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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불타는대륙
작가 : 김철
작품등록일 : 2019.10.30

조선상고사

 
10. 대무신왕
작성일 : 19-10-31 15:50     조회 : 220     추천 : 0     분량 : 7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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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대무신왕

 

 

 

 

 

 

 

 

 

 

 

 백제의 북쪽 낙랑국 최부(최숭의 아들)왕이 압록강의 예족(말갈)과 연합하여 백제를 핍박하는 것이 심했는데...처음엔 낙랑국과는 친하게 지내고 예족만 쫓아내었는데 나중에 예족의 침략이 낙랑국의 사주를 받은 것 인줄 알고 낙랑국과 절교하고 성책을 쌓아 방어전에 전력하였다.

 소서노는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한 여 제왕이다. 창업자일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사람이었다.

 그 소서노가 백제왕이 된지 13년 만에 죽었다.

 소서노가 죽자 비류와 온조 두 왕자는 백제의 앞날에 관해 상의했다.

 “서북의 낙랑과 말갈의 침입이 날로 심해지니 새로운 텨전을 찾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옳다.”

 이렇게 합의한 형제는 오간, 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북악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 보았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눈 여겨 보았고. 온조는 하남 위레홀을 도읍으로 점찍었다.

 형제의 의견이 이처럼 충돌하자 오간과 마려는 비류의 의견이 옳지 않다며 간했다.

 “하남 위례홀은 북으로 욱리하(한강)를 끼고 있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늪을 안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동으로는 고악(높은산)을 끼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를 둘렸으니 천연적으로 험한 지리를 이루고 있어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우리 백성의 삶을 도모 하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거늘... 어찌 이곳을 버리고 미추홀로 가려 한답니까?”

 그러나 비류는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비류와 온조는 백성을 두 쪽으로 갈라 그 중 하나는 비류를 따라 미추홀(메주골)로 가고 나머지는 온조를 따라 위례골(오리골)로 갔다.

 그리하여 백제는 두 개의 백제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바다를 끼고 있는 곳이라 물이 짰다. 백성 가운데 도저히 살 수 없다하여 흩어저 도망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물과 땅이 살아가기에 알맞고 마당하여 오곡이 잘 되었으며 백성의 삶에도 탈이 없었다.

 비류는 부끄럽고 분한 것이 병이 되어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지도자를 잃은 백성들이 다시 온조에게 돌아가니 둘로 나뉘었던 백제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백제는 마한의 땅을 빌려 건국하였음으로 마한에 대하여 공손하게 신하의 예를 다하였으나 온조가 나라를 물러 받은 뒤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왕이시여낙랑과 예(말갈)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북쪽의 강가(지금의대동강)에 성책을 쌓을까 합니다.”

 “그리하라”

 마한 왕이 허락하자 온조는 웅천에다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온조의 뜻밖의 행동에 화가 난 마한 왕이 사자를 보내어 온조의 행동을 꾸짖었다.

 “왕의 모자가 처음 남쪽으로 왔을 때 발 디딜 땅 한 조각 없었으나 내가 서북 백리에 이르는 땅을 베어 주어 오늘날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국력이 튼튼해 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니 어찌 이것이 의리 있는 자가 취할 짓이더냐?”

 사신이 전하는 말을 듣고 온조는 짐짓 부그러운 낯빛을 보이고는 성책을 헐었다. 그러나 온조는 마한 사신을 돌려보내고 나서 좌우의 신하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마한왕의 정치가 그 길을 잃어 나라의 기세가 자구 허약해지고 있다. 이제 우리가 마한을 취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게 돌아 갈 것이다.”

 “그런 겁니까.?”

 

 온조는 마한의 사신이 다녀간 뒤 오래지 않아 사냥 한다는 핑계를 대고 군사를 이끌고 마한을 습격하였다. 마한의 서울(지금의공주)을 점령하고 그에 딸린 50여개 나라에게 항복을 받아 내었다. 이에 마한의 유민들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온조는 그들을 남김없이 목을 베어 죽였다.

 불조선 단군 기준이 위만에게 쫓겨나서 마한을 습격하여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씨를 한씨로 바꾸어 그 자손에게 전하다가 온조에게 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떠난 뒤 추모왕이 죽고. 고구려의 2대왕에 오른 유리는 졸본부여의 왕이었던 송양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유리왕 때에는 유난이도 선비족과 오환(과거의 선비족 즉 선비족이 둘로 나뉘어 그 하나를 오환이라 불렀음)족의 침범이 잦았는데 유리왕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유리왕은 선비족 토벌을 결심하고 장군 부분노의 계책을 쫓아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쪽 부대는 유리왕이 친히 거느리고 선비족의 전면을 쳤고. 부분노 부대는 샛길을 통해 선비족의 후방으로 다가 갔다.

 유리왕이 전면에서 싸우다가 짐짓 패한척하고 달아나자 선비군이 속은 줄도 모르고 뒤를 추격하니 그사이 텅빈 소굴을 습격하여 퇴로를 막고 유리가 다시 군사를 돌려 앞뒤에서 협공하니 드디어 선비가 항복을 하였다. 고구려는 선비를 속국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선비의 준동으로 국력이 소모된 반면 동쪽의 기름진 땅의 동부여가 부를 축적하여 나라가 강성 하였는데 해금와왕의 장남 대소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고구려로 하여금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꾸짖으며 불모를 삼을만한 사람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대소왕의 으름장에 주눅이 들은 유리왕은 대소왕의 요구를 따르려다 두 명의 왕자를 희생하게 된다.

 첫째 태자 도절은 유리왕이 동부여로 불모로 보내려하자 이를 따르지 않았다. 유리왕이 크게 노여워하자 근심이 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그만 병을 얻어 죽었다.

 둘째 왕자 해명은 뛰어난 역량을 지녔었다. 유리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국내성(지금의집안현)으로 도읍을 옮기자 이처럼 수치스럽고 나약한 일도 없다며 유리왕을 따라가지 않았다.

 

 유리왕은 해명을 괘씸히 여기고 북부여로 인질로 보냈다. 내심 북부여 왕이 해명을 죽여주기를 바랬다.

 어느날 북부여 왕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주어 그 용맹과 힘을 보려고 하자 해명은 즉시 활을 분질러 북부여 사람의 힘없음을 비웃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유리왕은 해명이야말로 장래에 국가를 위험에 빠트릴 어리석은 인물이라 생각을 굳혔다.

 그런데 북부여왕은 해명을 사랑하여 후하게 대접하고 나서 오히려 고구려로 돌려보냈다. 이에 유리왕은 더욱 부끄럽고 분하여 해명에게 칼을 주어 스스로 자진토록 하였다.

 두 왕자의 죽음은 궁궐 안 임금의 정실과 첩 사이에 벌어진 질투가 원인일수도 있겠지만 두 왕자의 죽음 원인 제공은 고구려와 동부여의 외교 문제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유리왕이 동부여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라 하겠다.

 

 동부여왕 대소는 여러차례 수만의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를 쳤지만 번번이 실패를 하였다.

 고구려로서는 강한 적을 막아내어 자신감을 얻었으나 반면 동부여는 여러 번의 실패로 재정만 탕진하고 오히려 곤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대소는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줄기차게 괴롭혔다.

 유리왕은 여러 작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여의 사신 앞에서 구걸하다시피 쩔쩔 매었다.

 이때에 나이는 어리지만 죽은 형 해명의 기개를 이어받은 왕자 주류(대무신왕)는 유리왕의 명령을 받은 것처럼 꾸며 동부여의 사자를 꾸짖었다.

 “일찍이...금와는 우리 추모왕을 한낱 목장지기로 업신여겼으며 그 아들 대소는 추모왕을 해하려 했다. 그런 대소에게 조공을 바치라니 어림도 없는 수작이다. 썩 물러가지 않으면 그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동부여 사자는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돌아가서 대소에게 고해 바쳤다.

 “뭣이라고?”

 대소는 불같이 노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동부여의 침략소식에 놀란 유리왕은 이 모든 것이 주류 때문에 동부여가 쳐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유리왕은 화가 났지만 이미 몸과 마음도 늙었고.또 다시 도절이나 해명처럼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군권을 모두 주류에게 내어주며 나가 싸우게 했다.

 주력부대가 기마병인 동부여 군사를 평원에서 맞아 싸운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라...짐짓 싸움에서 패하는 척 하면서 학반령(압록강북쪽유역) 골짜기로 유인해 크게 무찔렸다. 유리왕은 크게 기뻐하고 주류를 태자로 삼았다.

 주력부대를 전부 잃은 동부여는 한동안 잠잠해졌다.

 

 왕자 주류가 학반령 전투에서 동부여를 크게 깨트리고 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대무신왕) 오른 뒤 4년 만에 5만 군사를 일으켜 북벌을 단행하였다.

 동부여 원정길에서 창술에 뒤어난 마로와 검술에 능한 괴유를 얻어 길을 인도케 하였다. 가시라(지금의훈춘)남쪽에 진을 치고 진 앞 가까이 함정을 파놓고 동부여군과 일전을 벌였는데 함정을 파놓은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대소왕이 탄 말이 구덩이에 빠진 것을 보고 괴유가 얼른 달려가 대소왕을 베었다. 대소왕의 죽음을 본 동부여군이 달아날거라 에상을 하엿는데 오히려 격분하여 고구려군을 겹겹이 포위하고 찔려왔다. 이때 마로는 전투중에 전사하고 괴유는 부상을 당하였다. 대무신왕은 동부여군의 포위 속에서 7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는데 때마침 안개가 짙게 일어 지척을 분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군은 풀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진중에 세워 놓고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이물림(가시라 남쪽예상)으로 도망 쳤다가 많은 군사를 잃고 간신히 고구려로 돌아왔다.

 

 이번 전쟁의 승리자는 동부여이나 대소왕이 전사함으로서 정권 다툼이 시작 되었다.

 대소에게는 아들이 없어 그의 형제간들끼리의 왕위를 다투는 혼란 속으로 빠진 것이다.

 대소왕의 막내 동생(갈사왕)은 자신을 따르는 부하 백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지금의함흥)로 가서 사냥 나온 해두왕을 습격하여 죽이고 남가시라(남동부여)의 왕이 되었다.

 동부여에서는 대소왕의 사촌동생(훗날 낙씨)은 고향에서 먼저 자립하여 북동부여를 세웠는데 격분한 대소왕의 여러 동생들이 군사를 모아 응징하려하자 군사 1만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해버렸다. 그 공으로 대무신왕은 낙 씨 성을 하사하였다. 낙 씨의 시조다.

 군세가 약해진 동부여는 결국 고구려군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다.

 

 대무신왕은 대소의 동생 남려를 동부여의 왕으로 삼았다. 이로서 동부여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동부여의 새로운 왕 남려는 자신의 손녀를 대무신왕 후궁으로 보내고 화친을 맺었다. 그 후 남려의 손녀(대무신왕 후궁)는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얼굴이 기묘하고 겉모습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그 이름을 호동이라 하였다.

 

 어느 날...대무신왕이 호동을 불렸다.

 “듣거라. 북동부여도 차지하였고 너의 외가인 동부여와도 화친을 맺었다. 이제 저기 아래 낙랑을 없애고 그 땅을 차지해야겠는데 좋은 수가 없느냐?”

 “염려 마십시오. 제가 그 방법을 연구해 보겠습니다.”

 

 호동은 비밀리에 낙랑으로 들어와 낙랑국 왕 최리(최숭의손자)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는데 최리가 사냥터에 나타나자 호동은 결심하였다.

 “여차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죽을 각오로 여기 오지 않았던가....”

 호동은 최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최리가 호동의 외모가 심상치 않으매 호동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소인은 고구려의 왕자 호동인데 외가로 가던 중.. 길을 잃어 그만....”

 낙랑은 호동의 외가와 반대편인데 호동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였다. 상대가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란 말에 최리는 호동의 거짓말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대가 소문이 자자하던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더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최리는 속으로 옳다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안 그래도 날로 강성해지는 고구려가 두려워 화친을 맺고 싶어 고심을 하던 중이었는데 절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왕 길을 잃었다하니...나와 같이 가서 몇일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떤가?”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공주야...”

 “네...아버지..”

 “내 말을 잘 들어라. 너를 저기 호동왕자에게 시집을 보내려 한다. 너의 생각은 어떠냐?”

 아버지에게 호동을 소개 받을 때부터 호동에게 반해버린 낙랑공주가 혼인을 거절할리 없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최리는 호동에게도 말했다.

 “그대를 나의 사위로 삼고 싶네...왕자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거야말로 호동의 계획대로 척척 되어가고 있었다.

 “아리따운 공주님을 두고 나를 사위로 맞아 준다하니 이를 어찌 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서로 싫지 않다. 하니 잘 되었도다.”

 최리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낙랑공주와 호동을 결혼 시켰다.

 

 최리가 아버지 최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는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정복한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낙랑국에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리는 북과 나팔이 있어 외부의 적이 침입이 있을 때 마다 북을 쳐서 속국의 군사를 소집해 적을 물리쳤다.

 호동은 낙랑공주와 사랑에 빠졌지만 자신의 임무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호동의 근심어린 얼굴을 본 공주가 물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어요?”

 “.....”

 “말해 봐요..?”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이웃에 있으면서 원수처럼 싸우고 있는데...두 나라를 하나로 합쳐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뭐...좋은 방법이 없겠소?”

 “제가 도와줄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요?”

 “음 ....있긴 하지만...”

 “뭔데요?”

 “차마 입을 때기가 그렇소....”

 “말씀을 해 보세요. 내가 도와서 두 나라 백성이 행복해 질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해 볼게요”

 “정말이오?”

 “네..”

 “우리 고구려와 낙랑국이 화친을 맺지 못하고 밤이나 낮이나 다투는 이유는 서로 지기 싫어해서요. 만약 한쪽이 강하게 되면 힘이 약한 쪽이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화친을 맺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오.”

 “그런 건가요...?”

 “내가 고구려로 돌아가서 내 아버지 대무신왕에게 말슴을 드려서 화친을 맺게 하겠소. 내가 다시 당신 곁으로 돌아오려면 열흘정도 걸릴 것이오. 열흘 후 내가 돌아오는 그날에 맞춰서 북과 나팔을 없애 주시오. 공주가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한 가지는 오직 이것뿐이오. 할 수 있겠소?”

 “염려마세요”

 

 “전하...전하의 뜻을 받들어 이제 고구려로 돌아가려 합니다.”

 “오...사위... 부디 대왕께 잘 말씀드려 화친을 맺게 해 주시게나”

 “염려 놓으십시오. 잘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구려로 돌아간 호동은 대무신왕에게 경과보고를 하고 군사를 이끌고 낙랑국으로 쳐들어갔다.

 화친을 꿈꾸던 최리는 고구려의 침입에 놀라...북을 치려고 누각으로 올라갔다. 그런데...북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나간 후였고 낙랑공주가 울고 서 있었다.

 “너의 짓이란 말이냐?”

 “.......아버지..”

 “네가 나의 딸이지만 나라를 배신했으니 용서를 할 수가 없구나.”

 최리는 그 자리에서 딸을 베고 고구려군에게 항복을 하였다. 최숭이 처음 낙랑이라는 나라를 연 뒤 3대만에 그 막을 내렸다.

 호동이 낙랑공주의 주검 앞에서 목메어 울었다.

 “나를 용서하지 마시오...”

 

 대무신왕의 정실인 왕후의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렸다.

 후궁의 자식인 호동이 큰 공을 세우자 호동에게 태자 자리를 빼앗길 가봐 늘 두려웠다.

 “호동이 나를 강간하려 했습니다.”

 왕후가 대무신왕에게 거짓을 고했다.

 “네 이놈 호동아 바른 말을 못하겠느냐?”

 낙랑공주를 잃고 슬픔에 차있던 호동은 황후의 모함까지 겹치자 스스로 자결을 하였다.

 대무신왕 20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호동의 죽음을 알게 된 동부여의 왕 남려는 대노했다.

 지난날...아버지의 원수요 형의 원수이던 고구려이기도 하지만 날로 심해지는 고구려의 압박도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남려는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사돈의 나라 낙랑을 무참히 짓밟는 것을 보고는 낙랑국의 유민들과 합세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한편으로는 위만조선 우거왕과도 내통을 시도 하였으나 우거왕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지금은 고구려와 다툴 때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에 남려는 우거왕과의 연합은 포기하고 한나라와의 연합을 도모하였다.

 그러나...한나라와 통하려면 부득불 위만조선을 경유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우거왕은 국경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려는 하는 수 없이 바닷길을 통하여 한나라 무제에게 간곡하게 사정을 알리니 야욕이 넘치는 무제가 마다할리 없었다.

 “동부여의 남려왕이 도움을 청하니 어찌 이를 모른 체 하랴. 내 장차 동부여를 창해군으로 정하리라. 대장 팽오는 연, 제(지금의직예,산동)의 병마를 데리고 동부여와 낙랑을 도와라”

 “분부 거행이오.”

 팽오의 한군이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대항이 워낙 거세어 9년 동안이나 혈전을 벌였지만 매번 패전의 고배를 마셨다.

 이에 한 무제는 청해군을 패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철수시켜 전쟁은 끝이 났다.

 한 무제 원삭 3년 BC 126년 [단기 2207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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