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일반/역사
광무의 꿈
작가 : 백두혼
작품등록일 : 2019.10.22

대한제국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홍종우의 삶을 보면 된다.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로 건너가 근대화를 통한 조국 조선의 부국강병의 길을 도모한 자. 김옥균 등을 수괴로 한 친일 매국노들과 벌인 흉험한 싸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밀사는 이용익이었고 그의 곁에는 홍종우가 있었다. 근대사 전체를 통째로 뒤집는 위험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8. 고금도
작성일 : 19-10-30 15:56     조회 : 260     추천 : 0     분량 : 6414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8. 고금도

 

 

  잔잔한 파도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초저녁에 겨우 먹은 쌀죽을 다 토해 내고 얼핏 잠이 들었나 보다. 온 몸의 뼈와 근육이 제 자리를 잃은 듯, 한 올의 힘도 없었다. 그는 겨우 윗몸을 일으키고 귓가에 다시 들리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히 전라도 남쪽의 작고 따뜻한 섬, 고금도 바닷가의 파도 소리다. 그의 어린 시절,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던 그 소리. 그가 다다미 위의 침구에 몸을 눕힌 지 벌써 두 달째였다.

 

  Messageries Maritimes 선사의 최신식 기선 멜버른 호를 타고 요코하마 항에 도착한 것은 1893년 9월 14일 오후 두시. 도쿄의 하숙집에 짐을 풀고 그가 처음 한 일은 조선으로 편지를 보내 그의 안부를 전한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고금도에 계신 그의 부친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지난 5월이었다. 그가 파리의 기메 박물관에서 “다시 꽃 피는 마른나무”의 서문을 적고 있을 때 그의 가여운 아내는 남도의 섬에서 저물어 떨어지고 있었다. 글월을 읽고 잠시 막혔던 숨을 가다듬은 다음, 그는 통곡을 시작했다.

 

  그의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한양의 가산을 정리하여 그의 부친 홍재원과 아내와 딸을 고금도로 옮겼다. 그가 떠나는 길은 기약 없는 길. 한양에는 생계를 벌 가장이 없는 가족이 살 길이 없었다. 강진의 마량 포구에서 눈에 빤히 보이는 섬이었지만 섬은 섬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초가집을 새로 단장하고 조촐한 세간과 부엌 살림과 쌀섬을 들인 후 그는 그 섬을 떠나왔다. 어린 딸을 옆에 끼고 그가 탄 나룻배를 배웅하러 나왔던 하얀 치마저고리의 가냘픈 몸집이 그의 망막에 새겨져 버렸다. 아내의 손 한번 따사롭게 잡아주지 못하고 모질게 떠나온 길이었다.

  그의 목울대를 울리는 건 마른 통곡뿐이었다. 그리고 몸져누웠다. 청년이 된 후 단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던 그의 육체가 무너져 내렸다. 극심한 피로가 고열과 같이 몰려왔고 한 알의 밥알도 삼키지 못했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희미해져 잠듬과 깨어있음의 경계도 희미해졌다. 고열 중의 꿈은 늘 그의 위태로운 잠을 난도질했다. 과거의 일들과 미래일지 모를 일들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혼란스럽게 그의 어둠을 어지럽혔다.

 

  그의 나이 서너 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부친이 식솔들을 거느리고 내려간 섬이 고금도였다. 바다에서 나는 생선과 해변에 밀려 온 해조류, 완만한 언덕의 보리와 고구마 농사로 그의 식구들은 살아냈다. 몸만 부지런하면 굶어 죽지는 않는 곳이 고금도였다. 그가 집안의 큰 어른이신 홍병례의 연동리 서당에 다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자문에서 사서삼경까지 읽어냈고 공부하는 틈틈이 낚시를 하고 통발을 놓고 미역을 줍고 밭일을 했다. 유자가 익어가는 철이면 섬에도 제법 외지인들이 들어와 북적였다. 그는 외지에서 들어 온 상인들의 심부름을 하며 한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부친이 가진 유일한 꿈이 사대문 안의 세 칸짜리 기와집이었다.

 

  그의 뼈대가 여물고 고금도에서 같이 자란 아내를 얻은 다음 그들의 가족은 한양으로 올라왔다. 동대문의 포목점을 하는 상인에게 그의 호패를 넘기고 받은 삼백 냥으로 목멱산 밑에 작은 집을 하나 얻고 물장사를 시작했다. 예장동 골목 안의 물터는 전쟁터였다. 수백 개의 물통들이 줄을 섰고 질서는 삼엄했지만 그 질서는 때때로 주먹질로 무너지고 다시 서곤 했다. 물장수 조합을 통해 급수 구역과 가호가 정해지지만 물 받는 순서와 물통의 숫자는 조합이 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주먹도 쓰고 발길질도 하면서 스스로의 물통을 지켜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쌀을 들이고 마른 생선과 푸성귀를 샀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고봉의 밥을 퍼주었고 그는 행복하게 먹었다.

 

  동트기 전부터 아침 식후까지의 일이 끝나면 잠시 눈을 붙이고 양반 갓을 쓰고 서촌에 자리한 김윤식 대감의 사랑채로 갔다. 팔아먹은 호패는 나무토막일 뿐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시서를 쓰고 논했다. 그리고 서학에 눈을 떴다. 신미년의 양요와 왜적들의 운양호 사건 이후 한양의 문사들은 이제 신학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개화의 여명을 꿈꾸던 때였다.

 

  그가 그들을 처음 본 곳은 죽동궁에 자리한 민영익의 사저였다. 민영익은 중전 민씨의 친오빠의 양자가 되어 당시 민씨 세족 최고의 세도가였지만 어린 나이였고 서양 문물에 일찍 눈 떠 개화사상에 심취한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죽동 팔학사라 일켤는 김옥균, 홍영식, 이중칠, 조동희, 김흥균, 홍순형, 심상훈, 어윤중, 이들은 당시 죽동궁 민영익의 사저에 거의 매일 모여 개화사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며 조선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윤식의 소개로 그 자리에 함께한 그는 이들의 자리에 끼지는 못하고 말석의 한 자리에서 지켜보는 처지였다. 특히 김옥균은 얼굴이 환했고 언행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그들의 식견이 그와 크게 다름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지루하기만 했다. 지루하고 불편한 자리에서 살짝 빠져나온 그가 행랑 채 담벼락의 버드나무 밑에 앉아 담배를 한 대 물고 있을 때 그의 어깨를 툭 친 사람이 있었다.

 

 “이야 이거이 누굼메? 예장 물터에 홍형 아님메?”

 

 그는 그의 발치에 선 긴 그림자를 올려봤고 얼른 일어서서 담뱃대를 털어냈다.

 

 “이형 아니오? 참으로 오랜만이오? 듣자니 단천에서 노다지를 캤다던데 여긴 어인 일이시오?”

 “나야 민대감 발치에 올가미 하나 던져 놓고 세월 낚고 있지비. 홍형은 물장수 안하고 양반 갓이 웬일임메?”

 “물장수는 물장수고 선비가 수신하지 않으면 되겠소? 허허...”

 “내래 홍형이 뭔가 다른 거는 일찍 알아봤디. 물장수 조합에서도 님자 입담에 님자 주먹질 당할 자가 없지 않았슴?”

 “주먹질이야 먹고 살라고 한 일이고 이제 나라를 위해 뭘 좀 해야 되지 않겠소?”

 “저치들 몽땅 샌님 쭉쟁이들 아니겠슴? 물정 모르는 도련님들이 뭔 야무진 일을 하겠슴? 이러고 있지 말고 나랑 노다지나 캐러 다닙시다. 나라 일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고 나랏님도 돈이 있어야 나랏님 아니겠슴?”

 

 그는 털털하게 웃고 서있는 이용익을 쳐다봤다. 육척 장신의 그에게 비해도 작지 않은 키에 다부진 어깨와 불거진 광대뼈. 단단한 사내였다. 그보다 네 살 연하의 이용익을 처음 만난 건 물장수들의 조직인 수상조합에서였다. 북청 사람들이 주도권을 쥔 수상조합에서도 북청 토박이 이용익은 단연 빼어난 인물이었다. 돈되는 일이면 안하는 일이 없고 조선 팔도를 바람처럼 휘젓고 다닌다는 풍운아.

 

 “나가서 탁배기나 한 잔 하지비?”

 

 그들은 중궁동을 빠져나와 남촌으로 내려가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용익이 임오년의 난리 때 중전을 구하는 공을 세우고 단천 부사로 나갔다는 소문을 들은 것은 그 나중 일이었다.

 

  갑신년의 변고를 들은 것은 늦은 저녁밥을 먹고 예장동 물터에 막 나오던 참이었다. 그의 일은 한밤중에 시작하여 새벽에 끝나는 일이었다. 그의 물통들을 줄 세우는 동안 도성 내에서 소문 빠르기로 유명한 물 지게꾼들이 알리는 소식이 속속히 들려왔다. 우정국에서 난리가 났고 상감께서는 경우궁으로 난을 피했다는 소식이 처음이었지만 연이어 난리의 주모자가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이며 일본군을 등에 업고 상감과 중전을 납치했다는 소식과 한규직, 이조연, 윤태준,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의 여러 대신들을 쳐 죽이고 있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어왔다. 그 소식을 처음 들은 그가 느낌 감정은 불길 같이 솟구치는 분노뿐이었다. 철없는 어린 놈들이 물정도 모르고 대역적질을 하다니. 처음으로 습격당한 민영익은 크게 다쳤지만 살아남아 어딘가에 숨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다음날 청나라 군대가 한양에 들어왔다. 한바탕 총소리가 나더니 겨우 한줌도 안되는 역적들은 황망하게 도망을 쳐 제물포에서 일본 배를 타고 떠났다. 겨우 이틀, 한양을 들쑤신 난리가 정리된 후 그는 그들이 남긴 그들의 ‘정강 14조’라는 것을 들여다 봤다.

 

 

 1. 청에 잡혀 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한다.

 5. 전후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한다.

 

  겨우 이 따위 것들을 하려고 일본 세력을 끌어들여 정변을 일으키고 그 살육을 벌인 것인가? 그는 김옥균 도당의 행위에 한심스러움을 넘어서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이런 멍청한 어린 놈들. 그 멍청함이 조급해져서 한계를 넘으면 이런 황당한 짓거리를 할 수 있구나. 정강 14조에서 그나마 의미가 있는 것은 1조와 2조 뿐이었다. 청나라에 하던 사대를 거두자는 것인데 청나라 군대를 불러 들인 것은 임오군란 때의 우리 조정이었다. 그 청나라 군대가 한양에 멀쩡하게 남아 있는데 군왕과 조정에 대한 반란으로 친청사대를 끊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더구나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 청국 군대를 쳐서 성공한다 치면 그 후론 일본의 영향력과 입김 속에 머물게 됨을 모르는가? 2조에선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의 권리를 세운다 했지만 선언적인 의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양반제의 폐지를 명시적으로 선언한 것도 아니고 문벌을 폐지하자는 것은 곧 민씨 척족을 겨눈 것에 불과했다. 나머지 조항들은 따져볼 여지도 없이 뻔한 것들이었다. 그저 주상께 고하여 그렇게 행하면 될 일들이었다. 정변 전에도 늘 상소하고 상주하던 조항들이고 행하지 못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것들이었다. 더구나 개화파의 방파제와 사랑방 역할을 하던 민영익조차 살해하려 하다니, 이건 대역죄인인 동시에 사람으로서 배은망덕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였다. 정변을 일으킨 세력은 김홍집, 박정양, 어윤중, 신기선, 김종한, 민영익 등 그들 외의 모든 온건 개화파조차 적으로 돌려 살해하거나 추방하려 했다.

 

  난리가 끝난 후 시중의 민심은 준엄했다. 백성들의 민심과 아무 상관없이 일본 물을 먹은 몹쓸 놈들이 벌인 무책임하고 철없는 역적질일 뿐이었다. 난리를 일으킨 급진 개화당의 면면은 하나 같이 일본에서 교육받은 자들이었다. 길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신사 유람단의 일원으로 다녀오거나 그저 몇 개월 일본의 문물을 살피고 그곳의 군사학교에 단기로 견습한 수준이었다. 김옥균이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지원 약속을 얻어내고 거사를 했지만 김옥균의 배후에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 유력 정치인들의 조종이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심지어 일본의 낭인 민병대를 군함에 태우고 조선에 들어가 김옥균 일파를 지원하는 방안까지 준비했다. 청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청산할 때가 분명히 되었지만 그것을 일본의 힘으로 청산하는 것은 곧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일 뿐이었다. 순진한 조선의 급진 개화파는 아직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탐욕과 야심을 읽어내지 못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주는, 좋은 이웃으로만 일본을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갑신년의 난리 이후 개화파라는 세력은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난리의 주역인 급진 개화파는 물론이고 급진 개화파의 공격을 받은 온건 개화파 역시 수구파로 전향하거나 정계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이후 개화파에 대한 민심은 대역무도하고 배은망덕하며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친일 세력이라는 것으로 굳어졌다. 개화에 대한 선구적인 열망과 국가적인 동력은 한동안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개화의 개짜만 꺼내도 개 취급을 받는 세월이 꽤나 흘러야 했다.

 

  갑신정변의 한심한 결과가 홍종우의 생각과 행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 역시 조선이 서둘러 개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명확했지만 갑신정변 이후 그 ‘개화’에 의심을 가졌다. 김옥균 박영효들이 일본에서 배워 온 ‘일본식 개화’가 과연 맞는 것인지, 그 ‘일본식 개화’가 가능한 것인지, 그 일본의 힘을 빌려 성취한 ‘일본식 개화’에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은 없는 것인지. 일본조차 서구 문물을 받아 들인지 겨우 몇십 년이 되지 않은 터였다. 조선의 개화를 일본의 관점과 입장에서 볼 일이 아니고 그 서구 문명의 원류인 영국과 프랑스에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됐다. 그것이 그를 프랑스로 이끌었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난 몇 년의 일들이 그의 허물어진 육체와 정신 속을 파도처럼 다시 넘나들었다. 고열에 들떠 누워 있노라면 늘 고금도의 얌전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어렴풋한 아내와 딸의 얼굴이 달처럼 떠올랐다 기울곤 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0 18. 승지홍종우등상소 2019 / 11 / 10 256 0 7683   
19 17. 광무 2019 / 11 / 9 260 0 6664   
18 16. 제국의 꿈 2019 / 11 / 8 290 0 9956   
17 15. 창의 토왜 (彰義 兎倭) 2019 / 11 / 7 272 0 3767   
16 14. 건청궁의 피바람 2019 / 11 / 6 274 0 3794   
15 13. 치욕의 갑오년 2019 / 11 / 5 259 0 8514   
14 12. 어사화 2019 / 11 / 4 260 0 9286   
13 11. 동화 양행 2019 / 11 / 2 278 0 5249   
12 10. 이와타 슈사쿠 2019 / 11 / 1 254 0 12606   
11 9. 정한론 2019 / 10 / 31 266 0 4338   
10 8. 고금도 2019 / 10 / 30 261 0 6414   
9 7. 다시 꽃 피는 마른 나무. 2019 / 10 / 29 252 0 4473   
8 6. 히야신스(야셍뜨) 신부 (2) 2019 / 10 / 28 263 0 6819   
7 6. 히야신스(야셍뜨) 신부 (1) 2019 / 10 / 27 249 0 6419   
6 5. 국가란 무엇인가 2019 / 10 / 27 251 0 8856   
5 4. 기메 박물관 2019 / 10 / 25 243 0 5725   
4 3. 펠릭스 레가메 2019 / 10 / 24 248 0 12738   
3 2. 파리 외방전교회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2019 / 10 / 23 260 0 6592   
2 1. M.M 르 사할리엔. 2019 / 10 / 22 260 0 5592   
1 프롤로그 2019 / 10 / 22 414 0 301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천무행
백두혼
조선해방전쟁
백두혼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