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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광무의 꿈
작가 : 백두혼
작품등록일 : 2019.10.22

대한제국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홍종우의 삶을 보면 된다.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로 건너가 근대화를 통한 조국 조선의 부국강병의 길을 도모한 자. 김옥균 등을 수괴로 한 친일 매국노들과 벌인 흉험한 싸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밀사는 이용익이었고 그의 곁에는 홍종우가 있었다. 근대사 전체를 통째로 뒤집는 위험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12. 어사화
작성일 : 19-11-04 19:36     조회 : 260     추천 : 0     분량 : 9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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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어사화

 

  제물포에 도착한 일행은 조선 정부의 증기선인 한양호로 갈아타고 그날 오후 양화진에 도착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진달래 만발한 조국의 산하를 육 년 만에 밟는 그의 양 손엔 일본에서 구입해 프랑스까지 들고 갔던 가죽 가방 하나와 조선을 떠날 때부터 그의 갓을 담았던 갓통이 들려 있었다.

  양화진 나루터 주변엔 이미 소문을 듣고 구경 나온 백성들이 깃발처럼 늘어섰고 조정의 관리들과 형조의 형리, 옥졸들이 나루터를 정리하여 그들을 맞이하고 김옥균의 관을 내렸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의 무리가 반갑기보다는 무섭게 느껴졌다.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관복을 차려 입은 기기국 협판 조희연이었다.

 

 “참으로 장하시오. 어서 가마에 오르시오. 상감께서 일각을 아껴 기다리고 계시오.”

 

  그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앞뒤로 가마꾼이 메는 남여라는 가마에 올랐다. 광화문 앞에 당도하여 가마에서 내린 그는 여러 대신들의 영접을 받고 근정전으로 들어가 난생 처음으로 고종 전하를 뵈었다. 여러 대신들이 배열한 가운데 무릎을 꿇고 엎드려 배례를 마친 그의 손을 손수 잡아 일으킨 것은 바로 고종 그 자신이었다. 그를 일으킨 군주의 어안을 뵙고서야 그는 그의 미래가 안개를 걷고 선연하게 열린 것을 보았다. 그 길이 어두웠으나 그는 결심했다. 이 분이 곧 조선이다. 이 분을 통해 조선의 독립과 부국강병의 길을 열리라.

 

 “경은 들으라. 경의 장한 일로 말미암아 과인이 지닌 심복의 통한이 해소되고 종묘와 사직이 평안케 됐으니 이 어찌 만조의 홍복이 아니랴.”

 “신, 홍종우. 재주가 미천하나 주상 전하의 근심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어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내 그대를 당장 서임하여 옆에 두고 쓰고 싶으나 나라에 국법이 있는 법, 곧 특별한 전시를 열어 출사의 방도를 마련하겠노라. 경은 그리 알고 심신을 가다듬고 과인의 부름을 기다려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그는 크게 절하여 인사를 아뢰고 여러 대신들과 궁을 나왔다. 그의 거처는 임시로 조희연의 사저에 마련됐고 그의 식구들을 한양으로 옮기라는 파발이 그날로 강진 현감에게 달려 내려갔다.

 

  그를 위한 환영연이 민씨 가문의 젊은 세도가 민영준의 사저에서 열린다고 알려왔다. 그는 조희연과 더불어 남여를 타고 북촌으로 넘어 갔다. 육 년 만에 돌아온 조선은 변한 것이 없었다. 파리에서 도쿄, 상하이를 거쳐 돌아온 그에게 한양의 모습은 초라하기가 끔찍했다. 익숙한 조선의 냄새. 골목마다 구린내 지린내가 진동했고 젖국 달이는 냄새와 된장 지지는 냄새가 사방이었다. 도처의 거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멀쩡한 행인들의 행색조차 거지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몰골들이다. 미개하고 불결하고 가여웠다. 하지만 조선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고 백성들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고 천진했다. 그가 조선을 떠나기 전에는 느낀 바 없는 점이다.

 하늘은 응당 푸르고 사람들의 표정은 응당 그랬다. 하지만 조선의 하늘은 정말 비할 데 없이 곱고 맑았고 조선 백성들의 표정은 천진난만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그는 이제야 알았다. 서양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면을 쓴 것 같은 일본인들과 과장스러운 중국인들과도 정말 달랐다. 감정을 숨길 줄 모르고 속생각을 감추지 않는 솔직한 성정이 그대로 보였다. 길거리 앉은 채 늘어진 젖가슴을 그대로 드러내고 젖먹이에게 젖을 먹이는 아낙의 표정이 참으로 평화로웠다.

 그는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그도 저렇게 젖을 먹고 컸다. 이것이 조선인 것이다. 순하고 천진한 사람들. 병자년의 난리가 이미 이백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 이후 조선은 침략을 받은 적도 없고 침략을 한 일도 물론 없었다. 수백 년간 일체의 전쟁 없이 살아 온 나라는 그가 아는 세계의 역사로는 없었다. 전쟁을 아예 모르고 살아온 평화로운 민족이 이제야 위태로움을 당했다. 전쟁은 설명해서 알아들을 일이 아니다. 공화국이니 입헌 군주제니 역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들은 절대적인 군주 밑에서 평화롭게 수백 년을 살아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편하게 밥을 먹고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이다. 군주께 절하여 충성을 아뢰고 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여 모시는 것이 수백 년 이상을 넘어 이어온 이 나라의 절대 원리였다. 아련한 가슴은 가마 위에서 흔들리기만 했다.

 

 

  골목 어귀부터 방만하게 풍물의 가락이 흘러나오고 기름에 전을 지지는 냄새가 흥건했다. 그는 반기는 인사들이 대문 안 마당에 내려서서 그를 맞았다. 주인인 민영준을 위시하여 민영익, 민영환 등 그와 연배가 비슷한 영자 항렬의 인물들이었다. 자리에 들어 그들은 맞절로서 인사를 나누고 이어 온갖 음식을 넘치게 차린 상이 들어왔다.

 

 “홍공은 일찍이 일본과 불란서의 문물을 적지 않게 접해서 조선의 이런 음식과 술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소. 혹여 미비하여 원하는 바가 있으시면 즉시 말씀해 주시오. 이 민 아무개가 뭐라도 준비해 보이겠소.”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바다 바깥의 일을 조금 겪었다 하여 소생이 어찌 이런 좋은 음식과 아름다운 술을 모르겠습니까? 여러 공들께서 불초한 사람을 이렇게 반겨 주시니 오직 즐겁게 마시고 소중한 인연을 더하길 빌 뿐입니다.”

 “홍공이 우리 집안의 원수요 흉적인 옥균을 처단하여 집안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저 아래 노복들에게까지도 그 은혜가 하해와 같으니 크게 예절을 갖추지 마시고 즐겁게 드시길 바라겠소.”

 “이 자리를 빌려 분명히 드릴 말이 있습니다. 소생이 흉적 김옥균을 처단한 것은 분명하나 이는 절대 귀공들의 사사로운 원한을 대신한 것이 아닙니다. 저 갑신년의 역적은 이미 오래 전 추포하여 대죄를 다스려야 했으나 왜국의 소굴로 도망하여 그를 이룰 수 없었을 뿐입니다. 이번에 저에게 다행히 그 기회가 와서 어명을 받잡아 이를 이행한 것뿐입니다. 더구나 그는 일본의 흉심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동아 삼국의 화맹을 깰 의도를 숨기지 않는지라 위로 주상 전하와 아래로 만백성들의 평안을 도모한 것 입니다. 부디 이를 숙고하셔서 소생에게 많은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참으로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말씀이시오. 이제 겸양의 인사는 그만두고 호탕하게 마셔 봅시다.”

 

 그는 그날 크게 취하도록 술을 마셨고 그 집의 어느 방에서 정신이 들었다. 새벽녘인지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쪽머리를 풀어 내린 기생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따뜻하고 매끄러운 여인의 살결을 쓰다듬었다. 잠에서 깬 여인이 그를 향해 살짝 웃었다.

 

 “어찌 그리 얌전 하시답니까? 칠 척의 대장부신대 어제는 참 샌님이신 줄 알았답니다.”

 “맹랑한 아이로구나.”

 

 그는 동백기름 냄새 물씬한 여인의 머리에 코를 묻었다.

 

  김옥균의 처형은 즉시 시행됐다. 영의정 심순택, 좌의정 조병세, 행판중추부사 김홍집, 행판중추부사 정범조 등이 연명한 차자를 올렸고 고종의 승인이 바로 떨어졌다. 이괄과 신지운에게 시행된 대역죄로 치죄된 김옥균의 시신은 머리와 손발을 다 잘라내는 육시의 형에 처해졌고 그 머리는 ‘대역무도옥균’이라는 글을 쓴 무명천을 달고 조선 전국 각지에 돌려져 효시되었다.

  홍종우는 그를 위해 특별히 열린 전시과에 급제하여 관모에 어사화를 꽂았고 즉시 홍문관 교리에 서임되었다. 홍문관 교리는 국왕을 지근에서 보필하면서 자문을 맡는 중책이었다. 초임의 그를 최측근에 둔 국왕의 파격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옥균을 죽인 공을 본 것만이 아니라 일본, 프랑스를 두루 돌고 온 그의 역량을 평가한 인사였다.

  이 모든 일이 완료된 1894년 5월 31일. 고종은 이 같은 경사를 종묘에 알리고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세자와 종친, 문무백관의 진하례를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사형을 제외한 모든 형의 사면을 명하는 대사면령을 전국적으로 내려 국가적 경사를 축하했다.

  서촌의 기와집 한 채가 내려졌고 고금도에서 그의 부친과 딸아이가 올라왔다. 어언 육 년 만에 부친은 크게 노쇠하셨고 딸아이는 많이 커버렸다. 바짝 여윈 부친께 큰 절하여 문안을 올릴 때 부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이제 없는 어미를 꼭 닮은 딸아이의 절을 받으면서도 그는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여덟 살 어린 아이가 이젠 열네 살이 되어 댕기를 매었다. 아침마다 그는 부친의 조반상을 직접 들고 올라가 아침 문안을 올렸다. 그리고 딸아이와는 늘 겸상을 했다. 생선살을 찢어 딸아이의 수저에 올려주는 것이 꿈만 같았다. 천 번을 쓰다듬어도 아까운 생각이 드는 딸아이의 댕기머리. 그러나 차마 죽은 어미에 대해서는 서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조반을 마치고 관복을 입고 궁으로 입궐하여 주상의 곁을 지켰다. 그가 프랑스에서 보고 느끼고 익힌 여러 가지 문물과 형세를 때로는 문서로, 때로는 직접 아뢰었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행보를 아뢰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문서로 정리하였다. 그에 대한 고종의 신뢰는 깊었고 그가 할 일은 너무 많았다.

 

 

  출사한 지 며칠이 안 되는 날 그는 경복궁 내의 회랑 한 곳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거칠었다.

 

 “이 보우, 홍형. 아예 노다지를 크게 봤구만. 하하하....”

 

 그는 이용익이었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와 서북 광무감리를 맡고 있는지라 귀국 후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행적이 표휼한 사람이라 한양에 들어오더라도 입궐과 퇴궐도 표휼했던 모양이었다.

 

 “이용익 대감.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홍문관 교리 홍종우 인사드립니다.”

 

 종 2품의 당상관인 병마절도사에게 정 5품의 홍문관 교리는 겸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와하하..사람도 없는데 뭔 인사를 그리 함? 같이 물 팔아먹고 살던 의리가 어디 가겠슴? 하튼 반갑슴. 내 홍형 이야기를 많이 들었슴메. 한양 길이 쉽지가 않아서리 이제야 보누만.”

 

 이용익의 말과 달리 그를 수행해 온 관료와 홍종우와 동행하던 홍문관의 동료는 눈치를 살피고는 바로 그들을 떠났다.

 

 “이형은 어찌 그대로요? 대감 체통이 참으로 말이 아니구료.”

 “이노무 답답한 사모관대 던져 버리고 술이나 먹으러 가우다. 퇴청이 언제요?”

 

 그들은 일찌감치 퇴궐하여 우정국 근처의 술집에 마주 앉았다. 이용익의 단골집인 듯 청지기부터 주방 잡일하는 아낙들까지 보는 자마다 모르는 자 없이 크게 인사를 올려왔다.

 

 “대감. 이제 우리가 이런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구려.”

 

 그들은 앉은 술집은 오십 칸 이상의 기와집이었고 마루 대청은 거울처럼 반짝이고 가구, 기물도 흔히 보기 어려운 고급품들이었다.

 

 “내 한양 내려오면 집처럼 지내는 곳이우. 술맛 좋고 밥맛 좋고 잠자기 딱 좋고. 돈이 좀 들긴 하는데 그닥 크게 드는 건 또 아니우. 홍형도 여기 주인네 보면 자주 드나들거우다.”

 

 과연 주인이라고 인사를 나온 여인은 그가 처음 본 미녀였다. 서른 남짓 아닐까 싶은데 도통 측량이 안될 만큼 눈빛이 깊은 여인이었다.

 

 “대감. 오늘 또 이렇게 갑자기 닥치셨습니까? 기별을 좀 미리 하면 제가 잡아먹는 답니까?”

 “하하.. 내 오늘 올 일 없었는데 이래 귀한 친구를 만나서리 확 왔음메. 여기 이분은 홍문관 교리를 하시는 홍자 성에 종우라 하시는 분이라네.”

 “나으리께서 그렇게 유명하신 홍자 종자 우자 쓰시는 나으리시군요. 소녀 희월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한양 천지에 지금 젤 유명한 사람이 님자 아니오? 여기 희월이도 알아보는 거 보니. 하하하..”

 “부끄러울 뿐이오.”

 

 잠시 후 화려한 주안상이 들어오고 꽃처럼 고운 기생 서넛이 금과 장고를 들고 들어왔다.

 

 “이 보우. 오늘은 우리 할 말이 워낙 많아서리 풍악은 좀 치우라. 님자도 술 한 잔씩만 치고는 나가보우다.”

 

 희월이란 여인도 나간 후 그들은 묵묵히 술잔을 나누었다.

 

 “그때 남산 밑에서 어울리던 것이 십년도 넘은 세월이 되었구려.”

 “그러게 말이우. 홍형이 이렇게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소. 김옥균이를 쏘아 죽인 공신으로 나타나다니, 참 상상도 못할 일이우다.”

 “이형도 이렇게 당상관으로 올라 북관의 광산을 총괄하시고 계시니 참으로 대단하시오.”

 “나야 뭐 땅 파는 재주밖에 없으니 그렇다 치고 홍형은 대체 무슨 생각이시우?”

 “무슨 생각이라니요?”

 “김옥균이를 죽이고 불란서까지 다녀 와 이제 주상의 측근에 앉았으니 뭔가 생각이 있을 것 아니우? 조정이란 것은 참으로 흉악하고 고약하여 지금은 홍형을 용납할지 모르나 곧 온갖 술수를 부려 이형을 내치려고 할 것이오. 나도 지금 열심히 캐내는 노다지 덕분에 주상의 총애를 받고는 있지만 늘 칼날 위를 걷는 형국이오. 내 홍형을 걱정해서 물어보는 거우다.”

 “무슨 생각이 있겠소. 지금 세계의 정세는 참으로 위험하오. 우리 조선은 참으로 위태롭고. 주상 전하를 보필하여 하루속히 부국강병의 위세를 이루어 외세가 감히 넘보지 못할 나라를 만드는 데 작은 힘이나마 다할 뿐이오.”

 “지금 조정에서는 홍형이 보신출세를 위해 김옥균을 죽였다고 수근들 대고 있슴메. 대체 왜 그런 것임메? 나한테는 솔직히 얘기해줘도 되지 않겠슴메?”

 “그렇게들 생각하겠지. 나도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내킬 리 있었겠소? 하지만 그 자는 죽어야 마땅했소. 아니,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였소. 왜놈들 중 특히 고약하고 위험한 자들의 돈줄로 연명한 지 이미 십년이오. 주색에 빠져 사람 구실 못한지도 오래되 보였소. 왜놈들이 던져주는 돈푼으로 말이오. 그러니 놈들의 주구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오. 이번에 상하이로 떠났던 것도 그로서는 마지막 안간힘을 써서 그 자들의 마수에서 도망친 것이오. 하지만 청국에서 이홍장을 만난들 뭐가 되겠소? 또다시 청국의 입맛에 맞춰 춤추는 꼭두각시 노릇 외에 무슨 쓸모가 있겠소? 또 그렇게 되면 일본이 가만히 두고 보겠소? 그 자는 이미 일본, 청국, 조선 삼국의 화의를 깨는 불쏘시개 밖에 안 되는 존재였소.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 조선의 국법이 지엄한 것을 만방에 알리는 것이 그 자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 여겼소.”

 “그렇게 형편 없습디까? 그래도 조선의 이름난 개화파 지도자였고 수재로 이름 높은 작자였는데.”

 “예전에 민영익의 사저에서 이형이 한 말이 있소. 저 물정 모르는 도련님들이 무슨 야무진 일을 하겠냐고. 바로 그 말이 옳은 말이었소. 그들은 사람으로서 단련이 되질 못했소. 글줄이나 읽고 서양 문물이나 좀 들여다 봤다고 본질이 바뀌겠소?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등등의 도련님들이 예전에 어떻게들 살았소? 조선에서 온갖 부귀를 누리다가 조정의 돈으로 외국 나가서 즐겼을 뿐이오. 일본으로 국채를 발행하러 가서 실패하고는 모으다 만 돈 18만원을 지들 먹고 노는 용돈으로 다 탕진한 인간들이오. 그게 얼마나 큰 거금이오? 박영효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김옥균을 뭐라고 욕한 줄 아시오?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망나니라 욕했소. 그 말이 옳고도 옳은 것이오. 저 저잣거리 민초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들이 알 것 같소? 개화라는 크고 중요한 일이 그저 상투나 자르고 옷 껍데기나 바꾸고 외국어나 좀 지껄인다고 될 것 같소? 개화가 우선이 아니고 부국강병이 우선인 것이오. 개화가 목적이 아니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한 방책이 개화일 뿐인데 그들은 개화가 무슨 하느님이나 되듯이 떠받들고 있는 것이오. 사고방식이 그 모양이니 필연적으로 저 외국의 열강들을 우리나라 파먹을 요괴들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따르고 존경해야 할 상국으로 보는 것이오. 내 장담하건데 앞으로 미국 물 먹은 놈은 미국 놈 되서 나타나고 일본 물 먹은 놈은 일본 놈 되서 나타날 것이오. 그리고 할 짓은 뻔하오. 일본 놈은 일본으로 만들려 할 것이고 미국 놈은 미국으로 만들려 할 것이오. 내가 외국으로 육 년을 돌고 와서 느끼고 배운 것이니 틀림없을 것이오.”

 그는 자못 흥분했다. 앞에 놓인 술잔을 한번에 비우고 거푸 두 잔을 더 따라 마셨다.

 “그럼 홍형은 불란서 놈 되서 나타난 것이우? 흐흐흐..”

 “나도 아마 불란서 생활 몇 년 더 했으면 불란서 놈 되서 나타났을 거요. 내가 상투를 안 자른 이유가 그것이오. 겨우 이년 반 만에 돌아온 이유도 그것이오. 불란서는 참으로 좋은 대국이었소. 그대가 상상도 못할 것들을 나는 몸소 보고 배우고 느끼고 왔소. 솔직히 말하리다. 조선에 돌아오기 싫었소. 거기서 소설 몇 권 팔아먹든지 마부 짓을 하든지 살 길은 널려 있었소. 점점 더 오기 싫어지는 내가 무서워서 떨치고 돌아온 것이오.”

 “내래 뭐 해삼위나 왔다갔다 하는데 아라사 놈들 사는 거 보면 별 거 없다 싶은데.”

 “흐흐. 해삼위야 아라사 영토의 변방 끝하고도 끝이니 그럴 수도 있을 거요.”

 “개화가 아니고 부국강병이 목적이고 개화는 그 방편이다, 참으로 옳고도 옳은 말임메. 홍형.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우다. 우리 북방에는 광산해서 파낼 것이 참으로 엄청 나우다. 지금 개발하고 있는 금광과 은광이 제대로 움직이면 부국은 염려 없을 거임메. 내가 파는 금과 은이 우리 군사들의 총과 대포가 될 것이고 나중에 무기 공장과 철도가 될 거우다. 석탄을 캘 준비도 하고 있고 총포를 만들 공장도 준비하고 있고 철도를 우리 손으로 부설할 회사까지 준비하고 있는 거 홍형은 잘 모를 거임메. 저 남쪽의 비옥한 땅에서 나는 곡식들로 백성들을 배불리고 북쪽의 산에서 나는 광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을 거우다. 인삼 쪄서 내는 일도 큰돈이 되는 일. 온통 돈 되는 일 참 많은 데 그걸 못한 거우다. 이제 두고 보우다. 그 부국강병 내 손으로 이룰 거임메.”

 

 이용익은 굳은 얼굴로 가늘게 눈을 뜨고 술잔을 들이켰다.

 

 “한양에 들어오면 자주 보고 한잔 합시다. 이 형과는 말과 생각이 통하니 친우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소.”

 “조정의 간신배들을 조심하기요. 우리 조선을 진정으로 망가트리는 것들은 다 벼슬아치라는 벌레들이우다. 지방엔 온갖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그것으로 모자라 조정으로 올릴 세물을 착복하고 있고, 한양에는 오로지 저 하나와 저들 도당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안하는 짓이 없는 간신 놈들이 득실거리고 있슴메. 내 눈엔 외세의 열강들 보다 국내의 벌레들이 더 잘 보이고 무섭슴메. 이번의 동학난도 그 벌레들 몇 마리가 문제들 아니겠슴? 나야 북방으로만 도는 몸이라 크게 걸리적거리지 않지만 홍형은 이곳 한양의 조정에서 일해야 하는 몸, 참으로 염려가 되우다.”

 “이 형의 말씀 잘 받들겠소. 조정에선 말과 행동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함을 명심하겠소.”

 “그나저나 걱정임메. 청국과 일본의 군사들이 들어 온 모양인데...”

 “그 점 나도 참으로 걱정이오. 외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 조선의 변란을 진압하려 하다니.”

 “참으로 답답하우다. 내가 캐낸 금으로 아라사를 통해 들여 온 그 좋은 총과 대포로 겨우 동학질하는 잔비들을 못 당해내고 있으니. 청국 병사들이 들어오고 왜병들도 벌써 들어 온 모양인데 이게 무슨 짓임메? 잘못하면 이 땅에서 전쟁이라도 날 거 아님.”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만은 막아야지 않겠소?”

 

 그들은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며 서로의 의견을 구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미 파국의 입구에 발을 들였고 파국의 형세는 거칠고 험악했다. 외국군이 들어올 것을 염려한 동학도들이 자진하여 해산했지만 청국과 일본의 군대는 그대로 조선 땅에 들어와 그들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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