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을 만끽하기 위해 서서히 잔혹하게 올라 온 서울은 도리어 준희에게 지옥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두려운 시선과 함께 점점 멀어지며 그를 둘러싼 공백의 길이 만들어졌고 그 정점 모든 감정의 시작은 중량 경찰서 서장의 공개 수배 브리핑이 방송되는 준희의 영상을 담은 대형 스크린에 있었다.
강남 터미널 바로 앞에 경찰 지구대가 있음이 생각난 준희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쫓지 않고 소리지르는 이 없으며 막아서는 이 또한 없었지만, 겁을 잔뜩 먹어 힘이 풀린 다리가 서로 엇갈려 바닥에 뒹굴러버린 그였다.
본능적으로 바닥을 짚은 오른손목은 이미 충격으로 시큰거렸고 무릎에선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안 돼!”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덮쳐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그는 크게 울부짖으며 아픈 손으로 바닥을 기어 중심을 잡은 후 다시 내달렸다.
‘다시 갇힐 수 없어! 안 돼! 젠장. 지금 어찌 된 상황이거지? 망할 신이 내게 기적을 행할 능력을 주고 바닥까지 떨어지도록 농락했어. 도망쳐야 해. 살아야 해.’
오만가지 생각에 휩싸인 가운데 억울함과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저기 있어요!”
등 뒤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고 바닥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왔다.
준희는 이 소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일단 달리고 봐야 했다.
생각은 그 다음.
감각과 본능에 온몸을 맡겨 무작정 달려 나갔다.
***
“어둠 속에 숨어 잔혹한 살육을 즐기던 악마가 맹수에게 쫓기는 사냥감 신세가 되었군요. 세상 일은 살아서도 모르겠더니 천사가 되어서도 영 모르겠어요. 더구나 인간들이 창조한 저 EP라는 곳의 변화는 조금도 예측 할 수없네요. 어쩌죠? 엘리고? 준희가 잡히면 애연을 괴롭힐 대상이 사라져 반가운 일이지만, 이대로 마무리되면 인간들은 또다시 EP에서 불행한 아이의 인생을 끝내기 위해 실험을 진행하지 않을까요?"
오아시스가 보여주는 준희 모습을 가리키며 엘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EP에 직접 개입할 수도 없지만, 저 준희란 괴물을 도와줄 수도 없어요. 그러나 당신 말대로 저 악이 이대로 경찰에 잡혀도 큰일이군요. 우리가 원하던 것은 애연의 행복과 EP의 장애, 그리고 김동욱 연구팀에게 경각심과 두려움을 심어 더 이상 참혹한 실험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죠. 하지만, 우리가 저곳에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원하던 방향이 무엇인지조차 이젠 아득해 머릿속에 가물가물하군요.”
엘리고는 엘리아가 가리키는 수면을 내려다보며 하얀 날개를 접어 팔짱을 끼듯 앞으로 둘러 자신의 양팔을 감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신을 감싸안은 따스한 엘리아의 온기에 다시 자신의 생각을 무겁게 입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김해인 연구원의 목숨을 앗아갈 수 없으니, 곧 영혼을 돌려놔야 하고 EP의 장애도 풀어야 할텐데 지금은 징계로 오아시스로 여기도 저기도 우리 힘이 미치지 않도록 막혔으니, 참 난감하군요. 잠시 이 상황을 그저 답답하게 지켜봐야 할 것같아요.”
엘리아의 하얀 손끝이 흔들리자 오아시스 한켠에 작은 파장이 일며 김해인 연구원의 노트북으로 경찰의 추격을 피해 한 없이 달리는 준희를 멍하니 주시하는 안재현 연구원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저 안재현 연구원도 EP에 접속하면 자신이 당장 뭐라도 할 거라 생각했겠죠. 다 부질 없어요. EP 세상은 스스로 판단하고 방향을 정하기에 저 세상의 창조주인 그도 우리와 바를 바 없어요.”
엘리아의 맑은 음성에 섞여 안재현 연구원의 중얼거림이 자그맣게 들려왔다.
“준희도 버그가 아닌 진화의 일종인가?”
안재현 연구원의 작은 중얼거림은 엘리고의 마음에 정체모를 울림이 되어 깊게 새긴 조각으로 남았다.
진화는 어떤 면에선 과학과 종교를 구분하는 경계로 창조와 대척점에 선 단어였다.
그리고 이 단어는 통제를 벗어난 EP의 AI와 상황을 버그와 시스템 오류로 치부하던 EP의 창조주 안재현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인정이었다.
이젠 자신의 힘이 영향을 줄 수 없어 그저 지켜봐야 하는 아무 반응 없는 수면 위를 짜증섞인 손으로 휘졌던 엘리아가 엘리고를 올려다 보았다.
“엘리고, 우리의 신도 이렇게 우릴 내려다 보고 계시겠죠?”
“아마도요. 엘리아.”
***
“권준희로 추정되는 인물이 서울 각지에서 목격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오고 있다.”
오늘따라 무척 상기된 표정의 꼰대가 수사팀을 돌아보며 말했다.
긴장된 표정의 수사원들 한 명 한 명의 눈빛이 자신에게 집중됨을 느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 일주일이면 벚꽃 축제다. 시장님이 축제 전까지 잡길 원하시고 무엇보다 서울에선 놈이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 서장님이 공개 수배까지 하며 호언장담을 하셨으니 우리의 명예가 걸린 일이다. 놈을 잡으면 이 계급 특진은 물론 해당 팀에도 포상이 주어질 것이다. 이 사건은 한 경사와 윤 경위가 담당하던 사건의 연장이니, 각 자역 광역수사대는 물론 다른 서에서 치고 들어오기 전에 우리가 마무리 한다.”
전국을 두려움에 떨게한 살인마를 잡길 원하는 서장과 퇴임 전 일생 일대의 큰 사건을 해결하고 싶은 꼰대의 기대가 가득했다.
무거운 분위기의 수사팀의 침묵을 깨며 윤 경위가 꼰대를 불렀다.
“팀장님!”
“응, 그래. 윤 경위. 그래 고생했네. 자네가 제일 고생했어. 뭔가?”
윤 경위를 대하는 꼰대 팀장의 얼굴이 무척이나 부드럽고 환했다.
“오전에 말씀드린 애연양 신변 보호 건은 어떻게 되나요?”
“아! 애연양. 그래 생각해 보았네. 오늘은 준희가 도망다니느라 무척 고단할 터이니, 애연 양을 습격할 겨를이 없을 거 같네. 내일 팀을 꾸려 볼 테니, 오늘 우리는 준희를 추적하는데 집중했으면 하네. 서장님의 기대가 크니 우리가 뭐라도 움직여야지 않겠나.”
사실, 준희를 다른 서에서 잡는다 해도 몽타주를 작성해 공개 수배를 진행한 중량 경찰서의 공으로 돌아 올 것이 분명했다.
꼰대에겐 준희를 누가 잡든 상관 없는 일로 그저 잡기 위해 움직이는 행동이면 족했다.
‘그 정도만으로도 공은 우리 팀에게 돌아올 거야.’
“네. 알겠습니다.”
내일 보호팀을 준비해 주겠다는 꼰대의 말에 더는 조르지 못한 윤 경위의 목소리에 불만이 섞여 있었다.
“자자, 접수된 여려 신고 중, 강남 고속 터미널 부근의 목격이 가장 유력해 보이니, 모두들 서두르기 바라네. 아, 그리고 윤 경위! 기쁜 소식이 또 하나 있네.”
꼰대의 독려에 몸을 움직이던 수사팀이 일제히 멈춰 윤 경위와 꼰대를 번갈아 살펴 보았다.
“한 경사 깨어났네! 한 경사가 오전에 의식을 찾았다고 제수씨에게서 전화가 왔다네. 윤 경위 자넨 한 경사 병실 들렸다가 애연양 신변 보호로 들어가게.”
그제야 윤 경위는 꼰대의 환한 표정이 단지 큰 사건을 물었기 때문만은 아님을 깨닫고 따라 환히 웃었다.
“넵! 명령 받습니다!”
***
혼수 상태가 길어져 경찰 지정 병원으로 옮기지 못한 한 경사는 예혼 마을에서 가까운 병원에 아직 입원해 있었다.
한 달음에 달려간 윤 경위는 호주에서 들어온 한 경사의 부인에게 안도 어린 시선과 함께 간단히 인사하고는 아직 침대에 누워 눈으로 그를 반기는 한 경사에게 달려갔다.
“선배님! 이제 일어나신 거에요? 농땡이가 너무 심한 거 아니십니까?”
“평생 범인 뒤만 쫓다가 마누라도 애들도 외국 나가고 이제 좀 편히 쉬는 거야. 임마. 이 늙은 몸으로 떼우고 쉬는 거니 징징대지 마.”
의식이 돌아온지 얼마 안 되었으나, 한 경사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나 없어서 편했나 보네요. 이제 당신 깼으니 전 호주로 애들 보러 가야겠네요. 윤 경위님 여기 앉으세요. 이 양반은 깨어나자마자 외국에 애들 놔두고 들어왔다고 잔소리부터 하더라고요.”
한 경사의 부인이 짐짓 엄포 놓으며 한 경사에게 자리를 권했다.
윤 경위에게 음료수를 건넨 뒤 편히 이야기 나누라며 부인이 자리를 피하자, 한 경사가 급히 윤 경위에게 물었다.
“나를 너덜너덜하게 만든 놈, 그놈 찾았나? 정체 파악했어?”
“제가 누굽니까! 당연히 찾았죠. 이제 잡는 건 시간 문제에요. 애연이란 여학생을 노릴 것이라 지키면 반드시 잡을 것입니다.”
윤 경위의 대답에 눈을 반짝이며 한 경사가 다시 되물었다.
“오! 그래? 그런데 애연이? 김애연?”
사랑하고 가엾이 여긴다.
애연의 이름에 담긴 키를 제일 먼저 인식해 수녀님께 맡겼던 한 경사는 윤 경위의 입에서 애연의 이름을 다시 듣자 14년 전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윤 경위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한 경사의 마음은 착잡했다.
‘내가 그때 부모님을 재대로 찾아주지 못했던 그 아이. 나때문에 고생했구나. 모두가 나의 업이다. 권준희 개자식. 애연이를 위해서라도 내 너 하나 꼭 잡고 만다.'
한 경사의 속 마음을 알 수 없는 윤 경위는 시계를 흘깃 보고는 품속의 권총을 꺼내 한 경사의 베개 밑에 넣어주며 말했다.
“전혀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놈이 선배님을 찾아 올 수 있으니 가지고 계십시오.”
“너는? 넌 괜찮은 거냐?”
“전 내일 애연양 보호팀을 꼰대가 꾸려준다고 했으니, 걱정 없어요. 그리고 그깟 놈 돌려차기 한 방이면 잡습니다. 누구처럼 약하지 않습니다.”
“자식 큰소리치기는. 크게 당해봐야 나처럼 정신 차리지. 네 총 가져가 임마.”
한 경사가 베개 밑에서 총을 꺼네 윤 경위에게 건네보지만, 윤 경위는 손사레를 치며 병실을 빠져 나갔다.
“괜찮아요. 전 애연양 신변 보호 때문에 가봐야 하니, 내일 팀 꾸려지면 다시 올게요. 치킨 사올게요!”
복도에서 울리는 윤 경위의 목소리에 침대에 다시 눕는 한 경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중얼거렸다.
“치킨이라. 맥주도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