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재희가 건넨 계약금 봉투에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천만 원짜리 수표를 손에 든 예준은 동그라미 개수를 몇 번이나 다시 세어보았다. 수표를 자신의 계좌로 입금한 후 ATM기에서 5만 원자리 현금을 가득 뽑아 지갑을 두둑하게 채울 생각을 하고 있던 예준은 은행에 가서야 수표를 바로 현금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뒷주머니에 든 빈 지갑을 다음날 뚱뚱하게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은행원의 말이 그렇게 서운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신용카드로 결재한 홍삼진액과 음료수 상자를 양손에 들고 학원을 향하던 예준은 겨드랑이에 낀 6호짜리 작은 캔버스가 빠지지 않도록 다시 제대로 고정시켰다. 좀 무겁고 불편하긴 했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충분히 참을 만 했다.
학원에 도착한 예준은 원장실 창문을 슬쩍 넘겨다보았다. 원장이 자리에 없는 것을 확인한 예준은 위층 교실로 바로 올라갔다. 아이들에게는 음료수만 나눠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이들이 귀엽고 예쁘긴 했지만 엄청난 애정이 있어서 이별이 마음 아프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아이들도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잘 적응 할 것 같이다. 예준은 이제 교실에서 오줌을 싼 아이의 바지를 갈아입히고, 화장실에 앉아 엉덩이를 치켜들고 있는 아이의 똥을 닦아 주지 않아도 되어 너무 좋았다. 비 오는 날 구박 받아가며 학원 차를 운전할 필요도 없었다. 늘 자신이 꿈꾸던 그림을 그리며 밥을 먹고 살 수 있어서 행복했다.
캐릭터 모양의 음료수 병을 받아든 아이들은 주둥이를 쪽쪽 빨아가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원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예준은 급히 문을 열고 원장실로 내려갔다.
“저, 원장님!”
“예, 정 선생님. 무슨 일이죠? 지금 수업시간 아닌가?”
“아, 예. 거의 다 끝나서요. 저, 다름이 아니라 제가 사정이 생겨서 다음 주부터 학원을 나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싸늘했던 원장의 낯빛이 더 어두워졌다.
“예? 아니,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 최소한 한 달 전에 말을 해야지? 강사를 어떻게 구하라고?”
원장은 기분 나쁜 투로 반말을 섞어 말했다.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사정이 생겨서.”
“나 참. 가불 해 달라면 가불 해 주고, 편의 다 봐 줬는데 이런 식으로 해요?”
원장은 딱 한번 부탁을 들어준 일을 마치 일상적인 것처럼 말했다.
“죄송합니다.”
예준은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미안해했다.
“맘대로 해요. 대신 한달 못 채웠으니 이번 달 월급 못 줍니다. 젊은 사람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어디 은혜를 이딴 식으로 갚고 말이야.”
예준의 주머니 사정을 대강 알고 있던 원장은 급여를 구실로 강사를 구할 때까지 예준을 잡아두려는 속셈이었지만 예준의 생각은 달랐다. 원장실을 나온 예준은 기분이 무척 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동안 온갖 잡일을 하며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쳐왔는데 이렇게까지 함부로 해도 되나 싶었다. 강사를 구하기 힘드니 며칠만 더 봐달라고 부탁했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 줄 수도 있을텐데.
수업을 마치는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예준은 자신이 가져온 그림과 홍삼진액을 챙겨 들었다. 어차피 급여도 줄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마당에 끝까지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원장에게 그 까짓 최저임금 받지 않아도 폼 나게 살 수 있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게 후회 됐다. 교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예준은 영문도 모른 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들을 돌아봤다.
“얘들아! 선생님 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니까 4시 되면 정리하고 줄 서요?”
“예!”
예준의 마음과 달리 아이들은 여전히 음료수를 쪽쪽 빨아대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학원 건물을 빠져나온 예준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시내버스 타는 곳 근처에 다다른 예준은 원장에게 주려던 홍삼진액을 잡풀이 무성한 집터에 던져버렸다. 지도교수에게 음료수를 두 통이나 주고 나왔을 때와는 달리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