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는 눈에 맺힌 물기를 손등으로 훔치며 카페로 달려갔다. 카페 창문 너머로 민호가 계산대 앞에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수 씨. 무슨 일이에요? 엄마는 잘 만나고 왔어요?"

　 민호가 카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지수에게 물었다.

　"민호 씨! 고독한 씨는요!"

　"네? 한이 형이요? 그기..."

　 그는 어물쩍거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지수는 빠르게 카페를 둘러보며 민호에게 따져 물었다.

　"고독한 씨 어디 갔어요?"

　"왜요? 중요한 일이에요?"

　"네!"

　 그녀가 다급하게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조금도 망설임이지 않고 대답했다.

　 민호는 그녀의 긴박한 태도에 잠시 갈등했다. 왠지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과 다르게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한이 형 엄마가 다시 찾아와서, 둘이 같이 밖으로 나갔어요. 나간 지는 꽤 됐고, 아마 근처에..."

　"고마워요!"

　 지수는 곧장 카페 밖으로 달려나갔다. 카페에 다시 혼자 남은 민호가 뛰쳐나간 그녀를 눈으로 좇았다.

　"한이 형은 게이잖아. 절대 여자를 좋아할 리 없어."

　 그는 고개를 저으며 불안한 기분을 떨쳐냈다. 여전히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 같은 찜찜한 느낌이 남았다.

　 거리로 뛰쳐나간 지수는 카페 근처를 샅샅이 뒤졌다. 왜 그를 찾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면서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카페 근처 거리와 골목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공원에 있나 싶어 공원으로 갔다. 공원에는 나들이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그곳에도 그는 없었다.

　 열심히 뛰어다닌 그녀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햇살은 더욱 뜨겁게 내리쬐고, 그늘 밖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더웠다.

　 지수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숙였다. 굵은 땀방울이 턱선을 따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뜨거운 햇살은 금세 바닥에 젖은 땀방울의 흔적을 지웠다.

　"구해준다고... 약속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들고 태양을 마주 봤다. 그녀의 시선이 푸른 하늘을 따라서 아래로 향했다. 시선 끝에는 높이 솟은 한강 다리가 햇살에 비쳐 반짝였다.

　*

　 한낮의 한강 다리는 그늘이 없어서 햇빛에 무방비로 노출 되어 있었다. 고독한은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서서 먼 하늘을 봤다. 밤과는 다르게 주변이 훤히 다 보였다. 맘껏 소리 지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에 잠긴 다리는 무섭고, 외로웠지만 지금은 그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에 불과했다. 다리 밑 강물은 파랗고, 일렁이는 물결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꽤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가까이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눈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쿠키슈."

　"고독한 씨..."

　 지수는 글썽이는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그의 무심한 얼굴을 보니 왈칵 울음이 터져나왔다. 억지로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고독한은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눈물이 핑 돌았다. 왜 눈물이 나려하는지, 왜 그녀가 미안하다고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구해준다고 했는데... 지켜주고 싶었는데... 바보 같이 난..."

　 그녀가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는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다가오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봤다.

　"많이 아팠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어요? 나는 상상도 못 할 만큼 힘들었어요? 나는 멍청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고독한 씨."

　 지수는 그의 앞에 마주 선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무심하게 예쁜 얼굴에 감춰진 상처가 고스란히 눈에 보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 고독한 씨에게 입 맞추고 싶어요. 눈감아줄래요?"

　 수줍은 목소리를 따라 강바람이 선선히 불어왔다.

　 그녀가 먼저 눈을 감으며 깨금발을 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에게 닿았다.

　 고독한은 놀라서 부릅뜬 눈으로 코앞에 놓인 그녀를 봤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그녀의 향기가 입술에 묻어났다.

　 여자의 입술은 이렇게나 부드러운 거구나. 입술에 솜사탕이 묻은 것 같아.

　 처음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로이와 입을 맞출 때는 늘 거칠고, 단단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입맞춤이 달콤하다고 느꼈다. 서서히 폐를 조여오는 공포가 아니라, 따스한 봄볕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눈과 그의 눈이 햇빛을 사이에 두고 마주 봤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다시는 입맞추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따가운 햇볕은 그들을 비췄다. 햇살보다 뜨거운 눈빛이 그들 사이에 오갔다.

　 그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녀의 눈꺼풀도 사르르 내려갔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둘은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서로의 품에 안겼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할 필요 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입술 속으로 서로의 혀가 어우러졌다. 혀로는 할 수 없는 언어가 서로에게 전해졌다.

　 이 순간, 모든 신경이 혀끝에 몰려들었다. 두개골을 관통하는 짜릿한 쾌감이 입술에서부터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쾌락이 입술을 지배하는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입맞춤만으로 이렇게 황홀할 수 있다면 그 다음은 어떨까.

　 그녀의 손과 그의 손이 잃어버린 자신의 몸을 더듬 듯 상대방의 몸을 훑었다. 손끝에 닿는 모든 감촉이 온몸으로 키스를 하는 것처럼 황홀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황홀감에 뇌가 녹아도 좋았다.

　 전신의 땀구멍에서 쉴 새 없이 땀이 흘렀다. 얇은 옷가지가 흠뻑 젖어들었다.

　 강렬하게 내리쫴는 햇살도 말릴 수 없었다. 세상이 찐득하게 땀으로 젖는 걸.

　*

　 황홀해. 첫 키스는 이렇게나 끈적한 거구나.

　 푼수처럼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그와의 입맞춤을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이거 꿈이 아니겠지. 꿈이 아니라면 한 번만 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예쁜 왕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빠르게 걷는 그를 총총걸음으로 뒤따라갔다.

　"같이 가요."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은..."

　 그의 붉은 입술을 보자 다리가 베베 꼬였다. 그는 말을 하려다 말고 홱 돌아서서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왜요? 하려던 말 해요. 난 이미 준비됐어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예쁜 왕자가 놀란 얼굴로 뒤돌아봤다.

　 어머나, 놀란 얼굴도 예쁘잖아.

　"괜찮아요.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아, 아니. 잠깐만. 실수야. 방금 그, 그 입 맞춘 건... 쿠키슈! 네가 강제로 한 거잖아!"

　"두 번째는 그쪽이 했잖아요."

　 방금 전 입 맞춘 게 생각나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의 당황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 있잖아. 그래, 난 게이야. 남자를 좋아한다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에이, 손으로 내 여기랑, 저기랑, 요기도 막 만지고 그랬잖아요. 그 손이 막..."

　"잠깐!"

　 고독한이 손을 번쩍 들면서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방울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더이상 말하지 마. 어디까지 말하려고 그래! 이제 그만하자고. 너, 너 프랑스에는 언제 가는데. 집에 안 가?"

　"아직 엄마랑 할 얘기가 많아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아! 이런 얘기는 그의 앞에서 하면 안되는데. 이 바보, 멍청이! 나는 정말 금붕어야!

　 고개를 살짝 들고, 그의 얼굴을 훔쳐봤다.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십 년 만에 만난 엄마랑 무슨 이야기를 한다고 한국에 남아있는건데. 빨리 집에나 가. 프랑스에서 널 기다려주는 네 진짜 가족들한테나 가라고."

　"미안해요. 고독한 씨 앞에서 엄마 얘기를 꺼내는게 아닌데..."

　"그게 아니라! 네 엄마는..."

　 그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네 엄마는..."

　 미안해요. 또 내가 고독한 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어요.

　 눈물샘이 흔들렸다. 고개를 돌린 채로 눈물을 참았다.

　"네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네."

　 그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고독한 씨가 무얼 걱정하는지 알아요. 나 역시도 그토록 힘들게 자랐다면 엄마를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세상의 모든 엄마가 증오스러울 거예요.

　 그는 말 없이 뒤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예쁜 왕자님. 내가 당신을 구해줄 수 있을까요. 당신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심장이 마구 욱신거렸다. 그를 뒤에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의 발걸음이 무심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

　 사장이 없는 카페는 한적했다. 가끔 카페에 찾아오는 손님도 음료를 받아서 나갈 뿐이었다. 평소의 민호라면 꾸벅꾸벅 졸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와 아직도 안 오노. 미치겠다, 참말로!"

　 민호는 카페 밖을 열심히 살펴봤다. 동네 주민만 지나다닐 뿐 정작 보여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란게 뭐고. 그때 물어봤어야 했는데! 벌써 점심시간 다 지났구만 둘이서 뭐 하는 건데!"

　 그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에게 달려가는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 계속 그려졌다.

　"미안. 점심에 힘들었지."

　 카페 문을 열고 고독한이 들어왔다. 민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수 씨는?"

　"와아, 시원해! 민호 씨! 시원한 레모네이드 한 잔만요!"

　 지수가 뒤이어 카페에 들어왔다. 카페에 함께 나타난 그들은 격한 운동이라도 하고 왔는지 땀에 흠뻑 절어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그들의 뜨거운 몸을 식혔다.

　"한이 형, 땀이..."

　"어, 어. 힘들겠지만 지금 바로 좀 씻고 올게."

　"괜찮아. 어차피 형 없어서 점심시간도 할 만했어. 천천히 씻고 와."

　 고독한이 입고 있는 티셔츠를 앞뒤로 펄럭이며 건물 위로 올라갔다. 그의 곁에서 땀 냄새가 후끈 풍겨왔다. 민호는 놀란 눈으로 지수를 봤다.

　"지수 씨. 오늘 진짜 무슨 일 있었어요? 한이 형은 한여름에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사람인데!"

　"그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지수는 온몸을 베베 꼬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에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방금 전 그와 있었던 일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가 살며시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쪽쪽거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

　"에? 키스!"

　 민호는 입을 쩍하고 벌리며 경악했다. 그녀의 손이 자랑스럽게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다.

　"진짜 형이랑 키스한거 맞아요? 이건 지금 내한테 자랑하는 거예요?"

　 지수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럼 뭔데요? 중요한 일이 키스였어요?"

　"두 번."

　"두 번이라니 뭐가..."

　 그는 설마하는 얼굴로 그녀를 봤다. 그녀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씻으러 갈게요. 에잉! 부끄러워!"

　"지수 씨! 지수 씨! 잠시만요! 레모네이드 금방 만들어 줄게요!"

　"씻고 올게요!"

　 지수는 소녀처럼 나풀나풀 뛰어서 건물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서 은은하게 땀냄새가 났다.

　"뭐고! 진짜 둘이 키스한기가!"

　 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한이 형에게서 났던 땀 냄새와 그녀에게서 나는 땀 냄새가 똑같았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불안의 실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게이라며! 한이 형, 게이라며!"

　*

　 고독한은 카페 뒷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올라갔다. 이층집으로 가는 현관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고 고민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삼층 현관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다.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지금 고독한 씨에게 입 맞추고 싶어요. 눈감아줄래요?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직 제정신이 아닌지 젖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를 생각하자 가슴이 떨리면서 피가 쏠렸다.

　"정신 차려, 고독한. 넌 게이라고."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변명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아닌데... 나는 이런 얼굴이..."

　"화장실에 있었네?"

　 미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거울 속에 로이의 모습이 비쳤다.

　"여기서 뭐해?"

　 로이는 고독한의 귓볼을 이빨로 살짝 깨물며 귓가에 속삭였다.

　 고독한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얼굴이 서서히 무심한 표정으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로이. 내가 이상해."

　 로이는 그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 점점 더 굳었다.

　"뭐가? 나는 오늘도 네가 이렇게나 근사한데."

　 로이의 손끝이 그의 가슴을 훑었다.

　 로이는 그의 목과 어깨 부근을 섬세하게 쓰다듬으며 그의 반응을 즐겼다. 그의 손길을 따라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오늘은 기분이 별로야. 하기 싫어. 하기 싫다고!"

　 고독한이 로이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로이가 부릅뜬 눈으로 그를 째려봤다.

　"나한테 소리친거니? 지금."

　"미안."

　 그가 화장실을 나가 거실로 향했다. 로이는 그를 뒤따라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방금 한 짓에 대해 설명해."

　"하기 싫어서 하기 싫다고 말 한 것 뿐인데."

　 로이의 눈이 날카롭게 그의 상태를 살펴봤다.

　"그 여자 때문이지?"

　"아닌데. 그냥 오늘은 진짜..."

　"내 눈 보고 똑바로 말해. 정말 그 여자 때문 아니야? 요즘 네가 이상한거, 그 여자랑 정말 상관없는거지?"

　 로이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강하게 따져 물었다. 고독한은 로이의 시선을 마주보지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여자 당장 내보내."

　"로이! 그 애랑 상관없어."

　"난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두 가지 있어. 하나는 누가 내 물건에 손대는 거. 다른 하나는..."

　 로이의 목소리가 따박따박 귓가에 선명하게 박혔다. 로이는 그의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히 속삭였다.

　"누가 내게서 벗어나려는 거."

　 하얀 어둠이 미성의 목소리를 따라 바닥에 잔잔히 깔렸다. 그 위에 고독한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

　[안녕 티나.]

　[리아! 이게 며칠 만이야! 옆에 알렉스도 있어.]

　 지수는 노트북 화면 속의 티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티나 옆으로 알렉스가 삐친 얼굴로 나타났다.

　[알렉스 안녕! 프랑스는 지금 낮이지? 여기는 밤이야.]

　[리아한테 들었어. 너 지금 사내들이랑 동거하고 있다며.]

　 알렉스는 고개를 돌린 채로 안경을 고쳐 쓰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티나가 그의 어깨를 치며 그를 타박했다. 지수는 익숙한 그들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있잖아, 있잖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그녀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열광했다. 과하게 신난 그녀의 모습에 티나와 알렉스가 불안감을 느꼈다.

　[이 바로 내가 첫 키스한 날이야!]

　[뭐! 누구랑!]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내 첫사랑이지.]

　 지수는 금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수줍게 말하는 그녀의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티나와 알렉스가 불어로 욕을 해대며 기겁했다. 둘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동시에 물었다.

　[첫키스 말고 다른 건?]

　[요기랑, 조기랑, 거기도 조금 만지긴 했는데...]

　[리아!]

　[괜찮아. 그는 함부로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티나가 카메라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따졌다.

　[리아!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남자는 다 똑같아!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상황만 되면 하려고 드는 게 남자라고!]

　[아니라니까. 그 사람은...]

　[남자만 있는 곳에 동거를 하고 있는 것부터 그래. 네가 아무리 조심성이 없다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쳐. 네 아빠들이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

　[그 사람은 게이야.]

　 지수의 낮은 목소리가 먼 이국땅 프랑스에 있는 티나와 알렉스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알렉스였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좋은거야? 게이라서?]

　[그런데 그 사람은 사실 게이가 아닐지도 몰라. 어렸을 때, 엄마한테 받은 상처로 여자를 싫어하게 된 것 같아. 두 번째 키스는 그 사람이 먼저 했어. 내가 그 사람을 도와준다면...]

　[도와주고 나서! 그 사람의 상처가 회복 되고, 다 나으면... 그때처럼 떠날 거야?]

　 알렉스는 슬픈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노트북 화면 속의 영상은 끊기기라도 한 듯이 그대로 멈췄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지수 씨! 삼겹살 사 왔어요! 얼른 나와요!"

　 지수는 활짝 웃으며 티나와 알렉스에게 인사했다.

　[미안. 오늘 삼겹살이란 걸 먹기로 했거든. 지금 사 왔나봐. 여기는 매일매일이 새롭고, 신나는 일 투성이야. 마치 내가 한국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된 것만 같아. 나중에 또 연락할게!]

　 그녀가 노트북을 덮었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점차 희미해졌다.

　"지수 씨! 자요? 소주도 사 왔는데. 삼겹살 하면 소주거든요! 빨리 안 나오면 내 혼자 다 먹을지도 몰라요!"

　 지수는 흥겨운 민호의 목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나가며 환하게 웃었다.

　"민호 씨! 나도, 나도 삼겹살 먹을 거예요! 소주도 왕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