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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광무의 꿈
작가 : 백두혼
작품등록일 : 2019.10.22

대한제국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홍종우의 삶을 보면 된다.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로 건너가 근대화를 통한 조국 조선의 부국강병의 길을 도모한 자. 김옥균 등을 수괴로 한 친일 매국노들과 벌인 흉험한 싸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밀사는 이용익이었고 그의 곁에는 홍종우가 있었다. 근대사 전체를 통째로 뒤집는 위험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5. 국가란 무엇인가
작성일 : 19-10-27 04:50     조회 : 251     추천 : 0     분량 : 8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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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국가란 무엇인가

 

 

 

 

 

  그가 파리에 도착한 지 벌써 일 년이 지나 두 번째 겨울을 맞았다. 가을의 낙엽을 태우는 냄새가 가시자 파리의 거리에는 군밤을 파는 행상들이 밤을 굽기 시작했고 그렇게 겨울이 시작됐다. 그도 이제 여름의 햇빛이 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이해했다. 파리의 위도가 북위 49도 정도니 북위 45도 정도에 위치한 극동의 하얼빈이나 사할린스크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당연히 일 년 중 거의 다섯 달이 겨울이었다.

 

  그는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프랑스 어 중등 과정까지 마치고 이제 학교에 나가진 않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완독함은 물론 그 사이 기 드 모파상,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등의 소설도 몇 권 읽었고 머무는 호텔에 배달되는 조간신문을 매일매일 읽고 있었다. 틈나는 대로 프랑스 법학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이제 그는 어눌하지만 제법 정확한 발음으로 프랑스어를 듣고 말할 수 있었다. 언어는 언제나 결정적인 열쇠였다.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문제가 없어지자 그의 프랑스 생활은 놀랍도록 편해지고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특히 주말이면 그와 레가메는 셍 제르멩 데 프레의 카페에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주 토론을 나누고 했다. 이제 그는 그들의 주장을 자기의 주장으로 상대할 수 있었다.

 

  음습하게 겨울비가 내리는 어느 금요일 오후 그와 레가메는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이자 학장이며 그 당시 파리 최고의 지성으로 알려진 에르네스트 르낭을 방문했다. 르낭은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창시자 중 한 명이기도 해서 그가 그 곳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당사자였다. 더구나 롸종 신부와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였다. 처음 인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는 거의 아무런 대화도 나누질 못했지만 이제 알리앙스 프랑세즈를 떠나는 입장이었다.

 

  에르네스트 르낭은 일찍이 중동과 시리아 일대를 여행하면서 예수의 일대기를 인문학적 입장에서 연구하여 예수를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으로 평가한 “예수의 생애”라는 저서를 1863년에 발표했다. 물론 카톨릭 전통이 강한 프랑스는 물론 서유럽 전체를 경악케 한 저술이었고 한동안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라는 영예로운 자리에서조차 해고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사이 또 바뀌었고 지금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지성으로서 인류학, 언어학, 종교사, 정치평론 등의 활발한 활동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사였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 자리한 르낭의 서재는 엄청났다. 온갖 문자로 제작된 온갖 종류의 책들이 커다란 그의 서재를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르낭은 뚱뚱한 몸매를 겨우 일으켜 그들을 맞았다. 얼굴색은 창백했고 얼마 남지 않은 하얀 머리카락은 위태로웠다.

 

 “오랜만이오. 홍군. 그리고 레가메 씨.”

 

 그들은 인사를 나누고 소파에 마주 앉아 궐련을 나누었다.

 

 “르낭 교수님.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프랑스 어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많이 늘었소?”

 “이제 듣고 말하고 읽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쓰는 것은 여전히 어렵군요.”

 

 그들은 홍종우의 거취와 진로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르낭은 주변의 유력인사들에게 그를 후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다.

 

 “홍군. 용기를 내시오. 용기를. 그래 이제는 무엇을 할 생각이오?”

 “할 일이 많습니다. 공부할 게 너무 많고 생계도 마련해야지요. 그리고 이곳의 인사들에게 조선이라는 저의 조국에 대해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공부를 해야겠지. 우선 이 책을 선물하겠소. ‘예수의 생애’나 ‘언어의 기원’ 같은 책들이 그대에게 필요하진 않을 것이고 내가 십년 전에 쓴 책인데 아마 도움이 될 거요.”

 

 르낭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을 하나 뽑아와서 그에게 내밀었다. “Qu'est ce qu'une nation(국가란 무엇인가)?” 그는 이 쉬운 단어들의 조합으로 적힌 제목이 오히려 어려웠다. 국가란 무엇인가? 혹은 민족이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바로 이 책이 그 고민에 대한 르낭의 견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선이라는 나라와 청나라, 일본이 있고 이곳 유럽에는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과 러시아 등이 있었다. 국가과 민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구분되는 지, 그것들은 어떻게 존재하며 어떻게 작용하는 지. 지금의 홍종우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였다.

 

 “감사합니다. 지금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계속 읽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조선의 국가관과 군주관과는 많은 차이가 있더군요. 우리는 우리의 군주를 어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애롭고 존엄한 존재. 인민의 모든 것을 도덕적으로 인도하며 인민은 군주를 충성으로 모시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자 절대적인 이념입니다. 그러나 이 곳 유럽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군주의 권리는 신으로부터 나오며 하느님이라 일컬는 그 신의 권능을 세속에서 대신하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그조차도 이젠 완전히 와해된 상태고 지금은 극도로 혼란스러운 모양입니다.”

 “그렇지. 우리 프랑스에서 왕정을 몰아낸 지도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지금은 인민 개개인의 권리와 국가 권력이 어떻게 성립되고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지에 대해 무척 혼란스러운 논쟁을 벌이고 있소. 단순히 정리해도 독일, 러시아처럼 절대적인 왕정을 유지하는 나라도 있고 영국이나 네덜란드처럼 입헌 군주제도 있고 프랑스나 미국처럼 공화국인 나라도 있으니. 게다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 훨씬 과격한 주장도 힘을 얻어가고 있소. 그런데 이 부분을 잊지 마시오. 프랑스와 미국의 공화정조차 과격한 전쟁과 혁명의 피바다 위에서 성립했음을. 그리고 이 두 나라는 그 전쟁과 혁명을 수행할만한 충분한 역사적, 시민적 역량이 충족된 상태였다는 것을. 식민지 해방 전쟁을 통해 공화정 체제로 독립한 미국은 그렇다 치고 우리 프랑스의 정치사를 들여다봤을 거요. 여러 차례의 반동적 왕정복고와 연이은 혁명을 통해서 겨우 도달한 정치 체제요. 공화정으로 정착한 지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소. 얼마나 많은 혼란이 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는 잘 알고 있을거요.”

 “우리 조선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려운 얘기지만 의외로 간단하오. 지금의 조선은 절대 입헌군주제나 공화정으로 이행할 수 없소. 천년 이상 유교적 세계관과 군주론으로 운영된 나라가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바뀌겠소? 국민 전체의 철학 체계가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가능한 일인데 조선 민족이 가능하리라 보시오? 국가와 사회가 바뀌는 건 상당한 규모의 과정을 엄청난 댓가로 치러가며 이행해야 가능한 것이오. 다음의 정치 체제로 이행하기 위해선 아마 상당한 시간과 혼란이 필요할 것이오.”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조선에는 유럽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무리가 생겼으나 그건 가당치도 않은 상황이지요.”

 

 그는 갑신년의 정변과 일본으로 도주한 김옥균의 얼굴이 떠올랐다. 똑똑하지만 어리석은 인간. 김옥균에 대한 그의 결론이었다.

 

 “당장 이 유럽에도 입헌군주제가 시행되는 나라는 영국과 네덜란드 뿐이오. 절대왕정이라는 것이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각각의 나라마다 특수성이 있을 것이오. 준비가 되지 않은 변혁은 대부분 비극일 뿐이오. 나는 홍군에게 독일과 러시아의 정치 체제를 연구하라고 권하고 싶소. 독일과 러시아는 유럽에서도 무척 낙후한 나라였소.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독일조차 불과 이십 년 전에 성립된 나라였으니까. 이 곳 베르사이유에서 말이오.”

 

 그는 보불 전쟁의 전말을 잘 알고 있었다. 불과 이십년 전의 일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전쟁에 패해서 몰락하고 이곳 파리는 적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 인류 최초의 인민정부인 파리코뮌을 결성하여 끝까지 항전했다는 것. 비극적으로 끝난 전쟁의 결과로 프러시아는 독일 통일이 완료됐음을 선언하고 독일 제국의 성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했다. 이로 인한 프랑스의 상처는 지독했다. 수백 년간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을 방해한 프랑스 왕정의 몰락이 역설적으로 두 나라의 왕정을 수립시킨 셈이다.

 

 “저의 소망은 우리 조선이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 역량을 갖춰서 타국에 멸시받지 않는 당당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조선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평화에도 중요한 조건이기도 하죠.”

 “그럴 것이오. 지금 러시아와 독일은 상대적으로 낙후됐던 국가의 기틀과 국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중이오. 알다시피 영국은 영국대로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세계 제국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소. 그건 막대한 공업 생산량과 세계 교역을 통해서요. 물론 이 두 나라의 식민 정책이 그 배경이기도 하오. 그런데 러시아와 독일은 뒤늦게 그 뒤를 쫓아가는 중이오. 내가 봤을 때는 상당히 효율적으로 진행되고 있소. 이 두 나라의 정치 체제는 절대군주제요. 정치적, 사상적 투쟁과 변혁을 감내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럴 준비도 되어있지 않소. 만약에 이 두 국가가 정치적 혼란을 맞는다면 지금 추진하고 있는 근대 국가 체계의 성립은 요원해 질 것이오. 어쩔 수 없이 국가의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켜서 그 동력을 중심으로 국가주도적인 산업발전을 추진해 가는 것이오. 조선 역시 마찬가지요. 조선의 군주를 중심으로 단단히 뭉쳐서 일단 근대 국가로서의 기본적인 틀과 토양을 만들어야 할 것이오. 그 다음에야 입헌군주제를 하든 공화정으로 전환하든 가능하겠지. 일본이야말로 그런 방식으로 성공한 것 아니겠소.”

 “교수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군신이 하나가 되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지요. 지금 우리 조선은 혼란할 틈도, 여유도 없는 상황입니다.”

 “비스마르크를 주목하시오. 조선에는 비스마르크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오. 그리고 절대군주로서는 독일의 빌헬름 1세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를 참고하시오.”

 

 비스마르크. 그는 사실 처음부터 비스마르크에게 끌렸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르낭 교수가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꺼내자 그는 홀린 듯이 물었다.

 

 “그는 대체 무엇으로 산산조각의 독일을 통일하고 유럽 최고 강국으로 만든 겁니까?”

 “그건 그대가 천천히 공부해야겠지. 그렇게 간단한 인물이 아니오. 다만 이건 단언할 수 있소. 그는 외교관이요. 정치인이지만 근본적으로 외교관이고 지금 독일 제국의 성립과 번영은 몰트케의 프러시아 군대가 아니고 비스마르크가 통솔한 유능하고 냉철한 외교관 집단으로 이뤄낸 것이오. 이걸 잊어서는 안 되오.”

 “독일을 근대적인 국가로 만들어 냈잖습니까?”

 “물론이지. 중앙 정부의 조세권과 행정권과 재판권을 강화시켜서 지방 지주들과 영주들의 힘을 중앙 정부로 귀속시키고 국가 상비군 제도를 정비해서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고 등등, 근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했지. 근데 말이오. 그대가 비스마르크를 배우려 하듯이 비스마르크의 스승이 있소. 그건 바로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에 나오는 그 리슐리외 말입니까?”

 “흐흐.. 그대는 소설에서나 그의 이름을 들어봤군. 뒤마의 소설은 그냥 재미로 쓴 소설일 뿐이오. 소설엔 악당으로 묘사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 당시 귀족들이 악마보다 싫어한 인물이 리슐리외였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오. 또 그렇게 묘사하는 것이 소설 팔아먹는데 도움이 되었겠지. 하지만 그 소설에서조차 그는 비범한 일물로 그려지고 있소. 비스마르크가 그토록 고심을 해서 최근에야 이룬 일들을 리슐리외는 이미 이백 오십년 전에 프랑스에서 해낸 것이오. 리슐리외를 주목하시오. 비스마르크의 진정한 스승이 바로 리슐리외니까.”

 

 그는 리슐리외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입니까?”

 “프랑스 절대왕정이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소. 그전까지 제 멋대로의 권력을 휘두르던 프랑스 귀족들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소. 국왕의 징세관과 재판관과 행정관들을 프랑스의 모든 지방에 파견해서 공평하게 세금을 걷고 공평하게 재판을 했소. 그 대상이 귀족이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말이오. 국가 주도의 상공업을 육성해서 국가 경제 전반을 발달시킴과 동시에 국고를 채우는데 세금에만 의존하지 않게 안든 것이오. 그리고 유럽 최초의 국가 상비군 제도를 만들어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육성했소. 이후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이나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이나 심지어 프랑스 혁명 조차도 그가 프랑스의 기초를 닦아 놓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오. 게다가 천재적이면서도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외교관으로서 독일 민족을 철저히 분열시키고 견제해서 독일이라는 국가의 성립을 수백 년이나 미뤄서 이제야 가능토록 해버린 사람이오. 수백 년 간 독일 사람들이 이를 갈면서 증오한 공적이었지. 지난 번 보불 전쟁 때도 리슐리외의 묘소를 폭탄으로 날려버릴 계획을 세웠을 정도니까. 물론 비스마르크가 허락할 일은 아니었소. 비스마르크는 철저하게 이 리슐리외를 연구해서 그대로 따라한 거요. 그리고 그대로 성공한 것이지. 그대 역시 마찬가지요. 일정한 모델을 두고 그의 사상과 철학과 방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때로는 가장 효과적이고 올바른 선택일 수 있소. 내 생각에 그대가 연구해서 따를만 한 인물은 프랑스의 리슐리외, 독일의 비스마르크요. 사실은 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지만.”

 

 그와 레가메는 일찍 내려앉은 태양이 끄는 긴 석양을 등지고서야 다시 파리 거리에 나섰다. 그는 그들이 나온 콜레쥬 드 프랑스 건물을 뒤돌아 봤다.

 

 “대체 저 학교는 뭐 하는 곳입니까? 대학교라 보면 됩니까?”

 

 그동안 별 말이 없던 레가메가 답을 했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곳이지. 대학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곳이오. 학위도 없고 학생도 없는 학교니까. 하지만 진정한 학문의 전당이라는 점에선 진짜 대학이라 볼 수 있는 곳이오. 프랑스 최고의 석학들이 저 학교의 교수가 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니까. 보수도 없고 댓가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근데 말이오. 저 곳의 강의는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소. 남녀노소, 빈부귀천도 상관없고 갖고 있는 학위도 관계치 않소 등록금이나 강의료도 없지. 오직 진리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들어가서 그들의 진리를 구할 수 있는 곳이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학당을 현세에 다시 실현한 곳이오. 인문학, 철학, 수학, 신학 등등. 저 곳의 강의는 나도 종종 들으러 가는 편인데 관심 있으면 같이 가도 좋을 것이네.”

 

 두 사람은 어두워져 가로등이 밝혀진 길을 걸어 그들의 단골 식당으로 향했다. 카페마다 식당마다 상점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즐겁게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파리는 늘 이렇게 행복했다.

 

 

  1892년 봄. 춘향전이 “Printemps parfume”이라는 프랑스 이름을 달고 당튀 출판사의 “기욤 모음집”으로 출간됐다. 그 책에는 홍종우라는 이름이 번역자이자 협력작가로서 조셉 앙리 로니의 이름과 같이 책 서문에 올랐다. 이 책은 예상외의 인가를 끌기 시작했다. 그 당시 팽배한 오리엔탈리즘을 정확히 자극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로니는 많은 돈을 벌었고 그에게도 적지 않은 돈이 건네졌다. 셍 제르멩 데 프레의 카페에서 그는 이제 작가의 대접까지 더해 받았다. 극동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처음으로 프랑스에 온 그는 기메 박물관의 동양 유물 담당 학예사이면서 문학 작가로서의 지위를 가진 것이다.

 

 

  춘향전이 출판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기메 박물관에서의 어느 날이었다.

 

 “이 봐. 홍공. 이 책 혹시 알아?”

 

 그는 찬찬히 매만지던 청자연적 하나를 내려놓고 그를 찾아 온 사람을 올려다봤다. 앙리 슈발리에. 그의 동료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손에는 한 눈에도 조선의 것임을 알 수 있는 책 한권이 들려 있었다.

 

 “대체 그런 것이 그대의 손에 어떻게 들어가 있는 건가?”

 “바라 씨의 수집품 중에 하나야. 신기한 책이라고 자기가 갖고 있다가 어제 들고 왔더라고. 대체 무슨 책인지나 알고 싶다고.”

 

 슈발리에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은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이었다.

 

 “참 희한한 것을 들고 왔군.”

 

 그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조선의 그 많고 많은 점복술 책 중에 하필 직성행년편람이라니. 그는 소년 시절, 이 책 때문에 부친에게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속으로 되뇌었다.

 

 ‘내 운명이 무척이나 궁금했던 시절이었지. 이걸 프랑스 파리에서 다시 펴 볼 것이라고는 그 시절에 상상도 못했으니 인생 참 묘한 것이지‘

 “이걸 좀 번역해 줄 수 있겠나? 바라 씨가 중국사람 몇몇에게 문의를 좀 해본 모양인데 이 책을 번역할 사람은 찾지 못했다네.”

 “얼마를 준다던가? 금액에 따라 다르다네. 이건 꽤나 골치 아픈 책이거든.”

 

 그는 그 책의 번역을 맡고 싶지 않았다. 조선의 문화와 역사와 철학을 소개하는 책이라면 얼마든지 소임을 다하겠지만 겨우 별점이나 치는 잡서에 불과한 책이었다. 이런 책을 프랑스에 소개해서 조선이 미신이나 믿는 미개한 나라로 비춰지는 것이 싫었다.

 

 “돈은 충분히 줄 거야. 기메 관장이 무척 기대하고 있다더군. 그 사람들 돈 많은 거 알잖아?”

 

 그는 슈발리에로부터 직성행년편람을 받아 들었다.

 

 “좋아. 200 프랑. 선불로.”

 

  그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그들은 그 다음 날부터 시간이 나는 틈틈이 나란히 앉아 조선식의 천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홉 개의 큰 별들. 인간의 운명을 담당하는 아홉 직성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 일은 시작됐다.

 

 

  선금으로 받은 200프랑을 들고 그는 팔레 루와얄 광장의 총포상에 들어섰다. 그리고 육혈포라 흔히 불리는 리볼버 권총을 하나 샀다. 셍테티엔 무기 제작소(MAS : Manufacture d'armes St.Etienne)에서 불과 얼마 전에 개발해서 출시한 최신형 권총이었다. 방아쇠를 조금 당기면 탄통이 자동으로 회전해서 연발 사격이 가능했다. 실탄도 두 타스를 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신문 광고에 나오는 이 권총을 눈여겨봤다. 꼭 갖고 싶었다. 조선에서부터 권총을 하나 갖는 것은 그의 소원 중 하나였다. 아마 그 시절 조선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성인 남자 중에 권총 한 자루의 욕심이 없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겠지만 그의 경우는 유별났다. 사내라면 반드시 권총 한 자루를 품에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목숨과 권리와 주장을 지켜내기 위한 필수품. 이 권총이 그의 인생을 어떻게 만들지는 그 조차도 몰랐다. 하지만 그 권총을 욕망했을 때 직성행년편람이 그의 손에 잡혔고 운명을 결정하는 아홉 개의 별을 그리며 그 권총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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