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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현대물
더 기븐(The Given)
작가 : 풍령인
작품등록일 : 2016.7.7
더 기븐(The Given) 더보기

작품안내
http://www.storyya.com/bbs/b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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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더보기 첫회보기

풍령인 작가의 더 기븐은 꽤 오래 묵은 작품이다.
작가가 영국 유학시절 축구에 눈을 뜨게 되면서 적게 된 이 이야기는
당시 수많은 독자들이 열광했던 “축구이야기”라는 소설과
같은 시기 같이 주목받았던 소설이며,
이제야 그 첫 번째 이야기가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둥근 공 하나, 꿈을 향한 열정으로 잔디장을
누빈 젊은 청춘들의 성장 이야기.

 
11 화
작성일 : 16-07-12 13:27     조회 : 669     추천 : 0     분량 : 1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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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2003. 12. 24.

 대한민국, 경기도

 

 

 24일.

 한 해에 24일은 12번이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이름이 붙어 특별히 여겨지는 날은 단 하루, 12월의 24일의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이브는 세계의 각 지역과 종교마다 다르다. 그리스 정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에는 그레고리력 1월 6일을 이브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가 12월 24일을 이브로 기념하며 그 날은 세계 모든 연인들이 축복하는 날이다. 동시에 솔로들에게는 가슴과 옆구리를 시리게 만드는 우울한 날.

 커플이 거리에 나가 주황빛으로 반짝이는 시내의 거리를 볼 때에 솔로들은 맥컬리 컬킨과 함께 하는 나 홀로 집에의 방영 시각이나 확인해야 하는 것이 그네들의 인생인 것이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모 애니메이션에 잉어킹이란 놈이 있다. 공격력은 없고 설정에 의하면 맛도 없다고 하는, 왜 존재하는지 모를 놈. 그런데 그놈이 로또 이상의 확률을 뚫고 진화할 경우 최강의 공격력을 가진다.

 이런 경우가 솔로에게도 있는데, 그들을 화려한 싱글이라고 부른다.

 솔로 주제에 감히 여자들과 잘 알고 자주 어울리며 ‘마음만 먹으면 여친 따위는 사귈 수 있어. 못 믿어?’ 라는 말이 절대로 거짓이 아닌 이들을 두고 말하는 이, 바로 화려한 싱글.

 그들은 일명 베오베, Best of the BEST다. 솔로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며 커플도 그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다. 솔로의 생활을 하며 커플의 향락을 즐기는 자. 어찌 넘사벽이 아니랴.

 그렇다면 지후는 어디에 속할까?

 루저 오브 루저, 솔로?

 반타작, 커플?

 진정한 베오베, 화려한 싱글?

 어제까지만 해도 지후는 커플과 화려한 싱글에 각기 한 발씩을 걸쳐둔 상태였다.

 예진과의 관계도 그 날 이후로 제법 가까워졌다. 남들이 보면 사귀나? 아닌가? 하는 사이 정도는 된 것.

 이런 관계가 예진에게 어떨지 몰라도 지후는 나름 괜찮은 관계였다. 구속도 없고 자유도 없으니까. 즉 그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지만 이브를 보내기엔 적절한 관계.

 그런데 어제로 작살났다.

 깨졌냐고? 그런 건 아니다.

 문제는 12월 27일로 잡힌 쇼 케이스 덕분에 회사 내 연습생들이 무지하게 구르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남자 아이돌이 데뷔했으니 여자 아이돌도 데뷔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문이 퍼져서 이번 쇼케이스에 목숨을 건 이가 많았다.

 예진도 목숨까지는 아니어도 일단 쇼케이스를 못 보면 좋은 꼴 못 보니, 열심히 노력 중이다. 덕분에 지후와 예진의 크리스마스 데이트는 물 건너 간 셈.

 꼴좋다.

 “에라이, 젠장…….”

 지후는 욕설을 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태엽에게 전화하니 놀러 갔다고 말한다. 어디로 갔냐고 하니 하와이로 갔단다.

 이 개자식, 집 잘 사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왠지 부럽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베프가 잘 살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어차피 나중에 자신도 크게 벌면 될 거라는 생각도 있고.

 다음에 핸드폰을 열어 연락하려 하니 별로 없었다. 급 연락해서 만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

 “내 인간 관계가 이랬나…….”

 왠지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일명 크리스마스 증후군으로 기념일마다 자신의 인간관계의 비참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증후군. 불치병이기도 하다.

 포기하고 집에 박힐까 하지만 남자로써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는 것은 죽음만큼 가혹한 형벌이다.

 어쩔 수 없이 설아에게 연락을 했다.

 “여보세요, 누나?”

 [어? 우리 귀염둥이 지후 아니야? 왜?]

 “어……. 그게…….”

 [설마 우리 지후가 크리스마스에 놀 사람이 없어서 누나에게 전화했다는 건 아니겠지? 응? 응? 누나를 그렇게 물로 본 건 아니지?]

 마치 그게 목적이라도 ‘그게 아니고…….’ 로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말. 하지만 우리의 귀염둥이 윤지후 군은 꽤나 시크하다.

 “맞는데.”

 [실망이야. 누나가 그렇게 쉬워 보였어?]

 “그건 아니니까 걱정 말고. 내일 놀 수 있어, 없어?”

 [글쎄, 누나 남자친구랑 놀기로 했는데. 약속 깰까?]

 설아에게 남자친구는 지후만도 못한 존재다. 조금 불쌍하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괜히 이상한 짓 하다가 걸리지 마.”

 [우리 지후, 누나 걱정해 주는 거야? 어이구, 예쁘다.]

 “응. 아니까 끊어.”

 설아는 몇 마디 시답잖은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끝까지 자신이 먼저는 못 끊는다는 말에 지후는 쿨하게 먼저 끊었다.

 “에휴.”

 지후는 핸드폰을 옆에 툭 던지며 침대에 누웠다.

 할 일도 없고, 할 것도 없고.

 지루하고 심심하기만 하다. 차라리 유스 연습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를 시기하는 애들이 많기는 해도 다 고만고만한 애들이라 발라 주는 맛이 쏠쏠하다.

 어린 것들. 엄마 젖을 1만 광년은 더 빨고 오너라.

 지후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컴퓨터나 하려고 자리에 앉으려 할 때였다.

 딩동!

 “……누구야?”

 올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다 싶어서 약간 긴장한 채로 인터폰을 보았다.

 보이는 것은 검은 정수리.

 “뭐야?”

 머리카락이 긴 게 남자는 아니다. 그러면 여자?

 설마 스토커?

 벌써 자신에게 스토커가 생긴 것인가? 유럽 유명 선수는 유스 시절부터 스토커가 있다고 하던데.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너냐.”

 지후는 곧장 문을 따 줬다. 그러자 대번에 안겨오는 여자.

 “오빠…….”

 “왜.”

 “울 엄마, 너무하잖아!”

 소녀는 울상으로 그렇게 울먹였다.

 “그래서 또 가출이냐?”

 지후의 핀잔에 소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뭐 어때. 여기가 남도 아니고.”

 “외숙모 걱정하신다. 전화는 드렸어?”

 “안 했으니까 가출이지!”

 소녀는 여러 번 들락날락 거린 듯 거침없이 지후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만졌다.

 그리고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오빠, incoming이 뭐야?”

 “incoming? 그게 뭐냐?”

 지후의 표정을 본 소녀는 흐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라고.”

 “됐어.”

 소녀는 그렇게 말을 끊고는 의자를 돌려서 그를 보았다.

 “오빠. 나 심심해.”

 “나도 심심해.”

 “그럼 나갈까?”

 지후는 순순히 지갑 사정을 고백했다.

 “미안하지만 오빠가 돈이 없다.”

 “사촌 동생 사줄 돈도 없냐!”

 “맞먹을 때는 동갑이고, 이럴 땐 동생이고?”

 지후의 말에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대들었다.

 “이이익! 그래도 꼬박꼬박 오빠라고 부르잖아!”

 “동생이니까 당연히 불러야지.”

 한 마디도 안지는 지후의 말에 소녀는 한숨을 쉬었다.

 “오빠는 인기 분명히 없을 거야.”

 “많거든.”

 소녀가 한쪽 입매를 피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 그래서 24일 날 집에 있구나?”

 “아, 그래서 너도 24일 날 여기에 왔구나?”

 “…….”

 소녀, 침몰.

 너무 큰 직격타였기 때문일까. 우울해 보이는 그 얼굴에 지후의 마음이 또 아렸다. 왠지 아픈 곳을 건드린 것 같았다.

 “미안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하는 지후. 하지만 소녀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오빠…….”

 “응?”

 “나, 선수 생활……. 잘 한 걸까?”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묻어지는 짙은 회의감.

 자신감도, 확신도 없는 목소리였다. 어쩌면 한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한탄.

 지후는 그러한 소녀의 모습이 낯설었다. 언제나 당찬 모습만 보여주던 소녀였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도 했다.

 “김유나.”

 “응…….”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이유라도 있어?”

 “그냥……. 친구들이랑 놀지도 못하고 매일 같이 훈련만 하고…….”

 2002년 슬로베니아 트리글라브 트로피에서 노비스 부문 우승을 시작으로 지난 달 크로아티아 골든 베어 노비스 부문에서 우승한 그녀, 김유나.

 그녀의 회의는 타당하다.

 언제나 그렇듯 우승이라는 이름 아래에는 무수한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2위 이하의 모든 선수들은 물론이고 국내에선 비인기 종목인 피겨 스케이팅인 만큼 지원도 적어서 많은 것을 유나와 그녀의 부모들이 감당해야 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선수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도 충분히 많다. 몸매 관리를 위해 고 열량의 식품은 꿈도 못 꿀 일이고 훈련 량을 채우기 위해 따로 친구를 만날 시간이 없다.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그렇듯 끼리끼리 친해지기 마련인데 피겨는 고독한 종목이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드라마로 이야기 할 때, 데뷔한 아이돌로 이야기 할 때,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 TV를 볼 시간도 없었으니까.

 그때마다 소외되는 느낌. 내가 이걸 해야 할까. 내가 무슨 영광 보자고 하고 있나. 그리고 이것을 계속 시키는 엄마도 미웠다.

 한 번 입이 열린 유나는 그 간의 한을 계속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지만 세상의 쓴맛을 조금씩 알아가는 아이. 세상의 고단함을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어렸을 때 그저 어리게만 보이던 그녀가 새삼 훌쩍 커 보였다.

 “힘들겠네.”

 이야기를 다 들은 지후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빠는 그래도 축구니까 나은 거야…….”

 유나의 투정에 지후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원래 스포츠, 그중에서도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야. 그 냉정함 앞에 인기와 비인기는 쓸모없는 잣대에 불과해. 살아남는 것은 언제나 그 세계의 1퍼센트 이내니까. 그들이 모든 것을 독식하지.”

 “하지만 피겨는 1퍼센트에 들어도 힘들다고!”

 유나의 말에도 지후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잖아…….”

 지후의 반문에 유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매일 같이 같은 년생이라고 오빠라고 안 부른다고 말은 해도 마음 속 깊이 친 오빠같이 생각하는 지후였다. 생각이 깊고 행동도 본받을 만한 그.

 그가 하는 말이니까. 왠지 자신의 생각이 흔들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최고를 좋아하지. 언제나 원조, 최초, 세계 신기록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그게 피겨랑 무슨 상관이라고…….”

 “네가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 되잖아.”

 “에?”

 차원을 뛰어넘는 지후의 해결책에 유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기록은 언제나 깨지라고 있는 거야. 가까운 예로 100m 단거리를 들어 보자. 100m 기록에서 10초의 벽이 깨진 게 언제인지 알아?”

 “모르지…….”

 “고작 해야 40년 전이야.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인간은 100m를 9초 70대에 달리는 시대가 왔어. 그 40년 사이에 무려 0.30초나 줄어들었지. 그러면 그 40년 사이에 인류가 진화한 것일까?”

 지후는 부드러운 눈으로 유나를 보았다.

 “아니면 지난 2천 년 가까이 인류가 진화하지 못해서 10초를 넘기지 못한 걸까?”

 “그건 아니겠지?”

 “그래. 단순한 생각일 뿐이야. 100m를 10초 안에 달린다는 건 단순 계산으로 1초에 10m를 달린다는 거야. 딱 봐도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지. 100m를 10초 안에 달리면 바람이지 인간은 아닌 거 아냐? 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이런 생각이 깨진 순간 이제 인간은 9초를 함락시키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 거야. 더 이상 10초는 문제가 아닌 거지.”

 지후의 말에 유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직 네 실력으로는 세계 신기록은 꿈도 못 꾸겠지. 그건 현실이야. 네가 바라보고 대면해야 하는 현실. 하지만 미래에도 그럴까? 네가 조금 더 성장해서 성숙한 모습을 갖춰도 실력은 지금 그대로일까?”

 “아니겠지.”

 “그래, 김유나. 그 생각을 하면 돼. 그리고 나는 네가 자라는 그 순간 더 이상 세계 신기록을 불가능하게 보는 이가 아니라고 본다. 이 오빠를 믿으렴.”

 “치……. 말은 잘해서……. 만일 안 되면 오빠가 나 책임 질 거야?”

 “네가 사촌만 아니었어도 책임지겠는데, 사촌이라서 못 지겠다.”

 지후의 말에 유나는 풋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올라가 지후의 팔짱을 끼고 누웠다.

 “뭐야?”

 지후가 시크하게 물었다.

 “그냥 누워봐. 옛 생각 좀 하게.”

 “어린 게 무슨…….”

 지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순히 누웠다. 그러고 보니 옛날엔 이렇게 잘 누웠던 것 같다. 유나를 돌보면서 말이다.

 “옛날 생각 안나? 여기서 오빠랑 떨어지기 싫다고 울었잖아.”

 “덕분에 그날 나 바지 벗겨지는 줄 알았다.”

 “그때 확 벗겼어야 했는데. 킥!”

 “안 벗겨줘서 고맙구나.”

 지후의 말에 유나는 빙긋 웃으며 추억을 더 꺼냈다. 말하고 보니 참 많았다. 많지 않은 12년이지만 쌓인 두께는 120년이 부럽지 않았다.

 “그거 알아, 오빠?”

 “뭘?”

 “나, 예전에 형제끼리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맨 처음 생각난 신랑감이 오빠였어.”

 “그래서 기뻤어?”

 지후의 반문에 유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쑥스러운 듯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응.”

 지후는 유나의 대답에 그녀를 보고는 손을 대어 머리를 만졌다.

 “열은 없는데…….”

 “아씨, 사람이 진지하면 좀 진지하게 들어 봐!”

 유나는 그렇게 핀잔을 주며 입술을 삐죽였다.

 “어쨌든! 나 그 때엔 참 기뻤어. 오빠라면 참 좋은 신랑이 되어줄 것 같았거든. 언제나 날 지켜줄 것 같았고…….”

 “내가 언제 널 버린 적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랬는데 사촌끼리는 결혼 못 한대. 내가 그 날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그날 오빠한테 전화도 했었는데.”

 지후는 몇 년 전 유나가 울면서 전화한 날이 떠올랐다. 전화기를 잡고 우는 데 횡설수설했다. 뭔 말인지 몰라서 겨우 달래고 끊었는데 그게 이 이유 때문이었다니.

 “아, 그 울면서 전화한 그 날? 그 날이 그것 때문이었어?”

 “기억하네?”

 “난 별 걸 다 기억하니까. 내가 너 씻긴 것……”

 “미쳤어, 미쳤어! 당장 기억에서 지워!”

 유나는 아까보다 얼굴을 두 배는 더 붉히며 소리쳤다.

 “가능하면.”

 “씨이……. 그래도 오빠니까 봐 준다.”

 유나의 말에 지후는 피식 웃으며 유나를 잡아 침대에 눕혔다. 유나는 새색시 같이 얼굴을 붉힌 채 옆에 누웠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헤에? 오빠, 내가 고백하니까 설렌 거야?”

 “뭐, 나도 남자니까. 여자애의 고백이 싫지는 않지. 하지만 떨리지는 않는다. 미안해. 우유를 조금 더……. 아, 알았어!”

 유나는 지후를 때렸다. 그 죽일 놈의 마지막 말이…….

 하지만 그녀도 안다. 이게 나름대로 지후가 그녀를 배려하는 것이라는 걸. 고백하고 무안해 할 그녀에게 다가가는 지후의 모습이라는 것도.

 “지금은……. 예전보다는 괜찮지. 그냥 좋은 오빠 정도?”

 “다행이네. 세상에 나보다 좋은 남자는 없어도, 나 정도 되는 남자는 있을 거야. 그 중에서 골라잡아.”

 “하여튼 입은 안 죽어요.”

 유나는 지후의 입술을 잡고 흔들었다. 유나가 손을 뗐을 때 지후가 말했다.

 “잡고 흔들면 내 입술이 더 섹시해져서 여자가 더 많이 붙을 텐데. 나중에 인터뷰하면 가장 섹시한 입술 1위 소감에 너를 말하마.”

 “허이구, 그러세요?”

 지후의 농담에 유나는 마치 애 보듯이 놀렸다. 지후는 별 말 없이 피식 웃고 말았다.

 “유나야.”

 “응?”

 “맛있는 거 먹을까?”

 “어떤 거?”

 유나가 반색하며 물었다.

 “고기?”

 “살찌는데…….”

 유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지후는 걱정 말라는 듯이 말했다.

 “채소 뷔페라고, 정확히 말하면 고기 맛 나는 거지. 가자. 오빠가 예쁜 여동생 사줄 돈 정도는 있다.”

 “응!”

 유나는 밝게 웃었다.

 정말 밝았다.

 

 

 Chap. 2004년

 

 2004. 1. 3.

 대한민국, 경기도

 

 

 새해가 밝은 지 이틀 밖에 안 된 날부터 화성에 위치한 수원 레드윙즈의 연습구장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앞으로 3개월 정도 남은 K-리그 2004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 만이라면 수원의 소속 선수들도 별 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임 김준호 감독이 떠나고 이번에 새로 부임하는 감독이 다른 사람도 아닌 차범수 감독이라는 소식.

 선수들이 기대감에 동요하는 것도 당연했다.

 “정헌이 형, 이번에 차범수 감독님 성향은 어떤 성향이실까요? 예전 분데스리가에서 보이던 플레이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하시려나?”

 차범수 감독의 현역 시절은 그야 말로 전광석화라는 말이 어울린다. 우스갯소리로 경마장에 보내도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그가 얼마나 빨랐는지는 알 만한 것.

 그것뿐만이 아니라 톱 스피드에서의 드리블링 능력, 볼 키핑 능력을 갖춘 스트라이커였다. 윙어를 잘 활용하여 중간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스타일의 공격을 즐겼다.

 때문에 본인 스스로의 골 포인트만이 아니라 어시스트도 많이 기록한 축구 역사에 길이 남는 스트라이커 중 하나이다.

 “모르지. 일단 감독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아 오셨다.”

 서정헌의 말과 함께 약간 부산하던 선수 대기실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뚜벅뚜벅!

 발걸음만이 조용하게 들리는 가운데에 나이를 피해갈 수 없지만 푸근해 보이는 인상의 짙은 황갈색 피부를 가진 탄탄해 보이는 초로에 접어든 인물이 나타났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이번에 수원에 새로 부임하게 된 감독, 차범수입니다.”

 차범수 감독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모두가 하나같이 박수와 환호를 질렀다.

 와아아아!

 짝짝짝!

 제법 길게 끈 박수와 환호가 지나가고 차범수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팀을 재정비할 기간이 3개월 밖에 남지 않았지만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기존의 스타팅 멤버들은 긴장하고 자리를 지켜낼 수 있도록 노력해주세요. 안주하는 선수에게는 가차 없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국가대표 감독은 감히 맡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이 말은 부드럽고 공손했지만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었다. 선수들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내 말에 모두 동의한 것으로 보고……. 그럼 지금부터 감독인 만큼 말을 편하게 하겠습니다.”

 “예!”

 선수들의 힘찬 대답에 차범수 감독은 미소를 짓고는 옆에 선 사내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사내는 어디론가 나가서 3명을 데려왔다.

 “이번에 팀에 합류한 선수들을 소개하마. 78년 생 고혁수. 이미 한 번 우리 팀에서 뛴 경력도 있고 말하지 않아도 잘 알거라 본다.”

 감각적인 패스와 슈팅, 예리한 크로스로 인해 앙팡 테리블이란 별명을 얻은 고혁수. 그가 수원에 돌아왔다.

 “김태의. 앞으로 나와요. 74년 생으로 포지션은 윙어와 공격수. 모두 박수!”

 성남에서의 그의 활약을 맛본 수원 선수들이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다음은 김동연. 84년 생으로 일본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뛰었고 이번에 우리 팀에 들어오게 됐어. 모두 박수!”

 트리니타에서 뛰기는 했지만 팀 내에서 외국인들과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 크게 눈에 부각되는 활약을 펼치지 못한 김동연. 때문에 박수 소리는 김태의에 비해 적었다.

 “마지막으로 팀의 가장 막내. 윤지후. 90년 생, 아직 만 13세. 유스에서 데려왔으며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

 “…….”

 차범수 감독의 말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만 13세? 프로 경기에서 만 13세와 함께 뛰라고?

 팀에서 최고령자인 서정헌과 무려 20살 차이다. 조선시대로 치면 애 아빠와 애가 함께 한 팀에서 뛰는 셈이다.

 “윤지후, 앞으로 나와서 자기소개를 해 봐.”

 차범수 감독의 말에 지후는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키 181cm, 가슴둘레 94cm의 윤지후. 누가 보기에도 중학교 3학년의 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힘들었다.

 “선배님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윤지후 입니다.”

 90도에 가깝게 고개를 숙이는 지후. 어린 나이에 프로에 입단하면 ‘내가 최고야!’라는 자만심이 생길 법 한데 그런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요즘 애들은 대체 뭘 먹고 저렇게 큰 거야?”

 “그러게 말이다…….”

 이진우가 서정헌에게 작게 물었다. 인사까지 받은 마당이지만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고작 만 13세짜리가 무려 181cm에 저런 몸이라니.

 “말이 많은 것 같은데 오늘 연습 게임 한 번 해 보고 실력을 평가해 보도록 한다.”

 차범수 감독은 미리 짜뒀던 A팀과 B팀의 스쿼드를 발표했다.

 

 A팀

 

 나르손

 마드셀

 주재진

 서정헌

 박건한

  김도현

  이진우

 최성영

 이병윤

 곽태주

 

 

 B팀

 

 

 김동연

 김태의

 고혁수

 권오집

 윤지후

 고창혁

 가브리엘

  조병국

 우르모브

  무사

 

 A팀은 작년도 수원의 주력 스쿼드였고 B팀은 이번에 들어온 신입선수들이 대거 기용된 일종의 신생팀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였다.

 “A팀은 김준호 감독의 전술을 잘 이해하고 있겠지? 그 전술대로 하고 B팀은 제가 직접 감독하는 걸로 하자.”

 차범수 감독의 말에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알 수 있는 게 감독의 전술능력과 신입선수들의 능력이다.

 고혁수나 김태의 정도라면 검증하지 않아도 되지만 몇몇은 검증해야 했다. 특히 윤지후는 아직 어린 나이에 멘탈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몸만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프로의 세계가 아니다. 목숨을 건 전장 같은 이곳, 프로의 세계는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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