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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Netwalker
작가 : HudmentJhinRaker
작품등록일 : 2019.9.6

프로급 마피아 조직원 르미데안느 드 블랑. 사이버 해킹 보안국 특수 요원 고준혁. 세계적인 대기업 제타 그룹의 회장 최문호. 가족을 잃고 사이버 킬러가 된 소년 서지환. 깊은 곳에서 부터 꼬이기 시작한 그들간의 과거가 기어코 실체를 드러낸다.

 
NetWalker - 12
작성일 : 19-10-27 18:39     조회 : 198     추천 : 0     분량 : 1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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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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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맺힌 새벽의 눅눅함이 아지트에 깊게 스며들어 호흡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불쾌함도 반복되니 익숙한 하나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블랑은 특별한 이유없이 잠에서 스르륵 깨어나 어둠에 덮여진 방 안을 찬찬히 감지했다. 막 꿈에서 깬 참이라 그런지 이 칠흑같은 어둠이 숨막힐 정도로 정적이고 비현실적인 형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블랑은 아지트로 돌아온 이래로 주욱 한 침대에서 자던 듀마르트가 누워 있을 자리를 더듬어보았다. 그는 자리에 없었다.

 

 일순간 헐벗은 몸의 온 부분으로 끔찍한 어둠의 일부를 빨아들인 것처럼 짜릿한 오한이 등골을 핥았다. 블랑의 기척감지는 예민하기로는 자나깨나 프로들 중 단연 최고였다. 아무리 듀마르트가 고요함과 정적을 몰고다니는 과묵한 유령같은 인물일지라도 그녀의 탐지 범위, 그것도 침대 바로 옆자리에서 몰래 벗어난다는 것은 예전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블랑은 듀마르트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자리에 손을 얹고 한참을 목석처럼 가만히 앉아 그것을 느꼈다. 좁은 방 안에 드리운 고요와 평화와 어둠이 뒤죽박죽으로 한데 얽혀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낼 때 그녀는 세상에 오로지 자신만이 남은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갑작스레 밀려든 외로움이었다. 듀마르트는 분명 그녀에게 무언가를 숨기기위해 전력을 다해서 기척을 지우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를 방에 남겨두고 몰래 말이다.

 

 블랑은 그사실을 깨닫고는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 정도로 나약해진 것에 또 놀랐다. 한 달전, 그녀가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 듀마르트가 했던 사년간의 부재 중 그녀의 사랑이 누그러든 것은 아닐까 걱정하였다던 말이 떠올랐다.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 같았던 그의 표정이 떠올라 블랑의 얼굴에는 이 칠흑의 어둠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그러나 미소에서는 곧 기운이 빠져 입꼬리는 축 쳐졌다.

 

 그는 사 년간의 부재중 블랑의 사랑이 옅어진 것이 아닐까하고 걱정하였지만, 반대로 블랑은 그런 걱정따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어둠의 새벽에 그는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숨겼다. 예전에는 무엇하나 숨기는 것 없었는데 사년 뒤에 재회하고는 한 달만에 무언가룰 숨긴 것이다. 이제는 되레 그녀의 쪽에서 근 사 년간 그의 행적이 의심스러워졌다.

 

 ‘양나빈 탓인가?’

 

 충분히 그럴만한 구실은 있었다. 블랑에 버금가는 양나빈의 외모와 함께 이 년간 공동임무를 했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는 해도 한 침대에서 잤으니 말이다. 그것도 블랑보다 더 먼저. 듀마르트도 완고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남자였다. 처음으로 침대를 같이한 여자에게 본능적으로 끌린다고 하여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녀는 행여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밤 양나빈과 듀마르트 사이에 어떠한 신호가 있었다.

 

 결국 듀마르트의 사랑이 조금이나마 식었다는 결론에 다다른 그녀는 미치도록 현실이 잔혹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그녀는 사 년간의 이별동안 한 번도 그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에게 잘못하나 저지르지 않았는데, 그는 기어코 다른 여자와 노닥거리를 하고 만 것이었다. 블랑은 알고 있었다. 블랑을 향한 그의 사랑이 식은 것도, 다른 여자에게로 눈을 돌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 모든게 현실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그저 자신의 과대망상일 뿐이라는 것을. 그런데도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그는 이 칠흑 같은 방에 블랑 혼자 내버려두고 몰래 어딘가로 빠져나갔다. 이 또한 현실이었다.

 

 사실은 별것 아닌 일일지도 모른다. 그저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 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조심할 것 없이 행여 그녀가 깨어나더라도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블랑은 긴 시간 그를 못 본 탓에 어리광을 부릴 구실을 본능에 가깝게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최문호 그 영악한 늙은이에게 호되게 당한 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마음이 허약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이유는 어찌되었건 이 즈음에서 블랑은 확신했다. 그녀 자신은 지금 어딘가에서부터 날아든 돌맹이에 맞은 토끼처럼 굴 속에 들어가 마음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런데 지금 한창 그녀의 토끼굴 역할을 해주어야할 듀마르트는 그녀 몰래 방을 나섰다. 그 사실만 떠올리면 계속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비극의 악곡 도입부를 되풀이하여 연습하는 미망인 연주가처럼 비통에 빠져들면서도 멈출 수 없는 도돌이표에 갇혀 있는 듯했다.

 

 한참을 끙끙대던 블랑은 악순환의 근원이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 달 동안 듀마르트에게 착 달라붙어 다녔던 것도, 별것 아닌 이유로 그에게 실망하는 것도, 홀로 남겨져 있으면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것도. 그리고 곧 그 근원의 시작이 최문호 그 늙은이로부터라는 사실 또한 알아차렸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아니 약 한달 전 그녀의 정체가 이미 들통나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직전 까지도 이렇게 나약하지 않았다. 활발함, 청렴한 웃음, 긍정적인 발상과 강인한 정신력을 모두 겸비한 문자그대로 프로다움을 유지한 채로 늙은이의 수발을 들며 버텨왔다. 그런데 지금은 피나는 연습으로 자연스럽게 몸에 배이게 만든 규칙적인 걸음걸이조차 꼬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상징이 무너졌다.

 

 피부에 와닿는 적적한 어둠보다 날카롭게 피부를 파고드는 지금의 상황, 현실의 맛이 온몸으로 퍼져 이제는 그 씁쓸함이 노골적으로 블랑을 음미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이 모조리 말라붙어 버릴 것처럼 입안이 텁텁했다. 프로가 되면서 끊었던 마리화나가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거의 버릇에 가깝게 침대 머리맡의 서랍장까지 손을 뻗고는 감으로 두번째 서랍을 열어 안을 뒤적였다. 당연히 그곳에 마리화나가 있을리 없었다. 한참을 서랍장 안을 뒤적이던 블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끔찍한 자기혐오가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선 마치 아마추어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한 번의 임무 실패로 마음이 완전히 꺾여 아마추어 시절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니 팔 년차 프로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완전 프로 실격이네.”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더듬더듬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슬프게도 듀마르트의 빈자리가 더 농후하게 체감되었다. 이 쇠약함의 끝은 어디쯤인가. 시골뜨기 농부의 지루한 일기를 읊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가 이리도 약해진 것은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녀에게 임무를 물어다 준 보스? 그 임무를 승낙한 그녀 자신? 몰래 그녀를 두고 방을 빠져나간 듀마르트? 그녀를 철저하게 이용해먹으면서 가지고 논 최문호 회장?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최문호 회장을 이 일기의 악우로 정했다. 그러나 이 일기에는 정의로운 영웅의 주인공 따위 없었다. 모두가 저마다의 잘못을 짊어진 악인들뿐이었고, 최문호 회장의 비중이 그 사이에서 조금 컸을 뿐이었다.

 

 애통의 물결 속에서 익사 직전까지 간 그때였다. 끼이익 하는 성질 긁는 소리와 함께 빛이 어둠을 하나 둘 해치우며 방안에 쏟아졌다. 그리고 빛의 진격과 함께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듀마르트였다.

 

 블랑은 급하게 눈물을 닦고는 자는 척을 했다.

 

 “어, 뭐야 언제 일어났어?”

 

 그녀는 최대한 빠릿하게 움직였지만, 듀마르트는 그녀의 단적인 움직임을 알아보았다. 결국 그녀는 포기하고 이불을 젖혔다.

 

 “어디 갔다왔어? 양나빈이라도 만나고 온거야?”

 

 티를 내려하지 않았지만, 블랑은 자신도모르게 신경질적인 투로 말해버렸다. 당황한 그는 말문이 막힌듯 잠시 동상처럼 가만히 있더니 이내 기절한 사슴이 정신을 차린 것처럼 사납게 고개를 흔들고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전등은 켜지 않았다.

 

 블랑은 그의 이상행동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음을 짐작했다. 분명 그의 행동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고, 어색한 티가 났다. 여전히 정적은 유지된채 그의 발소리만이 들려왔다. 어둠에 상당히 익숙해진 그녀의 눈에서는 그의 형상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바로 앞까지 도착한 그가 우뚝 멈춰섰다.

 

 “왜 그렇게 화나 있어?”

 

 듀마르트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블랑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알게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가 옆에 있을 때면 그 존재감만으로도 충만한 만족감이 생겨나 외로움 안에 연결된 필라멘트가 켜진 것처럼 그 안에 따스함이 감돌았다. 결국 블랑은 방금 전까지 마음 속에 장식되어 있었던 배신감과 부정의 흉상을 얼른 구석으로 치웠다. 장난기가 새록새록 돋아난 그녀는 흥 하고 삐진 척을 했다.

 

 “어이구, 우리 블랑씨가 어째서 심통이 나셨을까.”

 

 그가 웃으며 손을 뻗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런데 손을 주욱 뻗던 그가 블랑의 위로 엎어졌다. 그녀는 듀마르트가 쓰러진 것으로 착각하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듀마르트가 미안하다며 얼른 일어나려하였다.

 

 무슨일이 벌어진 것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진 블랑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에게서 멀어지려는 그의 목에 본능적으로 양팔을 감았다. 그도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것인지 움찔했다. 블랑은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감싸긴 했지만, 미치도록 부끄러웠다. 듀마르트의 얼굴은 그녀의 젖가슴 사이에 묻혀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저… 화나셨나요? 블랑씨?”

 

 블랑은 어둠 속에 있는 탓에 듀마르트가 자신을 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설렁설렁 고개만 저었다. 그녀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였다. 전등이 켜지면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감은 팔을 놓을 만큼 부끄러운 자세로 그를 안고 있었고,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놓아주기가 싫었다. 오히려 그대로 자신의 가슴 속에 그를 파묻고 싶다는 욕망마저 피어났다. 그의 온기가 목을 감은 두팔을 통해 그녀에게로 직접 전달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속의 외로움은 서서히 그 깃발을 접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한참을 버티던 듀마르트가 갑자기 블랑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허리에 손을 짚은 그가 천천히 그녀를 밀면서 온기가 멀어져갔다. 그를 감은 두 팔은 자연스럽게 풀려났다. 더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더니, 이내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지금의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그의 기척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듀마르트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는데도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 소리는 터벅터벅 요란하게도 들려왔다. 그녀는 한풀 꺾인 줄만 알았던 외로움이 다시 그 증오스러운 깃발을 높이 치켜들며 이번에는 상실감이라는 지원군을 불러왔다.

 

 멀어져가는 그의 발소리가 마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그의 감정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전등이 켜졌다.

 

 “어?”

 

 블랑은 얼른 이불을 그러모아 몸을 덮었다. 듀마르트는 그런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 내가 너보고 변한 것 같다고 말했던 것 기억해?”

 

 듀마르트의 뚱딴지같은 물음에 블랑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는 것은 이미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런 말을 했던 이유는 아지트에 돌아왔는데도 너는 평소의 너처럼 굴지 않고 여전히 한 명의 비서처럼 행동했어. 물론 너는 네 나름대로 편하게 행동한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전혀 그렇게 안 보였어. 마치 어설픈 연기를 하고 있는 재능없는 배우 같은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그때에는 그냥 사 년동안 그런 역할을 맡아왔으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굉장히 안일한 생각이었어. 너는 그이후로 한달 동안 여전히 그 사 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어.”

 

 블랑은 진지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며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입은 뻐끔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듀마르트는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내 친구이자 사랑스러운 르미데안느 드 블랑이었어. 늘 내 그늘아래에서 밝은 미소를 보여주고 어쩔땐 내가 너의 그늘 아래에서 죄악감을 달래기도 했지. 그런데 근 한 달 내내 너는 내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질 않고있어. 그늘아래에 있는다는 표현은 마음이 동했을 때 가끔 들려서 무언가를 충전한다는 의미인데, 너는 한달이 지났는데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어. 그 모습은 마치 내 친구이자 내가 사랑하는 블랑이 아닌 그저 나를 사랑할 뿐인 제타그룹의 비서실장 르미데안느 드 블랑 같았지.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야. 그저… 너의 그늘 속에 이미 무언가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내가 들어갈 엄두를 못내겠어. 지금의 나는 네게서 활력을 얻지 못하고 있어. 그런데 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는 너도 안식을 찾지 못하고 있지. 그만큼 네가 사 년간 임무를 수행해 오면서 어떤 고통을 감수해 왔는지 바로 알 수 있었어. 그리고 네가 조금 변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알았고. 너는 지금 자신의 정체성을 혼동하고 있는거야. 자신이 제타그룹의 비서실장인지, 조직의 프로인지 그 사이에서 크게 갈등하고 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이야기야.”

 

 블랑은 듀마르트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싶다는 욕구가 활개치고 있었다. 결국 한 방울의 눈물이 그녀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 왜 이러지?”

 

 그 눈물은 활화산에서 막 분출된 마그마처럼 뜨거웠다. 그리고,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한달 전, 블랑은 듀마르트의 품 안에서 펑펑 울고는 다시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였을 터였지만, 그 뜨거운 눈물은 그녀의 뜻처럼 쉽게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밀려오는 비통함에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이 어째서 눈물을 흘리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지나고 블랑의 눈물샘의 분출이 한풀 잦아들자 듀마르트가 말했다.

 

 “내가 왜 자꾸 너의 눈물을 부추기는지 알아?”

 

 블랑은 여전히 훌쩍이며 고개를 저었다.

 

 “넌 분명 사 년간 눈물을 단 한번도 흘린 적이 없을거야.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그날을 제외하고 말이지. 그렇게 되면 사람은 눈물은 쌓이기 마련이야. 다만 눈물 대신 안식처 안에서 다른 무언가로 마음을 채워주면 눈물은 쌓이지 않아. 그런데 방금 말했듯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안식처 같은 존재야. 그리고 이 아지트도 우리에겐 또하나의 안식처지. 사람은 긴 시간 안식처를 멀리 한채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살아간다면 본능적으로 새로운 안식처를 찾게돼. 안식처를 찾지 못하면 그 인간은 천천히 어딘가부터 망가지기 시작해서 어느순간 미쳐버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블랑은 열심히 눈물을 닦으면서도 듀마르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설명은 서두없이 이어져 의식의 흐름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이번 이야기는 말재주 한 번 더럽게 없었던 그가 하는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제법 심지가 드러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건지 알기 힘들었다.

 

 “어… 네가 최문호 그 늙은이한테 정체를 들킨 그 이유에 대해 내 추측을 말해주고 있는거야. 하던 이야기 계속해도 되지?”

 

 블랑은 한 번 훌쩍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그곳에 적응하면서 비서실장 르미데안느 드 블랑으로써의 안식처를 스스로 만들고 있었던거야. 그곳에 익숙해지면서 점점 나와 아지트가 멀어지고 있었는데도 너는 임무에 몰두하느라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거고. 그와동시에 최문호 회장이 네 정체를 알아차린거지. 아마 때는 제타그룹 건물 주변의 호텔방이 네 안식처로 바뀌어가는 도중 마음속에 생겨난 고장의 낌새가 드러났을 때일거야. 그는 분명 자신의 비서는 오랜기간 비서실장을 본업으로 해왔을 터인데 어느날 갑자기 그녀에게서 동요의 기류가 흐른다는 것을 이상하다고 느꼈을거고, 톱급 사업가인 최문호는 자연스레 비서 일이 네 본업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을테지. 그때부터 너에 대한 정보 수집을 시작한 걸거야. 그렇게 결국 이곳으로 돌아온 너는 우리 아지트에 익숙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또다른 곳으로 안식처를 옮기는 참이었던 지금의 넌 그 누구도 아니게 된거야. 방금 말했듯이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거지.”

 

 블랑은 어느새 눈물을 멈추고 듀마르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임무를 수행하면서 호텔방에 들어서면 처음에는 어색하게 생활했지만, 점차 그 공간이 익숙해지고, 혼자만의 공간에 들어오면 옷부터 벗는 버릇이 어느순간 자연스럽게 돌아왔고, 그 안에 있으면 마음이 헤이해지는 것을 종종 실감했다. 호텔 방 안에선 늘 아지트와 듀마르트가 눈 앞에 아른거렸지만, 그 형태가 갈수록 흐려져가기도 했다. 실제로 아지트로 돌아온 그날, 듀마르트를 처음 마주쳤을 때도 아주 잠깐이지만 그를 못알아볼 뻔하기까지 했다.

 블랑은 그 사실을 퍼뜩 깨닫고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자 듀마르트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덧붙이자면, 네 옷벗는 속도가 평소와 다를 바 없어진 순간은 임무 시작 후 이 년 정도 뒤부터였어. 이건 장담할 수 있어. 일종의 경험담이야.”

 

 블랑은 듀마르트가 농담을 하는 것으로 알아듣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왜 웃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녀는 적잖이 당황했다.

 

 “농담 아니였어?”

 

 그는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니 진담이었는데?”

 

 “으엑 그럼 뭐야. 듀마르트, 너도 옷 벗고자는 버릇이 있었어?”

 

 듀마르트는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다시 고개를 갸우뚱 했다. 블랑은 그의 반응이 재미있어 결국 언제 울었냐는 듯 폭소를 터뜨렸다. 그는 블랑이 포복절도를 하는 중에도 그녀가 왜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곧 웃음이 잦아든 그녀가 말했다.

 

 “농담이야, 듀마르트.”

 

 그녀의 말을 들은 그는 덩달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아무리 변했다고는 해도 농담은 알아듣기 힘들다는 건 똑같은 것 같아.”

 

 “내 농담 알아듣기 쉽거든!”

 

 “아니거든!”

 

 둘은 우쒸 하고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가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감돌았다.

 

 “여기 있는 동안 약간의 이질감이 들더라도 너무 걱정하진 마. 미쳐버린 게 아닌 이상 고장난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복구가 되니까. 그리고 네가 돌아왔을 때 변한 것 같다고 말했던건 네 성격이나 그런걸 의미한게 아니야. 안식처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럼 왜 바로 그런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어?”

 

 “시기가 별로 안 좋았잖아.”

 

 “뭐야 그게.”

 

 그녀는 ‘치'하고 옅은 미소를 보였다.

 

 “됐어, 그나저나 아까 나를 안았던 건 외로움 탓이었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말했잖아, 나도 둥지 혼동 현상을 경험했어. 아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야. 그냥 내가 이렇게 이름 붙인거야. 어찌됐든 그 외로움이 바로 네 고장난 부분인거야. 내가 늘 옆에 같이 있는데도 채워지질 않지?”

 

 블랑은 그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녀의 눈에는 그가 비범한 심리학자로 비추어지고 있었다.

 

 듀마르트는 그런 그녀가 귀엽게도 보였는지 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고쳐져.”

 

 그의 확고한 대답에 블랑은 커다란 만족감이 드리웠다. 그녀는 기다렸다는듯 목구멍 깊은 곳에 삼켜두었던 말을 했다.

 

 “듀마르트, 난 지금 너무 두려워. '늘 프로답게'를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던 내가 아마추어 시절로 되돌아가버렸어. 네가 칭찬해주던 내 걸음걸이도 어느샌가 부자연스러워졌고,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기척마저도 읽기가 힘들어졌어. 심지어는 오래전에 끊은 마리화나가 지금 너무 절실해. 이것도… 다 시간이 해결해 줄까?”

 

 듀마르트는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는 위로의 빛도 일부 섞여 있었지만, 지체 없이 끄덕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 네가 겪고 있는 모든 현상은 네 익숙함에서 나오는 과거의 잔향일 뿐이야. 네가 기억하는 과거를 네 몸이 스스로 도입부 부터 탐색하고 있는 거지. 네가 익숙하다고 느끼는 이곳이 정말 네 안식처였던 곳이 맞는지 머나먼 과거에서부터 차차 되뇌이고 있다는 이야기야. 자꾸 나를 찾게 되는 것도 그 이유야. 듀마르트라고 하는 이 사람이 네가 사랑했던, 매일매일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던 그 남자인지 본능적으로 탐색하고 있는 거지. 십 일 년 전, 모스크바에서의 그날 밤부터 현재까지의 기억을 모조리 다, 차근차근.”

 

 “듀마르트"

 

 블랑은 그의 이름을 사랑스럽게 불렀다. 그가 부드럽게 답했다.

 

 “왜?”

 

 “너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다시금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너를 매일매일 그리워하지는 않았는데?”

 

 “뭐?”

 

 듀마르트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에잇,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라도 그런말은 하지 마.”

 

 그가 경고하듯 말했다. 그러나 말투는 할로윈 장난이라도 당한 어린아이의 것과 같았다. 블랑은 풋하고 웃어보였다. 듀마르트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익숙한 과거의 잔향이라…”

 

 “그 표현, 별로였어?”

 

 “아냐 아주 좋았어. 그냥 네가 그런 서정적인 표현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자랑스러워서 곱씹어 본거야.”

 

 “그건 양나빈 한테 배운거야.”

 

 블랑은 잠시나마 앙숙으로 생각했던 동료의 이름이 나오자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그리곤 듀마르트가 몰래 밖으로 나갔었다는 사실을 겨우 기억해내고 어디에 다녀온 것인지 그를 추궁했다. 그는 어디에 다녀온 것인지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그녀가 감정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마지못해 말했다.

 

 “화장실에 다녀왔어…”

 

 “화장실?”

 

 블랑은 기가차서 ‘허'하고 소리를 내었다. 잠시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내비치곤 짓궂게 물었다.

 

 “가서 뭐했는데?”

 

 “…큰거 누고 왔어"

 

 “…”

 

 쭈뼛쭈뼛 답하는 듀마르트의 창백한 얼굴은 어느새 잠자다가 이불에 지도를 그려 부모님께 꾸중을 듣는 어린 아이의 얼굴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인상은 결단코 어려보이는 인상이 아니지만, 이럴 때마다 그의 모습은 블랑에게는 너무나 귀여워 보였다.

 

 부끄러워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위로아닌 위로와 함께 그녀는 드디어 아지트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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