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이 곧 애를 낳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애숙은 다른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전에 다투었던 일 따위는 머릿속에서 다 사라진 것 같다.
다만 이국 만리에서 서경이 남편도 없이 혼자 애를 낳으려고 한다는 생각에 빨리 가봐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한밤중에 용석에게 동무가 애를 낳으려 한다는 얘기만 던져 놓고 그냥 서경의 집으로 달려왔다.
집에 들어서니 서경은 진통 시간이 더욱 짧아져서 쉴새 없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혼자였다. 서경이 애숙을 알아본다.
“악! 악! 애숙아!”
“뭐야! 왜 혼자야! 애 낳는 게 뭐 운동하는 거랑 같느냐구!”
애숙이 서경의 침대 곁으로 달려오며 책망한다. 산파와 함께 왔다.
“으아악! 너 왜 신발 안 신고 왔어?”
서경의 말에 애숙이 발을 내려다본다. 신발은 안 신고 양말만 신고 있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몰랐다.
“어. 어. 몰랐네.”
산파가 침대에 누워 있는 서경의 이불을 들춰 본다.
“많이 벌어졌구만. 얘 머리가 보이네.”
산파가 애숙에게 부탁한다.
“가서 물 좀 끓이고 가위 좀 소독해 와요.”
애숙이 얼른 부엌으로 가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한다. 서경은 계속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고 애숙은 안절부절하며 서경에게 와 손을 잡아준다. 어떻게 해야 고통을 덜어줄지 몰라 손만 잡으며 안타까워한다.
얼마 후 서경이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지르자 아기가 나왔다. 산파가 아기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소리와 함께 ‘우왕’하고 아기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애숙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땀으로 잔뜩 젓은 서경의 얼굴을 보니 너무 안스러우면서도 감격스럽다. 조그마한 갓난 아기는 신비롭다.
“어머! 너무 예쁘다.”
애숙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포대기에 감싼 아기를 안으며 눈이 뭉클해진다.
“예뻐?”
서경이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묻는다. 애숙이 한껏 웃으며 포대기에 싼 아기를 서경에게 보여 준다.
“응. 아들이야.”
“흑흑. 아기다.”
서경이 감격에 차서 아기를 안는다.
“내가 애를 낳았어!”
“고생했어!”
애숙이 서경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서경이 애숙을 올려다보며 웃는다.
“고마워! 와 줘서! 너 아니었으면 나랑 애기랑 어떻게 됐을지 몰라.”
서경의 눈에서는 고마운 마음이 넘친다.
“너 혼자 있다는 얘기 듣고 나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 하하.”
애숙이 신발도 신지 않은 자신의 발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하하. 나 아기 엄마야.”
서경의 목소리가 자랑스럽다.
“나도 엄마야.”
애숙도 자기 배로 낳은 자식들은 아니지만 딸과 아들이 있다.
“그럼 우리 같은 엄마야?”
“응. 하하.”
애숙이 서경의 등을 쓰다듬으며 마주 보고 웃는다.
***
중국 상해 황포항에서 조선 총독이 의열단의 공격을 당했는데 3명 중 한 명의 범인도 잡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공격이 성공하지 못해 그나마 총독님이 무사한 건 커다란 다행이다.
그래도 상해 의열단 아지트를 찾아내 지금까지 제조된 많은 양의 폭탄을 압수한 것으로 하시모토는 실책을 만회할 수 있었다. 하시모토는 범인을 잡았다면 승진했을 거란 생각에 입맛이 쓰다.
경성으로 돌아와서도 의열단 조직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밀정들을 가동시키는데 본부가 상해를 떠났다는 것까지만 알아냈다. 오늘도 그런 차원에서 하시모토는 안창호의 비서 정군을 만난다.
“어머니는 건강하신가?”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골목에서 마주 본 정군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하시모토를 보고는 주눅이 든 표정이다.
“네. 근데 제 동무 박혁준이 죽었답니다. 의열단원들한테.”
“알어. 그러게 그 친구 마작을 하더라구. 도박에 빠져서는 신원이 밝혀지고. 그리고 의열단은 왜 그렇게 잔인해? 자네는 의열단원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쯧쯧. 자네도 조심하게. 그래야 나랑 오래오래 해먹지.”
‘오래오래 해먹지’라고 말하는 하시모토의 표정은 능글능글하기만 하다. 정군은 하시모토의 부름에 어쩔 수 없이 나왔지만 양심이 갈라지는 가책을 어쩔 수 없이 느낀다.
“뭐 새로운 소식 없나?”
정군은 선뜻 말하지 못한다.
“또. 또.”
하시모토가 예상했다는 듯 혀를 쯧쯧거리더니 주머니에서 현금 몇 장을 꺼내 정군에게 건네준다.
“어머니 약값에 쓰게.”
정군이 마지못해 돈을 받는다. 하지만 정말 긴요한 돈이다.
“얼마 후 의열단에서 동양척식회사 본부에 폭탄을 던질 계획이라고 합니다. 폭탄도 이미 들여왔대요.”
“정말? 누가 던진대?”
“그건 잘... 제가 의열단원이 아니라 자세한 얘기는 못 듣습니다.”
“정말이지?”
하시모토가 날카롭게 정군을 노려본다.
“나도 발각되어 사형당하기를 바랍니까?”
정군이 발끈해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 그렇진 않지.”
하시모토가 얼른 부인하며 손을 내젓고는 말을 잇는다.
“무기를 들여왔다고 하면 의열단 단원이 들여왔겠지. 만주 안동현으로 본거지를 옮겼다고 하던데. 하여간 동척 (동양척식회사) 방어를 단단히 해야겠군.”
하시모토가 눈을 빛낸다.
의열단원이 전해준 폭탄과 권총 2자루, 장총 1자루는 종희와 상연에게 잘 전달되었다. 목숨을 걸고 무기를 전달해 준 의열단원을 생각하며 상연은 동척 공격을 꼭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한다.
그동안 청진기나 수술칼이나 잡았지 총 따위는 잘 보지도 못했던 상연은 종희에게 사격 지도를 받는다. 종희는 이미 황포항에서 총을 쏜 선배라며 사격을 지도해 줬다. 상연은 의사로 일하며 손을 섬세하게 놀리는 훈련을 해와서인지 금방 총을 쏘는 데 능숙해진다.
거사 날을 정해 놓고 상연과 종희는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 경성에 있는 동양척식회사 주변을 돌며 주변 지형도 파악하고 도주 경로를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상연은 무사히 도주할 가능성보다는 잡힐 가능성이 더 크다는 걸 안다. 그땐 스스로 총을 쏴 자결할 생각으로 동양 척식 회사 본부 앞 거리 골목에 선다.
상연은 준비했던 대로 허름한 장삿꾼 옷을 입고 코밑에는 수염을 달았다. 등에는 커다란 바구니를 메고 바구니 안에 바나나를 가득 채웠다. 바나나 안에는 폭탄이 숨겨져 있다.
상연과 종희는 미리 조사를 해 동척에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바나나 장사꾼이 있다는 걸 알고 그로부터 바나나를 몽땅 사서 온 거다.
상연은 종희에게 현장에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누나는 어머니와 아들을 돌봐야 하니까 이번 일로 연루되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종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척 건물 앞 거리 골목에서 바나나 장삿꾼 옷차림으로 콧수염을 달고 농부 모자까지 푹 눌러 쓴 상연은 부모의 죽음, 형의 전사, 그리고 종희와의 키스까지 일들이 영화처럼 눈 앞을 지나간다.
그때 동척 정문 앞으로 차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트럭 2대가 와서 선다. ‘하차’하는 소리와 함께 헌병 30 여명이 우루루 트럭에서 내린다. 앞 보조석에서 하시모토가 내린다.
상연은 예상치 못하게 도착하는 헌병을 보면서 머리가 하얘진다. 왜 갑자기 헌병들이 들이닥치는 거지? 어떻게 된 걸까?
그만두어야 하나? 원래는 동척을 지키는 수위 두 사람만 젖히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계획을 짰다. 갑자기 도착한 총칼을 든 헌병을 보며 상연은 두려워진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입술이 떨린다.
골목 구석 그늘에 몸을 숨긴 체 상연은 생각한다. 그만둘까?
그때 고급스런 검은 관용차가 동척 정문으로 들어간다. 관용차는 헌병들을 지휘하는 하시모토 앞에 서더니 차창이 내려간다.
차 안 뒷좌석에서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내밀고는 헌병들을 지휘하는 하시모토를 보며 뭐라고 얘기한다. 상연은 그 남자가 사장인 걸 알아본다.
순간 상연의 가슴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솟아오른다. 사장이 오늘의 목표이다. 목표가 코 앞에 있는데 이대로 돌아서 갈 수는 없다.
상연은 떨리는 입술을 꽉 물더니 손을 꼭 쥔다. 그리곤 앞으로 발을 내딛고 한발 한발 정문을 향해 걸어나간다.
정문 주변은 총 칼을 들고 주변을 둘러싼 헌병들로 가득하다. 상연은 심장이 쿵쾅거리지만 숨을 가다듬고 침착해지려 노력하며 한발 한발을 내딛는다.
드디어 정문 앞에 도달하자 하시모토가 잡는다. 하시모토는 바나나 장삿꾼 차림의 상연을 알아보지 못한다.
“뭐야?”
“바나나 팔러 왔는뎁쇼.”
상연이 연습한 대로 원래 드나들던 장삿꾼 말투로 얘기한다. 하시모토가 상연이 등에 멘 바나나 바구니를 힐끗 보더니 다가가 고개를 바구니 안에 넣고 들여다본다.
“허. 귀한 바나나를.”
하시모토가 바구니 안에 손을 집어 넣어 헤집으려고 하자 상연은 머리가 하얘진다. 바나나 무더기 속에는 총이 숨겨 있다. 몸을 슬쩍 옆으로 옮긴다.
“쩌기 바나나를 손으로 만지면 상해서 팔 수가 없는 뎁쇼. 워낙 비싸게 샀는 뎁쇼.”
상연이 몸을 조아리며 하시모토에게 굽신거리자 하시모토가 얼굴을 찌푸리며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낸다.
“뭐야? 지금 경감한테 반항하는 거야?”
하는데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 바나나는 좋은가? 나도 한번 보세.”
정문 옆에 서 있던 수위다. 수위가 모자를 눌러 쓴 상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거다. 상연이 고개를 숙이고 얼른 수위에게 간다.
바구니를 내려놓고 바나나를 하나 꺼내 수위에게 건넨다.
“오늘 거는 억수로 맛있슴쇼.”
수위가 바나나를 받더니 옷에 쓱쓱 닦으며 좋아한다. 상연이 얼른 바나나를 하나 더 꺼내 하시모토에게 달려가 건넨다.
“뭐 이런걸...”
하시모토가 못 이기는 척하며 받는다. 상연은 얼른 바나나 바구니를 등에 다시 메면서 수위에게 소리친다.
“토지 개량부 다이묘소 과장님이 꼭 와달라고. 따님 바나나 가져다 주기로 했다고 어제 부탁했슴쇼. 그럼 저 들어가 보겠슴쇼.”
그리곤 바로 정문을 지나쳐 건물로 빠르게 걸어간다. 하시모토가 바나나 껍질을 까고 있는 게 뒤로 보인다.
상연은 현관 앞으로 다가가며 옆에 사장의 관용차가 서 있는 걸 본다. 운전사가 차를 닦고 있다.
상연은 건물 현관을 들어서 로비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른다. 로비에는 몇몇 사람들이 오가지만 많지는 않다.
2층에 올라서자마자 상연은 ‘토지 개량부’라는 팻말이 보이는 사무실 옆으로 ‘사장실’ 팻말이 붙은 고급스런 문을 본다. 상연은 주변을 살피며 복도를 가로질러 사장실 앞까지 다가간다.
다행히 2층 복도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상연이 사장실 문 앞에 서서 재빨리 등에서 바나나 바구니를 내려놓고 그 안에 있던 권총과 폭탄을 꺼낸다.
심장은 심하게 쿵쾅거리고 온 몸의 피가 요동치듯 흐른다. 권총을 양쪽 바지 주머니에 넣고 폭탄을 손에 잡는다.
긴장으로 손은 땀에 젖어 있다. 상연은 이빨을 꽉 물고는 폭탄에서 안전핀을 빼내고는 사장실 문을 확 연다. 그리고 폭탄을 던져 넣는다.
폭탄이 부르르 땅을 굴러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상연은 바로 돌아 복도를 뛰어 계단으로 향한다. 순간 뒤에서 ‘쾅’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악’ 비명 소리가 들린다.
상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폭탄 던지는 소리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뛰어 내려오는 상연을 본다. 상연은 양쪽 주머니에서 권총 2자루를 양손에 들어 사방으로 위협하며 계단을 뛰어 내려온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상연을 피하지만 헌병은 아직 들어오지 않아 상연은 의아해진다. 지금쯤 헌병이 총을 앞세워 들어와야 하는데 어떻게 된 걸까?
상연이 무사히 로비를 가로질러 현관 앞에 선 순간 헌병들이 거리 쪽으로 총을 쏘는 걸 본다. 타다다당.
거리 쪽에서 커다란 말이 달리고 있다. 말 위에는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 쓴 사람이 능숙하게 장총을 헌병 쪽으로 쏘며 달린다. 종희다. 타다다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