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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전생에서 만난 그대
작가 : 판도라
작품등록일 : 2019.10.4

“뭐...뭐라구요? 돌아갈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구요?"

뜻밖의 사고로 400여년전의 명나라로 타임워프를 한 임서은, 그런 그녀에게 염라대왕은 한가지 제의를 하게 되는데...

알고보니 이 모든것은 그녀의 전생이 저지른 일, 전생이 저지른 일은 후생이 수습해야 하는게 명부의 원칙이라고?

더이상의 망설임은 없다! 요동으로 갈것이다. 이여백, 누르하치, 이성량, 만력황제...기다려. 명나라 요동의 역사는 내가 고쳐쓸터이니!

담대하고 지혜로운 그녀의 좌충우돌 요동 정벌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그녀와 그의 사랑과 갈등도 지금 시작되는데....

 
후생
작성일 : 19-11-04 04:08     조회 : 260     추천 : 0     분량 : 13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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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실로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철령에 다녀온 후로 처음이었다. 꿈은 상당히 길었지만 여러 편린으로 토막토막 끊겨있었다.

 

 광녕 총병부.

 

 서재안에서 이여백이 붓을 내려놓고 천천히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서안위에는 그가 만력에게 남긴 장계가 보였다. 눈을 감고있는 서은의 미간이 크게 구겨졌다.

 

 “안된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여백은 검을 뽑아든 손을 멈추었다. 이성량이 서재에 들어섰고 이여백은 허한 시선을 들었다.

 

 “아버님…”

 “너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네 정녕 네 어미를 본받으려 하느냐.”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라면 검을 놓아라. 난 더이상…그런 일을 겪을수 없다.”

 “…”

 “그 아이의 뜻이기도 하다.”

 “아버님.”

 “천충을 남겨놓았다. 그 아이가 바라는 뜻을 네 정녕 모르겠느냐.”

 “그럼 어찌 제가 데려오는 것을 막으십니까.”

 “지금 네 몰골을 보아라. 이러고도 네가 제대로 된 애비 구실을 할수 있겠느냐!”

 

 이여백은 깊은 한숨과 함께 검을 내렸다. 검을 틀어쥔 그의 손이 작게 떨렸다.

 

 “당신은…”

 

 이성량이 나간 후 그가 되뇌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염라대왕이 오지 않으니 내가 명부를 찾아가서 물어볼수밖에…”

 

 소슬한 바람이 그의 서재안으로 불어들어온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자결을 하면 윤회를 할수 없다고…하지만 당신이 없는 세상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투명한 눈물 한줄기가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자금성 양심전.

 

 만력이 양심전 용좌에 앉아 눈물을 주룩주룩 쏟고 있었다.

 

 “이여백…그 무능한놈, 그렇게 서안을 잘 보살피라 했거늘…당장 총병직에서 파면시키거라…!”

 “태후마마께서 납시옵니다.”

 

 내관이 고하자 만력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태후는 령이의 부축을 받으며 조용히 양심전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어마마마…서안이…”

 “황상은 무슨 말을 하고 계시오. 서안공주는 어제 입궁하여 여기 있지 않소!”

 

 이태후가 령이를 가리키자 만력은 시선을 내렸다.

 

 “어마마마!”

 “궁에 이목이 많은데 어찌 그리 조심하지 않는 게냐.”

 

 가까이 다가온 이태후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만력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태후가 다시 둬걸음 물러섰다.

 

 “그 아이라면 걱정하지 말게나.”

 “네?”

 “원래 왔던 세상으로 되돌아간 것뿐이니.”

 “네? 그게 무슨…”

 

 만력이 놀라 물었고 령이도 눈물흔적이 있는 얼굴을 들었다. 이태후는 시선을 들어 양심전 문밖을 보았다.

 

 “원래 여기에 속하지 않는 아이였네.”

 “…”

 “이 어미는 그 아이가 부럽구려.”

 

 이태후의 말에 만력과 령이는 의문섞인 시선을 주고받았다.

 

 ……

 

 자금성 문화전 서각.

 

 령이가 눈물을 비오듯 흘리면서 문화전 서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다. 누군가 등뒤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찌 이렇 듯 서계시옵니까. 서안공주마마.”

 

 령이는 뒤를 돌아본 후 급히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저곳을 보니 옛일이 생각나서요.”

 “그 일이 지난지 수년이온데 참으로 정이 깊으신가 봅니다. 이젠 그만 잊으십시오.”

 

 령이는 시선을 들다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봉선은 이 시간에 웬 일이십니까.”

 “아행을 데리고 입궁하였사온데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서…”

 “어린 아이가 벌써 신출귀몰하는 보법을 익히셨군요.”

 “다 제 아비를 졸라서 배운 것입니다.”

 

 봉선은 령이와 나란히 선 채 문화전 서각을 바라보았다.

 

 “그분은, 잘 계실 겁니다.”

 “네? 봉선이 그걸 어찌…”

 “일전에 광녕으로 가서 나치야를 만났습니다.”

 “아…”

 “공주마마께서 부탁하신 물품들도 죄다 넘겨드렸습니다. 지금쯤 총병부에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치야에게서 얘길 들었지요. 그분은 원래 여기 속한 분이 아니시라는 걸. 미래…에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셨을 거라고.”

 “화살을 맞아 돌아가셨는데 어찌…”

 “이 세상에는 불가사이한 일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그럴진대 몇백년후의 세상은 더 달라져있을지 누가 압니까. 혼백으로 여러 육신을 드나들수 있을지두요…”

 “그래서 그런 알쏭달쏭한 말씀들을 하셨군요…”

 

 령이가 중얼거리자 봉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령이는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참 엉뚱한 구석도 많으신 분이셨는데…”

 

 다시 고개를 든 령이는 깊은 눈빛으로 서각의 작은 방을 주시했다.

 

 “이생은 이러하거니와, 다음 생에는 꼭 제대로 공주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흰 손수건을 움켜쥔 령이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노을이 문화전 앞마당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임진왜란, 조선.

 

 이여백이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점령했고 이여송은 금부인과 한 남자아이를 데리고 군사들의 환호성속에서 평양성으로 입성했다.

 

 “형님…”

 “네가 큰 공을 세웠구나. 이쪽은 네가 그동안 궁금해하던 금부인이다. 이번 길에 천근을 데리고 왔다.”

 

 이여송의 말에 이여백은 남자아이의 영리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아이의 손을 잡았다.

 

 “이천근.”

 “네, 숙부님.”

 “나를 아느냐.”

 “왜 모르겠습니까. 어머니께서 누차 말씀해주셨는 걸요. 요동에서 요직을 맡으신 숙부님이 아니십니까.”

 

 남자아이의 또렷한 대답에 이여백의 눈에는 얼핏 물기가 어렸다.

 

 “그래, 내가 숙부다. 숙부 역시 아버지와 같은 존재거늘…천근아.”

 “네. 숙부님.”

 “한번만, 한번만 나를 아버지라 불러볼수 없겠느냐.”

 “아버지…”

 

 이여백은 남자아이를 와락 품안에 끌어안았다. 금부인이 머리를 한쪽으로 돌려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서은의 눈가에서도 천천히 눈물이 배어나왔다.

 

 ……

 

 자금성안 어화원.

 

 조선전장의 소식을 탐마가 고하자 정자에 앉아있던 만력의 얼굴에는 한결 석연한 기색이 어렸다.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안아. 이 오라버니는 약조를 지켰다.”

 

 다시 시선을 갈무리한 그가 내관을 불렀다.

 

 “조서를 꾸미거라. 평양탈환에 공을 세운 이여백을 요동총병으로 명하노라. 앞으로 해투알라에 대한 견제는 이여백에게 일임하노라.”

 “누르하치는 이여백 한사람으로 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력과 마주 앉아있던 이태후가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만력은 얼핏 서글픈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소자 또한 알고있습니다. 달이 이그러지매 그 무엇으로 그 변화를 막을수 있겠습니까.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지요. 소자는 다만, 이여백이 누르하치의 손에서 요동의 피해를 최저한도로 줄일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운명을 감히 바꿔보자는 아이가 있었다.”

 

 이태후의 눈빛이 잠시 오래전 기억을 더듬는 듯 보였다.

 

 “참으로 무모하고, 당돌한 아이였지.”

 “네, 그리고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이였죠.”

 

 만력의 말에 이태후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도 똑같이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

 

 요동 총병부.

 

 이성량이 병상에 누워 이여백의 손을 잡고 마지막 숨을 톺아쉬고 있었다.

 

 “아버님…”

 “슬퍼하지 말거라…그 아이와의…약속을 지키러 가는 길이니.”

 

 ……

 

 요동의 전쟁터.

 

 명군과 조선의 10만 대군이 헤투알라성을 공격하고 있었고 누르하치가 성우에서 군사들의 기세등등한 공격을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여백에게 밀사를 파견하거라.”

 

 군중에서 밀서를 받은 이여백은 밀사를 내보내자 피씩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어느새 머리와 수염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그는 뒷짐을 지고 티끌이 자욱한 전장쪽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사르후전역은 우리 패배로 끝나게 될 것 을. 역사에 그렇게 기재되어있고…난 그 역사의 결과를 지켜줘야 하는 거니까. 게다가 만리타역에 부모형제를 둔 일만 정예군사들의 목숨으로 내게 위협을 하다니…불필요한 희생보다는 전군의 후퇴가 나을 것이다. 누르하치, 네가 이겼다. 대신 하나의 조건이 있다.”

 

 ……

 

 총병부.

 

 “페하께서 붕어하셨습니다.”

 

 총관이 고하는 말에 이여백의 눈엔 짙은 상심이 스쳤다. 뒤이어 그는 모든것을 체념한 초연한 눈빛으로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만력 뒤에는 천기 원년…그래, 이젠 드디어 갈수 있겠구나.”

 

 다시 고개를 든 그는 총관에게 말했다.

 

 “헤투알라성에 서신 한통을 보내거라.”

 

 그날 저녁, 총병부 담장을 뛰어넘어 한 검은 그림자가 이여백의 서재에 들어섰다. 이여백은 벽에 걸린 검을 벗겨서 손에 들었고 검은 그림자는 이여백의 행동을 눈여겨 보았다.

 

 “정녕 그리 하시렵니까.”

 

 검은 그림자의 말에 이여백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적막하고 고통스러울 땐, 오히려 지금 이 시간이 더 행복한 것을.”

 “스스로는 안되는 것입니까.”

 “지난 30년동안, 술에 절어 자포자기도 해봤고 전장을 누비며 전쟁터의 눈먼 화살을 기다리기도 했었다. 내가 얼마나 이날을 기다려왔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그분때문에 그러지 않습니까.”

 “누르하치…”

 

 이여백은 눈앞의 누르하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너는 영영 모를 것이다. 너에겐 항상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네, 도련님과 저의 다른 점이기도 하지요.”

 

 누르하치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저 역시 오늘을 기다려왔습니다. 도련님께서 그런 조건을 제시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제게는 줄곧 제거대상이었던 사람이 자기를 죽여달라는 조건을 내어걸다니.”

 “네 마음에 드는 조건이 아니냐.”

 “네, 그렇습니다. 도련님이 막지 않았다면 전 어쩌면 좀 더 빨리 중원으로 들어갈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유감입니다.”

 “너는 들어가지 못해도, 네 아들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

 “중요한 건! 제 눈으로 그것을 볼수 없다는 겁니다.”

 

 누르하치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여백은 소리없이 웃었다.

 

 “다 부질없는 것을.”

 “어찌 부질없다고 하는 겁니까. 남아가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큰 뜻을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는 건 저로선 이해할수 없는 일입니다.”

 “끝이 끝나는 게 아니고, 이 세상 그 누구의 생이라도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이여백은 잠언처럼 되뇌였다.

 

 “내게 그것을 가르쳐준 사람이 있다.”

 “…”

 “그래서 30년을 버틸수 있었다. 생을 허타이 구는 일이 없어야 했기에…내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면 그 조건, 제게 불리하진 않겠습니까.”

 “이미 수많은 피를 묻힌 네 손으로, 내 목숨 하나 더 거둔다 하여 무엇이 문제되겠느냐.”

 “그래도 이상합니다…제가 뭔가에 말려들지나 않았는지…”

 “말려든 게 맞다.”

 

 이여백이 냉랭하게 누르하치의 말을 받았다. 그의 손에서 검이 차거운 빛을 내뿜었다.

 

 “내가 죽기전 너를 거두어간다면, 명과 조선에 큰 우환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냐. 검을 빼거라.”

 “…!”

 

 누르하치는 당황한 얼굴로 허리의 검을 뽑아들었다. 달이 차츰 구름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

 

 초인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서은은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침대에서 내렸다. 휘청거리며 현관쪽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세요?”

 “오늘아침 방문하기로 했는데, 잊으셨나요?”

 

 이시현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였다. 눈앞에 나타난 익숙한 얼굴은 그녀로 하여금 간밤의 꿈을 연상케 했다. 그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몸이 어디 안좋은가요? 얼굴색이…”

 “잠을 설쳐서요.”

 

 그녀는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갔다. 금방까지 같은 얼굴을 한 남자의 꿈을 꾸다가 현실로 그 사람을 보니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대체 그는 뭘까.

 

 이시현은 잠시 거실을 둘러보다가 주방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들고온 짐들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의 행동을 보다가 그의 뒤로 다가갔다.

 

 “뭐하시려구요?”

 

 그가 느닷없이 몸을 돌리는 바람에 그녀는 하마터면 그와 부딪칠뻔 했다. 급히 물러서다가 냉장고에 어깨를 부딪친 그녀를 그가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눈에 살짝 웃음기가 어린 것을 보고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파 죽겠는데…우스워요?”

 “괜찮으세요?”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쪽을 잡았다. 그녀는 흠칫하며 그의 손을 떨쳐냈다.

 

 “괜찮아요!”

 “저기 앉아있어요. 금방 될 겁니다.”

 

 그가 눈짓으로 소파쪽을 가리켰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소파에 가 앉았다. 대체 그가 뭘 하는지 눈여겨보던 그녀는 잠시후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현란한 칼짓, 능숙한 손놀림…스샥스샥, 싹둑싹둑소리에 이어 각종 요리들이 차례대로 완성되는 과정을 그녀는 놀랍게 바라보았다.

 

 “쉐프에요?”

 

 그녀가 묻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취미입니다.”

 “그 취미 한번…좋네요.”

 

 잠시후 그와 그녀는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국그릇을 그녀앞으로 놓아주면서 그가 말했다.

 

 “선생님께서…그러니까 서은씨 아버님이 신신당부하고 가셨어요.”

 “트레이닝만 코치해주시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두루두루…가급적 일상생활 모든 부분 체크 부탁하셨습니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녀가 궁시렁거리자 그가 눈을 반쯤 접어 웃었다. 숟가락으로 국을 한입 맛본 후 그녀가 말했다.

 

 “식당 차려도 되겠네요.”

 “칭찬인 거죠?”

 “아니요.”

 

 그가 의문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녀는 밥을 한입 가득 떠넣었다.

 

 “립서비스.”

 “…”

 “얻어먹는 주제에 필요한 거니까요.”

 

 그가 다시 눈을 휘며 웃었다. 참으로 웃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것 한가지만 봐도 그가 이여백의 후생일 수 없다.

 

 “참,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가 묻자 그녀는 수저를 놀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물 한컵을 그녀앞으로 밀어놓았다.

 

 “철령엔 왜 가셨어요?”

 “꼭 대답해야 해요?”

 “형…그러니까 이자현배우님 팬인가요?”

 

 그녀는 수저를 놓고 허리를 똑바로 폈다.

 

 “그쪽이야말로 정체가 뭐죠? 이자현배우는 부모형제가 없다고 알고있는데 방금 형이라고 하셔서요.”

 “저 동생 맞습니다. 그동안 호적을 합치지 않아서요. 공개된 비밀이라고 할까요.”

 “…그렇군요.”

 “어릴때부터 저는 어머니랑 살고, 형은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네…”

 “제가 대답했으니 이젠 서은씨 대답 들을수 있겠죠?”

 

 그가 하도 바투 들이대자 그녀는 살짝 당황해졌다.

 

 “팬…맞아요.”

 “아…그래서 묘지까지…많이 좋아하셨나봐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는 다행이 더이상 물어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세요. 주방 거두고 있을께요.”

 “두세요. 설겆이는 제가…”

 “제 취미입니다.”

 

 참 별란 취미도 다 있다고 궁시렁거리며 그녀는 밥그릇을 비웠다. 그러고보니 얼마만에 먹는 집밥인가 싶었다. 후식으로 과일까지 내놓은 그가 그녀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고 있어서 그녀는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뇨.”

 “아까부터 쳐다보고 계셔서요.”

 “아, 제가 예쁜 얼굴을 좋아해서요.”

 “그것도 취미인가요?”

 “네. 네?”

 

 그의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보며 그녀가 키드득 웃었다. 그도 빙긋 웃었다. 문득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셔졌다.

 

 웃어…세상에…그녀가 웃을수 있다니? 그것도 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이처럼 아무 시름도 없이?

 

 벌떡 일어난 그녀가 방안으로 달려들어가자 그의 입가의 미소도 차츰 사라졌다. 그것을 대체한 것은 가슴 시리도록 슬픈 표정이었다. 뒤이어 그녀가 사라진 방문쪽을 향해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다행이, 기억하지…못하는 군.”

 

 입으로는 다행이라고 하나, 얼굴은 더없이 불행한 듯 보였다.

 

 ……

 

 아버지의 출장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상보다 길게 이어졌다. 애초에 두달로 잡혀있던 일정이 석달째 이어지자 이시현이 한가지 제의를 했다.

 

 “집에만 있지 말고 어디 놀러 나가는 건 어때?”

 

 그동안 그녀의 의식주행을 보살펴주느라 둘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그가 그녀에 대한 말투도 어느새 편하게 바뀌어있었다.

 

 “나가기 싫어요.”

 “나가는 걸 좋아했잖아.”

 

 그녀가 그를 힐끔 보았다.

 

 “제가 언제요?”

 “아, 미안. 내가 착각했어.”

 

 그는 더 입을 열지 않았고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한군데 있긴 해요.”

 

 그래서 두사람이 온 곳이 자금성이었고, 그들은 신무문에서 또 한번의 실랑이를 벌렸다. 역시 정우진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정우진은 도저히 사정을 봐줄수 없다는 딱딱하고 드팀없는 태도를 보였다.

 

 “저 당신 기억합니다.”

 

 정우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은을 바라보았다.

 

 “저번에도 당신이 없어져서 여기 전체가 야단이 났었지요. 이번에도 또 그러시면…”

 

 “부관장님은 왜 허구한 날 여기 나와 계시는 거죠?”

 

 서은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정우진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앞쪽만 바라보았다. 이시현은 서은의 팔을 당겨 자기 뒤에 세우고 정우진을 마주했다. 정우진은 놀라움이 역력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이자현배우…”

 “…의 매니저였습니다.”

 

 이시현이 정우진의 말을 잘라 대답했다.

 

 “규정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문표를 구매해서 들어가는데 수비가 너무 빡빡하신 게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 저분이 저번에도…”

 “고궁박물관이 관광객을 가려서 들이는군요.”

 “그건 아닙니다!”

 

 정우진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었다.

 

 “시간도 촉박합니다. 지금이 자금성 영이 시간까지 두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들어갔다 금방 나오겠습니다.”

 “…”

 “저번같은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못믿으신다면 동행하셔도…”

 “휴…되었습니다. 이번만 봐드리죠.”

 

 정우진이 길을 틔워주었고 이시현은 그를 깊이 주시했다.

 

 “고맙습니다.”

 

 돌아선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빚은 갚은 겁니다.”

 “빚…요?”

 

 앞장선 서은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시현은 씻은 듯 표정을 바꾸었다.

 

 “저번에도 널 막았다면서. 그러니까 그 빚을 지금 갚은 걸로.”

 “되게 무서우시다…혹시 저는 그쪽한테 뭘 잘못한 거 없죠?”

 “있지.”

 “뭔데요?”

 

 그녀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그녀를 지나치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나중에.”

 

 서은은 고개를 기웃하다가 그를 따라 걸음을 재우쳤다. 석양이 지는 자금성은 한낮보다 삼엄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그녀은 황혼녘에 말없이 뿌리내린 고궁 담벽들을 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어화원을 가로질러 문화전에 이르자 건륭제때 새로 지은 문연각(文渊阁)이 눈에 들어왔다. 서은은 그 앞에 잠시 서있다가 홀연 한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문연각 서각이 바로 그곳이었다. 자금성 반칸방…몇백년이란 시간이 그들 사이에 가로놓여졌고 서은은 홀린 듯 그쪽만 바라보았다.

 

 “문연각이군.”

 

 이시현이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서 문연각 간판을 바라보았다.

 

 “절강 녕파의 범씨 천일각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사고전서(四库全书)>를 편집한 곳.”

 “네.”

 

 그녀는 우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를 보며 그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항상 그런 눈빛이지?”

 “네?”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슬프고 사연 많아보여.”

 “제 나이가 어때서요.”

 “좋은 나이지. 그래서 좀 더 밝은 모습이면 좋겠어.”

 

 그녀가 입을 삐쭉거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슬퍼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오히려 지금처럼 불퉁해있고 짜증이나 화를 내더라도 무작정 슬퍼하는 것보단 나을 거야. 무슨 슬픈 사연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슬픈 사연이 있을수도 있죠.”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반박했다. 그가 고개를 기우뚱했다.

 

 “그래? 뭐가 그리 슬픈데? 좋아하던 배우가 잘못되어서?”

 “…”

 

 그의 말은 그대로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서은의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숨이 콱 막히는 감을 느끼며 멍하니 그의 얼굴만 보았다.

 

 “생명은…우리 소관이 아니야. 우리가 할수 있는 건,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야.”

 

 문득 그녀의 눈이 커졌다. 머리속으로 뜨거운 바람이 훅 불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떠나오기전에 했던 말…그 한마디가 어떻게 그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흘러나오고 있을까. 세상에 이런 우연의 일치도 있을까…

 

 “혹시, 피리 불줄 알아요?”

 

 그녀의 질문이 하도 뜬금없었는지 이번에는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피리? 그건 왜?”

 “아는지 모르는지만 대답해요.”

 “모르는데.”

 

 역시…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럴리 없다. 그가 아니다. 하지만 다시 기분을 추스르고 그녀가 물었다.

 

 “혹시…데자뷰 믿어요?”

 “데자뷰?”

 “네, 사람의 대뇌는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있어서 스치듯이 한번 본것도 잊지 않고 뇌세포에 저장하고 있어요. 우리가 무의식중에 했던 말이거나 행동을 다시 할 때, 또는 기억세포에 저장된 곳에 다시 갈 때 그런 기시감 현상이 일어나는 거고,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데자뷰라고 하죠.”

 

 그는 머리를 끄덕였고 그녀는 탄식조로 말했다.

 

 “그런 데자뷰 현상을 겪어요. 제가.”

 “…”

 “저기를…아세요…?”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이 주시하던 곳을 가리켰다. 그는 그녀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무문 닫을 시간이야.”

 

 ……

 

 그녀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한무리 괴한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 괴한들이 그녀를 따라잡고 포위망을 좁혀올 무렵.

 

 “비켜.”

 

 등뒤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이여백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냉정하고 의연한, 그리고 차분하고 담담한 말투…돌아보는 그녀의 의혹어린 시선에 살짝 미간을 구기는 그 표정까지도 이여백이 틀림없었다. 다만 이여백보다 한결 밝고 명랑해보이는 그 모습에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그리고 그 눈가에 언뜻 스쳐지나는 이유 모를 상실감이 그녀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임서은, 정신 차려.”

 

 그녀는 눈을 떴다. 순간 그녀는 눈앞의 익숙한 얼굴과는 퍼그나 역설적인, 이름못할 생경한 감정을 휩싸여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둘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고 그녀는 잠시 멍해있다가 화닥닥 몸을 일으켰다. 민망해서 어쩔바를 모르고있을 때 그가 그녀에게 생수 한병을 건네주었다.

 

 “피곤해보여서 깨우지 않았어.”

 

 그녀는 조수석에서 잠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차창문 밖을 보니 가을은 너무 쉽게 흘러가고 있었고, 마른 나뭇가지위에서 낙엽 몇잎이 가을바람에 가볍게 춤추고 있었다.

 

 “악몽을 꾸었나봐.”

 

 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녀에게 다시 뭔가를 내밀었다. 하얀 손수건이었다.

 

 “여기…땀.”

 

 그가 가리키는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혀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손수건을 받아서 땀방울을 훔쳤다.

 

 “씻어서 돌려드릴께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녀가 몸을 돌려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이유를 묻는 그녀의 눈빛에 그의 대답은 잠시의 침묵.

 

 “데자뷰 그거.”

 

 그녀가 시선을 들었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짧게 부딪쳤다.

 

 “믿지 마.”

 “네?”

 “다 허황한 거야.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어.”

 “…”

 “조심해서 들어가.”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후 그녀가 그의 차에서 내렸다. 시동을 거는 그의 옆얼굴이 왠지 슬퍼보여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착잡해졌다.

 

 “뭐지.”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들을 털어버린 후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소파에 앉아있다가 손안의 물건에 그녀의 눈길이 닿았다. 손수건이었다.

 

 “남자가 웬 명주손수건…”

 

 손수건을 펼쳐보다가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홍매화가 수놓여진 비단 손수건이었다. 그녀가 명나라 궁중에서 쓰던 손수건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손수건 한쪽 귀퉁이에 자그마하게 수놓은 글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령아…”

 

 그녀의 손수건마다 홍매화를 수놓던 령이가 기억에 떠올랐다. 이태후의 명에 좇아 서안공주라는 이름으로 후반생을 살아가야 했던 령이…당연히 그녀에게 차려졌던 모든 물품들이 령이의 지참금으로 되었을 것이다. 령이는 이런 방식으로나마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왜…?”

 

 이시현의 손에 있는 걸까…이자현의 유품이었을까. 보관방법이 적당하기만 하다면 명주 같은 고급 원단들은 몇백년까지도 보관 가능하다고 듣긴 했다. 만일 이시현이 이 손수건이 어떤 것인줄 알았다면 이렇게 쉽사리 자신에게 넘겨줄리 없었다.

 

 울컥 설음이 괴어올랐다. 차라리 환생이라도 하지 말 것을…어찌 그녀와 엇갈리는 운명으로 왔다 간단 말인가. 이것 역시 명부가 그녀에게 내리는 벌이었을까.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싶이 한 그녀는 이튿날 이시현을 만나자마자 손수건을 내밀었다.

 

 “잘 세탁해서 말렸어요.”

 

 그가 물끄러미 손수건을 보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고급스러워 보여요. 앞으로 아무한테나 주지 말고 잘 보관해두세요.”

 “아무한테나.”

 “네, 암튼 고마웠어요.”

 

 그가 천천히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짐짓 홀가분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 오늘은 뭐하죠?”

 “난 심양으로 가야 해.”

 “네?”

 “선생님께서 연락이 오셨어. 일손이 부족해서 가서 B팀에 합류해서 도와줘야 해. 혼자 있을수 있겠어?”

 “내가 뭐 어린애인가요?”

 

 그녀가 투덜대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를 주시하는 그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냉장고에 좋아하는 음식들 만들어 넣어놨어. 먹을땐 전자레인지에 덥히기만 하면 되고. 혹시 모르니까 차 두고 갈께. 여기 차키. 면허는 있지? 무슨 일 있으면 폰으로 연락줘.”

 “네.”

 “그럼 갈께.”

 

 그가 몸을 돌렸다. 뭐가 이리 갑작스러운가. 그녀는 미처 적응하지 못해 눈을 깜빡거렸다.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금세 허공에서 거두어들였다. 바로 그때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품에 안았다.

 

 “…”

 “혼자니까 각별히 조심해.”

 “네.”

 “갈께.”

 

 그가 곧바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꼭 마치 무엇을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그가 빠르게 현관문을 나섰다. 문소리와 함께 시린 적막감이 그녀의 가슴을 훑었다. 그리고 곧 그것은 은은한 슬픔이 되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똬리를 틀었다.

 

 만일 이시현이 이여백의 후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전생과 후생이 저렇듯 서로 다른 느낌일수도 있을까. 아니면 윤아처럼 단지 이생에 새롭게 태여나서 성격에 차이가 있는 걸까. 전에없는 혼란을 느끼면서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안으로 던져진 지는 햇살이 이 도시에 드리웠던 붉은 날개를 조금씩 거두고 있었고, 바람에 꺽인 나뭇잎들이 스러져가는 황혼 아래에서 슬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

 

 -윤아야.

 

 서은은 유리창에 떨어뜨린 한줄기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핸드폰으로 윤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응?

 -나…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무슨 소릴…

 

 윤아의 식겁한 표정이 느껴졌다. 잠시후 윤아가 다시 문자를 보내왔다.

 

 -너…조심해. 아버님 알면 어쩌려고.

 -…

 -그리고 뭐?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윤아는 화가 동하는지 답장이 길고 빨라졌다.

 

 -아버님 가슴이 피멍 들게 그런 소리 하지 마. 너까지 그러면 아버님 어떻게 살라고. 대본작업은 다 하고 그런 소리 하냐? 너 그거 다 쓴 다음 오감독님 보여주기로 하지 않았어?

 -넌 어쩌면 그렇게 밝게 지낼수 있니?

 -누군가가 그랬어. 성격이 운명을 만들어간다고. 밝은 성격이 긍정적인 인생을 만들어.

 -성격이 운명을 만든다…누가 그랬어?

 -누가 그랬더라? 아 몰라몰라…암튼 누군가가 그런 말 한적이 있어. 잠깐 머리를 스친 건데 누구란테서 들은 건지는 기억이 안나네.

 

 핸드폰을 들어다보는 서은의 눈빛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잠깐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다 있는데…다 느끼는 데자뷰인데…아버지도…너도…다 기억하고 있는데…왜 하필 그 사람만 아닌 거야.”

 

 해볕이 내려앉은 그녀의 까만 머리가 유난히 빛났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말없이 대본을 번졌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있었다.

 

 ……

 

 “날 만나자고 했다면서.”

 

 눈앞의 나이 지긋한 늙은이가 날카로운 눈길로 서은을 바라보았고 서은은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몸을 흠칫했다. 오감독의 주선으로 업계에서 유명한 역사대하드라마작가의 사무실을 방문한 서은은 눈앞의 얼굴이 바로 나치야의 아버지 니칸외란의 얼굴이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따로 없었다.

 

 “만나자고 해놓고 왜 침묵이냐. 프로도 아닌 신인 작가가 내 귀한 시간 빼앗았으면 말이라도 빨리 해야 할 거 아니냐?”

 

 노작가는 짜증섞인 표정이였고 서은은 입술을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만력황제] 대본 봤는데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의문점이 좀 있어서 여쭤보려구요.”

 “흥!”

 

 노작가는 부아가 치민 얼굴로 머리를 창밖으로 돌렸고 서은은 노작가를 주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3년전 무산된 그 드라마를 대본 수정해서 다시 촬영 들어간다는 소리 들었습니다.”

 “그런데는.”

 

 서은은 담담하게 눈을 들어 작가의 시선을 마주했다. 사무실 공기가 팽팽해졌고 잠시후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마지막 부분을 다시 재고해주실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없는 공간이 이렇게 적막한 것을, 그래서 숨쉬기조차 어려운 것을…굳이 이 세상에 자신을 돌려보냈다면 남은 생은 그를 위해 뭔가를 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본의 마지막을 보자 더이상 참을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람이 사르후에서 누르하치에게 군사기밀을 누설했다고?”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자신을 감싸주던 만력황제가 죽자 죄가 무서워 자결…”

 

 투명한 눈물 한줄기가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역사는 이긴자의 역사이긴 하나, 결코 이렇듯 무작위로 회자되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깨달았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현실과 환상의 괴리를 겪으며 생의 희망을 잃어가는 자신에게 아직도 굳이 뭔가 생에 연연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지극히 그 사람을 닮은 누군가의 존재와, 역사의 기록속에 사장된 그들의 사연을 새롭게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그녀의 소신이라는 것을.

 

 다시 고개를 쳐든 그녀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그래서, 엔딩...그러니까 완결부분 수정을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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