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밤.

　장소는 한율의 침실.

　인원은 한율과 바론, 나 이렇게 세명이서 자게 되었다.

　와,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상황인지.

　나는 한율의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나를 기다리는 바론 한번, 고급스럽고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아 우리는 지켜보는 한율을 한번, 번갈아 쳐다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대놓고 바람 피는 기분인데.

　그게 아니면 조금 특별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된 기분.

　세명이서 밤을 보내는, 흠, 아직 정신을 다 놓지는 않았는지 굉장히 미묘했고 머뭇거려졌다.

　그래도 잠을 못 자 정신 피폐해진 채, 살고 싶진 않으니 껄끄러운 기분들을 억누르고 바론에게 안겼다.

　그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밀려오는 잠.

　나는 나를 덮치는 수마에 몸을 맡기며 생각했다.

　와, 앞으로 바론과 화해할 때까지 이 짓을 계속해야 해?

　혹은, 한율이 쳐다보고 있는데 퍽이나 화해하겠다.

　*

　삼일.

　삼일을 셋이서 잤다.

　첫날 한율은 소파에서 불편하게 자더니 두 번째부터 편안히 침대로 올라왔다.

　그래, 한 침대에서 세명이서 잤다.

　한율의 침대가 커서 망정이지 아니었음 고래들 사이에 낀 새우가 될 뻔했다.

　바론을 내보내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한율의 자연스런 시중을 받는 도중 현타가 왔다.

　한방에서 셋은 막장이지.

　근데 셋이서 한 침대?

　이건 막장을 넘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았다.

　따지자면 첩인 바론에게 안겨 처와 함께 잔다, 아닌가.

　하, 진짜 바론과 어떻게 화해하지.

　겉으로나마 화해해볼까 생각하여 바론과 둘만 있을 기회를 노렸는데 이 또한 시스템의 농간인가, 단 1초도 바론과 둘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럴 때 들리는 다됐다는 말.

　"화연, 다됐어요."

　"응, 고마워."

　마지막으로 내 옷무새를 점검하곤, 애정이 가득 차다 못해 흘러넘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한율은 가히 잘생겼다.

　고민에 머리가 터질 것 같던 기분이 잠시 가라앉을 정도로.

　이건 거의 뭐 잘생김 테라피였다.

　내가 치유된다는 느낌으로 한율을 쳐다보고 있자니 한율은 쑥스럽게 시선을 완전히 내리깔았다.

　와, 눈을 뜨든 내리깔든, 위에서 날 보든, 아래로 날 쳐다보든 한결같이 잘생겼네.

　한율의 미모에 내가 감탄하는 사이 한율이 조곤조곤 말했다.

　"저는 어제 말했던 것처럼 오늘 하루, 궁 밖에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히 다녀와."

　"네, 화연."

　*

　은가람이 찾아왔다.

　왜?

　"화연님, 바론 예무와 한율 여화의 시중을 받으며 단잠을 주무신다고요."

　돌고 도는 소문을 듣고,

　"저는요? 저는 필요 없으신가요?"

　저도 끼려고.

　제 얼굴이 잘난 건 아주 잘 아는지 잘생김을 활용하는 게 대단했다.

　대단해, 아주 대단해.

　아주 환장하겠다.

　솔직히 소문이 퍼질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천호란 무엇을 해도 빨리 퍼지는 그런 자리니까.

　거기다 천호의 애첩? 같은 바론, 약혼자인 한율이 함께 한율의 침실에 들어갔다?

　드디어 천호께서 후손을 낳을 생각이 드셨나보다, 싶어서라도 관심을 가질 세계관이었다.

　그런데 맹세코, 은가람이 이렇게 나올 줄을 생각도 못 했다.

　지금 상황도 괴로운데(사실 7할 정돈 행복했다.) 은가람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안되나요? 저는, 안되는 건가요?"

　는 아닌가.

　은가람의 반짝이는, 나는 정말 무해해요- 라고 주장하는 잘생긴 얼굴을 보니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을 초인적인 인내로 참아낸 나는 은가람에게 그렇게 된 이유를 설명해줬다.

　내가 플레이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시스템 탓에 이렇게 된 거라는 진실을 말이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끝이 없으니 시스템이 '바론에게 안겨야만 잠을 잘 수 있다'라고 지정했다고 간단히 말했다.

　그 뒤에 한율의 절대 바론과 합방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셋이서 자게 된 거다, 라는 것까지.

　은가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더니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꼴 보기 싫어서라도 얼른 화연님과 바론 예무를 화해 시켜야겠네요."

　역시 은가람은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닌 거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이 또한 아군이라고 나는 환영했다.

　"도와준다니 어쨋든 고맙네."

　그리고 마음이 편했다.

　게임 시스템을 알고 있어서, 혹은 내가 플레이어란 걸 알고 있어서 진실을 알려줄 수 있고 그로 인해 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게.

　그렇다고 그 사람이 꼭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오늘 하루, 바론예무와 한 번도 못 마주칠 수가 있는 거죠?!"

　바론과 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주겠다, 예관 뒤에서 편히 기다리고 계셔라, 호언장담한 은가람이 몹시 당황해하며 돌아온 거다.

　"상사인데, 부르면 안 돼?"

　"직속은 아니에요. 그래서 바론 예무 직속 예단을 찾아 이러한 이유로 바론 예무를 부를 거라 언질은 해둬야 하는데 놀랍게도 바론 예무 직속 예단도 보이지 않아요."

　그러면서 심각하게 덧붙였다.

　"이 정도면 그 시스템이라는 것의 농간 아니에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둘이서 심각하게 고민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안 되겠다. 그냥 한율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 있어도 철판 깔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잊을 만 하면 찾아오는 페널티.

　바론과 단둘이 있을 때만 원하는 대화가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이 있으면 ‘절대’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페널티 -1

　남은 페널티 : 2}

　“-는 못하게 됐네.”

　이 개새끼 때문에.

　내가 짜게 식은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말을 바꾸자 은가람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혹시 페널티...?”

　“아는구나, 바론과 단둘만 있는거 아니면 이야기 못 한데. 아니, 근데 십 년 전에도 얼마나 많은 페널티를 날렸으면 네가 알아?”

　“음... 시스템을 실제로 보면 한 대 때릴 거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페널티가 많았던 거로 기억해요.”

　이대로 계속 셋이서 자면 내 피가 먼저 마를거 같았다.

　물론 7할은 행복에 겨워서.

　미남 두 명과 함께 밤을 보내도 욕은커녕, 칭찬 비슷한 것만 들리는 세계관에 언제 살아보겠는가.

　나는 이미 내 인성과 양심을 내려놓았다.

　그래, 쓰레기 하지 뭐.

　*

　천무막 때문에 들어온 괴물을 처리하러 간 백호가 보름이 초저녁에 돌아왔다.

　"천호!"

　아주아주 열 받은 채로 나를 부르며.

　호지궁 집무실에서 호위무사와 어떻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바론과 화해할 수 있을까를 논하던 나는 착착착, 문이 열리며 등장한 백호가 보름에 깜짝 놀라 쳐다봤다.

　나름 편하게 벽에 기대고 있던 호위무사도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하며 백호가 보름을 쳐다봤다.

　미친, 백호가 보름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네.

　백호가 보름이 저렇게 화난 채, 내게 달려온건 딱봐도 그거지.

　한율, 나, 바론이 '함께', 천호가 제일 사랑하는 반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월궁에서' 그것도 '한율의 침실'에서 자서.

　내 예상이 맞다는 듯 백호가 보름은 뒤에 아지랑이가 보일 정도로 룬을 끌어올리며 나를 죽일 듯 다가와 호통쳤다.

　"정녕 미치셨나 봅니다! 제가 없는 사이 감히! 감히이!"

　{플레이어의 목숨을 보호합니다.}

　오우.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진짜 심장이 멈췄을 정도로 위협적인 룬이 나를 덮쳤다.

　그에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고 호위무사의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눈을 떴을 땐 살아있는 날 보고 놀라 하는 백호가 보름이 있었다.

　잠깐의 정적.

　이내 백호가 보름이 인상을 와그작 구기며 말했다.

　"역대 최약인 하늘의 핏줄이라 불리어도 일반 사람들 중 몹시 강하다 칭해지는 나 따위는 가뿐히 넘을 정도군. 이러나 저러나 해도 하늘의 핏줄이라 이겁니까."

　그리곤 혼자 심각하게 중얼거리더니 아예 반말로 내게 경고했다.

　역시 성인이 되어서도 나 혼자 억누르는 건 역부족이군.

　"좋다, 천호.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 또한 생각이 있지. 그토록 죽은 듯 살고 싶다는데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너는 혼자고 나는 여러 명이다.

　백호가 보름이 심히 노하며 룬이 다시 한번 위협적으로 움직인다.

　{플레이어의 신체를 보호합니다.}

　"팔을 자르고"

　{플레이어의 신체를 보호합니다.}

　"다리를 자르고"

　{플레이어의 신체를 보호합니다.}

　"결국엔 그 혀와 눈까지 잘라내 궁 한구석에 처박아주겠나이다."

　처음 받아보는 명백한 적의와 살의.

　그러나 이 또한 시스템이 방어해주는지 딱히 뭔가의 위협은 들지 않았다.

　그냥, 아. 그렇구나?

　그래, 현실성이 없어 와닿지 않는다, 라는 표현이 딱 맞다.

　마치 드라마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에 불과.

　내가 그렇게 현실성 없이 있을 때, 다시 한번 미닫이문들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하얗게 질린 한율이 나타났다.

　"아버지!"

　저번과 같이 백호가 보름을 부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