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비르.
그의 이름을 되뇌이는 순간, 준호는 자기도모르게 온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웃는 소리는 이가 갈리는 듯 끌끌끌 혀를 차는 소리같았다 .
비열한 미소를 연상시키는 말그대로 괴상한 웃음.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
그렇게 병실 침대에서 준호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다음날, 민호는 서둘러 아버지와 함께 준호의 병실을 찾았다.
영양제 삼아 링거액이 다 몸속으로 흡수되는 것을 두눈으로 지켜본 후에야 아버지 차선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호는 준호와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의 흰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암으로 아내를 잃고 훤칠했던 아들녀석의 팔하나를 자르던 날, 몇 달지나지 않아 그의 머리칼은 새하얗게 새어버렸다. 염색을 해도 검은색 머리칼은 오래가지 못했다.
누가 일부러 밤새 빨래하듯 빨아버리는 냥, 새하얀 흰머리가 밤새 수북수북 다시 올라왔다.
자기도 모르게 민호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버지 : 됐다. 됐어. ...이제 집으로 가자.
준호의 정기검진 예약일자 확인을 받고야 웃음을 띄었다.
터벅.터벅.
오랜만에 골목에 들어서는 세 부자의 가슴 한켠에 큰일을 겪고 난 후의 서늘함이 발자국에 남는 것 같다. 그리고 옆집 2층 창가, 수현은 그 세사람의 어딘가 모를 슬픈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준호가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달랑달랑. 소맷자락이 흔들린다.
그날 밤, 준호는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민호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는 것 같다며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라고 최순경이 전화를 걸어왔었다. 차기자님은 괜찮으신거냐며 묻는 그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방문을 준호가 노크했다.
민호 : 어, 형? 왜 안자구. 수목원땜에? 거기는 병가처리 부탁해놨어.
그의 말에 준호는 엉거주춤 침대에 걸터앉았다.
차에서 오는 길에 대충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숙자가 사라졌다. 수목원에는 길고양이가 오가긴 했지만, 중성화수술을 한 숙자가 낯선 야생고양이에게 다가간 일은 없었다.
오히려 항상 연구실 창가에서 그들이 다가올까봐 꼬리를 곤두세우던 녀석이다.
준호 : 숙자는 그럼, 내가 쓰러지고 없어진거야?
민호의 표정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어색한 그의 표정에 준호가 오히려 미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민호 : 근데. 숙자 말고 ... 형 뭐, 걱정있어? 할말 있는 눈친데?
준호 : ...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는데.
민호 : .... ?
준호는 뭔가 잘못한 표정으로 침울한 눈빛이었다.
민호는 준호의 심각한 표정에 오히려 풋,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툭 쳐보였다.
하지만, 준호는 여전히 무엇인가 고민하는 얼굴로 진지한 표정이었다.
민호 : 차박. 아, 말을 해야 믿든지 안믿든지 하지. 뭔데?
민호는 계속 싱글싱글 눈웃음을 흘렸다.
마치 준호가 말못할 연예고민을 하려는 줄 알던 모양이다.
설사 옆집 수현이, 한검사를 좋아한다고 해도 흔쾌히 응원할 것같은 표정이다.
그의 얼굴을 마주보다 준호는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민호가 준호의 양 볼을 꽉 잡았다.
민호 : 믿어. 진짜루. 빨리 말해.
준호 : ... 요새 계속 같은 악몽을 꿔.
준호의 말에 민호는 표정이 조금 굳었다.
몸이 어디 안좋아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민호 : 악몽?
준호 : 응. 악몽. 근데 .. 이게 어릴 때 꿨던것도 아니구, 공포영화속 장면도 아닌데 뭐랄까 ... 그 꿈이 너무 생생해. 느닷없이 튀어나온 괴물이... 꿈이라하기엔.. 너무 익숙해.
민호 :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거 아니야? 아니다. 몸이 허해서 그런가보지.
준호 : 스트...레스?
민호 : 그래. 그때 지하실 김씨아저씨꺼 옷 걸린거보고 괜히 잔상이 남는거 아닐까?
준호 : ... 사실, 그 괴물이 말이지.. 자꾸 나한테 미르...라고 하는데.
민호 : ...?? 미르? ... 웬 미...르? ! ... 그 술집도 미르잖아.
준호 : 찾아보니까 우리말을 쓴거라면 용.이란 의미던데.
민호 : ...용? .. 드래곤?
준호는 다시한번 확인하려는 듯 휴대폰속 어학사전을 클릭해보았다.
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포영화를 본거 아니냐 할참이었다. 그러다 문득 물의왕국 미르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준호가 시름시름 하게 된 건 학회참석차 휴가때 물의왕국 미르를 다녀온 이후부터가 아닌가.
민호 : 형, 그 여사장이 준 향수. 그거 선물받은 담날 형 쓰러지지 않았어?
준호 : 그렇긴 하지.. 근데 향수가 왜?
민호 : 아니, 그 향수가 뭔가 모르게 형을 몽롱한 상태로 해가지구, 뭐냐.. 그 뭐지?
준호 : 환각상태?
민호 : 그, 그래. 환각. 뭐, 그런거를 일으키는거 아니야? 당장 검사해보자.
준호의 표정은 더 심각해졌다. 듣고보니 그럴 듯 하다. 자신이 시름시름 몽롱한 상태였던건 그때부터이니. 정말 향수성분에 환각제 성분이라도 들었던게 아닐까.
민호는 서둘러 욕실선반에 올려둔 향수병을 가져왔다.
준호 : 우리 수목원에는.. 그만한 분석장비는 없구. 대전 화학연에 맡겨볼까? 선배가 있어.
민호 : 그러자 그럼. 내일 샘플을 조금 나눠서 택배로 보내자.
준호 : 그냥.. 별것 아닌 향수면?
민호 : 별게 아니믄 다행이지만, 환각제나 무슨 이상한 성분 향수라면? 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 최순경이랑 내가 옆지구대 약수터서 시신한구가 더 발견된 사건을 알아봤단 말이야.. 그 피해자가 미르 여사장 비서를 따라서 드나들었던 것도 봤다하구. 검출안되는 환각약물 같은 거에 노출되었는지도 모르지.
준호 : 그럼 그 시신도... 심장마비?
민호 : 맞아. 멀쩡히 약수터를 산책하다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큰 추위도 아니었구 평소 주량보다도 훨씬 작은 술한잔에... 대체 그 술집, 정체가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아, 최순경이랑 내가 사진만 안 찍혔어도 계속 지켜보는 건데.
준호 : 사진...? 조사하더니 걸렸어?
민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민호를 보다 준호는 여사장 나비를 떠올렸다. 비싸보이는 담배 한 개피를 우주제약 회장의 입에서 요염하게 뺏어재끼던 그 여자. 그리고 세라. 그 뒤 비서. 신약개발차 자신의 제비꽃 연구가 필요하다 했던 나비의 제안을 떠올렸다. 느닷없이 오랜만이라며 나타난 세라. 진세라가 자신의 정보를 흘린거라면.
준호 : 사실, 나도 은회장 제안.. 궁금하긴 해. 결심이 서면 다시 오라고 했었어. 그 사장도.
민호 : 뭐? ... 안돼. 형, 위험해서. 이상하잖아. 그럼 나랑 같이 가.
준호 : 아니. 넌 이미 노출됐어. 내가 가야겠어.
민호 : 뭐야, 그 표정은? 미끼라도 되겠다는거야?
준호 : 미끼?
준호는 민호를 바라보았다. 민호역시 걱정스런 얼굴로 준호를 본다.
미끼.
어쩌면 정말 이상한 덫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준호는 결심이 선 듯 하다.
미끼가 되기로. 둘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