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하면 시시하잖아.”
계안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의자에 앉는다.
“그럼?!”
태평이 공격적으로 물으며 노트북 앞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개새끼!”
“으아아아… 귀가 썩는다. 안 들여. 안 들여.”
“씨팔 새끼! 육시럴 놈! 죽창에 꽂아버릴 놈! 눈깔을 뽑아 짤짤이 할 놈 등등 많잖아.”
태평이 두 손으로 양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난 김태평! 태평하게 살아왔지. 하지만 친구를 잘못만나 듣기 싫은 소리를 듣고 있지. 이건 아니야. 난 결백해. 그런 거 싫어 한다고!”
“크크크….”
계안이 즐거워한다. 태평은 욕을 할 줄 모른다. 그리고 너무 착해서 남을 돕지 않고는 못 배긴다. 소꿉친구인 계안이 괴담 동호회를 만들 때도 다른 사람들은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나, 그만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거다. 괴담에 외곬수에 입까지 험한 친구를 보좌하는 것. 우정이라는 이름의 족쇄였으나 도망 갈 수는 없었다. 너무 착했으니까.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나 다신 널 안 볼 거야!”
태평이 으름장을 놓아도 계안은 웃을 뿐이다.
“여기가 ‘누구’ 동호회인가?”
과학실 입구에 한 사람이 나타난다.
“맞아, 누구?”
계안이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태평을 뒤로하고 물었다.
“나, 그 폐가에 갔던….”
“아, 네가 그 중 하나구나!”
계안이 쏜살같이 출입구로 달려갔다.
“어, 어.”
“반갑다. 난 서계안이라고 해. 안으로 들어와. 사양하지 말고.”
계안이 활짝 웃으면서 손을 내민다.
“아, 그래. 반갑다. 난 강일중이라고해.”
일중이 계안과 손을 잡았다.
“잠깐만, 잠깐만… 강일중이라고?”
태평이 달려와서 험상궂은 얼굴을 한다. 태평은 키가 190에 육박하는 거구다. 그런 그가 인상을 쓰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들은 주눅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중을 그런 것에 주눅 들지 않는다. 그가 지금까지 봐온 도린곁 때문이었다. 그들보다 사람은 무섭지 않다.
“반가워.”
일중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태평은 그 손을 노려만 볼뿐 잡지 않았다.
“나 너 잘 알아. 오, 이런 세상에나, 유명한 일진이잖아. 형사님께서 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알겠어. 넌 나쁜놈이잖아!”
갖은 인상을 쓰며 태평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최악의 욕을 했다. 하지만 일중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아, 고마워. 내가 누군지 일깨워줘서.”
“뭐?”
“들어가도 될까? 딱히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일중이 태평에게서 눈을 떼 계안에게 물었다.
“누구 맘대로?”
태평이 계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회장인 내 맘대로. 어서 들어와.”
계안이 일중의 팔을 잡아끈다.
“야!”
태평이 계안을 불러 세웠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계안은 일중을 과학실로 들어갔다.
“한 방 먹었네. 허우대로 사람 찍어 누르던 우리 태평이.”
그런 그를 뒤돌아보며 계안이 이기죽거린다.
“너!”
태평이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눈에 이채를 띄며 계안을 따라 붙는다.
“계안이 너, 내가 누군지 아는 거야?”
“그야, 김태평이지.”
“그래, 네 하나 밖에 없는 친구 태평이야.”
“알아.”
“아는데 지금 나 보다 얘를 위하는 거야?!”
태평이 계안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래, 알아. 하지만 난 지금 친구보다 괴담이 더 좋아.”
하지만 계안은 조소를 입에 담는다.
“으아아아… 배신자!”
태평이 비명을 지른다.
“자, 여기 앉아.”
계안이 자신의 옆 자리를 권한다.
“어, 고마워. 그런데 저 친구는….”
자신의 등 뒤에서 낮게 으르렁거리고 있는 태평을 가리키며 물었다.
“신경 쓰지 마. 저러다 나아져. 그런 거 있잖아? 집고양이가 새로운 고양이가 들어오면 더 짓궂어 지는 거.”
“나 고양이 아닌데.”
“비유가 그렇다고. 하하하….”
“어, 그래.”
태평은 그들의 뒤에 앉아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부담스럽네.”
“신경 쓰지 마.”
떨떠름한 표정의 일중에게 계안이 태평의 얼굴을 밀어냈다. 하지만 태평은 목에 힘을 주며 버틴다,
“이제야 인사할 수 있겠네. 난 서계안이라고 해.”
계안이 손을 내민다.
“어, 반가워. 난 강일중이고, 이 쪽은 김태평이야.”
계안이 책상에 걸터 앉으며 태평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난 안 반가워!”
태평이 고개를 쭉 빼며 선언했다.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 어차피 난 정보가 필요해서 온 거니까.”
“뭐라고?!”
일중의 말에 태평이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나도 정보가 필요해. 그 일을 직접 격은 너라면 더할 나위 없지.”
계안이 몸을 일으켜 책상 위에 서서 태평의 얼굴을 막는다.
“그래, 너희들도 그 집에 갔다지?”
일중이 계안의 뒤에서 고개를 쑥 빼고 있는 태평을 향해 물었다.
“그래, 갔다 왔다. 애들 괴롭히려고 자리잡고 있던 너희들과 전혀 다른 허무맹랑한 괴담을 쫓아서, 찾아갔지.”
“투덜거렸지.”
계안이 키득거리며 거든다.
“그런 얘기는 하지 마.”
태평이 쌍심지를 돋우며 계안을 째려본다.
“알았어. 인상 풀어.”
계안이 태평의 어깨를 두드리며 일중에게 시선을 돌렸다.
“맞아, 우리가 그곳에 갔었지. 하지만 너희들은 보지 못했어.”
“알아. 그날 난 집으로 돌아갔고, 너희들도 봤겠지만, 지건이라는 아이가 내 친구들에게 희롱 당했지.”
자신의 입으로 희롱이란 단어를 쓰니, 기분이 이상했다.
“희롱? 요즘 일진은 괴롭힘을 희롱이라고 쓰나 보지.”
태평이 이기죽거린다. 일중은 잠시 태평을 지그시 바라봤다.
“뭐? 어쩔 건데!”
태평이 책상에 한 발을 올려놓으며 공격적으로 말했다.
“그래, 이런 모습이야. 적의.”
일중은 적의를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 앞에서 진솔한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이 사라졌다는 것에 외로움을 느낀 게 처음일 정도로 그런 일에 둔감했었다.
그런데 일중은 태평이 자신에게 쏟아내는 적의로 한 가지 깨달았다. 지건은 왜 가만히 있을까?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그저 참는다. 일중은 자신에게 화를 낼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느껴져 서글퍼졌다.
“적의가 왜?”
계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깨달았거든. 네가, 태평이라고 했지?”
“그래, 이름 기억했다가 저주인형에 바늘 꽂으려고 그러지. 기억하지. 세 달 전에 갔던 폐가에서 봤잖아.”
“그렇지. 그런데 중요하지 않지. 계속 해.”
계안은 씩씩 거리는 태평을 무시하고 말했다.
“하여튼 태평이가 내게 보이는 적의 말이야. 내가 괴롭힌 피해자, 걔가 내게 보여야 할 적의는 마땅한 거야. 하지만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잔잔해. 그리고 화를 내기 보단 오히려 실종된 내 친구들을 걱정하지. 이해가 돼?”
“그 아이, 인격이 훌륭하네.”
어느새 계안의 앞으로 튀어나와 책상 위에 걸터 앉은 태평이 말했다.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 아이 얼굴 상상했지?”
“내 상상과 일치 했으면 좋겠다. 그런 훌륭한 인격이라면 나하고 통하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 친구가 돼 줘야겠어.”
“허허허… 날 버리고.”
“그래, 이 틈에 갈아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