는 서재필이 그 첫 번째고 윤치호나 이상재 같은 인사들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사옵니다.”

 “주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인사들이군.”

 “보고 듣고 익히고 온 것이 미국의 사정이오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겨지옵니다. 더구나 미국에 팽배한 개신교라는 기독 사상은 사회 계약설과 더불어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체를 이루오니 그들의 기독 사상에도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경은 불란서를 다녀와 불란서 말과 문물에 이리 박식함에도 또 이렇게 충성스럽지 않은가?”

 “망극하옵니다. 신은 그 공화제라는 것을 직접 보고 몸으로 겪으며 익혔사옵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에게 합당하고 좋은 것이라면 소신 역시 그에 경도되었을지도 모르오나 절대 그렇지 않았사옵니다. 이 세상에는 이미 백 개가 넘는 국가들이 존재하는데 그 각각의 국가들의 처지나 여건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사옵니다. 우리 조선은 백성들을 성심으로 아끼시는 대군주 폐하가 계신데 어찌 다른 마음을 품겠사옵니까? 더구나 구라파의 제국 중에서도 지금 크게 성세를 높이는 영국은 물론 독일과 아라사 역시 모두 황제를 모시는 제국이옵니다. 소신은 몇 번이나 독일 제국의 명재상인 비스마르크에 대해 고한 바 있사옵니다. 독일의 변방 소국인 프러시아의 왕을 모시고 참담한 분열과 전화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독일을 통일시키고 천년에 걸친 숙적 불란서를 격파하여 독일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비스마르크야말로 소신이 품고 있는 출사의 사표이며 우리 조선이 지금 나아갈 바라고 여기고 있사옵니다.”

 “그야말로 참으로 일리 있고 합당한 생각이로다. 우리 조선이 지금의 독일처럼 그렇게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꼬.”

 “대군주 폐하. 조선에는 아직 물불을 가리지 않을 충신열사들이 수없이 많고도 많사옵니다. 폐하께서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시어 옥석을 가려 쓰신다면 이 강산은 오래지 않아 저 왜놈들에게 당한 깊은 수모를 갚을 수 있고 어떠한 외세의 침범도 응징할 수 있는 강국이 될 것이옵니다. 우선은 종왜 패륜 역적배들을 축출했사오니 일본은 물론 청나라, 러시아에도 굽힐 것이 없사옵니다. 부디 아뢰옵건대 만대에 이어질 연호를 발표하시어 제국을 선포하시옵소서. 제위에 오르셔서 조선의 독립국임을 만방에 선포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국체를 공고히 하여 국제 사회의 공인을 획득하는 것이 폐하의 위엄을 떨치고 외세의 어지러운 간섭을 피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조선은 지금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는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앞장 서서 이 백척간두의 위기를 극복할 분은 오직 대군주 폐하 한 분이십니다. 폐하의 명에 견마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을 충신들이 많고도 많사오니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경의 생각이 참으로 합당하도다. 그대에게 명하오니 세계 각국의 체제를 살펴 칭제할 방책을 강구해 보라.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행한 여러 정책의 방안을 제시하여 새로운 국제(國制)의 근본으로 삼고자 하니 그 방안을 정리하여 검토하도록 하라. 내 그대의 방도가 매우 합당하니 즐거이 시행코자 하노라.”

 

 초코렛 푸딩을 마지막으로 만찬은 끝났고 그는 크게 절하고 어전을 빠져 나왔다. 정동 언덕길을 넘어 서촌으로 향하는 인력거 안에서 그는 그를 이끄는 아홉 개의 별 중 하나를 떠올렸다. 제왕을 상징하는 북쪽 하늘 가운데의 별. 절대 움직이지 않는 그 별의 주위에서 그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다. 혹은 마른 나무에 움트는 꽃몽울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0 18. 승지홍종우등상소 2019 / 11 / 10 256 0 7683   
19 17. 광무 2019 / 11 / 9 260 0 6664   
18 16. 제국의 꿈 2019 / 11 / 8 291 0 9956   
17 15. 창의 토왜 (彰義 兎倭) 2019 / 11 / 7 272 0 3767   
16 14. 건청궁의 피바람 2019 / 11 / 6 275 0 3794   
15 13. 치욕의 갑오년 2019 / 11 / 5 259 0 8514   
14 12. 어사화 2019 / 11 / 4 260 0 9286   
13 11. 동화 양행 2019 / 11 / 2 278 0 5249   
12 10. 이와타 슈사쿠 2019 / 11 / 1 254 0 12606   
11 9. 정한론 2019 / 10 / 31 267 0 4338   
10 8. 고금도 2019 / 10 / 30 262 0 6414   
9 7. 다시 꽃 피는 마른 나무. 2019 / 10 / 29 253 0 4473   
8 6. 히야신스(야셍뜨) 신부 (2) 2019 / 10 / 28 264 0 6819   
7 6. 히야신스(야셍뜨) 신부 (1) 2019 / 10 / 27 250 0 6419   
6 5. 국가란 무엇인가 2019 / 10 / 27 251 0 8856   
5 4. 기메 박물관 2019 / 10 / 25 243 0 5725   
4 3. 펠릭스 레가메 2019 / 10 / 24 249 0 12738   
3 2. 파리 외방전교회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2019 / 10 / 23 260 0 6592   
2 1. M.M 르 사할리엔. 2019 / 10 / 22 260 0 5592   
1 프롤로그 2019 / 10 / 22 414 0 301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천무행
백두혼
조선해방전쟁
백두혼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