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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에나멜
작가 : 신정
작품등록일 : 2019.10.20

요양 간 오지마을에서 주인공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

 
에나멜 01
작성일 : 19-10-20 08:40     조회 : 392     추천 : 0     분량 : 1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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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회로에서

 

 다시 그 지점이었다.

 

 일용할 양식으로 나는 한 짐 토마토를 그득하게 챙겨 넣은 가방을 메고 있다. 그리고 가는 길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낡아빠진 표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이제껏 본 표지들은 전부 하얀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있었다. 그 표지들은 대부분 칠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삭아있었다. 나뭇결을 따라 삭거나 썩어가고 있었다. 검은 글씨 또한 크고 작은 점으로 떨어져나가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여럿이었다.

 

 그런 표지에 그려진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따라서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었다. 때는 여름인지 겨울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사실은 내가 긴소매를 입고 있다는 것과 긴바지를 입고 있다는 것, 한가득 토마토를 챙겨 담은 가방을 메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바닥이 뜨거운 운동화를 신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사실 긴소매든 긴 바지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난 어떤 계시에 의해 걷고 있는 게 아니며 알 수 없는 운명의 부름에 답하고 있는 것 또한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제든 나는 바짓단을 잘라낼 수도 있었다. 그러고 싶어질 만큼 답답해진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아마 걸어가는 도중에 토마토를 지나치게 많이 먹은 탓에 지나치게 몸이 불어난다거나 도저히 참기 힘든 더위에 지치면 어쩔 수 없이 잘라내야 하지 않겠는가.

 

 바지는 낡고 낡아 발뒤꿈치 쪽이라면 쥐가 이를 갈아놓은 모양으로 뜯겨나가 있다. 그에 비해 어디 딱히 스칠 일이라곤 없는 반대쪽은 아직 박음질 상한 곳도 없이 그대로 멀쩡했다. 그렇지만 먼지가 덩어리져 들러붙어 있었다. 그리고 모자가 있었다. 영문자를 이마에 새겨 넣은 모자였는데, 검정 바탕에 검붉은 색으로 수를 놓았거나 꿰매놓은 모자였다. 쓸 일이 없어 아직 안쪽까지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허리춤에 안정된 모양새로 매달려있다.

 

 사실 굉장한 뙤약볕이다. 그런 뙤약볕 아래 긴소매 긴 바지로 등에 한가득 토마토를 담은 가방까지 짊어 맨 채 땀띠가 날 지경인데도 덥다고 느끼지 않는다니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난 그런 스스로에게 어떤 경외감을 느끼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대체 이게 뭐니.”

 일단 그렇게 툭 내뱉고 나면 공허하게 아스팔트에 대고 한 차례 김빠지는 웃음을 지은 다음 다시 걷기 시작한다.

 가방에 한 가득 토마토뿐이지만, 밖에 달린 작은 주머니들에 내가 노숙하면서 써야 할 자잘한 생활용품들이 들어있다. 우선 중요한 것 네 가지를 들자면 물통, 손수건, 검정고무줄, 휴대용 칼이다.

 

 다들 물통이 중요하다는 사실이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밥 없이는 한 달을 살아도, 물 없이는 삼일도 채 버틸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말이다. 손수건 역시 중요하다. 보통 쓰이는 용도로 사용하지만, 무엇보다 손수건은 얼굴을 덮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다. 나 같은 경우 잠을 자려고 할 때 이불 없이는 잠들 수 있어도 얼굴만은 꼭 덮어야하는 탓에, 정말 그랬다. 왜 꼭 얼굴을 덮어야 잠이 오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그래왔기에 습관으로 굳어져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맞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으니 확인해볼 수는 없는 일이다.

 검정고무줄 같은 경우엔 그야말로 필요할 때 적당하게 잘라서 유용하게 두루두루 쓸 수 있는 중요품목이다. 헐렁한 소매를 걷어 올려 고정하는 데에 쓸 수도 있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 바지에도 같은 용도로 써먹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길어진 머리카락을 처리하는 데에도 쓸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머리카락 처리하는 데 쓰는 건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 사용방법이다. 뙤약볕에 내놓으면 곧 고무줄 표면이 슬며시 녹아서는 서로 달라붙고 머리카락까지 엉겨 붙어 버려 나중에 떼어내려면 상당히 아프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역시 중요품목인 휴대용 칼은 검정고무줄만큼, 아니 그보다 더 쓰임새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고무줄을 그렇게 사용해보려면 휴대용 칼이 있어야한다. 칼은 부러진 손톱을 처리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인다. 그리고 지나치게 길어진 머리카락을 잘라 내거나 머리칼에 찐득해진 고무가 엉겨 붙은 것을 잘라내고 다듬는 데에도 쓸 수 있다. 토마토를 자를 때도 칼이 필요하다. 그냥 베어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수분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이니만큼, 과즙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면서 꼭지까지 잘 씹어 삼키려면 칼로 잘라먹는 과정은 필수다. 휴대용 칼은 발이 아플 때에도 쓸 수 있다. 아스팔트 위에 무슨 모래알들이 그리 많은지 몰라도 그 위를 오래 걷다보면 운동화 밑창에 자잘한 모래알들이 딱딱하게 수도 없이 박혀 들어있다. 그렇게 박혀든 모래알들은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발바닥을 지그시 눌러 찌르는 탓에 아파서 그때마다 밑창에 박혀든 모래알들을 제거해줘야 한다. 조그만 모래알을 빼내는데 뾰족한 칼끝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 가다가다 어떤 이유로 긴소매를 잘라내야 한다면, 그때도 칼을 써야 할 테니 여러모로 중요한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몇 개 표지를 거쳐 왔는지 오면서 세지를 않았다. 몇 번째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7개? 8개? 아마도 9개를 넘어가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 손목시계가 죽어버렸다.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 산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차고 다닌 지는 얼마 되지 않아서 길이 들기 전으로 빳빳한 감이 있어 손목에서 뱅글뱅글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여유를 둬야하는 시계,

 

 바늘은 5시2분12초를 가리키고 있다. 언제 멈춘 것인지 모르니 얼마나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시로 왼쪽 손목을 들여다봤겠지만, 이럴 줄 알았겠느냔 말이다. 사고 나서 한 번도 건전지를 갈지 않았는데도, 차고 다닌 적이 없다보니 생각 없이 완전히 새 것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아직 해가 환하게 떠있는 걸 보면 5시 전인 모양인데,

 가방에 작은 주머니 안쪽 고리에 나침반을 매달아 둔 걸 기억해내고는 방향을 확인해보았다. 아까부터 쭉 남쪽으로만 가고 있고, 태양은 높은 남동쪽에 머물러있다. 대략, “12시에서 1시 사이 쯤 되지 않았을까?”

 

 다시 슬슬 배가 고파진다. 난 곧바로 토마토 세 개를 꺼내 먹었다. 지금까지 토마토만 15개를 먹었다. 그러니까 세 개씩 다섯 번을 먹은 셈이다. 잘 익은 토마토들 크기도 큰 편이어서 세 개 먹으려고 하면 채 다 먹기도 전에 금방 배가 부른다. 하지만 또 그만큼 금세 꺼져서 얼마가지 못하고 먹기 전에 허기진 상태로 되돌아가버린다. 세 개를 연달아 먹고 난 직후인 지금은 잠시 후 찾아올 허기와 아주 멀리 있는 듯하지만, 아마 이 상태도 얼마 못 갈 거라는 얘기다. 문득 이렇게 계속 토마토만 먹다가 이러다 토마토가 돼버리는 게 아닌가. 엉뚱하긴 하지만 갑자기 조금 걱정이 된다.

 

 아직 환한 대낮인데 계속 걸어서인지 피곤하고 이내 졸음이 밀려온다. 따뜻한 날씨에 배까지 부르자 슬슬 춘곤증인지, 한걸음 씩 내딛어 옮기면서도 아스팔트 위에 편안히 드러누워 한숨 푹 자는 일만 간절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 토마토 가득한 가방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고 발도 천근만근이었다. 더는 걸을 의지도 없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얼굴덮개 손수건도 없이.

 

 

 

 “왜 이런 데로 끌고 와서, 내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되냐.”

 뒤를 돌아보니 힘이 들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채 헉헉거리면서 그 얼굴에 근육이란 근육은 구길 수 있는 대로 몽땅 구겨 인상을 쓴 채 따라오는 중인 모습이 보인다. 저렇게 불평하는 걸 보니 꼭 내가 억지로 끌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근데 분명 출발할 땐 나 혼자였고, 원래 난 혼자 갈 생각이었다.

 최다인이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야 이미 알고 있는데, 뭐 하러 굳이 같이 가자고 하겠는가 말이다. 산 얘기를 할라치면 어차피 내려올 거 피곤하고 시간 아깝게 뭐 하러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한테 대고 가자고 하고 싶은 마음일랑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같이 오게 된 건 쟤가 먼저 나서서 같이 가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가 먼저 나서서.

 “말은 바로 해라. 내가 가자고 했냐? 네가 온다고 했지. 따라간다며. 가는 길 중간에 지가 갑자기 끼어들어놓고는 뭔 소리야.”

 내가 하는 말에 최다인은 고개를 내휘둘렀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큰 바위에 앉으면서 등산 가방을 벗어 내리며 말했다.

 “아, 몰라. 무조건 쉬었다 가.”

 마침 나도 잠시 쉬었으면 했던 참이었기에 그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앉은 채로 정상 쪽을 올려다보니 과연 가파르게 점점 더 심하게 깎아지르며 올라가고 있었다. 험한 산이라는 건 아저씨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서 최다인이 잘 따라 끝까지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럼에도 용케 여기까지 따라 올라온 걸 보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이제 해가 지려고 하는 참이었다. 게다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하루 동안 천팔백 미터를 걸었는데, 정상까지 가려면 천육백 미터를 더 올라가야한다. 산세는 점점 더 험해지면 험해지지 완만해지는 일은 없을 테고, 최다인은 물론 나 역시 지금은 지칠 대로 지쳐있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피곤할 정도까지는 아닌데 한동안 뜸하게 산타기를 게을리 했더니 금방 티가 나는 모양이다.

 

 안 그래도 쉬어야하는 이 시점에, 시의적절하게도 바로 눈앞에, 바위에 앉아 쉬던 중에 뜻하지 않게 오늘의 목적지가 된 가마민박이 눈앞에 보였다. 때마침 날도 이미 어두워지고 있다. 이제 가속이 붙어서 더 빠르게 어두워질 터였다. 그런데 최다인은 뭐든 아랑곳없이 아래쪽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에만 푹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최다인, 저기 절벽 봐봐.”

 “절벽? 어디 절벽.”

 “저쪽에 봐봐. 절벽 군데군데 방 붙어있는 거. 보여?”

 “아, 보인다. 저기 저거 말이지?”

 최다인이 손가락을 들어 가마민박 쪽을 가리켰다.

 “응. 저기서 쉬고, 내일 다시 출발하는 걸로 하자. 이제 날도 어두워지려고 하니까.”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산세 험준하기로 유명한 가마봉으로 오르는 길 중턱, 그것도 그냥 중턱 어딘가가 아니라 깎아지른 절벽에 지어놓은 민박집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에 가마민박은 가마산 중턱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유명했었는데, 그 위치가 각도85도로 깎아 지르는 절벽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부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가마민박에 한번 예약해 묵으려면 1~2년쯤 기본적으로 기다려야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여태껏 일어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영업을 시작한지 이제 막 7년째 넘어가려는 시점인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가마봉 오르는 길 중간에는 북쪽을 향해 85도 각도로 깎아지른 절벽 낭떠러지가 있었다. 거기에 민박을 차리게 된 계기에 대해 묻는 것에, 현재 가마민박 주인인 황수혁씨는 그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고도 알고 있었다.

 처음 가마봉에 올라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이런저런 자료라는 자료들을 몽땅 다 찾아보았다. 그래서 가을엔 그다지 사랑받지 못하는 산이라는 것부터 이런저런 자잘하고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본 것들 중 가장 내 흥미를 끄는 부분이 저기 매달린 가마민박이었다.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낭떠러지에 민박을 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놀랍기 않은가!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래 낭떠러지 끄트머리에서 체크인 하도록 되어있었는데 안전상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훨씬 안쪽으로 옮겼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가마민박 앞에 이르러서는 기대감에 좀 들떠 있었다. 그런데 최다인은 뭔가 마땅찮다는 기색이었다. 주변상황에 동화해 쉽사리 힘들여 모여들곤 하는 미간근육. 왜 저러지.

 

 “왜 그래? 뭐 이상해?”

 “안재은.”

 “왜.”

 “여기 뭔가 맘에 안 들어. 위험해 보이잖아. 신변에 무슨 문제 생길 일은 없겠지 설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빨리 가자. 피곤해서 곧 기절하겠어.”

 내가 팔을 잡아 끌어가려고 하자, 최다인은 안 끌려가려고 버티면서 다시 말했다.

 “아무래도 저기 엄청 비싸 보이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 참고로 나 돈 없다. 그냥 없는 게 아니라 정말 한 푼도 없어. 십 원 한 장도 없다고.”

 “뭐라고?”

 이제 코앞에 가마민박이 있는데, 이게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지갑 안 챙겨 왔어. 너 가는 거 보고 갑자기 무작정 따라 나왔잖아. 급하게 짐 챙겨서 나오긴 했는데, 깜빡하고 지갑 챙기는 걸 잊어버려서. 그러니까 굳이 저기에 묵고 싶으면 네가 내 것까지 계산해야 된다. 설마 의리 없이 나만 밖에서 자게 놔두고 혼자 방 쓸 생각은 아니겠지?”

 “빌려줄게. 갚아. 그럼 되지. 빌려줘?”

 “그러니까, 지금 너 방 두 개 값 치를 만큼 돈이 있다는 말이네.”

 “아니, 아니다. 너 나 따로 쓸 필요 없이 그냥 같이 쓰면 되잖아. 그럴래?”

 

 그렇지만 결국 방은 따로 쓰기로 하고, 가마민박 간판 아래에서 체크인.

 가마민박에는 방이 단 7개뿐이었다. 절벽에서 방을 안정적으로 고정해 붙일 수 있는 위치가 한정되어있고, 일단 만들어 붙인다 해도 관리하는 일 역시 보통 일이 아니어서 어려운 점이 있다고 원래 처음 시작할 때는 4개뿐이었단다. 그랬던 것을 그 아래로 한 줄 더 늘려서 7개까지 만들게 되었다, 고 말하는 설명을 들었다. 열쇠를 건네받기까지 그 짧은 시간동안 가마민박 역사공부라도 한 기분이다.

 “아…네.”

 무엇보다도 열심히 대꾸하는 최다인 고개 끄덕이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우습기만 했다. 최다인이 감탄하는 사이 난 열쇠를 건네받아 확인했다.

 “‘가2’, ‘가3’호인가요?”

 “네. 윗줄 두 번째 세 번째 방인데, 전망도 좋고 가운데에 있는 방이라서 안전성도 아랫줄이나 끝번보다는 좋으니까요,”

 당신들이 쓰게 될 방은 가마민박에서 가장 좋은 방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는, 방에 들어가고 나오는 방법, 방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방법에 관한 설명이 죽 이어져 나왔다.

 

 “방에 들어가실 땐, 잠깐 저쪽에 보시면 7개 들어가는 자리가 있습니다. ‘가1’부터 ‘오3’까지 보이시죠? 두 분은 ‘가2’호와 ‘가3’호니까, 각자 그 자리로 가셔서 갖고 계시는 짐을 먼저 내리셔도 되고, 먼저 내려가신 다음 짐을 직원에게 부탁해 내려달라고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만약 짐을 먼저 내리시려는 경우, 잘못 실수해서 저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솔직히 직원에게 맡기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크흠.”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직원은 이어서 말했다.

 “간혹 가다 직원을 의심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굳이 짐을 맡기라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만약 두 분께서 직원에게 짐을 부탁하시는 경우, 먼저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방으로 내려간 후에 안전장비를 푸시고 방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러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직원이 풀어놓으신 안전장비를 끌어올려서 짐을 내려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간혹 가다 짐을 들거나 맨 채로 내려가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건 아주 위험한 행동입니다. 규정상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는 만큼 두 분께서는 그러고 싶으셔도 규정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손님이 원하신다고 그렇게 했다간 가마민박 그날로 영업정지니까요, 나중에 내려가시든 먼저 내려가시든 짐하고는 따로 내려가셔야 합니다.”

 한 박자 쉬고,

 “그렇게 방에 내려가시면, 두 분 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가마민박 방들은 절벽에 붙어있는 육면체형태입니다. 그래서 윗면, 그러니까 천장으로 출입문이 뚫려있습니다. 문을 아래로 여시면 위에 얹어져있는 사다리가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바닥에 닿게 되어있으니, 그 사다리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신 후에는 손쉽게 절벽 쪽 벽에 있는 손잡이를 돌려서 사다리를 올리시면 됩니다. 사다리만 올릴지 문까지 닫을지 조절하실 수 있으니까, 그건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되고요. 그런데 두 분, 저희 방이 상하좌우 일 미터씩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거 아세요?”

 굉장히 열심히 설명하던 직원은, 본인이 말해놓고선 잔뜩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곧 눈알 쏟아낼 듯 눈을 크게 뜨고는 흥분해서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었다. 쉽사리 동화하고 마는 특성대로 나도 모르게 같이 놀라서 침까지 삼키고 말았는데, 옆을 보니 최다인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나와 최다인에게 눈을 맞추며 잠깐 멈췄던 직원은 설명을 다시 이어갔다.

 “방에 들어가셔서 보시면, 정면으로 난 창 옆에 상하좌우로 움직일 수 있게 되어있는 조종 장치가 있습니다. 방에 처음 들어가시면 아마 가장 왼편 아래쪽으로 내려간 위치에 놓여있을 거예요. 그 조종 장치 바로 위쪽에 방이 얼마나 움직여서 어느 지점에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도록 보여주는 표시화면이 있으니까 확인해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표시를 보면서 위치를 가늠하며 조종 장치를 이용해 방을 움직이시면 됩니다. 아, 그런데, 더는 움직일 자리가 없는데도 한 방향으로만 방을 계속 밀게 되면 자잘한 부속품이 빠진다든가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방 추락이라는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위치 조정을 하실 땐 각별히 신경 쓰시고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긴 설명 들어주셔서 감사드리고, 머무시는 동안 즐거운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설명하고 인사하는 직원을 다시 보니, 이제까지 뒤쪽으로 돌아가 있던 명찰 앞면이 눈에 들어왔다. 황수운.

 “황수운 씨.”

 “네.”

 참 열심인 직원이지 싶었다.

 “이제 방으로 가도 되는 거죠?”

 부르긴 내가 불렀지만 질문은 최다인이 했다. 그는 다인이 묻는 질문에 어딘가 부산하게 움직이며 우리를 낭떠러지 쪽으로 이끌어갔다.

 

 낭떠러지 절벽 끝 주먹하나를 놓을 수 있을 정도 안쪽에 작은 직사각형 표지가 있었다. 나는 ‘가2’라고 쓰인 표지 앞에, 최다인은 ‘가3’이라고 쓰인 표지 앞으로 섰다. 그리고 직원이 알려주는 대로 각 자리에 놓여있는 안전장비를 집어 들어 착용했다. 다리를 끼워 넣고, 허리에 둘러서 채운 뒤 몸에 딱 맞도록 끈을 당겼다. 매고 있던 등산 가방은 뒤쪽에 내려놓은 채였다. 사실 짐을 먼저 내려 보낼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설명하면서 직원이 경고하듯 말하던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냥 직원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안전장비에 의지해 정육면체 방 윗면으로 내려서자 직원이 말했던 대로 문손잡이 옆에 초인종이 있었다. 설명을 듣긴 했지만, 이런 데에 웬 초인종인가 싶었다. 난 안전장비를 바로 풀지 않고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어스름한 노을도 빠져나가고, 이제 어둠이 내려앉으려하는 산. 정말 장관이다. 잠시 동안 난 이제 안전장비를 풀어야하고 초인종을 누르고 가방을 내려 받아야 한다는 건 깜빡 잊은 채 내다보이는 풍광에 흠뻑 녹아들었다. 그렇게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근데,

 가마민박에 묵고 있는 사람이 나랑 최다인뿐인가? 나는 절벽에 가려진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최다인이 날 불렀다.

 

 “안재은.”

 “어, 왜.”

 “뭐 하고 서있어. 짐 안 내려?”

 그러고 보니 최다인은 이미 짐을 내려서 끌어안은 채로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구경을 해도 짐은 내리고 해.”

 “너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위험할 것 같다고 신변에 문제가 뭐 어쩌고 하더니만 되게 좋은가보다?”

 “아, 들어와서 보니까, 괜찮네.”

 그러더니 샐쭉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 돌려 정면을 감상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짐을 내려 받아야 했다. 우선 안전장비를 푼 다음, 발아래에 있는 문 옆 초인종을 살며시 밟았다. 그러자 곧 안전장비가 위로 올라가더니 절벽 뒤로 사라지고 이내 짐을 묶은 채로 다시 내려왔다. 그런데 내려온 가방에 쪽지가 하나 붙어있었다. 가방을 묶는 데 쓰인 안전장비를 다시 풀어 초인종을 누른 뒤 쪽지를 펼쳐보았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고, 직원 도움이 필요하실 때에는 방 안 절벽 쪽 벽에 있는 수화기를 들어주십시오. 저희 가마민박에서는 가마산에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을 위해 확성기나 마이크는 물론이고 큰 목소리로 말하는 일도 없으니, 부득이하게 쪽지를 통해 말씀드리는 점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완전한 밤도 아닌 어중간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난 다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퍼뜩 우선 짐부터 풀어야겠다 싶어서 잠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래쪽으로 사사삭, 사다리 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딱 닿도록 맞춤으로 제작되었는지 사다리 길이가 딱 맞았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방 안으로 창을 통해 희미한 빛이 스며들어서 환하진 않았지만, 더듬으며 헤맬 필요는 없이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직원 말대로 절벽 쪽 벽 가운데에 돌리는 형식으로 된 손잡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수화기와 스위치가 있었다. 스위치는 방 안 전등스위치였다. 전등을 켜니 갑자기 확 환해져서 설명으로 들었던 걸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환해지자 한가운데에 서있는 사다리가 거슬렸다. 절벽 쪽 벽에 붙어있는 손잡이를 돌려서 사다리를 천장으로 완전히 올렸다. 그리고 계속 돌려서 문을 닫으려다가, 위에 한 뼘 정도 공간을 남긴 채 열어두었다. 그러고 난 뒤 절벽 쪽으로 붙어있는 침대로 가 앉아서 가방을 열었다.

 

 방 안 가득 토마토냄새가 진동한다.

 여전히 가방 안에는 한가득 커다란 토마토만으로 꽉꽉 채워놓은 상태였다.

 내가 정말 가방 한가득 토마토만 챙겨들고 나왔었나. 분명 나는 가마봉 오를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침낭부터 꺼내놓고 그 옆으로 각종 등산용품들을 늘어놓았었다. 그때 그러고 나서는 가방에 그것들을 챙겨 넣었다. 분명 그랬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기저기 있는 주머니에다가 휴대용 칼과 검정고무줄, 손수건, 물통을 챙겨서 넣었다. 그런데 지금 가방 속에는 작은 주머니에 챙겨 넣은 물건 네 가지와 토마토밖에 없다. 아무리 뒤져봐도 다른 게 없어서 나중에는 가방을 뒤집어 안에 들어있는 걸 전부 쏟아내 보았다. 하지만 토마토만 우르르 쏟아져 나올 뿐이다.

 난 당장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화기 안쪽에 엘리제를 위하여 멜로디가 흐르고 있었다. 두 차례 반복하고 나니, 딸깍.

 -네. 황수운입니다.

 “내 짐이 좀 이상한데, 물품들이 몽땅 다 없어졌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짐에 문제가 있으신가요?

 “가방에 온통 토마토뿐입니다.”

 -네?

 “아니, 짐 정리 좀 하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집에서 나올 때 내가 챙겨온 건 하나도 없고 토마토밖에 안 들어있는데,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내 짐에 손대신 겁니까? 어떻게 보상하실 겁니까?”

 -손님, 진정하시고요, 우선, 제가 나중에 짐을 내려드린 건 맞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어떤 불순한 의도로 손을 댔다거나, 가방을 열어봤다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 정말 전 열어볼 생각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마민박에서 당하신 일이니, 어느 정도는 보상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가마민박에서는 피해금액에 최대 이십 퍼센트 이내에서 보상을 해드리고 있는데, 잃어버리신 물품 목록이 어떻게 되시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일단 침낭하고,”

 -네.

 “침낭하고, 그리고, 아—” -그리고요.

 “아, 지금 정확히 잘 모르겠으니까, 다시 확인해보고 알려드릴게요. 아, 참, 그리고,”

 -네. 손님.

 “옆방이랑 연락할 방법 없어요?”

 -물론 있습니다. 내선전화수화기를 들어서 직원이 받았을 때, 어느 방으로 연결하고 싶으신지 말씀해 주시면 직원이 연결해드립니다. 손님, 지금 연결 도와드릴까요?

 “‘가3’호요.”

 -지금 ‘가3’호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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