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80화
작성일 : 19-11-04 22:50     조회 : 270     추천 : 0     분량 : 8167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놈들은 얻어맞아 힘없이 늘어진 봄이의 묶인 양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갔다. 어둠에 가라앉은 밤공기는 쌀쌀했고, 봄이의 의식은 자꾸만 멀어져만 갔다. 봄이는 놈들이 자신을 그 높디높은 지하실 계단에서부터 어떻게 끌고 올라왔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봄이는 어떻게든 의식을 부여잡으려고 노력했다.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끌려가는 모습은 영락없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다름없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가까스로 들어 올려다보니 아까 전에 보았던 불이 꺼진 창고가 보였다.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놈들은 두 팔이 묶인 봄이를 거칠게 안으로 내팽개쳤다.

 

  “금방 다시 올게. 꼬맹아.”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창고 문을 걸어잠근 채 돌아가버렸다.

 

  놈들이 돌아가자 세상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습기처럼 들어찬 어둠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깊은 밤에 벌레가 우는 찌르르 소리만 귀에 맴돌았다.

 

  두 팔과 다리를 움직여보려고 했다. 봄이는 두 팔이 잘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놈들에게 두들겨 맞아서인지, 밧줄에 팔이 묶여서인지, 힘이 없어서인지 잘 알지 못했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개처럼 짓밟혀 엉망진창이 된 몸은 자꾸만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목에서는 끅끅 하는 신음소리만 흘러나왔고, 그마저도 이를 악물어 잘 나오지 않았다.

 

  탄환이 떨어진 권총과 칼, 그리고 전기충격기는 모두 놈들에게 빼앗겨버렸다. 봄이는 이제 자신의 몸을 지킬 최소한의 무기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봄이에게 남아있는 것은 맞아서 병든 몸과 상처뿐인 마음,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뿐이었다. 지금 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봄이는 제대로 몸을 지탱해 일어서지도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봄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여정과 목적에만 의지할 수 있게끔 도와준 작은 소망이 이렇게까지 의미없고 헛된 길이었는지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놈들에게 의지가 무참히 짓밟히기 전에는 실현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지금껏 자신이 바라왔던 꿈과 희망이 한순간에 구겨진 종잇조각이 되어버리는 것을 봄이는 자신의 생기 잃은 눈동자로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봄이에게는 이제 더 이상 삶의 이유가 없었다. 이 이상 벌레처럼 연명하는 것이 과연 자신에게 있어 현명한 선택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봄이는 여지껏 자살이라는 개념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생각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어리석고 부질없는 고민도 한순간이었다. 결국 봄이는 이 가망 없는 세계에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이 세계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사람이 끝내 목숨을 잃는 것은 지금은 흔한 일이었다. 어제도 몇 자릿수가 넘는 사람들이 기아와 굶주림, 투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것이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봄이 역시도 이 절망뿐인 세상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창조주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고, 그 대가로 죗값을 치른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투쟁하지만 정작 생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이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나 자기 자신은 죽음을 피해갈 것이라고 굳게 믿은 채 살아갔고, 봄이도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설픈 착각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간과하고 시덥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 봄이에게 있어 치명적인 실수였다. 봄이는 어느새 죽음의 문턱까지 와 있었지만, 앞으로 자신이 어떠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지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놈들이 아까 뭐라고 했었더라? ‘널 식인종에게 팔아넘길 거야.’ 그런데 그 다음엔? 놈들이 자신을 식인종이란 자들에게 팔아넘기기 전에 과연 가만히 내버려 둘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 다음엔? 분명히 그 식인종이란 자들이 봄이를 비참하게 죽인 다음 잡아먹을 것이다. 아니, 산 채로 잡아먹을 수도 있었다.

 

  결국 봄이에게는 내일이 없었다. 봄이의 가족들은 이제 없었고, 더 이상 그녀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 사람도 없었다. 봄이는 하루라도 더 빨리 이 잔혹한 악몽에서 깨어나기만을 원했다. 그리고 악몽에서 깨어나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할지, 봄이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봄이의 결심에 응하기라도 한 것처럼 봄이의 양팔을 단단히 옥죄고 있던 밧줄이 풀렸다. 처음부터 헐겁게 묶여있었던 것인지, 의도적으로 그 순간에 풀리도록 한 운명의 도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봄이는 엎드린 채로 필사적으로 어둠 속을 더듬었다. 손을 휘저을 때마다 끈적끈적한 것이 손등에 닿았다. 비쩍 마른 바퀴벌레 시체가 만져지기도 했다. 그렇게 더듬어 나가다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배낭이 놓여있는 것을 눈치챘다. 놈들이 안에 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봄이와 함께 던져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봄이는 가까스로 배낭을 열어 안을 뒤졌다. 그러자 얼마 전, 하수도 내부에서 몰려 살던 아이들과 만났을 때 준혁에게 받았던 약 봉투 하나가 손에 잡혔다. 분명히 그들은 이 약 봉투를 신경안정제라고 했었다.

 

  봄이는 준혁의 말을 떠올렸다. ‘힘들 때,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될 때 한 알 삼켜봐. 그래도 부족한 것 같으면 두 알까진 괜찮아. 그 이상은 안 돼. 절대로.’

 

  봄이는 준혁이 했던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죽으면 편해질 거야.

 

  봄이는 주저없이 쥐고 있던 알약들을 모두 입 속으로 털어넣었다. 물이 없어 삼키기가 힘들었지만 눈물로 대신 억지로 삼키면 되는 일이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기 때문에 삼키기 어렵지는 않았다. 삼키는 순간에는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곧 잦아들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곧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편안함만 남을 것이라고, 이제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날 시간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러한 염원은 오래가지 못했고 봄이는 삼켰던 모든 것들을 토해버렸다. 가슴 속에서는 자신에게 영원한 휴식과 더 이상 고통도 절망도 없는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지만, 봄이의 몸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왜일까? 이 알약들만 삼키면 이제 봄이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싸울 필요도 없어질 텐데. 밑바닥에서 목숨이 위태로워질 걱정도 없고, 구질구질하고 비굴하게 연명할 필요도 없이 편안하게 고통도 절망도 없는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봄이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죽음만이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때가 되니 죽음이 두려워진 자신의 나약함이 미칠 듯이 한심해서 봄이는 바닥에 머리를 몇 번이나 처박았다. 이제 봄이는 악몽에서부터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마저 저버렸고, 이제 남은 것은 정말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닌, 타인의 손으로 맞이하게 될 죽음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봄이는 좌절감과 슬픔에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내일이 거래 날짜라고 했었다. 내일까지는 얼마나 남았을까? 동이 트기까지는 앞으로 몇 시간도 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정신없이 울부짖던 봄이는 이제 기진맥진해서 힘없이 푹 엎어져버렸다. 이곳에 봄이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고, 무엇보다 더 이상 봄이에게는 몸부림칠 힘조차 없었다. 물 한 잔만 마실 수 있었으면.........

 

  봄이가 탈진해서 쓰러져있던 그 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창고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그 어둠 속 그림자는 한 개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그림자들은 저마다 봄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듯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이윽고 어둠 속 그림자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언니. 괜찮아요?”

 

  생기는 없었지만 맑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봄이는 그림자들의 존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몸 속의 것들을 약과 함께 모두 게워내버린 봄이는 갈증을 견디기 어려웠다.

 

  “물.......... 물 한 모금만..........”

 

  그러자 어둠 속 그림자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이 물인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봄이는 그것을 빼앗아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수분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봄이는 그제서야 어둠 속 그림자들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다.

 

  어둠 속 그림자들은 다섯 명은 되어 보였고, 그들은 저마다 슬그머니 다가와 봄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봄이는 너무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을 제대로 쳐다보기 위해 눈을 찡그렸지만 소용없었다. 봄이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그림자들에게 외쳤다.

 

  “너, 너희들은 누구야?”

 

  방금 전에 마실 것을 얻어마시고 나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어둠 속 그림자들은 잠시 동안 자기들끼리 수근대더니 말했다.

 

  “여기에 갇힌 지 얼마 안 됐나 보군요.”

 

  갑자기 그림자들이 웅성거렸다. 봄이는 왠지 모를 위협을 느끼고 땅바닥을 더듬었다. 조그마한 녹슨 못이 손에 잡혔다.

 

  “저리 떨어져, 가까이 오지 마.”

 

  봄이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못을 쥐고 어둠 속에다 휘둘렀다. 하지만 봄이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이해해요.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림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어둠이 걷히고 사방이 환해졌다. 자세히 보니 그림자는 작은 알코올 램프를 들고 있었다. 불 붙은 램프 덕분에 그림자들의 모습이 이제 뚜렷하게 보이게 되었다.

 

  램프를 들고 있던 그림자는 이제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소녀는 생기 없는 눈으로 봄이를 내려다보았다. 얼굴까지 덮히는 낡은 천쪼가리를 뒤집어쓴 소녀는 얼음처럼 굳어버린 봄이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한 마디 던졌다.

 

  “언니, 언니는 어디에서 왔어요? 어쩌다가 여기 오게 된 거예요?”

 

  램프의 불빛 때문에 소녀의 얼굴에 핀 주근깨가 드러났다. 소녀는 봄이가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한숨을 쉬었다.

 

  “꽤 심하게 두들겨 맞았나 보네요. 저 아저씨들, 그래도 얼굴은 잘 안 건드리려고 하던데. 상품의 질이 떨어진다나 뭐라나.”

 

  그러자 소녀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저항하려고 하면 얄짤없어. 얼굴이든 어디든 가차없이 때린다고. 나도 그랬거든.”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봄이는 슬슬 자신과 이들이 처한 상황이 같다는 것을 눈치챘다.

  소년이 팔을 걷어올리며 계속 말했다.

 

  “여기랑, 여기랑, 여기. 몇 주 전에 얻어맞아서 생긴 상처인데 아직도 욱신거려. 내가 계속 발버둥치니까 주먹으로 뺨을 때렸는데 이빨이 부러지는 줄 알았어. 그렇게 한 5분 동안은 개 처맞듯이 맞았지. 내가 그 자식들한테 밟히면서 배우게 된 게 하나 있어. 어설프게 덤비려다 더 맞지 말고 그냥 가만히 쥐죽은 듯이 웅크려서 맞고만 있으면 된다는 거야. 그러다 보면 그 자식들은 지쳐서 금방 그만두지.”

 

  누구도 소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소년은 계속 떠들어댔다.

 

  “그 자식들에게 붙잡혔을 때만 해도 여동생이랑 함께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동생은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어. 나만 남게 되었지. 그 짐승 같은 자식들한테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줘. 하기야 사람 목숨을 팔아서 장사하는 놈들인데 자기들끼리 노리개로 삼아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뒷골목에 묻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 이외에 다른 그림자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들은 잠자코 구석에 틀어박혀만 있었다. 주근깨 소녀가 알코올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고 앉으며 말했다.

 

  “이제 갇혀서 사는 이 지긋지긋한 생활도 오늘이면 끝이야. 혹시 알아? 내일이 되면 여기보다 더 편한 곳으로 갈지.”

 

  “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봄이가 생각을 추스르고 물었다. 그들은 봄이가 드디어 입을 열게 된 걸 반가워하는 반응이었다.

 

  “무슨 말이냐니, 녀석들에게 이야기 못 들었어? 우리들은 상품이고, 오늘 밤이 지나면 곧 팔려갈 거야. 어디로 팔려갈지는 아무도 몰라. 아까 전에 그 자식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 여기 온 이상 그쪽도 마찬가지일 테지. 그쪽이나 우리들이나 정말로 운이 없구만.”

 

  소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태연해서, 봄이는 그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완전히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봄이는 조금이라도 그들을 부추기기 위해 외쳤다.

 

  “아까 전에 들었어. 저 놈들이 우릴 식인종에게 넘길 거라고 했어. 이대로 있다간 전부 죽을 거야.”

 

  식인종에게 팔려갈 것이라는 말에 램프 앞에 쭈그려 앉아있던 주근깨 소녀가 고개를 들었고, 소년이 어깨를 으쓱했다. 구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던 그림자들도 관심을 보였다.

 

  “식인종이라, 그 쪽에 팔려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는걸. 적어도 잡아먹기 전까지는 우릴 이렇게까지 막 대하지는 않을 테니.”

 

  소년의 여유로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봄이가 쏘아붙였다.

 

  “여기에 가만히 있으면 전부 다 죽게 돼. 아무것도 안 해보고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죽을 셈이야?”

 

  지금껏 가만히 쭈그려 앉아있던 주근깨 소녀가 대답했다.

 

  “소용없어요.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요. 우리가 여기 갇혀서 지낸 지 한 달은 지났어요. 처음 며칠 동안은 우리는 여기서 탈출하기 위해 그야말로 고군분투했죠. 문을 부수려고도 해봤고, 보이지 않는 환풍구라도 있을까 싶어서 땅을 파헤쳐보기도 했죠. 전부 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몸부림이었어요. 이 좁은 창고에는 탈출구도 없고, 밖에서 잠긴 문을 제외하면 나갈 곳도 없어요. 여기서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그럼 어쩌자는 거야, 여기서 꼼짝없이 기다리고만 있다가 개죽음당하자는 거야?”

 

  봄이는 분개해서 소리쳤다. 주근깨 소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물론 억울하게 끌려왔겠지. 억울하게 붙잡혀 끌려와서 죽게 된 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지금 이 상황이 납득도 안 되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는 건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우리는 힘없는 어린애들일 뿐이야. 이제 이 세계는 강한 자가 곧 힘이고 절대자야.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젠장!”

 

  봄이는 주먹으로 창고 벽면을 거칠게 쥐어박았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그들의 말이 맞았다. 이 햇빛도 들지 않는 좁고 더러운 냄새가 나는 창고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앉아 죽기에는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그대로 의연하게 운명을 받아들이고 아무 시도도 해보지 않은 채 죽다니, 이 얼마나 멍청한 행동인가?

 

  봄이는 좀 더 따지려다 그만두고 얌전히 주저앉았다. 이들에게 화를 내고 소리쳐 봐야 모두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이들도 결국 봄이와 똑같았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세상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어린아이들일 뿐이었다.

 

  소란이 조금 진정되자 소년도 자리에 다시 앉았다.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예상외로 말을 제일 먼저 꺼낸 것은 봄이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쩌다가 여기 오게 됐어?”

 

  “우린 하수도에서 왔어요. 그 하수도엔 우리 같은 아이들이 정말 많이 살고 있어요. 거기서는 하루에 한 번씩 인원을 나눠서 식량이나 물을 구하러 지상으로 올라가는데, 하필이면 우리 차례일 때 지상에서 그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았어요. 두세 명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모조리 붙잡히고 말았죠. 그 때 붙잡히지 않은 오빠들은 하수도로 잘 돌아갔는지 모르겠네요.”

 

  옆에 앉아있던 소년도 주근깨 소녀의 말에 거들었다.

 

  “그래, 거기 대장이랑 나랑은 꽤 친한 사이였지. 그것보다 내가 알기론 거기 마실 물이 되게 부족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벌써 몇 주는 지난 이야기로군.”

 

  사실 딱히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무작정 내뱉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봄이는 이들의 말에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 지금 봄이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역겨운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뿐이었다.

 

  이미 밤은 깊었다. 놈들은 분명히 내일이 거래 날짜라고 했다. 동이 트기까지 몇 시간이 남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로 이 녹슨 창고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쇳소리를 내며 창고 대문이 열렸다. 밤이 깊었기 때문에 잘 알아보기는 힘들었으나 누군가가 문을 열어준 것이 틀림없었다. 벌써 거래할 시간이 되었나? 아직 동은 트지 않았는데........

 

  세 명은 되는 사내들이 봄이의 눈에 손전등을 비췄다. 사내들은 자기네들끼리 중얼거렸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걱정 마. 다른 녀석들은 지금 모두 곯아떨어져 있어. 나랑 정훈이가 확인했어. 저 년을 가지고 놀려면 지금뿐이야.”

 

  사내들이 다가와 봄이를 둘러쌌다.

 

  “오두막집으로 끌고가.”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05 104화(그 후의 이야기) 2019 / 11 / 10 245 0 10184   
104 103화(마지막화) 2019 / 11 / 8 252 0 7150   
103 102화 2019 / 11 / 8 237 0 9365   
102 101화 2019 / 11 / 8 258 0 12720   
101 100화 2019 / 11 / 8 271 0 6491   
100 99화 2019 / 11 / 8 277 0 12040   
99 98화 2019 / 11 / 8 251 0 10197   
98 14.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2019 / 11 / 8 249 0 8345   
97 96화 2019 / 11 / 8 244 0 5686   
96 95화 2019 / 11 / 8 281 0 9160   
95 94화 2019 / 11 / 8 236 0 10760   
94 93화 2019 / 11 / 8 266 0 6631   
93 92화 2019 / 11 / 8 227 0 10034   
92 91화 2019 / 11 / 8 248 0 13252   
91 90화 2019 / 11 / 8 239 0 5434   
90 13.최후의 결전 2019 / 11 / 8 239 0 14296   
89 89화 2019 / 11 / 8 243 0 6525   
88 88화 2019 / 11 / 7 250 0 13724   
87 87화 2019 / 11 / 7 257 0 6876   
86 86화 2019 / 11 / 7 243 0 6670   
85 85화 2019 / 11 / 7 241 0 9450   
84 84화 2019 / 11 / 4 242 0 7691   
83 12.까마귀 2019 / 11 / 4 216 0 8834   
82 82화 2019 / 11 / 4 251 0 5374   
81 81화 2019 / 11 / 4 252 0 8794   
80 80화 2019 / 11 / 4 271 0 8167   
79 79화 2019 / 11 / 4 226 0 5245   
78 78화 2019 / 11 / 4 252 0 7057   
77 77화 2019 / 11 / 4 239 0 5426   
76 76화 2019 / 11 / 4 239 0 10576   
 1  2  3  4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