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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광무의 꿈
작가 : 백두혼
작품등록일 : 2019.10.22

대한제국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홍종우의 삶을 보면 된다.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로 건너가 근대화를 통한 조국 조선의 부국강병의 길을 도모한 자. 김옥균 등을 수괴로 한 친일 매국노들과 벌인 흉험한 싸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밀사는 이용익이었고 그의 곁에는 홍종우가 있었다. 근대사 전체를 통째로 뒤집는 위험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4. 기메 박물관
작성일 : 19-10-25 18:22     조회 : 244     추천 : 0     분량 : 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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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기메 박물관

 

 

 

 

 

  1891년 가을 어느 날 그에게 중요한 일이 생겼다. 하루 종일 외출했던 레가메가 저녁에 집에 들어 와 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었다.

 

 “홍공. 그대에게 직장이 생겼소.”

 

 그는 크게 놀라고 반가웠다. 이제 레가메의 호의에 더 이상 기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레가메는 여전히 친절하고 호의적이었지만 더 이상 폐를 끼치는 것은 그가 감내할 일이 아니었다.

 그 동안 레가메는 여러 분야의 인사들을 만나 그의 거취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랑스 어도 할 줄 모르는 이국의 남자를 조건 없이 선뜻 후원할 사람은 없었다.

 특히 1891년 여름에 중국 임지에서 돌아온 조르쥬 코고르당을 만나러 가서는 말 못할 모멸을 겪은 바도 있었다. 1886년 조불 통상수호 조약 체결 과정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었던 코고르당은 그의 파리 귀환을 절실히 기다려 왔던 홍종우의 반가운 인사를 매몰차게 외면했다. 친프랑스적인 조선 인사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프랑스 외교 당국의 정책이 이유일 것이다. 프랑스는 이미 조선을 자국의 이익 영역 밖으로 간주한 상황이었다. 그는 한동안 크게 낙담하고 실망하여 방에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희망의 빛줄기가 내비친 것이다.

 

 이에나 광장에 위치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물이 그의 새로운 직장이었다. 프랑스의 유력 기업가이자 여행가이며 동양 유물 수집가인 에밀 기메가 그의 일생에 걸친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해 건설한 박물관이었다. 특히 이집트, 중동, 인도, 중국, 일본 등 아시아의 전시품들을 전시해왔는데 이번에 한국관을 개설코자 하는 것이다. 에밀 기메는 바로 펠릭스 레가메와 극동 여행을 같이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레가메의 곁에 있는 조선 사람이 그의 조선 유물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했다. 더구나 그는 한자에 능숙하고 일본어까지 자유롭게 구사했다. 기메 박물관에서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직원인 셈이다.

 그의 월급은 100프랑.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는 레가메 부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숙소를 정해서 독립할 수 있었다. 파리 6구 세느 강변 셍 미쉘 광장 근처의 세르팡트 거리 23번지의 작은 호텔. 아주 작은 주방과 욕실이 딸린 꼭대기 층의 작은 방 하나를 구했다. 처음으로 그 스스로 시장을 보고 음식을 해서 먹었다.

 그가 처음으로 한 음식은 서양배추를 소금에 절여서 쌀과 끓인 쌀죽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 남도의 섬에서 그의 어머니가 종종 끓이던 음식이었다. 쌀죽이라도 먹는 날이면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는 늘 그 쌀죽의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조국이 생각나는 음식. 파리의 기름진 고기 요리와 고소한 빵 맛을 알아버린 그의 입맛이 늘 갈구하던 음식이었다.

 쌀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애완용 새들의 모이로 수입되는 동 아시아의 쌀들이 흔한 도시였다. 파리 사람들은 주로 인도나 실론의 푸석한 쌀들을 먹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새 모이로 파는 제일 싼 쌀이 바로 그가 익숙한 단립종의 끈적한 쌀이었다. 역시 같이 구할 수 있었던 찹쌀을 섞어 밥을 지으면 대략 비슷했다. 그는 이제 상투를 튼 머리로 쌀을 씻고 불에 올릴 수 있었다. 그가 원하면 언제나.

 

  그는 처음으로 출근을 하여 사무실을 배정받고 그가 정리하고 돌보아야 하는 조선의 유물들이 가득 찬 창고로 안내 되었다.

 

 “조선에 나가 있는 콜렝 드 플랑시 총영사가 보낸 유물이 지난달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이것들을 정리해서 내년 중에 조선 전시실을 개관하는 것이 목표지요. 아마 할 일이 아주 많을 겁니다. 바라 씨가 전에 보낸 물건들과 합하면 천 점은 족히 넘을 테니까요.”

 

 그를 안내한 기메 박물관 직원의 이야기를 귀로 흘리며 그는 산더미 같이 쌓인 나무 상자들을 일일이 손으로 쓸어 보았다. 조선에서 온 유물들을 이 곳 파리에서 만나 그것들을 정리하게 되다니. 일찍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콜렝 드 플랑시가 보낸 상자들부터 열기 시작했다. 거의 도자기들이었다. 낯익은 하얀 백자 그릇들이 숱하게 나왔다. 조선에서 별 감흥 없이 사용하던 주병과 주발과 사발들. 그것들을 감싼 지푸라기는 바로 조선의 들판에서 자라난 조선의 벼였다.

 그 매캐하고 간질간질한 볏짚의 냄새가 그의 코를 통해 뇌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두고 온 산천과 식구들이 떠올랐다. 조선에 두고 온 모든 것들과 그것들의 추억이 폭포수처럼 그를 덮쳤다. 이제 열네 살이 되어 한참 자랐을 그의 딸이 생각났다. 사년을 못 봤으니 얼마나 컸을까. 그는 하얀 자기 그릇들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조선을 떠난 후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를 안내한 직원이 모른 척 사라져 갔다.

 

  그의 업무는 단순했다. 창고의 물품들을 일일이 꺼내 닦은 다음 물건의 이름과 용도를 적은 다음 물품 번호를 매겨 놓으면 담당 직원이 별도의 수장고에 옮겨 가곤 했다. 그는 여덟 폭의 병풍을 하나 꺼내 펴서 그 병풍에 적힌 글월들을 프랑스 어로 번역해 적고 있었다. 그 병풍에는 샤를 바라가 적어 놓은 감상문이 첨부되어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글이었다. 적어도 샤를 바라는 이 물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길에서 산 작은 병풍이 내 가구목록에 하나 더 포함되었다. 가로가 3m 세로가 1m 남짓 되는 그것은 무척 오래된 것이었는데, 전체가 여덟 개의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각각에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그 의미는 효도, 겸양, 정숙함, 신의, 예절, 의로움, 공정함, 검소함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미들이 관례에 따라 일정한 짐승들이나 상징적 사물들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 현란한 색채가 비좁을 방을 환하게 만들 정도로 화려했다. 밖에서 엄청난 폭우가 짜증나게 내리쏟고 있었는지라, 나는 병풍을 벗 삼아 들여다보며 모든 시름을 잊으려 했다. 가만히 보니 그 각각의 의미가 표방하는 윤리적 가치를 따지지 않더라도, 단지 예술적인 관점으로 보아 그 병풍은 조선 예술의 근본에 관해 무척 소중한 정보로서 가치가 가득했다.

  - 중 략 -

 요컨대 하나의 작은 병풍이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제반 요소들이 조선인의 국가적 예술 전반에 걸쳐 그 기저를 이루는 자양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보아왔던 조선의 여러 예술 작품들, 즉 한양의 기념 건물들과 궁궐의 웅대한 장관, 대구 성문 누각의 그림들, 관리들의 눈부신 복장들, 밀양의 그 다채로운 조각들과 건축물들, 그 밖에도 수많은 수공예품과 더없이 인간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신기한 일인극 (一人劇) 등을 차례차례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나는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운 채, 언젠가 나에게 조선인처럼 야만인들을 없을 거리라고 말했던 누군가의 어리석은 생각을 한껏 비웃으며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샤를 바라의 안목에 경탄하면서도 씁쓸한 심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특히 후일 고려 시대의 수월관음도를 정리하면서는 놀라고 말았다. 이들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수집했을까? 듣기로는 온 조선에 소문을 냈다고 했다. 후한 값을 쳐 주니 값어치 있는 물건들을 들고 오라고. 그런데 이 귀한 수월관음도는 얼마를 쳐 줬을까? 아마도 쌀 200가마니 정도 쳐주지 않았을까. 그보다 적을 수도 있었다. 일본 돈과의 환율 등을 맞춰 보면 여기 프랑스 돈으로 그의 한 달 월급인 100 프랑이면 지금 조선에서 쌀 50 가마니 정도는 살 수 있다 싶었다. 그의 두세 달 치 월급 정도의 돈을 주고 이런 유물들을 끌어 모았다면 사실 공짜로 주워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샤를 바라를 욕할 생각은 없었다. 금을 제외하곤 어떤 물건도 동일하게 교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더구나 가난한 그의 조국에서 이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서 대우하지 않는다면 헐값에 타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어디 이런 유물과 예술품만 그럴까? 지금 조선에서 온갖 이권을 챙겨가는 열강들의 행위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가 우리 것의 가치를 제대로 셈하지 못한다면 이미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이다. 조선은 지금 가난할 뿐 아니라 무지한 것이었다. 이 세상천지가 얼마나 큰 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제대로 아는 인물은 겨우 몇몇에 불과했다. 우리의 것을 지켜내기 위해 우선 우리 것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그것 때문에 그는 지금 파리에 와 있는 것이다. 이 곳 프랑스를 포함한 서구 열강들의 힘과 의도를 셈할 줄 알아야 하고 조선의 역량과 가치를 셈해야 한다. 그것이 조선의 강산과 백성을 지키는 전제 요건임을 그는 뼈저리게 깨우쳤다. 장부를 적어가는 그의 손이 느려지기만 했다.

 

  그는 기메 박물관에 취직을 하고 레가메의 집을 떠난 다음 한동안 레가메를 만나지 않았다. 대신 교유의 폭은 훨씬 넓어졌다. 우선 기메 박물관의 동료들이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었다. 그는 일본 아사히 신문사의 식자공으로 일할 때도 그 동료들과 무척 친하게 지냈었다. 그들은 친절했고 유쾌했다. 더구나 그 동료 중엔 중국인, 인도인, 러시아 인, 이집트 인등 여러 종류의 인종이 포함됐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트로카데로 광장의 카페를 찾으면 대낮부터 포도주를 마시면서 왁자지껄 떠들어대곤 했다. 그 역시 그들과 유쾌하게 어울리며 한 때를 보냈다. 그 트로카데로 광장에선 에펠탑이 한 눈에 보이곤 했다. 처음의 위압감과 거부감은 점점 사라지고 이제는 오히려 정겨운 모습이었다. 파리의 분위기는 그를 점점 취하게 했다. 자유롭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이 파리의 모든 것이.

 

 “내 이름은 조셉입니다. 조셉 앙리 로니.”

 

 갈색 머리에 갈색 모직 모자를 눌러 쓴 작은 키의 남자였다. 그는 소설가였다. 여기 기메 박물관 직원 중 한 명의 소개로 찾아 온 모양이었다. 이제 그의 프랑스 어 실력은 어눌하나마 꽤 정확히 듣고 말할 수 있었다.

 

 “조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고요.”

 

 조셉 로니는 원래 쥘 베른처럼 공상과학 소설을 주로 써 오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였다. 조선에도 물론 사랑이 있고 신분의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 있는 남녀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는 남원 광한루를 떠올렸다. 백일홍이 만발하고 버드나무가 연못 위로 흐드러진 어느 봄날의 추억이었다. 그는 춘향전의 줄거리를 어렵지 않게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조셉 로니와의 작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침에는 알리앙스 프랑세즈라는 학교에 다니고 점심 전에 기메 박물관에 출근해서 저녁 시간까지 근무한 다음 조셉 로니를 만나 저녁 식사를 했다. 그가 구술하는 이야기를 로니는 꼼꼼하게 받아 적고 가끔은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사건 상황에 대한 토론도 이뤄졌다. 그가 기억해서 구술하는 춘향전이 정확하지 않은 줄도 알고 있었고 프랑스 독자들의 이해가 쉽도록 적당히 각색되는 것도 이해했다. 어차피 춘향전이라는 것은 주로 구전으로 전해졌고 인쇄본 역시 다양한 판본으로 존재했다. 다만 그는 판소리로 전개되는 한국 고유의 정서가 조금이나마 정확히 전달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조선의 여인들이 엄청난 억압 속에 사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은 꺼려졌다. 그는 어느 날 오귀스텡 거리에 자리 한 로니의 숙소에서 판소리 춘향전의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옥중가의 쑥대머리. 그 처연한 슬픔을 이 이방의 남자는 이해할 수 있을까.

 

 규칙적인 생활 속에 하루하루가 지났다. 그는 프랑스라는 나라를 조금씩, 그리고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파리 거리의 어린 거지들과 소매치기, 호화로운 마차를 끌고 다니는 신흥 기업가들, 몽마르트르 언덕 밑바닥의 몸 파는 여자들과 기괴한 예술가들. 이 모든 인간 군상들이 무심한 파리의 회색 빛 하늘 밑에서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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