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로부터 연락이 없었는지 다음 날 오전까지 부장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재희는 손님들을 응대할 때 사용하는 테이블에 앉아 어제 블루문에서 찍은 사진과 자신이 페어에서 찍어온 사진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몇 번을 비교해 봐도 같은 작가가 분명했다. 로봇의 머리를 가진 여성이라는 독특한 주제로 그림을 그린 화가가 두 명이 있을 리는 절대 없었다.
늘 꿈꾸던 일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동안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고 있었다. 옥션에서 그림가격의 동향을 살피고, 아트페어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온갖 전시회를 다닌다고 해서 반드시 변화의 중심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 형식적이고 판에 박힌 일은 갤러리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고리타분한 미술계의 뒤통수를 후려칠 정도로 파격적인 작품과 작가들을 발굴하여 평단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바람이 가득했지만 정작 자신은 두꺼운 유리문 속에 둘러싸여 소리도 듣지 못하고, 바람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매년 나갔던 아트페어에서 처음 본 20호짜리 작품이 불과 한 두 달 만에 천만 원이 넘는 가격으로 거래되어 근처 카페에 걸려 있다니. 재희는 자신을 둘러싼 유리문을 어떻게든 깨부수고 밖으로 달려 나가 생전 한 번 뿐일지도 모를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에 대해 무슨 말이든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마트폰과 블루문 사장에게 건넬 명함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려던 재희는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발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