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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해바라기,너에게
작가 : 신정
작품등록일 : 2019.10.18

평범한 여대생 진연두 이야기

 
해바라기,너에게 3
작성일 : 19-10-18 08:45     조회 : 223     추천 : 0     분량 : 1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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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연구실.1

 

 이제 지각은 절대 안 돼.

 복도가 어두웠다. 연두는 복도에 걸어가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걸어가면서 천장에 죽 늘어선 모양으로 붙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고 연결되어가는 기다란 형광등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은 그렇게 계속 이어져나가면서 켜져 있었는데, 중간에 하나가 한 쪽 끝이 까매져서 곧 꺼질 것처럼 깜빡거리고 있었다. 수명이 다한 형광등은 지직, 징, 직, 지지직거리면서 불규칙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목 뒤가 뻣뻣해졌다. 문득 온 시야가 그렇게 진동하고 떨면서 반응이라도 하는 듯했다. 근데, 전에도 이런 적 있었나?

 교수님한테 이렇게 불려간 적은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근데, 전에 이런 적 있었나?

 

 

 16. 아침, 정류장

 

 바쁘게 언덕길을 뛰어올라갈 때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빨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정류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그렇게 뛰어서 정류장까지 다다랐을 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아직 시간 남았는데 벌써 가버렸나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도로 가운데에 작은 화단이 도로와 함께 길게 뻗어있는 모습을 보았다. 잠시 그 화단에 시선을 두었다가 곧 버스가 올 방향으로 고개 돌려 멀리 내다보면서 답답한 숨을 내뱉고, 한 번 더 내뱉었다.

 계속해서 고개를 쭉 빼내고 혹시 버스 오지 않을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괜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차들이 달려가는 쪽으로 내다보면서 정말 가버렸는지 초조해하고 있었다. 다시 버스가 달려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한 사람이 정류장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버스가 지나가버리지는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사실 같은 버스를 타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약간 마음 놓을 수 있었다. 연두는 다시 도로 가운데 화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긴 정원에 심어진 나무는 키 작은 상록수였다. 시선을 돌려서 정류장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정류장까지 걸어와 연두 옆으로 선 그녀는 의자를 두어 번 손으로 털어내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버스 오는 쪽을 내다보고 있는 연두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227번 지나가는 거 보셨어요?”

 “아뇨. 아직 안 온 것 같아요.”

 “아, 다행이다. 늦은 줄 알았어요. 근데, 혹시 은화대학생 아니에요? 학교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연두 역시 왠지 저 여자 본 적 있는 것 같다고, 학교에서 봤는지 어디서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간에 여기서 227번 타려는 걸로 보아 어쩌면 은화대에 다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좀 놀랐다.

 “네, 맞아요. 근데 어떻게,”

 “역시, 맞았구나. 음악 감상 듣죠?”

 “아….”

 어디서 본 적 있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게 강의실에서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다. 음악 감상뿐만이 아니라 다른 강의를 들을 때도 그녀를 본 적은 없었다. 아니, 강의실뿐만이 아니라 어디든 학교 안에서 그녀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연두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혹시 이름이 ‘진연두’인지 물어 확인하더니, 본인 이름을 밝히면서 이런 데서 만나니 반갑다고 했다.

 

 

 17. 오후, 정류장

 

 전봇대와 전봇대를 연결하는 전선들이 살짝 밑으로 쳐져있었다. 일정한 굵기의 검정색 전선 네 개가 전봇대 맨 위쪽으로 이어져가고 있었다. 아래쪽으로 조금 더 굵은 선이 하나, 그 아래 더 무거워 보이는 선이 또 하나있었다. 다른 선과 달리 그 선은 좀 더 곧게 뻗어가고 있었다.

 굵은 선과 위쪽에 떠 있는 선에 거미가 집을 지어 집터로 삼고 있었다.

 전봇대마다 거미들이 실을 내어 쳐놓은 거미줄 위로 안개가 방울방울 붙어있었다. 가늘어서 언뜻 보면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자세히 보면 뿌연 줄 위로 안개방울이 걸려있었다. 연두는 검은 전선을 따라 이어지고 있는 거미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미줄은 거의 전부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잇는 전선 양 끝에 쳐져 있는 거미줄들은 그렇게 비슷비슷해 보였다. 연두는 계속해서 물끄러미 거미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다 지각하겠다.

 

 

 18. 강의실.1

 

 특별히 원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강의 시간에 거의 매번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자리가 아니더라도 연두는 최대한 뒷문에 가까운 줄에 앉았다. 그 또한 별다른 이유 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곤 했다.

 학교를 사이에 두고 지수는 연두와 반대 방향에서 살기 때문에 각자 따로 와서 강의실에서 만났다. 그런데 같이 옆자리에 앉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강의 때마다 지수는 거의 매번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고, 두 번째 줄에서도 문에서 가장 먼 안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가 무슨 본인 지정석이기라도 한 것처럼, 강의실에서 어디 앉아있나 찾아볼 때마다 지수는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만약 다른 누군가가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바람에 못 앉게 될 경우 어쩔 수 없이 그 옆자리에 앉았는데, 어쨌거나 지수는 그 자리에 앉거나 그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어째서 그렇게 그 자리를 고집하는지 언제 한 번 물어보았다. 그때 지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그 자리가 좋아서.”

 

 

 19. 도서관.2

 

 눈을 감았다 뜨면서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을 꿨다고, 현실감이 없다고 지수에게 말했다. 그러자 지수는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냐면서 여기 도서관이라고 말했다.

 종이냄새.

 눈을 깜빡였다. 지수 말대로 꿈도 아니었고 연두가 앉아있는 곳은 분명 도서관이었다. 일어나서 앉아있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책꽂이들이 늘어선 사이로 들어갔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을 쳐다보았다. 전혀 관심이라고는 생겨나지가 않았다. 전부 손이 뻗어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책들뿐이었다. 몇 차례 아무이유 없이 아무 책이나 빼들어 보았다. 하지만 한 번 펴보지도 않고 곧바로 다시 꽂아버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어떤 책이 좀 더 나으려나.

 아무리 봐도 지금 서있는 곳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연두는 내내 서있던 책꽂이 앞에서 빠져나와 ‘지리, 여행’이라고 써 붙여놓은 책꽂이 사이로 들어갔다. 하지만 역시 관심 가는 책을 찾을 수 없었다. 연두 손은 다양한 높이로 굴곡진 선 위를 따라가고 있었다. 갖가지 제목들 사이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여전히 연두 손은 보이지 않는 방패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처럼 책 사이로 파고들어 꺼내지 못하고 그저 표지를 따라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얼마못가 짜증만 날 것 같았다. 연두는 등 뒤에 있는 책꽂이로 가만히 기대섰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게 하나 있었다. 도서관을 강의실이라고 했을 때, 일단 연두가 매번 잘 앉는 자리에 꽂혀있는 책을 빼들어 읽어보는 방법이었다. 연두는 통로 쪽으로 맨 끝에 있는 책장 앞으로 들어갔다.

 아래부터 두 번째 칸, 제일 바깥쪽에 꽂혀있는 책.

 빠르게 한 번 넘겨보면서 사진들을 보았다. 다시 표지를 넘기고 두어 장 넘겨서 소제목들 쓰여 있는 차례를 읽었다. 다시 두어 장 뒤에 펼쳐진 양쪽을 사진으로 가득 채우면서 1부 시작한다고 알리는 두 쪽. 그 뒤로 본문. 그와 함께 본문 이해를 돕기 위해 실렸을 그림과 사진들. 글자는 눈에 담지 않았다. 그저 제목 옆에 붙어 인쇄되어있고 각 장을 시작하는데 배경으로 쓰인 사진들과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들어간 그림들을 눈여겨 훑어보았다. 그렇게 한 차례 죽 훑어본 후 책을 덮었다. 한 번 훑어보고 덮은 책을 눈높이에 있는 칸 가운데 아무 데나 끼워 넣었다. 연두는 그 옆 책꽂이로 이동했다.

 살펴보며 지나치고, 또 움직였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책꽂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연두 손은 이제 직각으로 이리저리 구부러지면서 뻗어나가는 선 위를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정처 없이 도서관 전체를 책꽂이에서 책꽂이로 옮겨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있던 사람이 책을 펴들어 훑어보더니 앞에 꽂혀있는 책들 위로 아무렇게나 얹어놓고 가버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버린 후에 그쪽으로 걸어가서 대충 얹혀있는 책을 꺼내들었다. 연두는 그 책을 밑에 꽂혀있는 책들 사이 틈이 벌어져있는 자리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 그 칸 맨 끝에서 두 번째에 꽂혀있는 책을 빼들었다.

 

 양팔로 끌어안고 있는 책을 펴보지도 않은 채 빼낸 그대로 들고서 도서관 가운데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연두가 일어난 옆 자리에 지수가 앉아서 이미 한 권 붙잡고 읽고 있었다.

 자리에 앉기 전 서있는 자세로 연두는 마치 온 신경을 집중해서 세밀하게 작업해야하는 기술자가 된 것처럼 연약하기 그지없는 생물이라든가 위험한 화합물을 다루는 실험연구원인 것처럼 조심스럽고도 조심스럽게 책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며, 정말 뭐가 그렇게 놀라운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빤히 쳐다보는 지수에 대해선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럼에도 연두는 그런 지수에게 말했다.

 “뭐, 왜.”

 “아니야, 아무것도.”

 그런데 지수는 무엇 때문인지 대답하면서 살짝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연두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조심스레, 지극히 신경 쓰고 있다는 몸짓으로 최대한 부드럽고도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그러면서도 앞에 놓여있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왜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책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표지는 단색으로 아무런 무늬 없이 어두운 진녹색 배경. 바랜 노란색으로 제목이 찍혀 있었다. 그 제목이 군데군데 지워지고 흐려져 있었지만 명조체가 아니라 손으로 쓴 듯 자연스러운 필체였다. 두꺼운 편이면서 무겁지는 않으며 오래 되어 살짝 묵은 종이 냄새가 나고 있었다.

 ‘상아’

 왠지 마음에 들어.

 

 

 20. 하교.1

 

 태양이 뻗쳐오는 모습을 응시하고 있기를 좋아한다. 약간 따가움을 감수하고서라도, 햇볕 내리쬐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정류장에 은색 파이프 두 개를 붙여놓은 모양인 의자에 걸터앉아서 보니, 비스듬한 태양이 이제 지평선 바로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그 아래쪽으로 저 앞 언덕을 넘어서 버스 한 대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227번일 것 같았다. 연두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가 섰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앉으려 뒤돌아보았지만, 옆에 서있던 사람이 이미 연두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버린 후였다.

 어차피 들어갔다 다시 나와야하는데, 가지 말고 그냥 학교에 있을까.

 그때 입고 있는 옷을 뚫고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굵은 실이 짜인 작고 수많은 틈새로 정말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역시 집에 가서 따뜻하게 옷도 더 챙겨 입고, 배부르게 저녁도 먹고 나와야겠다. 버스 빨리 좀 왔으면 좋겠어.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추운데.

 

 해가 점점 더 아래로, 아래로, 지평선에 걸치고, 점점 더 내려가더니 마지막에 살며시 반짝 하고는 완전히 밑으로 내려갔다. 공기 또한 그에 따라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이제 밤이 되려는지 살며시 얇은 그림자가 내리면서 싸늘해져가고 있었다. 시시각각 느낄 수 있었다.

 

 

 21. 지수가 들어간 사이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학교 오기 전에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났던 여자를 우연찮게 학교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연초희라고 자기 이름을 밝혔던 그녀가 먼저 아는 척 연두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라고 하는 건 좀 그런가?”

 “아뇨. 뭐.”

 학교에서 연초희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연두는 이렇게 그녀와 마주치게 된 일이 어쩐지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대충 약간 시큰둥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녀 옆에 다른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자기 남자친구라면서 그를 소개했다. 이상하게도 연두는 그 얼굴이 또 익숙하게 느껴졌다. 가만 생각해보니, 강의 시간에 잠깐 졸다가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던 그 사람인 것 같았다. 연두 때문에 졸지에 난데없이 뒤통수에 벼락을 맞았던 사람 말이다. 모른 척 부인할 수도 없었다. 두 사람도 이미 그 일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초희는 남자친구와 머리를 부딪쳤던 일 기억 안 나냐고 하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정말 학교에서 자기를 본 적이 진짜 단 한 번도 없는지를 물어보면서 마치 연두를 취조하다시피 했다. 같은 강의를 듣는다면 정말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연두는 그녀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전혀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저번에 그 정류장에서 만난 걸 보니 가까운 데 사는 것 같고, 강의도 같이 듣는 사이이니만큼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말했다. 그런데 뒤이어서 그녀는 계속 그녀만 기억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하나씩 늘어놓듯 얘기하기 시작했다. 대체 어쩌자는 건지 어디 못 가게 하려는 건지 연두를 꼼짝없이 붙잡아두려는 듯했다.

 “근데, 저 급한 약속이 있어서요.”

 

 

 22. 늦은 저녁, 학교.

 

 어두워진 캠퍼스는 불이 한두 군데 켜진 건물과 검정색을 뒤집어쓴 나무, 검은색으로 진회색으로 소리 없는 그림자로 어둡게 뒤덮여 있었다. 해가 진 후 캠퍼스에서 전등 아래 검고 투명한 그림자가 두껍게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연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지수와 낮에 걸었던 길을 되짚어 걸어가고 있었다. 전기가 밝히고 있는 미약한 빛이 희미하게나마 어둠을 걷어내어, 짙은 갈색으로 굴러다니고 있는 낙엽과 보도블록 깔려있는 모양이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이제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사방에 옅은 안개가 끼어있었다. 마치 연두가 내뿜는 입김이 증발하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다 식으면서 깔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풍경을 뒤로 하고 본관으로 들어가려다가 잠깐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에 가려고 했는데, 엉뚱한 데로 들어갈 뻔 했어.

 앉아있는 자리에서 도서관으로 바로 가려면 본관을 빙 돌면서 휘어져 꺾어드는 먼 길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날은 추웠고, 밤이 깊어 어두워지면 질수록 점점 더 추워지고 있었다.

 춥고 먼 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본관 4층에 도서관으로 쉽게 오고갈 수 있도록 연결해놓은 다리가 있긴 했다. 하지만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올려다본 4층에 환하게 불 켜놓은 방이 있었는데, 교양 국어 교수님 연구실이기 때문이었다.

 아까 강의 끝나면 들렀다가라고 하셨다는데.

 만약 마주치게 되면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일부러 피하고 들르지 않으려던 건 아니었다. 오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만 깜빡하고 잊어버렸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일 학교에 오자마자 찾아뵐 생각이었다. 어쩌면 내일 오는 길에 교수님과 마주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그전까지는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연두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미세한 틈 사이사이로 사정없이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1층은 가운데 입구 천장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그나마 계단에 불이 켜져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층 반, 2층, 2층 반, 3층, 3층 반. 차갑게 식은 난간을 잡고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한 칸씩 천천히 올라갔다. 올라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숨죽여서 가만히 올라갔다.

 운동화로 갈아 신고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계단을 오르다가 문득 도서관에서 지수와 함께 계단을 뛰어내려오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생각을 하니 뜬금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그 바람에 연두는 계단 중간에 서서 한참을 고생해야했다. 허리를 구부린 채 입을 틀어막고 몸을 떨면서 그 웃음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혹시 누가 보지는 않았을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뒤쪽에도 아래쪽에도 아무도 없었다.

 

 정말 소리 없이 가만가만 조용히 올라갔다. 중간에 위험한 순간이 있긴 했지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새어나오지 않게 했기 때문에, 아마 꽤 가까운 곳에 누구 한 사람 있었다 해도 등 돌리고 있었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렇게 4층까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연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작게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며 소리 없이 조용히 웃었다.

 왠지 교수님이랑 마주칠 일도 없을 것 같아.

 다행히도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복도에서 교수님 연구실이 있는 쪽 반대방향 끄트머리에 있었다. 잠깐 교수님 연구실이 쪽을 한 차례 돌아보고, 다리가 있는 쪽으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연두가 걷는 쪽은 불이 꺼져있었다. 그래서 한 손으로 앞쪽을 휘저어 살피며 다른 손으로는 벽을 더듬어가면서 가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발에 치이는 건 없겠지만 복도 끄트머리 다리까지 가는 도중에 사물함과 부딪히면서 요란하게 큰 소리 날 수도 있었다. 중간에 어이없게 넘어지기라도 하는 때엔 정말 여기 누구 있다고 대놓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그래서 정말 조심스러웠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조심스레 앞으로 내뻗는 다리와 앞쪽을 휘젓는 손에 특별히 뭔가 걸리는 일은 없었다. 더듬더듬 벽을 짚어간 덕분에 사물함에도 부딪히지 않고 잘 피해갈 수 있었다.

 다리 쪽으로 가까워져가니 밖에서 바람이 불어들어 스쳤다. 그런데 그 바람결에 목소리가 스며있었다. 연두는 순간 멈칫하고 당황하여 뒤돌아섰다. 아무래도 그렇게 피하려고 애를 쓴 교수님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수님이 먼저 움직였다. 따각따각 구두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고, 돌아서는 연두 등 뒤로 정체불명의 인물을 불러 세우려는 목소리가 울렸다.

 “거기 누구야. 학생인가?”

 

 따각. 따각. 온 복도에 울리는 구두소리를 들으면서, 도망갈까 돌아설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속으로만 허둥지둥 난리가 난 상태였다. 그러다 한순간 진이 빠져서 돌아섰다. 연두는 뒤돌아선 인물이 누구인지 가늠해보려는 교수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연두야? 불도 다 꺼놨는데 여기서 뭐해.”

 “집에 들어갔었는데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다시 나왔어요.”

 “아 참, 너 그러고 보니까, 강의 끝나고 나한테 들렀다 가라고 했는데 왜 안 왔어. 일단 따라와. 컴컴해서 잘 보이지도 않네.”

 

 23. 저녁, 나가는 길.

 

 거미들이 동쪽 지평선에서 서쪽 지평선까지 걸치는 집을 짓고 있었다. 축 늘어지는 거미줄처럼 밤이 키 큰 빌딩에 아파트에 가건물 컨테이너에 3층짜리 빌라에 놀이기구에 철골 구조물 위에 걸쳐 있었고, 도로에 흙바닥에 강물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게 어두운 밤이 둥근 지평선 지름 양 끝에 걸친 상태에서 점점 늘어지고 쳐지다가 서서히 저 아래로 내려앉더니, 그대로 바닥에 단단히 안착하여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점점 더 깊이 녹아들며 파고들어가는 듯했다. 오로지 거미만이 자유롭게 그 위를 돌아다니고 끈적끈적한 거미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처럼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다시 나갈 땐 운동화 신으려다 구두를 신고 마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나가려고 현관에 앉았을 때, 아침에 신고 나가려다 내버려둔 운동화가 맞는지 두 번 보고 한 번 더 확인했다. 연두는 가지런히 리본모양으로 묶여있는 끈을 풀어서 느슨하게 한 뒤 발을 밀어 넣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몹시 추웠기 때문에, 나가기 전 입고 있는 옷 안에 얇게 한 겹 더 껴입고, 겉옷도 바람이 파고들 틈이 없어 보이는 것으로 바꿔 입었다.

 

 집에서 상당히 가파르다싶게 경사진 오르막으로 걸어 나와 왼쪽으로 꺾었다. 그렇게 올라가는 방향으로 대여섯 걸음쯤 올라가다보니 담벼락에 얼룩고양이가 앉아있었다. 그 옆에 검은고양이가 걸어 다니고 있었고, 아래에 또 다른 얼룩고양이가 앉아있었다.

 연두는 저런 고양이들이 차에 치여 죽은 사체를 몇 차례 목격하기도 했다. 며칠 전에도 큰 도로가에서 그렇게 죽었을 고양이사체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광경을 보았었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 때문에 닭살이 돋아난 양팔을 쓸어내리고 비비면서 가라앉혔다. 그리고 고개를 털어내면서 고양이들이 서있는 쪽에서 방향을 꺾어 오르막을 마주보고 섰다.

 해가 급히 서두를 때였다. 도둑고양이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 이미 날은 꽤 많이 어두워져있었다. 연두는 다시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해서 큰길로 나와 방향을 꺾고 정류장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가만 보니, 예전에 강의시간에 졸다가 머리를 부딪친 기억이 있는 사람이었다.

 연초희가 그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했던 기억이 떠올라 혹시 그녀가 함께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그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고 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그녀와 되도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우연하게 마주치게 되는 일이라도 그다지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보긴 했지만 왠지 그 사람에게 아는 척 인사하는 일조차 거리꼈고 애매했다. 그래서 좀 떨어진 거리에 조용히 서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전에 머리를 부딪쳤을 때도 그렇고 학교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도 연초희 옆에 조용히 말없이 서있기만 했던 사람이 먼저 아는 척 그것도 꽤나 반가운 듯이 가까이 다가와 연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이 근처에 사나 봐요?”

 “네. 바로 저기 내리막길에 내려가다 보면….”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빨리 가야 되는데 버스가 안 오네요. 이미 좀 늦었는데. 약속이 있거든요.”

 “네….”

 분명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녀를 떠올리니 좀 불편했다. 게다가 옆에서 그가 말하는 모습을 보니, 전에 연초희가 그랬듯 옆에 버티고 서서 계속 떠들고 있을 것 같았다. 문득 연두는 도로 쪽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도로 가까이 나가서는 다가오는 택시 쪽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혹시 학교 가는 길이면 같이 타요. 같은 방향이니까.”

 “아뇨.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먼저 갈게요. 또 봐요.”

 

 24. 카페.1

 

 지수가 쟁반을 들고 일어나 옆에 서서는 배고프다고 밥 먹으러 가자고, 안 일어나고 앉아있는 연두에게 안 나갈 거냐고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별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햇볕을 쬐고 싶었다.

 사실 배가 고팠다. 케이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쪽도 연두였다. 계속 머핀에다 타르트까지 떠올리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는 쪽은 연두였다. 그리고 지수는, 어렸을 때부터 지수는 아침을 잘 챙겨먹지 않는 편이었다.

 

 이것저것 단편적인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지수가 옆에 서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여겼는지, 지수도 자리에 다시 앉으면서 말했다.

 “진짜 배고프다. 나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어. 나가자. 응?”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그—”

 멈칫했다.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조금….”

 “뭐 먹고 싶은데.”

 “햇볕 쬐고 싶어.”

 잠시 지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다시 열었다.

 “그냥 여기서 때우자. 괜찮아?”

 “그래. 그러자.”

 “타르트, 머핀, 케이크라. 연…”

 

 갑자기, 지수가 말하는 목소리, 바로 앞에서 연두에게 직진해오던 목소리가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러더니 정말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인 것처럼 우웅, 윙윙거렸고, 곧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흐리게 불분명해졌다. 마치 지수가 입을 벙긋거리며 말하는 얼굴에서 소리만이 따로 분리되어 떠돌고 있는 듯했다. 그러더니 시야가 여럿으로 분리되었다. 잔뜩 흐려져서 떠돌고 있는 소리처럼 시야에 형태를 이루고 있는 모든 선들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듯했다. 그러다 폭죽이 터지듯 뻗쳐 나가는 모양으로 색 하나하나가 일일이 분리된 채 서로 뒤엉켜들었다.

 

 “연두야.”

 

 한 줄기 섬광처럼 진하고 강하게, 그 혼란을 뚫고 파고드는 목소리가 귀에 박혀오는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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