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공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고층 빌딩의 루프탑 카페에 앉은 예준은 선글라스 위로 망원경을 갖다 댔다. 조금 전 자신이 벤치 밑에 두고 온 작품을 확인한 예준은 스마트폰을 켜고 동영상을 올렸다. 벤치 주변에는 아직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예준은 벤치와 가까운 지하철 출구 쪽에서 몰려나올 사람들을 보기 위해 고개를 길게 뺐지만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앗 뜨거!”
예준은 지하철 출구가 잘 보이는 쪽으로 가기 위해 일어서다가 커피를 들고 오는 직원과 부딪혔다. 예준은 에폭시가 두껍게 칠해 진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주워들었다.
“아! 참. 똑바로 좀 보고 다녀요. 이게 뭐야?”
예준은 액정이 깨진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툭 던지며 화를 냈다.
“죄송합니다. 손님. 괜찮으세요?”
“됐어요.”
예준은 테이블 위의 티슈를 한 움큼 쥐어 손에 묻은 커피를 닦아냈다.
“정말 죄송합니다. 커피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됐습니다.”
직원이 주방으로 급히 들어간 후에 예준은 망원경을 꺼내어 벤치를 보았다. 젊은 남성이 그림을 높이 들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예준은 망원경을 작은 배낭에 집어넣은 후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테이블에 놔두고 밖으로 나갔다.
차를 몰고 한강변을 달리는 동안 예준은 자신이 벌이는 기이한 이벤트로 이제 학벌이나 수상경력 따위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미술사만 봐도 특이한 일화를 남긴 화가들이 평범한 화가들보다 훨씬 더 주목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예준은 화가들 중에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무명 화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세상에 알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존재감 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작업실로 향하는 중에 스마트폰이 울렸다. 깨진 액정 사이로 보이는 전화번호가 눈에 많이 익었지만 누군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보세요?”
“정 선생?”
“아, 예, 안녕하세요. 오랜 만이네요?”
“요즘 뭐 하나요?”
“뭐, 그냥 그림 그리고 있습니다.”
“강사가 급히 필요해서 그러는데 내일부터 며칠만 좀 나와 주면 안 될까?”
“제가 요즘 좀 바빠서요. 죄송합니다.”
“할 일 없으면 좀 나와요. 며칠만 하면 되니까.”
예준은 마지막 급여도 떼먹을 만큼 지독한 원장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편안한 음성으로 제 할 말만 하는 것이 무척 기분 나빴다.
“아니 바쁘다는데 왜 그러세요?”
“참나! 저 필요 할 때는 구구절절 도와달라고 사정하더니만 젊은 사람이 그래서 쓰겠어?”
“이것 봐요. 아줌마!”
“뭐? 아줌마?”
“예! 아줌마! 내가 틀린 소리 했어요?”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하기 싫으면 안하면 그만이지 어디서 어른한테.”
“어른? 당신 붓이나 한 번 잡아봤어? 예술이 뭔지 알아? 그 실력으로 미술학원 하고 있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 안 들어?”
“뭐라고?”
“애들 코 묻은 돈으로 잘 쳐드세요.”
“야! 야!”
예준은 창문을 내린 후 액정이 깨진 스마트폰을 강변으로 집어 던졌다.
“재수 없게.”
예준은 오피스텔 근처 카페에 앉아 새로 구입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미대 재학생인데요. 제대하고 학비가 필요해서 그러는데 그림 한 점만 구입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학생은 A4용지만한 캔버스를 예준에게 들이 밀었다. 고개를 들어 학생의 얼굴을 힐끗 한 번 쳐다본 예준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얼만데요?”
“3만원입니다. 제가 직접 그린 정물화입니다.”
예준은 지갑에서 5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학생에게 건넸다.
“잔돈은 됐어요.”
“아, 고맙습니다. 제가 나중에 이 가격 이상으로 받으실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서 꼭 보답하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세요.”
예준에게 몇 번이나 인사를 한 학생은 가방에서 그림을 하나 더 꺼내어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을 향해 걸어갔다. 학생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예준은 윗주머니에서 펜을 꺼내어 캔버스 위에 로봇의 얼굴을 그린 후 사인을 했다.
“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예준의 행동을 우연히 본 학생은 예준에게 다시 걸어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잘 보관하세요.”
예준은 자신이 덧칠한 캔버스를 학생에게 건넸다. 예준의 행동에 화가 난 학생은 예준의 멱살을 잡았다.
“야! 이게 뭐하는 짓이야? 등록금 없다니까 우습게 보여? 너 같은 새끼 낙서하라고 내가 힘들게 그림 그린 줄 알아?”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소동에 놀라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준은 자신의 낙서로 그림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학생을 향해 피식 웃었다. 학생은 예준을 밀쳐 자리에 앉히고는 조금 전에 받은 돈을 뭉쳐 예준의 얼굴을 향해 집어 던졌다.
“너 같은 쓰레기한테는 안 팔아.”
“이봐, 학생! 뒤샹 몰라? 레디메이드 안 배웠어?”
예준은 점잖게 학생을 타이르듯 말했다.
“뭐? 너가 뒤샹이냐? 너 같은 게 예술을 알아?”
학생은 예준이 낙서한 캔버스를 들고 식식거리며 카페 밖으로 나갔다. 예준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땅바닥에서 구겨진 5만원을 주워 지갑에 다시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