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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해바라기,너에게
작가 : 신정
작품등록일 : 2019.10.18

평범한 여대생 진연두 이야기

 
해바라기,너에게 5
작성일 : 19-10-18 08:48     조회 : 242     추천 : 0     분량 : 1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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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상아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그대로 침대에 털썩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가만히 감은 눈으로 정면을 보았다. 눈감은 시야에 온통 붉은 빛이 가득했다.

 시야를 뿌옇게 가득 채운 붉은 기운으로 완전히 빨강도 아니고, 그래, 내장을 찍어놓은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색이야.

 왠지 침대에 누우니 더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연두는 이대로 그냥 자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생각났다. 누워있는 그대로 아직 왼손에 잡고 있는 가방을 배 위쪽으로 끌어올려서 빌려온 책을 꺼내들었다. 들고 있던 가방은 침대 밖으로 밀어내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연두는 책을 펼쳐보려다가 멈춘 채 잠시 품안에 껴안고서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러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아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데나 펼쳐보았다.

 자세를 바로 하고서 책을 바로 들었다. 그리고 눈이 가닿은 곳에서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1999년 8월 26일

 

 8:00 기상, 깨우는데 굉장히 힘들었음.

 8:15 아침식사.

 8:40 ~ 3:30 학교.

 6:30 저녁식사. 7시가 넘을 때까지 밥 안 먹겠다고 떼를 쓰고 고집을 부렸음.

 9:00 취침.

 

 아침부터 말썽이었다. 일어나기 싫다는 걸 깨우면서 어르고 달래느라 혼이 났다. 며칠간 어찌나 힘들고 피곤했던지, 순간 내가 예전에 했던 일이 어쩌면 잘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져서 흠칫했다.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상아는 이미 완전히 좋아져서 친구들도 잘 사귀고 잘 뛰어놀고 정말 좋은데, 난 아직도 멀었다는 말이다. 상아가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볼 때면 코끝이 시큰거릴 정도다. 정말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이라서, 그럴 때면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기쁘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도 작은 말썽이 있었다. 갑자기 상아가 밥을 안 먹겠다고 떼를 쓰면서 친구들과 다르게 매번 물풀 같은 것만 먹기 싫다고 했다. 싫어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냥 밥을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말 애한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병이 다 낫지 않았다고 말해주어도 이제 듣지 않으려고 한다. 상아가 그렇게 나도 밥 먹고 싶다고 떼를 쓰면서 보채는데, 진땀이 뻘뻘 났다. 아무튼 오늘 하루 제대로 혼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그 상황에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결국 어르고 타이르고 달래면서 겨우 겨우 다 먹일 수 있었다. 정말 힘든 날이었다. 어쩌면 상아가 이렇게 진짜 아이가 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펴서 읽어보니, 그렇게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덮어버리지 않고 두어 장을 넘겨 다시 읽어나갔다.

 

 ⌜1999년 9월 16일

 

 8:15 기상

 8:40 아침식사.

 9:05 ~ 5:30 학교. 운동회. 점심을 거름.

 6:30 저녁식사. 절반만 겨우 먹이는데 그침.

 8:30 취침.

 

 상아보다도 내가 더 기대하고 기다렸던 운동회다. 며칠 전부터 상아도 나도 들떠서 기다려온 운동회 날이었다. 난 정말 정성으로 도시락을 싸들고 가고 싶었다. 1층에 유부초밥, 2층에는 군만두와 김밥, 3층에는 사과랑 딸기랑 방울토마토를 넣은 도시락으로 말이다. 오렌지주스도 챙기고, 과자도 챙겨서 상아와 맛있게 먹고 같이 즐겁게 운동도 하고 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을 뿐이다.

 상아는 정말 잘 뛰었고, 내가 앉아있는 곳을 수시로 쳐다보며 엄마! 하고 부르면서 양손을 흔들었다. 오전에 달리기도 하고, 줄넘기대회도 하고, 두 팀으로 나눠 콩 주머니로 박 터뜨리기도 했다. 상아와 2인3각을 할 땐 넘어지기도 많이 넘어졌다. 상아는 잘 달리는 편이라 혹시 질까 싶어 마음 급하게 서두르는데, 나는 원체 달리기를 못하는 탓에 뒤쳐지고 자꾸 발이 걸리는 바람에, 계속 넘어지기만 하다 그만 꼴찌를 하고 말았다. 상아는 엄마 왜 이렇게 달리기를 못하냐며 속이 상하는지 퉁명스럽게 굴고 시무룩해졌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땡볕아래 줄넘기를 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넘쳤다.

 문제는 점심시간이었다. 점심 먹을 시간이 되어 아이들은 각자 엄마가 싸들고 온 도시락을 같이 먹거나, 시켜먹거나 사먹거나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상아는 그럴 수 없었다. 상아는 잔뜩 심통이 나서 이제 그런 거 안 먹는다고, 이제 자긴 하나도 안 아프다고 하더니, 절대 안 먹는다고 싫다고 소리를 지르고는 일어나서 도망가 버렸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빨리 어떻게 해줘야 하는데. 정말 수술이라도 해줘야 하는 건지 싶었다. 하지만 만약 수술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무서웠다. 그 때문에 상아에게 어떤 부작용이나 역효과가 일어나게 되는 건 아닐지, 너무 무섭다. 실은 그래서 계속 미루기만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수술이 잘 될 확률보다 잘못될 확률이 더 높다는 것도 그렇고, 다른 손에 상아 수술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도 너무 두렵게만 느껴졌다. 정작 나 자신은 맡아 하지도 못할 거면서 남에게 맡기기는 싫다고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술하다가 그대로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끔찍했다.

 어쨌든, 운동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집에 돌아와서 배가 고팠는지 상아는 별 말 없이 저녁을 잘 먹었다. 하지만 겨우 절반, 배고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는다는 식으로 평소 먹는 만큼의 딱 절반에 해당하는 양을 삼켰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둘 다 엄청 울었다.

 상아가 나한테 울먹이면서 말했다. 점심시간에 다른 친구들을 찾아가서 이것저것 신나게 얻어먹고 다녔다고 말했다. 난 물론 소스라치게 놀랐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삼킨 지 20분이 채 되기도 전에 화장실로 달려가서 남김없이 전부 다 토해냈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젠 정말 이대로는 안 된다. 난 여전히 두려울 뿐이다. 하지만 이제 나부터 확신을 갖고 상아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결단을 내릴 때다. 더 이상 이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아라는 아이가 수술은 했는지, 잘 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읽어 내려가면서 안쓰러웠고 가슴이 아팠다.

 대체 무슨 병이지.

 상아가 수술을 하게 되는지 했다면 잘 회복했을지 궁금해서 그 부분을 먼저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손에 들려 있는 책에는 쪽수도 차례도 없었다. 중간에 따로 읽고 싶은 부분이 생기면 어디쯤 그 부분이 나오는지 일일이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찾아야 했다. 그럼에도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그렇게 한 장 두 장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너무 졸려서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켠 뒤,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33. 10월 15일, 화요일

 

 찰칵.

 몸이 뻐근했다. 어제 그다지 피곤할만한 일도 없었는데, 뒤틀린 자세 그대로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잘 만큼 잤는데도 몸이 뻐근해서 잔 것 같지 않았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피곤했다.

 어제 종일 집에서 뒹굴 거리고 쉬지 않았나? 어제 푹 쉬었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아침 일찍 이른 시간에 나가봐야했다. 연두는 지독하게 피곤했지만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섰다. 이불을 잘 펴서 구김 없이 정리해놓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창문이 열려 있는 앞에 서 있으니 끼쳐오는 찬 공기가 이제 곧 겨울이 올 거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연두에게 냉기를 끼얹고는 뺨에 스치고 온몸에 쓰다듬듯 지나쳐가는 바람이 그렇게 일러주고 있었다.

 보고 쓰다듬는 모든 것이 살아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면서,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스스로 항상 그렇게 하려고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많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렇게 하는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이유를 떠올려보려고 할 때, 머릿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 싶었을 뿐이라고밖에 더는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열린 창 앞에 서있으려니 닭살이 돋고 추웠다. 환기도 좋지만 문을 닫았다. 조금 뒤에 아침 먹고 나서 나가려고 할 때 열어놓고 나가기로 했다.

 

 요리하면서 풍겨오는 냄새와 소리가 부엌에서 방문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잠시 그 냄새와 소리에 집중했다.

 뭔지 맞춰봐야지. 이 냄새는 생선조림 같은데, 꽁치인지 고등어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네. 그런데 무를 넣은 것 같아. 고등어인가? 그리고 이건, 된장국. 아마도, 시금치 같아. 그리고 이 냄새, 뭐더라? 좀 별로인데.

 연두는 제대로 맞췄는지 확인하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대로 주방에 가서는 엄마 뒤에서 기웃거리며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무를 밑에 깐 고등어조림, 애호박과 시금치를 넣고 끓인 된장국, 이것저것 밑반찬.

 맞추는 데 성공했다. 연두는 웃다가 상아를 떠올렸다. 상아 엄마가 쓴 육아일기라고 해야 하는지 그냥 소설처럼 허구로 써놓은 건지 알 수 없는 책을 찾으러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침대 위를 훑으며 찾아봐도 어제 읽다가 깔고 잠들어버린 책은 대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다 둔 거야.

 혹시 자다가 침대와 벽이 맞붙어있는 틈으로 떨어뜨렸을지도 모르고, 침대 밖으로 밀어내고 방바닥에 떨어뜨려서 방구석 어딘가에 뒹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책이 들어갈 수 있을만한 틈이나 바닥 어디를 살펴봐도 진녹색 표지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책장과 책상 위, 서랍 안과 가방까지 뒤지고 살펴보았지만 방 어디에도 그 책은 없었다. 혹시 엄마가 치워버렸나 싶어서 부엌으로 갔다.

 “엄마, 혹시 제 방에서 책 못 보셨어요?”

 “책이라니? 무슨 책?”

 “‘상아’라는 책인데, 분명 어제 그 책을 읽다가 깔고 잠든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방에 없어서요. 표지가 진녹색이에요.”

 “상아라고? 글쎄. 모르겠는데. 네가 어디다 잘 놔두고는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린 거겠지. 엄마가 네 책에 손댈 일도 없고. 어제 읽다가 그대로 잤으면, 책에 발이 달리지 않은 이상 그새 어디로 갔겠어. 방 어딘가에 있겠지.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잘 찾아봐.”

 엄마 말씀이 옳았다. 그 책에 발이 달린 게 아닌 이상 저 혼자 어디로 갈 일도 없고, 엄마가 책을 읽고는 괜히 이유도 없이 본 적도 없다고 말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 있느냔 말이야.

 

 찰칵.

 엄마가 혹시 보게 되면 알려주겠다며 연두에게 책표지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다. 그래서 말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 책을 펼치기 전에 색이 어떠했는지 글자가 어떠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사각형에 두꺼운 편으로 오래되어 먼지처럼 일어난 표지 촉감만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분명 어제 그 책을 읽으며 상아 엄마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상아가 수술은 했는지, 했다면 잘 했을지 궁금해 했던 기억이 선했다. 그런데 그 책에 대해 연두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면서 말할 수 있는 건 마치 읽은 지 십년도 더 된 책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이 아련하게 남아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연두가 그 책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거라고는 책 내용 중 한 장 분량정도에 불과한 정도였다. 곧 쓰러질 것처럼 머릿속이 아찔하면서 어지러웠다.

 “근데 그 책 산 거니? 아님 친구한테 빌린 거야?”

 말문이 탁 막혔다. 머릿속도 탁 막혀버린 것처럼 멍했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걸 생각해내려고 안절부절 부엌에서 거실로 초조한 걸음으로 거실에서 부엌으로 왔다 갔다 했고,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집안에서 계속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런 연두를 엄마가 불러 세웠다.

 “진연두. 이제 그만해. 생각 안 나서 그래?”

 약간 슬퍼진 기분으로 엄마 쪽을 쳐다보았다. 왜 생각이 나지 않는지도 모르겠고 책에 대해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때 뜬금없이 머릿속에 한 가득 ‘오후 두 시 예약’이라고 어딘가 적어놓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언제 무슨 이유로 썼는지 모르는 건 물론이고 그 메모를 어디서 봤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토할 것 같아.”

 연두는 어디서 언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 메모와 어디서 언제 연두 손으로 들어왔는지 기억나지 않는 책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라면 사소한 내용이라도 모조리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를 이어가면서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었다.

 엄마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어딘가 약간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연두야, 너무 불안해하지마. 별일 아닐 거야. 걱정하지 마.”

 엄마는 불안해하는 연두에게 똑바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러더니 가볍게 안으며 토닥여주었다. 팔을 풀고 떨어진 후에도, 다시 한 번 연두를 안심시키려는 엄마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쳐다보았다. 8:47.

 

 지각이다.

 “지각이다.”

 “응? 뭐? 지각이라니. 오늘도 일찍 가는 날이야?”

 “네. 오늘 원래 일찍 가는 날이에요. 아, 또 지각하면 큰일 나는데.”

 마음이 급해져서 허둥지둥 왔다갔다 옷은 어디 있는지 가방은 어디 있는지 양말은 또 어디 있는지 헤매다가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게 후다닥 허겁지겁 준비를 마치고 현관으로 미끄러졌다. 좀 거칠다싶게 운동화 속으로 발을 밀어 넣고는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오르막길에서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뛰었다.

 그렇게 정류장에 도착해서 몇 시인지 다시 확인했다. 8:53. 바로 버스가 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는데,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때맞춰서 바로 227번 버스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잘 달려오던 버스가 그만 횡단보도 앞에서 빨간 신호에 걸려 멈춰서고 말았다. 그때 연두는 기시감에 사로잡혀 잠시 멍해졌다.

 

 찰칵.

 주황색, 초록색. 횡단보도 저편에는 빨간색.

 버스가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달려와서 정류장에 연두 앞에 다시 멈춰 섰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계단을 올랐다. 카드를 찍고 나서 한 번 둘러보았는데 빈자리가 없었다. 앉지 못할 바에야 곧장 내릴 수 있게 내리는 문 앞에 서 있는 편이 나았다. 연두는 그 쪽으로 걸어가 청록색 기둥을 붙잡았다. 그때 연두 귀에 똑똑히 선명하게 ‘진연두’라고 부르는 지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연두야.”

 다시 한 번 들리는 목소리. 지수였다. 놀랍게도 어깨에 툭 소리가 나도록 처억 손을 올리면서 연두를 부르며 어느 새 옆에 서있었다. 지각하는 일이라고는 없고, 집도 반대방향인 지수를 이 시간에 버스 안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 지금, 왜 여기 있어. 아직 학교 안 갔어?”

 지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가는 중이잖아. 어젠 푹 잘 잤어?”

 “응. 하루 종일 푹 쉬고 잘 잤어. 근데 몸이 뻐근해.”

 “어제 하루 종일 쉬었다고?”

 “응. 어제 일요일이었잖아. 근데 지금 많이 늦지 않았어? 나 지각한 줄 알고 엄청 뛰었는데?”

 “지각? 무슨 소리야. 네가 착각하는 거야.”

 지수는 휴대전화를 꺼내 날짜를 보고 시간표를 확인하더니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화요일이야. 화요일엔 너도 오후에만 강의 있잖아.”

 “화요일이라고? 월요일인줄 알았는데.”

 급한 마음에 시간만 확인하느라 날짜를 살필 여유는 없었지만 분명 어제가 일요일이었으니 마땅히 그 다음날이라면 월요일이어야 했다. 연두는 오늘 월요일이라고 말하면서 지수가 내미는 화면을 보았다.

 날짜는 10월15일. 요일은, 화요일이다.

 

 지수 말이 맞았다. 화요일에는 연두도 오후 강의만 있었다. 정말 그렇게 바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바쁘게 운동화로 발을 밀어 넣지 않아도 되는 요일이었다. 느릿느릿 굼벵이 친구마냥 여유롭게 걸어갔어도 지각할 일은 없었을 텐데.

 당연히 월요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화요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억에 연두는 어제 분명 하루 종일 누워서 뒹굴뒹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직접 날짜를 확인하고 나서 어제 들었던 강의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려고 했다. 그러다 이내 그만두었다.

 “화요일 맞지? 그냥 시간이 남아서 와봤더니, 여기까지 나오길 잘했네. 내가 생각 없이 집에서 나오기는 진짜 일찍 나왔는데 나오고 보니까 시간이 남더라고.”

 지수는 날짜를 확인하고 왠지 시무룩한 연두에게 계속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연두는 이내 기분이 나아져서 말했다.

 “그래서 이대로 종점까지 가려고? 그러지 말고, 지금 내려서 걸어가자. 어차피 시간도 많으니까.”

 “엄청 따가워 보이는데, 오늘 같은 날 저런 땡볕에 걸어가자고? 싫어.”

 “오늘 같은 날이 어떤 날인데? 그리고 맑은 날 걸어야지, 비오는 날 걸어갈 거야?”

 버스가 곧 정류장에 도착하려는지 도착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

 

 버스가 멈췄을 때 계단을 내려가면서 전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싫다면 뭐, 이따 학교에서 보자. 먼저 내린다.”

 말하는 사이 내리는 문이 드르륵 열렸다. 연두는 카드를 찍고 계단아래 보도블록 위로 쨍쨍한 해 밑으로 내려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인도에 섰을 때 뒤따라 내리지 않는 지수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지도 못했던 실망감에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그러고 있는 사이 버스 문은 닫혀버렸고, 상황은 이미 끝나있었다. 학교 쪽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땅만 보며 걸음 옮기기를 아홉 걸음 옮겨갈 즈음이었다. 귓가에 연두를 부르는 지수목소리가, 마치 버스 안에서처럼 또 다시 가깝게 들려왔다. 이번엔 확실히 정말 환청이 분명하다고, 연두는 질끈 감고 두 귀 틀어막은 채 ‘이제 그만’이라고 중얼거렸다. 정신을 집중하면서 그런 환청 따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힘주어 꼭 감은 채 말하고 있었다.

 “환청이다. 분명 환청이야.”

 곧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좀 더 속도를 내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딱 여섯 걸음 옮겼을 때, 더 걸음을 옮기지 못하도록 왼쪽 어깨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또 뭐하는 짓이야. 위험하게. 너 요새 좀 이상해.”

 또 다시 어깨를 짚어서 멈추도록 붙잡는 손길에 뒤돌았을 때, 지수가 어깨를 꽉 붙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환청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연두는 이도저도 아니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으로 지수에게 말했다.

 “분명히 안 내렸잖아. 언제 내렸어?”

 “문 닫히고 출발하자마자, 기사아저씨한테 졸라서 바로 내렸지. 근데 나, 아무래도 안 그래도 되는데 괜히 따라 내렸나봐. 이렇게 쌩쌩한데.”

 지수가 왼손을 들어 그늘을 만들며 쳐다보고 서있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34. 연초희

 

 화요일에 지수는 연두보다 좀 더 일찍 한 시간 전부터 강의가 있었다. 그래서 먼저 강의실로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지수가 먼저 강의실로 올라가고, 연두는 홀로 걷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앞에서 정류장에서 봤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연초희가 걸어오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녀에 대해서라면 며칠 전 정류장에서 만났을 때 느낀 인상만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녀가 연두 앞으로 똑바로 걸어와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말하는 모습은,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안녕하세요. 연두 씨.”

 “안녕하세요.”

 “진연두, 맞죠? 잠깐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같이 가요.”

 버스에서 내릴 때만해도 그렇지 않았지만, 곧 구름이 잔뜩 끼어서 하늘을 거의 전부 뒤덮고 있었다. 정말 버스에서 내릴 당시만 해도 쨍쨍하던 태양이었다. 하지만 지수와 만나서 같이 학교로 걸어가는 도중 하늘에 점차 구름이 덮여오는 것 같더니 곧 구름들이 잔뜩 끼어서 하늘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 바람에 학교까지 걸어오는 동안 내내 내리쬐는 볕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연두는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흐린 날에는 이유도 없이 괜히 기운이 빠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날은 연초희와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네. 괜찮아요.”

 

 찰칵.

 

 그때 어떤 한 순간을 붙잡아놓은 영상처럼 사진 한 장으로 편집되어 머릿속에 번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장면에서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굉장히 열심히 말하고 있는 연초희와 그 옆에 떡 버티고 서있는 한 사람이었는데,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지만 키가 굉장히 큰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남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연두는 이제 그만 다른 데로 가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쩔쩔매며 그 두 사람에게 둘러싸여있었다.

 그게 언제였지?

 

 “연두 씨?”

 연초희는 어느 새 바로 옆으로 서서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네?”

 “어디로 갈까요? 내가 평소 잘 가는 카페 있는데, 여기서 가깝고 맛도 나쁘지 않아요. 거기로 갈까요?”

 “그래요. 가요.”

 오른쪽에 팔짱을 끼면서 붙어선 채로 연초희와 함께 나란히 걸었다. 나란히 서서 보니 그녀는 연두와 키도 비슷하고, 체구도 비슷한 편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 가는 내내 연두에게 굉장히 친근하게 대했다. 하지만 연두는 그렇게 걸어가는 내내 뭔가 답답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연초희는 정말 가장 친한 친구인 것처럼 편하게 다정하게 웃고 떠들면서 자연스럽게 연두를 데리고 가고 있었다. 그녀가 자주 간다고 말했던 카페는 연두도 지수와 함께 자주 오곤 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주문하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자리까지 연두를 끌고 갔다.

 “여기 와본 적 있어요? 머핀이 꽤 괜찮은데.”

 “네. 와본 적 있어요.”

 “정말요? 신기하네. 근데 우리 수업도 같이 듣는 걸 보면, 왠지 동갑일 것 같은데. 나이가 몇이에요?”

 “아, 22살이에요.”

 “혹시나 했더니 역시. 나도 22살. 동갑이었네. 그럼 강의도 같이 듣는 사인데, 그냥 말 놓자. 괜찮지?”

 왠지 얼떨떨했다.

 “그러지 뭐. 근데 특별히 할 얘기라도 있어?”

 “성격 되게 급하구나. 그 전에 주문부터 하자. 나 배고파.”

 그녀는 연두 말을 들으며 조금 놀랐다는 표정으로 배고프다고 말하더니 연두에게 뭘 시킬지 물었다. 그런데 연두는 별로 뭔가 먹고 싶지도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

 이따 지수랑 오려고 했는데.

 “머핀 먹으려고 하는데, 먹을래?”

 “아니, 별로.”

 “마실 건?”

 “핫초코.”

 “핫초코? 알았어.”

 그녀는 또 어딘지 놀랍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연두는 그런 그녀가 어딘지 좀 이상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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