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마리의 하루
토요일이었다. 학교 옆 테니스장이 일반 학생들한테도 열려있는 날이어서 준석과 마리는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마리의 실력은 단기간에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지만 그래도 중학교 때 테니스 선수였던 준석이의 상대로는 역시 역부족이었다. 1세트 6:0으로 준석이 승리를 따냈다.
“솔직히 좀 놀랐는데. 이렇게 실력이 급상승할 줄은 몰랐는데.”
“실력이 늘긴 뭐가 늘어? 1게임도 못 땄는데. 두고 보라고. 나중엔 내가 반드시 이길 테니까.”
“마음가짐은 칭찬한다만 난 중학교 때 테니스 선수였던 사람이라고. 초보자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시끄럽고 다시 시작하자고.”
2세트가 준석이 서브로 시작되는 세트여서 마리는 공을 준석이한테 넘겼다. 준석은 날카롭게 서브를 넣었는데 마리가 멋지게 받아서 오른쪽 구석으로 공을 찔러 넣었다. 방심한 준석은 그렇게 첫 점수를 내 주었다.
“솔직히 이 서브를 받을 거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두고 보라고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준석은 다시 서브를 넣었다. 마리는 이번에도 멋지게 받아 넘기려 했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공이 네트에 걸리고 말았다. 두 사람이 그렇게 테니스를 치고 있을 때 언제부터인가 나연과 약속 때문에 학교에 온 도현은 마리를 보고는 테니스장 밖에서 계속 마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리는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잠깐 타임.”
“왜 그래?”
준석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마리는 테니스장을 나갔다.
“이봐요. 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에요?”
“테니스 잘 치네요. 저도 테니스는 조금 치는데 언제 한 번 저랑도 치지 않을래요?”
“댁 같은 인간한테 조금도 관심 없으니까 그만 가 줬으면 좋겠는데요.”
“지금은 관심 없을지 몰라도 조만간 관심을 갖게 될 겁니다.”
“예?”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그만 가지만 어쨌든 전 마리씨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도현은 자리를 떠났고 마리는 다시 테니스장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야?”
준석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신경쓸 거 없어. 재수 없는 인간이니까. 자 다시 시작하자고.”
마리가 공을 준석이한테 넘겨 주었다.
도현은 나연이랑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인 중국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연은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도현은 나연이 앉은 자리로 가서 앉았다.
“니가 웬 일이냐? 나한테 밥을 다 사 준다고 하고.”
“난 맨날 거지인 줄 알아요? 저도 돈 있을 때가 있는 거라고요. 짬뽕 사 줄게요.”
“야, 또 짬뽕이야? 난 짬뽕 싫어.”
“오빠, 외계인이에요? 어떻게 짬뽕을 싫어할 수가 있어요?”
“어휴, 정말. 아무튼 난 짬뽕 싫어. 잡채밥 먹을 거야.”
“알았어요.”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자 나연은 잡채밥과 짬뽕 곱빼기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떠났고 다시 둘만 남았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됐어요?”
“뭐가?”
“태화 고등학교 살인사건이요? 범인은 잡았나요?”
“야, 난 경찰이 아니라 검사야. 그리고 수사는 검사가 아니라 경찰이 하는 거라고.”
“검사도 수사권은 있잖아요? 오빠 이러는 건 지금 직무유기라고요.”
“어휴, 도대체 저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
나연이 주문한 잡채밥과 짬뽕 곱빼기가 나왔다.
학교 옆 테니스장에서는 여전히 준석과 마리의 게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준석의 강력한 서브로 2세트도 끝이 났다. 예상대로 마리의 완패였다. 하지만 준석은 단기간만에 몰라볼 정도로 성장한 마리의 실력에 감탄했다. 둘은 학교로 돌아가서 땀으로 젖은 얼굴을 씻었다.
“이제 뭐 하지?”
준석이 물었다.
“난 희연이네 집에 가기로 했는데.”
“희연이네?”
“응. 희연이가 점심 해 준다고 했거든.”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같이? 한 번 전화 해 볼게.”
마리는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서 희연이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통해 희연이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야.”
“언제 올 거야?”
“지금 갈 건데 준석이랑 같이 가면 안 돼?”
“준석이?”
“응. 왜 싫어?”
“싫은 건 아냐. 자신 있으면 데리고 와도 돼.”
“무슨 말이야?”
“오늘은 내가 너한테 점심 해 주기로 했잖아? 준석이도 내 음식 솜씨에 감탄할 걸.”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군. 끊을게.”
마리는 전화를 끊고 준석이한테로 돌아갔다.
“희연이가 뭐라고 해?”
“안 된대.”
“하는 수 없지.”
준석은 조금 실망을 했다.
“그럼 다음 주에 보자.”
두 사람은 헤어졌다.
희연이의 집에 도착한 마리는 거대한 철제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희연은 인터폰을 보고 마리가 온 것을 확인한 후 문을 열어 주었다. 마리는 대문에서 현관까지의 거리가 꽤 되어서 한참을 걸은 후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준석이는?”
“같이 안 왔어.”
“왜? 같이 오지 그랬어?”
희연이 놀리듯이 말했다.
“내가 미쳤나? 니 음식 솜씨를 준석이한테 보여주게? 결국 남자가 여자한테 반하게 되는 건 미모도 마음도 아닌 음식솜씨라고. 미모는 질리고 마음은 알 수가 없어. 질리지도 않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음식솜씨뿐이라고.”
“난 돈이 좋은데.”
“어휴, 저 속물. 그래서 이 다음에 재벌 2세랑 결혼할 거냐?”
“당연하지. 들어가자.”
두 사람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 놓여있는 테이블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했어?”
둘은 자리에 앉았다.
마리는 콩나물 무침을 한 젓가락 집어 먹었다. 정말 환상의 맛이었다.
“너 정말 우리 보육원에 요리사로 자원봉사 할 생각 없냐?”
“자원봉사는 싫어. 돈 많이 주면 생각해 볼게.”
“하여튼 속물이라니까. 이런 집에 살면서 무슨 돈을 그렇게 밝히냐? 너 그러다 천국 못 가.”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응?”
“기독교 신자라고 다 천국 가는 거 아니니까. 기독교 신자가 다 천국 간다고 생각하면 그거야 말로 오만이라고.”
“하여튼 이상해.”
“수아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서울엔 올라왔어?”
“아니.”
“왜?”
“난 돈 없으니까.”
“아깝네. 그 아이는 조금만 뒷바라지 해 주면 훌륭한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니가 무료료 가르쳐 주면 되잖아?”
“난 그렇게 착한 사람도 아니고 그럴 시간도 없어. 바쁘다고.”
초인종이 울렸다.
희연은 거실로 나가 인터폰을 확인했다. 유진이 와 있었다. 희연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희연은 문을 열어 주었다. 유진은 5분 정도 걸은 후에 현관문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진이는 책을 세 권 들고 있었다.
“책 반납하고 책 좀 빌려 가려고. 근데 누가 왔어?”
유진은 못 보던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응. 마리 왔어.”
“마리? 마리가 누구야?”
“왜, 너도 저 번에 한 번 봤잖아? 준석이 여자 친구.”
“아. 그 아가씨.”
유진은 그제서야 기억을 해 냈다.
“점심은 먹었어?”
“아니, 아직.”
“뭐 하느라고 아직 점심도 안 먹었어? 점심 먹고 있었는데 좀 먹을래?”
“그래.”
유진은 희연이랑 같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유진과 마리는 서로 인사를 했다. 희연이 밥그릇에 밥을 떠서 유진이 앉은 테이블 앞에 갖다 주었다. 유진은 밥 한 숟갈 뜨고 된장찌개도 한 술 떠서 맛을 보았다. 정말 끝내주는 맛이었다.
“먹을 만해?”
“진짜 맛있어. 가끔은 정말 배우고 싶다니까.”
“남자가 요리는 배워서 뭐해?”
“하여튼 저 고리타분한 생각은 어렸을 때부터 변함이 없다니까.”
세 사람이 식사를 마친 후 희연이 상을 치웠다.
유진은 한 장관의 서재로 들어가서 반납하러 가지고 온 책을 책장에 끼워놓고 철학책 한 권을 꺼냈다.
“난 그럼 갈게.”
유진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마리랑 얘기를 나누고 있던 희연이한테 말했다.
“응.”
“책은 빨리 읽고 반납할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아버지도 니가 책 빌려가는 거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유진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집에는 다시 희연이와 마리만이 남았다.
“드디어 니 약점을 발견했어.”마리가 말했다.
“무슨 약점?”
“저 도련님이 니가 이 다음에 결혼하려는 재벌 2세지?”
“이 봐요. 아가씨, 사람의 약점은 건드리는 게 아니에요.”
“왜?”
“그러다 다쳐요.”
“농담이야 진담이야?”
“알아서 생각해.”
“나도 그만 가 봐야겠다.”
마리는 희연이한테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