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오전 일찍 예준은 ‘갤러리 재희’를 방문했다. 재희는 캡슐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뽑아 예준 앞에 내놓았다. 우 화백의 그림을 쳐다보고 있던 예준은 재희가 준 커피 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우명환 작가님 작품이 많네요?”
“아! 우 화백님 잘 아시죠?”
“예, 워낙 유명하시잖아요.”
“저희 아빠와 친분이 있으셔서요. 그런데 제 취향은 아니에요.”
재희는 자신이 초대한 작가를 앞에 두고 우 화백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계약서를 만들어봤는데 같이 한번 보시고 수정할 내용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올 초에 나온 표준 계약서라 크게 문제가 될 부분은 없을 거예요. 이건 판매 위탁에 관한 거고, 이건 전시, 이건 전속계약서예요.”
세 가지나 되는 두툼한 계약서 뭉치를 받아든 예준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대충 읽었다. 처음 써 보는 계약서라 문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재희가 자신에게 꿈만 같은 제안을 해 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해서 하나하나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예, 그냥 괜찮습니다. 사실 내용을 잘 모르겠는데 사장님 믿고 할게요.”
“다른 건 일반적인 내용이니까 놔두고, 여기보시면 판매수수료 50%, 작가님 판매대금 세전 50%라고 되어 있는데, 보통 무명작가 같은 경우 8대2까지도 하는데 작가님은 이미 작품가격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으시니까 이렇게 정했습니다. 괜찮으세요?”
재희는 자신이 40%, 아니 30%를 받더라도 반드시 계약을 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아! 제가 처음인데 이렇게까지 해 주시니까 정말 고맙습니다.”
예준 만큼이나 재희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림 가격은 생각해 보셨어요?”
“아뇨, 제가 그런 건 잘 몰라서.”
“그럼 저희에게 일임하시겠습니까? 가격을 책정하고 관리하는 일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예, 그렇게 해 주세요.”
“그리고 여기 2차 저작물도 동일한 비율로 책정했습니다.”
“2차 저작물요?”
“예, 상품과 콜라보를 하거나 프린트해서 한정판을 판매할 경우도 생기니까요.”
“아, 예.”
“그리고 저희와는 일단 3년간 전속 계약을 하고 그 이후에는 다시 협의해서 연장하시는 걸로 했는데 괜찮으세요?”
“예, 좋습니다.”
“그리고 어제 말씀하신 것처럼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도 계약서상에 넣었는데 어떠세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우선 이렇게 활동하시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공개하시죠. 사람들이 아마 깜짝 놀랄 거예요.”
소설 같은 일이었지만 예준은 재희를 통해 충분히 감동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제가 작품을 숨겨놓고 유튜브에 올리는 걸 하고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하죠? 인기가 엄청 좋은데.”
“아! 그것도 제가 봤어요. 어떻게 그런 계획을 하셨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재희의 끝없는 칭찬에 예준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원칙적으로는 보통 갤러리를 통해서만 거래를 하셔야 되는데, 해 오시던 일이고 워낙 인기가 좋으니까 두 번 정도만 더 하시는 건 어떠세요?”
“예, 좋습니다. 이제는 저도 계약을 했으니까 굳이 유튜브에 올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 정도만 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대로 계약을 진행할까요? 중요한 부분은 거의 다 확인했는데.”
“예.”
예준은 주머니에서 도장을 꺼냈다.
“아! 사인 하셔도 되는데. 아참! 계약금 말씀을 안 드렸네.”
재희는 서류철에서 하얀 봉투를 하나 꺼내어 예준 앞에 놓았다.
“너무 감사합니다. 많지는 않은데 저희 마음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세요. 작가님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예, 예.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여기, 여기에 주소랑 성함 적으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2부 모두 해 주세요.”
예준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둔 채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자신의 사인을 마친 재희는 한 부를 ‘갤러리 재희’가 인쇄된 하얀색 서류봉투에 넣어 예준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아닙니다. 제가 너무 고맙습니다.”
“다음 주 중으로 갤러리에 작품을 몇 점 전시했으면 하는데요.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좋죠.”
“그럼 제가 연락드리고 차를 보낼 테니 우선 열 점정도 먼저 보내주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올랭피아 꼭 보내주셔야 되요?”
“하하! 예.”
“참! 여기 앞에 블루문이라는 카페에 작가님 작품이 있던데 직접 판매를 하신건가요?”
“예? 어, 잘 모르겠는데. 음, 아트페어에서 사 가신 분인가?”
“제가 그 그림 보고 깜짝 놀라서 작가님 찾아갔잖아요. 나중에 같이 한 번 가 봐요.”
“예.”
재희는 예준에게 악수를 청했다. 예준은 쑥스러워하며 희고 가냘픈 재희의 손을 잡았다.
“작가님! 잘 부탁드려요.”
“예, 예.”
갤러리를 나온 후에도 재희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계속 느껴졌다. 지하철역에 도착한 예준은 화장실을 찾았다. 주머니에 넣어 둔 계약금 봉투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