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은오가 모델 일을 하러 서울에 간 사이 켄이 이사한 곳으로 놀러 갔다. 은오의 집에서는 걸어서 20분 거리. 생각보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집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켄이 주스를 담은 컵을 내게 건넸다.
"은근히 귀엽게 해놓고 사네요."
"다들 의외라고 하긴 해, 자 딸기 주스야.”
“깜찍하네요, 그 앞치마.”
나는 켄이 두르고 있는 딸기무늬 앞치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의 취향에 함부로 비웃지 말라고’ 켄이 말했다.
"은오씨가 살인자를 잡는 것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알고 싶어요."
"흠..."
"저주에 걸리기 전부터 그 사건에 대해 알기 위해 제가 사는 집에 찾아왔었어요."
"그랬겠지."
"켄씨, 물음에 답해주세요."
내 물음에 한숨을 내쉰 그가 자리에 앉았다.
"...이걸 너에게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제가 알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상처받을 지도."
나는 묵묵부답으로 켄을 바라봤다. 켄은 망설이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10년 전에 소중한 사람을 잃었었다는 얘기를 했었지?"
"...기억나요."
"그 소중한 사람도 비슷한 사건으로 잃었거든."
"어떻게...소중한 사람이었어요? 사랑하던 사이였나요?"
나는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쓸어내리며 물었다.
"사랑하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녀와 매우 가까웠어. 마치 가족 같았지."
그녀.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군요."
시무룩해진 나를 지켜보던 켄이 잠시 후 정적을 깼다.
"하지만 은오가 그녀를 한 여자로서 사랑하지는 않았어. 정말 여동생처럼 아낀 거지. 이연씨와 지금 하듯이...그런 남녀 관계가 아니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
"그녀는 물론 은오를 그 이상으로 생각한 것 같지만. 어쨌든, 어느 날 그녀는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고, 온몸에 피는 모조리 빠져나가 있었지. 너무 괴로웠던 은오는 10년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잤던 거고. 그러다가 깨어났는데, 바로 새로운 사건들이 다시 터진거야.“
"그 연쇄 살인범이 갑자기 다시 나타난 거군요. 긴 공백 끝에. 뭔가 더 알아낸 건 있어요?"
켄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지금은 제아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노력 중이야. 그것 밖에는 지금으로서 실마리가 전혀 없으니까."
나는 식어가는 컵을 멍하니 바라봤다. 바로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누구 또 와요?"
"그래, 내가 초대했어."
켄이 문을 열자 한 여자가 안에 들어섰다. 한눈에 봐도 튀는 핑크색 단발머리를 한 귀엽게 생긴 여자였다. 그녀 역시 붉은 눈을 갖고 있었다.
"어머, 손님 와 있었네? 안녕하세요!”
여자를 발랄하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얘가 은오네 산다는 그 여자야."
켄이 나를 그녀에게 소개시켜줬다. 여자는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반가워요 저는 타라예요."
"네...반가워요."
나는 타라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이 모였으니 이제 내 요리를 선보일 때인가?"
켄이 조금 흥분해서 말했다.
"요리요?"
"켄 오빠의 취미가 요리예요. 정작 본인은 먹지도 못하면서."
타라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켄이 자리를 뜨자, 옆에 앉은 타라가 내게 말을 건넸다.
"은오 오빠는 요즘 어때요?"
"...그저 그렇죠 뭐."
"여전히 저주 때문에 힘든가요?"
"저주에 대해서 알아요?"
타라는 묘한 눈빛을 보내더니 내게 더욱 밀착해 앉았다.
"그 저주를 푸는 방법 내가 알아요."
"그게 정말이에요? 뭔데요? 알려줄 수 있어요?"
타라는 부엌 쪽을 힐끔 보더니 내 귀에 입을 갖다 대며 귓속말을 했다.
"인간의 손가락 한 개를 피에 끓여서 먹으면 돼요."
"..."
"정말로 좋아하면 그런 것쯤은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타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봤다. 켄과 은오가 나에게 어떻게 저주를 풀 수 있는 지 절대로 이야기를 안 해주는 이유가 있었다. 저주를 풀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손가락 하나 즈음 포기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나 때문에.
"참, 얼마 뒤에 있을 파티에 이연씨도 오는 거죠?"
"파티요?"
부엌에서 요리중이던 켄이 큰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래 흡혈귀 세상에서 1년에 단 한 번 있는 아주 큰 행사야. 은오는 갈 텐데!"
*
"아까부터 왜 그렇게 손을 쳐다봐요?"
"네? 아닌데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뒤로 숨기자 은오가 더욱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차 창밖을 내다봤다. 오랜만에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 번역 일로 편집자와 미팅이 잡혔기 때문이다. 은오 역시 일이 있어서 차로 함께 가고 있다.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던데."
"아...하하...날씨 좋네."
"뭐가 좋아요."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진짜 그러네. 비 오는 거 아니야?"
"비 싫어해요?"
은오가 운전하며 물었다.
"싫진 않은데...마음이 뒤숭숭해져요. 가뜩이나 요즘 은오씨가 제아라는 그 흡혈귀 뒤쫓고 있으니까 더 그래요."
은오가 나를 살짝 쳐다봤다.
"조심해요. 알았죠?"
내 말에 은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어제 켄씨 집에서 타라씨가 그러던데 무슨 파티가 있다고..."
"파티?"
은오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파티길래 타라씨가 저보고 오냐고 물어요?"
"1년에 한 번 흡혈귀들이 모이는 날이에요. 쓸데없이 화려하고 요란한 파티라 잘 안 가요."
"그럼 올해에도 안 갈 거예요?"
"이번에는 갈 생각이에요. 제아나 내가 찾고 있는 살인범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연씨도 궁금하면 같이 가요."
흡혈귀들의 파티는 어떨까? 음식도 먹지 않을텐데. 나는 섬뜩하고 어두운 파티장을 떠올렸다. 의자 대신에 관들이 있고, 음식이라곤 피가 든 와인잔 뿐인.
"어, 은오씨. 여기서 세워주면 돼요. 저 건물이요."
은오는 내 말에 차를 세웠다. 출판사 입구로 향하다 뒤를 돌아 차 안에 있는 은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도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저럴 땐 그냥 해맑은 소년 같기도 한데. 다시 돌아서려는데, 한 남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혹시 이연씨 맞나요?"
"네, 제가 이연인데...편집장님이세요?"
"반갑습니다. 감지훈이라고 합니다."
나는 지훈과 악수를 나누며 다시 은오의 차가 세워진 곳을 살며시 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짝 웃고 있던 은오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있었다.
"들어가죠."
"네? 아, 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지훈을 뒤따라갔다.
미팅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은오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훈과 인사를 한 후 차에 올라탔다.
"빨리 왔네요?"
"미팅을 즐거웠어요?"
"네. 뭐 그럭저럭요."
은오에게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아아, 저 분이 편집장님이세요. 저도 처음에 만나고 좀 놀랐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고, 외모도 훤칠하고..."
은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근데 은오씨, 그 파티에는 무슨 옷을 입어야 해요? 그냥 평상복 입어도 돼요?"
"..."
"...은오씨?"
"..."
”은오씨 질투하는 건 귀여운데, 저 사람 죽이면 안돼요 알겠죠?“
은오는 눈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봤다.
”질투하는 거 아닙니다.“
”맞잖아요. 저 남자 보고부터 계속 짜증이 이만치인데?“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은오가 헛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한눈팔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요.“
맞는 말이다. 나도 저주에 걸린 것처럼 그에게 사로잡혔으니까. 지독한 사랑이라는 저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