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응, 슬기 다 그렸니? 보자! 어? 오늘도 도깨비 그렸네?”
6살 슬기는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꼬며 웃었다.
“야! 도깨비가 키가 많이 컸구나.”
슬기의 스케치북에는 산보다 훨씬 큰 도깨비가 산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슬기야! 도깨비가 그렇게 좋아?”
슬기는 부끄러운 듯 웃기만 했다.
“슬기는 무서운 도깨비를 어떻게 이렇게 귀엽게 그릴까? 선생님은 여기 커다란 볼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제일 궁금해. 뭔가 신기한 게 많이 들어 있을 것 같은데? 뭐가 들었지?”
2등신으로 그린 머리의 크기나 몸과 다른 방향을 하고 있는 얼굴의 표현이 어색했지만 예준은 커다란 도깨비의 두 볼이 신기한 듯 물었다. 6, 7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5개월 동안 예준은 단 한 번도 아이들에게 그림을 못 그렸다고 말하거나 꾸중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의 작품을 평가할 때마다 자신이 겪었던 일이 늘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았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몸에 진한 외곽선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본 선생님은 ‘네 몸에도 이런 선이 있니?’라며 친구들 앞에서 핀잔을 주었다. 외곽선을 그리는 것은 잘못된 표현 방식이라는 지적이었다. 예준은 연필로 외곽선을 먼저 그리고 그 안에 색을 채워 넣는 것이 쉽고 재미있었는데 선생님의 지적을 받은 이후로는 외곽선을 마음 놓고 그리지 못했다. 외곽선 없이 덧칠을 반복하는 동안 사람이나 사물의 몸뚱이가 계속 커져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형태가 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성인이 되어 굵은 단색의 외곽선으로 표현된 인간이 걷거나 뛰는 작품을 커다란 빌딩의 현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는데, 영국의 유명한 현대미술가 줄리안 오피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예준은 어릴 적 자신에게 핀잔을 주었던 선생님을 찾아 어떻게 생각하는지 되묻고 싶었다.
외곽선의 인간이 세상을 활보하는 모습을 본 이후로 예준은 어느 누구의 작품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의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궁금해 하는 것을 물어보면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었지만 자신이 먼저 나서서 옳고 그르다는 지적을 하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식의 표현은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 믿었다. 각종 공모전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을 읽을 때마다 그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느끼게 되는 계기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야! 어떻게 됐어?”
학원 일을 마치고 나오던 예준은 병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되긴. 됐지.”
“정말?”
“응, 당당하게 좃됐지.”
“아이 미친 놈. 또 안됐어?”
“그렇지 뭐.”
“어쩌냐?”
“뭘 어째. 나 같은 사람 한둘이겠냐? 술이나 한 잔 사주라.”
“그럴까? 음, 그럼. 우리 늘 가는 데로 와.”
“어디? 거기? 됐어. 야! 너 혼자 마셔.”
“야! 야! 아냐. 오늘은 촉이 좋단 말이야. 저녁에 보자. 꼭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