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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해바라기,너에게
작가 : 신정
작품등록일 : 2019.10.18

평범한 여대생 진연두 이야기

 
해바라기,너에게 4
작성일 : 19-10-18 08:46     조회 : 226     추천 : 0     분량 : 10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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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어떤 시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눈 뒤쪽으로 오로지 자잘한 신경 몇 가닥만이 살아남아있는 듯했다. 눈꺼풀은 플라스틱으로 죽어버린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눈알을 덮고 있는 눈꺼풀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그 아래 자리 잡고 있는 눈알을 드러내라고 눈꺼풀 밖으로 노출되어야 하는 부분을 드러나게 하라고 아무리 명령을 내리고 또 내려도 눈꺼풀은 꿈쩍하지 않았다.

 기적처럼 그대로 살아서 멀쩡하게 모든 감각을 느끼고 있는 신경 몇 가닥은 딱딱하게 굳어진 살 속에 파묻혀 경련하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눈을 뜰 수가 없는 상황에서 오른손에 힘을 줘보려고 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은 꼼짝하지 않는 눈꺼풀로 끝나지 않았다.

 도무지 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어디론가 잠시 여행이라도 떠나버린 모양인지, 오른손은 손목으로 이어지고 팔꿈치로 올라오는 부분에 이르기까지 어디로 가버렸는지 도무지 여부조차 느껴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소재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단 한 부분, 딱 절반인 팔꿈치에서 어깨관절로 이어지는 나머지 부분이라도 들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조차 무거운 추를 매달아 묶어놓은 것처럼 놓여있는 그 자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되찾았을 때였다. 여전히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을 한 자세로만 있었는지 온통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어딘가 닿아있는지 아닌지도 제대로 느끼기 힘들었다. 정신을 가다듬고서 온 신경을 절반뿐인 것 같은 오른팔로 집중해 움직여보려 했다. 하지만 고정되었는지 굳었는지 그 상태로 어딘가 놓여있다는 사실만 깨달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저 계속해서 정신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어 몸 어느 곳이든 힘주어 움직여보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왼팔에, 그 다음은 왼다리, 오른다리, 발목, 발가락, 무릎, 엉덩이, 배, 등, 목 관절에 이르기까지 한 부분씩 온 신경을 모아서 조금이라도 움직여보려고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뺨과 입술을 포함한 모든 얼굴 근육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코를 움직여보려고 했다. 하지만 코 역시 그 어떤 감각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 코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 같기도 했다. 코가 있는지 없는지 눈을 떠서 확인하고 싶었다. 코를 벌름거려보려고 하고 나지도 않는 힘을 집중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근육도 신경도 플라스틱처럼 죽어서 딱딱해져 버린 것 같아.

 

 눈꺼풀과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일부만이 아니라 온몸이 그렇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처할 새 없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사태에 울고 있었다. 정말 견딜 수가 없어서 이러다 곧 정신을 잃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흐르는지 흐르지 않는지조차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들끓는 것처럼 열나는 몸으로 벌떡 일어섰다. 분명 여기가 꿈속이 아니며 쓰러졌든 잠들었든 간에 이제 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연두는 몸을 일으키면서 비틀거릴 때 떠오른 기억 속에 남아있고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이 어쩌면 꿈이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26. 카페.2

 

 “진연두. 괜찮아? 연두야.”

 어두운 시야에서 귓속으로 음악이 흘러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비틀거리는 몸에 힘을 주어 바로 서려고 했다. 그러다 삐끗하면서 넘어질 뻔했지만 지수가 내미는 팔을 붙잡아 버티고 섰다. 그리고 먼지를 털듯 고개를 좌우로 탈탈 털어 흔들며 떨쳐버리려고 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을 것처럼 비틀거렸을 때 떠오른 조각, 기억 속에 정말 아리기만 한 시간, 저 너머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내쳐버리고 싶은 뭔가가 떠오르려 했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벌떡 일어서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걸 지수가 부축해주었고, 의자에 기대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의자에 앉았을 때 뱃속이 텅텅 비어서 잔뜩 허기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연두는 급히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 그대로 지수에게 건넸다.

 머핀이랑 브라우니.

 “머핀 종류별로 하나씩.”

 “머핀 종류별로 하나씩? 그걸 다 먹으려고? 그렇게 배고팠어? 그래. 알았어. 난 가서 알아서 사 올께.”

 “응. 아메리카노도.”

 지수는 표정을 살짝 찡그리면서 알았다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수가 주문하러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문하는 곳에서 이것저것 손으로 가리키며 점원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손가락질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메뉴판을 훑어보고 점원에게 주문하는 중인 지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점원이 주문을 받아 이것저것 버튼을 누르며 계산할 때 그 앞에서 지갑을 꺼내 여는 모습까지 계속 지켜보았다. 계산을 마친 지수가 벨과 영수증을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올 차례였다. 그런데 지수가 멈칫하더니 점원에게 뭐라 뭐라 말하고는 다시 되돌아왔다.

 왜?

 “연두야, 호두, 단호박, 초코, 블루베리, 연유 있는데,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 많아. 보나마나 한 개도 다 못 먹고 남길 텐데.”

 “왜.”

 연두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지갑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지수는 얼굴에 한가득 씁쓰레한 표정을 짓더니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진연두. 두 개만 하자. 말 좀 들어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깐만.”

 “메뉴 보고 골라봐. 근데 갑자기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 혹시 머리 아파?”

 “응. 좀 지끈거려서. 알았어. 그럼 연유랑 단호박.”

 지수는 돌아가서 계산까지 마치고 점원에게 영수증과 벨을 받아들고는 정말 서두른다싶게 돌아왔다.

 

 아까 전부터 계속 머리 한 구석이 은근하게 지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티내고 싶지 않았다. 연두는 어쩔 수 없이 찌푸려지고 마는 미간을 반듯하게 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맞은편자리에 앉아있는 지수 쪽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문득 귓속 어딘가에 삐, 삐, 삐, 삐 일정하게 박자를 맞추듯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소리가 있었다. 그런데 귓속이 멍하지는 않아서 귀 울음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했다. 삐, 삐, 삐, 삐, 삐, 삐… 사그라지지 않고 이어지는 소리에 연두는 무엇인지 하면서도 이명이라면 잦아들겠거니 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흔드는 손길에 돌아보니 지수가 이상하다는 듯 걱정스런 표정으로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벙긋거리는 입모양으로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듣기 힘들어서 살짝 찌푸렸다. 곧 지수가 연두 손목 위로 손을 올려 힘주어 잡았다.

 뭐지. 지수도 들었을까?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괜찮아. 근데 지수야. 지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소리? 무슨 소리?”

 “삐, 삐, 삐 하는 소리 말이야. 이명 같기도 하고.”

 근데 박자 있는 이명도 있나?

 “이명?”

 그 말을 듣더니 지수는 조금 심각해진 표정으로 뭔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히 얘기했네. 지수야, 됐어. 그냥 이명인데 뭐.”

 

 

 27. 강의 끝나고.1

 

 원래 오후 두 시는 교수님 급한 사정으로 인해 취소된 강의에 들어갔어야 할 시간인데, 대체 오후 두 시에 뭘 예약했다는 말인지.

 아무리 봐도 분명히 연두가 써 놓은 글씨였다. 100%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후 두 시 예약’이 연두가 써 놓은 글자라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연두는 평소 어딘가에 뭔가 적어놓는 습관이 없을뿐더러 적어놓는 일을 꽤나 귀찮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써놓은 걸 보면 뭔지 모르지만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을 터였다. 언제 썼는지 알지 못하고 써놓은 일이 있었는지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혹시나 해서 지수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두 시라면 너 강의 최소된 거밖에 다른 일 없다면서 혹시 취소된 기념으로 써놓았냐고 하더니 나중에는 짜증을 냈다. 조교 언니에게도 물어보았다. 하지만 언니 역시 강의가 취소된 일 말고는 다른 일이 없다고만 했다.

 “너 강의 있다는 거 깜빡하고 그 시간에 뭐 하려고 적어놓은 거 아냐? 그래 놓고 잊어버린 거지.”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언니 말대로 뭘 하려고 써놓았다면, 그 내용이 있어야했다.

 “언니, 괜찮아요. 나중에 생각나겠죠. 고마워요. 내일 봐요.”

 “그래. 잘 들어가. 연두야, 너무 고민하지 마. 그냥 잊어버리고 있다 보면 나중에라도 생각나겠지.”

 “네.”

 언니도 강의 취소된 것 말고 다른 일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학교와 관련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면 학교와 관련해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연두에겐 오후 두 시에 학교에서 개인적으로 봐야할 일이 없었다.

 그럼 뭘까.

 

 ‘오후 두 시 예약’이라는 메모에 관해 연두가 그냥 잊어버리고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는, 요 근래에 이러한 일들이 꽤나 자주 일어난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건망증이 심해진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때때로, 그렇게 허둥거리며 헤맬 일도 아닌데 당황하며 허둥댈 때가 있었다. 때로는 그러다가 전혀 생각지도 않게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가끔 스스로 이해할 수 없게 움직이기도 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뭔가 분명히 본 적이 있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였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봐도 연두가 한 일이 분명한데 나중에 보면 전혀 그 일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스멀스멀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연두는 무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오후 두 시 예약’이 뭘 말하는지 기억해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잊지 않고 메모내용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근데 그런 걸 어디서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지.

 그렇게 뭘 예약했는지 기억해내려고 하면서 휴게실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눈앞에 자판기 세 대가 나란히 서있었다. 마침 연두는 살짝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자판기 앞에 서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밀어 넣고 생수 한 병을 뽑았다. 투두두둑,

 뚜르르르르르.

 그나마 거스름돈 동전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부딪히는 소리가 꽤나 경쾌하게 들렸다. 연두는 답답했던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했다. 병 나오는 곳에서 생수병을 꺼내들고, 거스름돈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돌아서서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을까 하다가 그냥 복도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병을 열어 한 모금 마시면서 생각했다.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에요.”

 -응.

 “혹시 오후 두 시에 무슨 일 있어요? 뭐 예약했다든가.”

 -오후 두 시에 예약을 했다고? 무슨 예약?

 “아무 거나요. 뭐든지.”

 -글쎄. 잘 모르겠네. 생각이 안 나는데. 없는 것 같은데? 근데 갑자기 왜?

 “아, 수첩에 보니까 ‘오후 두 시 예약’이라고 써 놓았는데, 그걸 왜 써놓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서요.”

 -난 또 뭐라고. 엄마가 어떻게 알아. 네가 써놓은 거잖아.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서, 혹시나 해서요.”

 -연두야, 그런 건 생각하려고 하면 더 생각 안 난다.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면 나중에 생각날 거야 아마. 기억나면 무슨 일인지 엄마한테도 말해주고. 혹시 모르니까.

 “네. 알았어요.”

 

 엄마도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사람을 통해서는 알아내기 힘들었다. 지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 모두 같은 과였다. 그런데 강의 시작시간에 무슨 약속을 잡았을 리도 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해서 몇몇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아니, 무슨 소리야.

 그럼 뭐지.

 

 

 28. 연구실에서 나와, 휴게실

 

 “뭐해. 이런 데서.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깜빡, 연두는 잠결에 왠지 추운 것 같아 몸을 움츠렸다. 그러다 온몸으로 확 끼쳐오는 냉기에 부르르 떨며 가늘게 눈을 뜨고 웅크리다가 뭐 하고 있나 싶어서 벌떡 일어섰다. 앞에 지수가 서있었다.

 “대체 너….”

 “지수야. 여기 웬일이야?”

 “지금 누가 할 말을…”

 지수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지수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불 꺼진 휴게실에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연두는 학교에 다시 나왔다는 사실 자체를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어?”

 “너 지금 그게 중요해? 후, 문자 보냈잖아.”

 “문자?”

 주머니에서 넣어둔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통화내역을 확인했다. 지수 말이 맞았다. 보낸 편지함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학교 휴게실이야. 빨리 와.]

 “이 시간에 뭔 일인지, 학교에 대체 왜 갔는지, 물어보려고 해도 전화도 안 받고. 무슨 일 생겼나 걱정돼서 뛰어왔더니 왜 이런 데 앉아서 자고 있어. 말해봐. 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

 말문이 탁 막혔다. 지수에게 해줄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있다고 빨리 오라고 문자를 보냈다는데 전혀 그런 적이 없는 것 같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멀뚱히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지수를 연두 역시 멀뚱히 마주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꽤 싸늘했다. 연두는 파고드는 추위로 움츠러들었다. 왠지 그 때문에 뭐라고 할지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학교에 와서, 교수님 만나고, 연구실 밖으로 나와서, 복도에서, 휴게실에 앉아서…

 “연두야.”

 “그냥 좀, 추워, 너무 추워서, 추워서, 그래서 오라고 한 것 같아.”

 대답을 들으면서, 지수는 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야, 너,”

 “아니, 참, 집에 같이 가자고 하려고.”

 되는 대로 나오는 대로 내뱉어버렸다.

 “진연두.”

 추위에 부르르 떨면서 허둥거리기까지 했다. 가만히 앉은 자세로 아무도 모르게, 물에 빠진 사람처럼 어푸어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지수는 연두를 부르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체념한 듯 말했다.

 “진짜 너 때문에 마음 편한 날이 없다. 정말 이러고 있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날도 추운데 여기서 계속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이러면서 나한테 문자할 생각은 어떻게 했어? 아니, 휴, 됐다. 아무 일 없는 것 같으니까, 됐어. 이제 일어나. 집에 가자.”

 

 

 29. 카페.3

 

 얄밉게 대꾸하고 나서 한 입 뜯은 연유머핀.

 맛있다. 부슬거리면서 부드러운 식감. 진한 우유 향.

 지수는 라즈베리무스를 포크로 한 입 떠서 입에 넣고 있었다. 연유머핀을 한 입 떼어먹고, 단호박머핀으로 손을 뻗어 한 입 떼어먹었다. 단호박 향이 진했다.

 “맛있어?”

 “응.”

 대답하면서 쳐다보니, 지수는 포크를 든 채 연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30. 도서관 가기 전에

 

 따뜻한 날 물에 몸을 담근 채로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처럼 몽롱하고 꿈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나 부드럽게 피부 밑으로 스며들어오는 태양을 바로 보고 싶어서 고개를 들었지만,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아플 정도로 눈이 부셔서 도저히 눈 뜨고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었다.

 눈을 감고도 눈이 부셔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감은 눈앞에 초점을 맞추는 지점에 동그라미 하나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눈을 뜨자 주변이 하얗게 흐려져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연두는 몇 차례 눈을 힘주어 끔뻑거렸다.

 그때 큰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서, 이제 어디로 갈지 지수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떨어져 내린 나뭇잎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연두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지수에게 도서관에 가자고 했다. 지수는 그러자하고 일어섰다.

 

 그렇게 지수와 도서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연두는 저 앞에 연초희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를 보니 좀 전에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길 하면서 붙잡아두려고 했던 기억이 떠올라 피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우연찮게 눈이 마주쳤을 때 연두는 그나마 웃으려고 노력했다. 좀 전에 뿌리치고 가버려서 미안한 마음을 가볍게나마 표현하려고 했다. “아, 초희 씨….” 그런데 연초희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말 거는 연두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갑자기 방향을 꺾어들어 본관 쪽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연두는 순간 당황해서 멈춰 섰다.

 “너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아니, 잘못 봤나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잘못 봤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연초희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녀는 바로 연두가 있는 두 걸음 앞에 있었다. 말 그대로 코앞이었다. 그것도 눈까지 마주친 이후였다. 그런데 그녀는 연두가 인사하는 모습을 못 봤는지 못 들은 척 하는지 모르는 척 지나쳤다. 본관 쪽으로 갑자기 각이 지도록 마치 좌향좌 우향우하듯 방향을 꺾어서 본관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로 두 걸음 앞에 꺾어 들어가는 길로 들어갔으니 아마도 자나가면서 고개를 돌리면 연초희가 맞는지 아닌지 정말 잘못 보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두 걸음 앞, 그녀가 꺾어 들어간 곳을 지나치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연두가 볼 수 있는 시야 그 어디에서도 그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새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봤는데.

 옆에서 지수가 물었다.

 “대체 누군데 그래.”

 “아니야. 아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잘못 봤나봐.”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 서면 왠지 기운이 샘솟고 안 좋았던 기분도 점점 좋아졌다. 따뜻한 햇볕 아래에 서면 기운이 솟아나고 몸 안에 따뜻하게 한가득 기력이 차올랐다. 그렇게 햇볕은 곧게 뻗어서 연두 온몸에 사방에 내리쬐고 있었다. 옆에서는 지수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31. 하교.지수와 함께

 

 학교휴게실에서 지수를 앞에 두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지수는 그런 연두에게 화를 내다가 달래면서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나섰다. 학교에서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 내려왔을 때 이제 혼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수는 혼자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227번이 정차했을 때 버스에 오르자 막무가내로 뒤따라 올라타는 지수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내리는 문 바로 뒷자리까지 들어가 앉았다. 지수는 통로 쪽에 앉은 연두를 창가 쪽으로 밀더니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았다.

 

 하루 동안, 온통 피곤한 일뿐이었던 것 같아.

 

 계속해서 착각하고 잘못 보기만 했다. 도서관에서는 정말 빼본 기억도 없는 책을 베고 자고 있었고, 아침에는, 구두를 신고 뛰다가 급한 마음에 벗고 뛰었지만 결국 20분이나 늦고 말았다. 교수님께 불려가기까지 하고, 방금 전 휴게실에서는 한심하게 굴기까지 했다.

 하루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시야에 연초희 모습이 나타났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연두는 그때마다 전부 착각하고 있었다. 왠지 유령이 따라다니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쩌면 연초희와 나눈 이야기들까지 전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연두 머릿속에서만 상영되는 영화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정말 심각하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만약 이런 연두 생각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정말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봐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어찌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러면서도 연두는 병원에 가서 검사하는 거라면 너무 싫었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믿으려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내내 다닌 탓에 이제 연두는 병원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건물에 켜진 불, 깜빡이는 간판과 주황빛 가로등, 청색을 띠는 전등과 버스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트렁크 아래에 깜빡거리는 빨간불과 응급차가 지나가면서 삐뽀삐뽀 사이렌을 울리며 번쩍번쩍 돌아가는 초록색불과 초록주황빨강으로 이어지는 신호등. 연두는 빠르게 지나쳐가는 불빛 하나하나에 차례대로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흰색 가로등에서 뻗어 나오고 있는 빛에 초점을 맞추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연두는 그러고 있는 모습이 우습게 느껴져 홀로 피식거렸다. 그렇게 혼자서 피식거리다가 문득 옆자리에서 지수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숨죽였던 웃음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피식하던 웃음이 다문 입 사이로 비집고 흘러나왔다. 쿳, 킥킥. 옆에서 지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지수를 쳐다보면서 쉬지 않고 계속 웃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져갈 것 같던 웃음이 점점 힘을 잃으면서 마치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피식피식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연두는 그렇게 가라앉아버리는 데도 도저히 붙들어 둘 수 없었다. 어쩌면 쭉 잊고 있던 ‘오후 두 시 예약’이라는 메모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문득 ‘오후 두 시 예약’이 떠올랐지만, 그 뿐이었다. 과사무실에 들른 후부터 지금까지 쭉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잊어버리고 그렇게 내버려두었는데, 그 메모에 담긴 의미는 아무리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창밖만 쭉 내다보면서 고요하지만은 않은 밤 풍경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밤에 보았던 풍경을 떠올렸다. 검은 산과 드문드문 시야에 서너 개뿐이었던 하얀 불빛. 연두가 봤을 때는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별도 달도 뜨지 않은 채였다. 구름이 낀 탓인지 굉장히 뿌옇던 하늘이었다. 검정에 가깝게 어두운 남색을 바라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서 아쉬웠던 밤하늘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리막길에 가장 가까운 정류장을 향해서 열심히 내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버스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연두가 벨을 누르고 버스가 멈춰 서도록 해야 하는 정류장에 곧 도달하려는 참이었다. 이제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기억을 더듬어가며 그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지수가 벨을 누르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버스가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다시 창밖을 살펴보았다.

 순식간에 와버렸네.

 버튼을 누른 후 지수는 앉은 자리 바로 앞에 있는 기둥을 붙잡고 섰다. 그 모습을 보고 연두도 그 옆으로 서서 기둥을 붙잡았다.

 “여기 맞지?”

 “응. 어떻게 알았어?”

 “네가 저번에 알려줬잖아.”

 반대쪽이라서 돌아가려면 꽤 멀고 시간도 오래 걸릴 텐데.

 “고마워.”

 지수는 말하면서도 계속 앞만 보고 있다가, 고맙다는 말에 힐끗 연두 쪽을 쳐다보았다.

 “고마우면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마. 밤중에 혼자 쓸데없이 학교에 왜 가?”

 문득 휴게실에서 잠자다 깨서는 횡설수설했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버스가 멈춰 섰다. 정류장에서 연두와 지수 두 사람만 내렸다.

 

 “푹 쉬어.”

 응. 알았다고, 고맙다고, 내일 보자고.

 “그래. 알았어. 들어가. 잘 자고, 내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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