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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광무의 꿈
작가 : 백두혼
작품등록일 : 2019.10.22

대한제국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홍종우의 삶을 보면 된다.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로 건너가 근대화를 통한 조국 조선의 부국강병의 길을 도모한 자. 김옥균 등을 수괴로 한 친일 매국노들과 벌인 흉험한 싸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밀사는 이용익이었고 그의 곁에는 홍종우가 있었다. 근대사 전체를 통째로 뒤집는 위험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13. 치욕의 갑오년
작성일 : 19-11-05 18:39     조회 : 260     추천 : 0     분량 : 8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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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치욕의 갑오년

 

 

  1894년 1월에 발생한 동학 민란은 고부 군수 조병갑을 파직하고 신임 군수 박원명을 보내 무마를 했다. 그러나 안핵사로 파견한 이용태가 민란의 수습을 너무나 가혹하게 처리하면서 4월에 두 번째 거병이 일어나고 말았다.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독일제 크루프 대포와 마우스 소총, 미국제 레밍턴 소총과 개틀링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중앙의 경군 800명을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이들의 절반이 전투 전에 무기를 버리고 탈영해버리고 전주 감영의 지방군을 인솔한 전라 감사 김문영이 5월 11일의 황토현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경군들도 5월 28일 장성군의 황룡촌에서 동학군에게 패배하여 5월 31일 전주성은 동학군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가 김옥균의 시신을 갖고 들어오고 홍문관 교리에 임명될 때 남도의 들판은 이미 민초들의 봉기에 이은 핏빛 전쟁터가 되고 만 것이다. 전라도 감영이자 전주 이씨의 본관인 전주성의 함락은 조선 정부에 큰 충격이 되었고 이는 청국 군대를 불러 들여서 동학군을 진압하자는 어이없는 결정을 하게 했다.

 6월 8일 청국군이 아산 항으로 입항하자 갑신정변 이후 양국의 군사 개입을 제한하는 텐진 조약을 내세워 청하지도 않았던 일본군이 6월 9일 인천 제물포 항에 전격적으로 입항했다. 외세 척결이 봉기의 주된 목적이기도 했던 동학군은 청국군과 일본군의 진주에 놀라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에 나섰다. 그리고 조선의 변란이 해소되면 외국군은 바로 철군하기로 약조된 텐진 조약을 믿고 초토사 홍계훈에게 해산의 의사를 전하여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하고 말았다. 조선 정부는 전주화약을 이루고 양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의 속셈은 이 기회를 빌려 조선을 그들 손에 넣기 위해 청나라와의 일전을 불사하려는 것이었다.

 

  1894년 7월 23일. 새벽이 밝기 전에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 육군 오시마 혼성여단이 제물포를 출발하여 한양에 진입한 후 경복궁을 향해 돌격해 왔다. 조선의 수도는 맹렬한 전쟁터가 되었고 왕궁을 수비하는 조선군은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야마구치 게이조 소좌가 지휘하는 오시마 여단 2대대가 영추문을 돌파하여 고종과 왕세자등의 신병을 확보하면서 전투는 끝나고 말았다. 고종은 야마구치 게이조가 휘두르는 칼에 위협을 당하여 조선군의 투항과 무장해제를 명했다. 무려 3천정의 독일제 마우저 소총과 크루프 대포 20문, 게틀링 기관총 8정이었으니 그날 침입한 일본군의 무장에 세 배가 넘는 전력이었다.

 

 그는 총성에 잠을 깨어 상황을 보다가 총성이 잦아진 다음 관복을 입고 광화문 쪽으로 향했다. 광화문 앞에서 그는 참담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부지런한 여름 햇빛이 벌써 뜨거운데 맨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는 조선의 병사들이었다. 무려 수천 명에 이르는 군사들이 맨 손, 맨 몸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압수된 그들의 총검과 대포는 일본군 병사들의 지휘 하에 광장 한 곳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가슴 속에서 불처럼 솟아오르는 분노를 애써 다스리며 궁으로 들어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저렇게 충성스러운 조선의 병사들이 있었건만 도대체 무슨 일로 왕궁이 함락되고 주상께서 왜적의 손에 떨어진 것인가.

 

  고종이 직접 주재하는 조례에 일본 육군 소좌 야마구치 게이죠가 지휘하는 일본 군병들이 착검을 한 소총을 든 채 들어와 배열했다. 고종이 앉은 용상 왼쪽에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고 오른쪽엔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가 배석했다. 백관을 내려다보는 용안이 지극히 어두웠다. 판중추부사 김홍집이 나섰다.

 

 “밖으로는 청국 병사들이 강토를 유린하고 안으로는 동학의 역적 잔비들이 나라를 어지럽히니 종묘와 사직이 크게 어려움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일본국의 정병들이 주상 전하를 보위하여 동비들을 격멸하고 청국 군사를 몰아내고자 이제 입경 하였습니다. 도성의 방비와 궁성의 호위를 이들이 맡을 것이며 엄정한 군기와 정예한 군율로서 백성들을 보호하고 치안을 정비할 것입니다. 제관들께서는 민심의 흔들림이 없이 선무하시고 선진한 제도와 참신한 국법을 새로이 정비하여 태평안국의 초석을 쌓음에 모자람이 없도록 노력해 주시오.”

 

 영의정 심순택 등 문무대신 어느 누구도 반론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군국기무처의 설치가 발표되었다. 일본 공사관의 스기무라 서기관의 발의에 대원군이 동의하여 결정되었다. 총재는 김홍집, 부총재는 박정양으로 하여 십 여 명의 회의원으로 구성됐고 일본 공사 게이스케가 고문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개혁적인 법안을 쏟아내듯이 발의하여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국왕조차 관여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기관이었다. 개혁은 개혁이되 일본군의 총검이 뒷받침하는 그들만의 개혁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미 정부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할 일을 읽은 대신들은 궁궐의 곳곳에서 귓속말을 수근대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일본군이 왕궁을 침범한 날 내부에서 내응을 한 자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전에 약속된 대로 궁궐의 작은 문 하나를 일본군에게 열어줬고 그 문을 통해 들어 온 일본 군대가 쉽사리 고종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조선의 군병들이 궁궐의 안팎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국왕의 옥체가 이미 적의 손에 떨어졌으니 길게 이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그날 아침 억울함에 땅과 가슴을 치며 통곡하던 조선 병사들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궁궐 내의 문무 대신 어느 누구도 슬퍼하거나 원통해 하는 자가 없었다. 왕궁이 침범당하여 국왕이 적의 총칼에 사로잡혀 욕을 당했는데도 뻔뻔하게 차와 밥을 먹고 거들먹거리는 족속들이 역겨울 뿐이었다.

 

 며칠 후 허례뿐인 조례를 마친 다음이었다. 조례 때는 아무런 발언조차 못하던 이들이 끝나자마자 군데군데 모여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 꼴을 더는 볼 수 없었다. 크게 소리쳐 그들을 불러 세웠다.

 

 “여러분들께서는 이곳에 모여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선혜청 당상 어윤중이 되물었다.

 

 “지금 국사가 매우 위급하여 마땅히 그것을 상의하는 것은 대신들의 직무이거늘 무슨 잘못된 점이 있기에 그대는 그런 질문을 하는가?”

 

 그는 크게 소리쳤다.

 

 “적의 군병들이 왕성을 침범했거늘 여러 대신들은 장차 혓바닥으로 적을 공격할 것입니까? 싯구를 지어 적을 물리칠 겁니까? 여러분들께서는 특별한 일이 없던 시절에 총명하다는 것을 앞에 세워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말만 타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큰일을 당하여 백성들의 근심과 국가의 안위는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처럼 여겨 간신들이 충신들을 계속하여 없애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개나 말도 오히려 주인을 걱정하고 승냥이나 수달 같은 짐승도 자신이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는데 여러분들은 편안히 앉아 수염이나 쓰다듬고 손뼉을 쳐 사람을 부려가며 태연해 하시니 공경 사대부로서 대체 무슨 일을 도모하려 하십니까? 임금께서 욕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하거늘, 물속으로 뛰어들거나 머리를 부딪쳐 죽음으로써 나라를 팔아먹은 죄를 속죄하는 이는 없고 오히려 느긋하게 걸어 다니며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고, 얼굴을 가리고 웃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이 사람은 마음이 울적하여 죽고만 싶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는 도리어 저를 책망하시는 겁니까?”

 

 이때 마침 그날의 왕궁 경비를 맡았던 군문대장 이종건과 한규설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더러운 놈들은 소위 십년 씩이나 군문에서 대장을 지냈던 놈들이 아닌가. 저 놈들의 팔과 허리는 대장의 인과 부를 감당한 주제도 못되면서 아침에 김씨 문벌로 달려가고 저녁에 전동의 조씨 문벌로 달려갔던 놈들입니다. 창칼이 숲을 이루어 앞에서 소리 쳐 길을 열고 뒤에서 철옹성같이 호위를 받을 때만 군문의 대장이고 임금이 볼모가 되고 사직이 존망의 위험에 처해 외국의 군병이 대궐에 들어와 종묘의 제기까지 약탈하는 지금은 군문의 대장이 아닙니까? 먼저 적의 기를 꺾어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들고 적국의 간교한 계책을 꺾지 못했으면 당연히 삼군을 통솔하여 충의를 격발시켜 밖에서 대궐을 포위하고 반드시 죽을 각오로 싸웠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감히 저 게이스케가 비록 교활하다 하나 이처럼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래도 안된다면 분연히 소매를 걷고 칼을 빼들고 대궐에 들어와 적병들과 더불어 싸우다가 대궐의 계단에 쓰러져 죽음으로써 백성들에게 사죄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에 만분의 일이 아니겠소이까?”

 

 대청은 물 끼얹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고 자리를 떴다. 이미 이 조정은 국왕에 충성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곳이 아니었다.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어떤 식으로든 자리를 보존하여 부귀영화를 얻으려는 자들의 아귀 지옥일 뿐이었다.

 

 갑오년의 개혁은 이렇게 일본군의 총칼로 시작되었다. 1차 개혁의 요지는 이렇다.

 

 1. 청국의 연호를 폐하고 조선의 개국 연호를 사용한다.

 2. 정부를 궁내부와 의정부로 구분한다.

 3. 6조를 8 아문으로 개편한다.

 4. 과거제를 폐지한다,

 5. 정부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 한다.

 6. 은본위제를 실시한다.

 7. 세납을 금전으로 납부토록 한다.

 

  그 외에 신분을 타파하고 문벌을 철폐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한다는 등의 항목이 있었다. 아직 청나라와의 전쟁도 진행 중이었고 남도의 들녁을 뒤덮은 동학군도 건재했기에 개혁의 방향은 모호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왕권을 제한하려는 일본의 의도는 정확하게 반영됐다.

 

 풍도 해전으로 개시한 청일 전쟁은 성환과 평양의 육지 전투 모두 일본의 압도적인 승리로 이어졌고 10월의 황해 해전에서는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 함대에게 괴멸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이제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11월에 다시 일어난 전봉준의 동학군을 우금치 마루에서 맞은 조선 관군과 일본의 연합군이 전멸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한양은 대원군의 종손이며 고종의 장조카인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반역의 음모가 적발되어 발칵 뒤집혔다. 동학군이 봉기하면 이를 토벌하는 군대의 지휘권을 이준용에게 맡게 한 다음 중앙의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 오히려 동학군과 힘을 합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고종을 폐위시키려 한 것이다. 이를 사주하고 조종한 것으로 지목된 흥선 대원군은 다시 실각하였고 조정의 실권은 온전히 김홍집의 친일 세력에 집중되었다.

  홍종우에게도 무서운 칼날이 다가왔다. 고종을 뵙지 못한지도 오래였고 이제는 궁에 입궐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동학군과 청국군을 괴멸시킨 일본은 1894년 11월, 2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는데 그 내무대신이 박영효였고 법부대신이 서광범이었다. 불과 일 년 전 김옥균과 더불어 대역죄인으로 단죄되어 척살의 대상이 됐던 자들이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들어와 조선의 내정과 법무를 총괄하는 대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김옥균을 사살한 그로서는 이제 언제라도 닥칠 그들의 마수를 걱정해야 했다.

 

  그나마 일본의 야심을 경계하던 온건 개화파의 김홍집마저 실각시킨 박영효 일당들은 다시 2차 갑오 개혁안을 발표하였다. 청나라와 동학군과 대원군 등 모든 장애물을 제거한 일본 측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안이었고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1차 개혁에서 8아문 체제로 바꾼 정부 구성을 일본식의 내각과 7부로 개편하고 사법권을 독립시켜 각지에 재판소를 설치하며 경찰 제도를 만들고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든다는 둥의 내용이 있지만 결국 일본식의 체제를 확립하여 향후 일본이 합병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더구나 그 핵심은 조선 군사 제도의 와해에 있었다. 기존의 3도 통제군과 각 지역의 병영, 수영, 진영, 진보들을 완전히 해체하고 오직 수도인 왕궁과 한양을 수비하는 시위대와 훈련대만 조직하였다. 그나마 시위대와 훈련대의 훈련 교관과 고문관을 전부 일본 군인으로 두어 완전히 일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군사 조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강했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방위 체제를 완전히 해체한 것이었다. 수백 가지의 잡다한 개혁안이 통과되었지만 다른 것들은 의미가 없었다. 일본이 종용한 개혁은 조선을 위한 개혁이 아니었고 일본을 위한 개혁이었다. 당장의 수탈과 미래의 침략이 수월해지도록 조선의 제도를 정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갑오년을 넘겨 을미년을 맞은 지 오래 안 되어 다시 가죽 가방 하나와 갓통 하나의 짐을 싸고 부친께 절을 했다. 그리고 함흥으로 길을 떠났다.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해산된 함북 병마절도사 대신 함흥부, 갑산부 겸임 관찰사가 된 이용익이 있는 함흥이야말로 그가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조선 땅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소.”

 

 두 사람은 마주 앉아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이용익의 함흥 관아는 함경도의 굳센 포수 출신으로 구성된 총포대가 경비하고 있었다. 독일제의 최신 소총으로 무장한 그들은 일본군이 닥쳐와도 산속으로 끌어들여 교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정예병들이었다.

 

 “관찰사 대감. 이제 어찌 해야 되겠소?”

 “흐음. 소나기 오면 일단 피하는 게지 뭐가 있겠슴?”

 “참으로 꿈같은 일이오. 4월에 조선에 들어와 조정에 출사했는데 불과 몇 개월 만에 이렇게 북관의 관아에서 눈밭을 걷고 있으니 말이오.”

 “그 민씨 놈들, 씹어 먹어도 모자랄 것들.”

 

 결국 그렇다. 가렴주구해서 동학 난을 유발한 것도 민씨 일족들의 하수인이었고 그 대처를 제대로 못해서 불을 키운 것도 그들이고 청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동학군을 진압하자고 고집을 부린 것도 그들이었다. 지금 그들은 바싹 엎드려 어디로 붙어야 그들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유지할 것인지 열심히 계산중일 것이다.

 

 “민씨 일족과 대원군 일파의 싸움이 결국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든 것 아님. 이번에 이준용이 박영효, 서광범에게 잡혀가서 죽을 모양이던데. 역적 놈들끼리 잘들 노는 모양 아이겠슴?”

 “이제 방법은 하나요. 아라사 등 다른 열강의 힘을 끌어들이는 거요. 선택의 여지가 없구려.”

 “영국 놈들은 일본 편이고 미국 놈들은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이고 그나마 일본 놈들 막아서려면 아라사와 프랑스와 독일, 이 삼국 밖에 없지 않음?”

 “청나라가 이미 만주와 요동 반도까지 잃은 지경이오. 모르긴 해도 그대로 두고 보지는 않을게요.”

 “홍 형은 아라사를 어찌 보시오? 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선 이제 남은 게 아라사 밖에 없다고 보는데.”

 “이 형의 안목이 실로 옳소. 나도 우리 조선 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우선 아라사 세력과 일본 세력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보오. 이렇게 가다가는 일본 놈들 손아귀에 조선을 통째로 넘기는 날이 오래지 않을 것이오. 아라사는 실로 거대한 제국이오. 이쪽 태평양의 동해와 닿아 있으면서 서쪽으로는 유럽의 제국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소. 그들은 땅을 욕심내는 나라가 아니오. 그들이 욕심내는 것은 오직 한가지요.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 바로 부동항이오. 유럽 쪽 제국들과의 신경전은 오직 그것 하나요. 바다로 진출하려는 아라사를 막으려는 영국과 그 아라사와 동맹을 맺어 지원하는 불란서 말이오. 특히 태평양으로 뻗어가는 발판이 되는 조선 반도는 아라사 입장에서 더 없이 중요한 입지를 갖고 있소. 그러나 그들은 조선 반도를 통째로 삼키고 식민지로 삼을 의도까지는 없을 거요. 있더라도 일본 놈들처럼 구체적이고 집요할 리는 없소. 조선 땅의 열 배는 되는 알라스카라는 땅덩이도 돈 몇 푼에 미국에 넘길 정도니 땅 욕심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다만 그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조선의 항구들이오. 원산이든 부산이든 목포든 몇몇의 항구를 그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아라사의 국력은 바로 몇 배로 강해지고 태평양을 둘러 싼 국제 정세는 순식간에 뒤집어질 테니까.”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아라사를 끌어들인다, 이이제이의 묘책이기는 한데 또한 양날의 검이 아이겠슴?"

 "그렇소. 양날의 검이긴 하지. 하지만 지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질 않겠소? 지금 당장 상감께서 능멸을 당하시고 종묘와 사직이 위태로운데 다음의 일은 다음에 감당할 밖에."

 "내 한양의 몇 사람에게 기별을 해 보겠슴. 해삼위 쪽에도 분위기를 좀 알아 봅세."

 

 1895년 3월에 청나라와의 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마무리 지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요동 반도 등을 획득 하였으나 극동 아시아에서 일본 세력이 그토록 팽창하는 것을 두고 볼 서구 열강이 아니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 삼국은 일본에 공동으로 압력을 가해 요동 반도의 일본 획득을 무효화 시키고 조선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청일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회복시키려 했다.

 삼국의 간섭에 일본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 세력은 일단 조선 반도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이후 위기감을 느낀 박영효 일당은 이전에 비해 더욱 친일적인 을미 개혁을 준비하는 한편 흥선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을 군국기무처 회원인 김학주 암살 사건의 배후로 체포하여 잔혹한 고문을 가하는 등 무리한 행적을 더해 갔다. 급기야 1895년 7월, 박영효 일당은 중전 민씨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여 일본 세력과 박영효 등 친일적인 급진 개화파를 축출하려던 중전 민씨를 암살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박영효 일당의 흉계는 그들이 믿었던 동지 유길준을 통해 고종에게 밀고 되었다. 일 년간에 걸쳐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의 일본화를 추진하던 박영효 일당은 국모 암살의 흉계가 발각되면서 일본으로 재차 도주하고 말았다. 조선 땅에서 일본 세력과 러시아 세력의 균형이 맞춰지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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