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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55년생 순자씨
작가 : 춘자
작품등록일 : 2019.10.16

82년생 김지영의 부모 세대 이야기.

 
동족간의 전쟁
작성일 : 19-10-17 08:45     조회 : 201     추천 : 0     분량 : 3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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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후 충희는 외항선을 타는 아버지를 따라 마라도나가 되었다. 봉급은 적지 않았으나 술과 노름과 친구를 좋아해 집으로 가져오는 돈은 많지 않았고, 배를 타지 않는 동안에도 집에 오는 일은 드물었다. 종의는 고모의 일감을 그대로 받아 사창가의 삯바느질과 빨래를 해 가며 가족을 부양했다. 첫 아이는 아들이었는데,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너무나 약했다. 건강한 아들이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등살에 못 이겨, 피임도 산후조리도 없었던 시절 충의가 집에 와 있는 기간 동안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려 부부만의 시간을 겨우 보냈다. 부엌 옆 식은 아궁이에서, 혹은 곳간에서 후다닥 끝내는 때도 종종 있었다.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던 종의의 마음을 하늘은 몰라주셨는지, 둘째도 셋째도 딸이었다. 세 살, 두 살의 터울로 아이들을 낳은 후에는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쌀이 나는 지역이기도 하고 주민들 인심이 좋은 탓도 있었겠지만 전쟁 초반 피난민들이 내려오면 군산에서는 주먹밥을 나눠 주고 쉼터를 마련해 주었다. 아직 덜 풀린 몸을 이끌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종의도 피난민들을 도와주는 일을 했다. 이런 때일 수록 서로 돕고 힘을 내야 한다는 건 종의의 고모도, 종의의 시댁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고, 군산도 안전하지 않다며 이리에 있는 충희의 당고모네로 피난을 가기로 한 차에, 지병으로 고생하던 고모님이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종의는 꺼억꺼억 우는 동생을 달래가며, 술을 들이붓는 오빠를 말려가며 상을 치렀다. 놀기 좋아하는 남편 충희도 이때만은 종의에게 의지가 되어 주었다. 5일 후, 상복을 입은 채로 골골거리는 아들을 충희가 업고, 둘째는 종의의 손을 잡고 셋째는 품에 안은 채로 피난짐까지 머리에 지고 길을 나섰다.

 

  같은 전라도라지만 군산과 이리는 분위기가 달랐다. 쌈짓돈을 챙겨왔더라도 전쟁통에 돈의 가치가 클리 만무했고, 친척집이라 해도 마냥 군식구가 될 수는 없어서 종의가 이웃집의 밭일도 도와가며 집안 살림을 꾸렸다. 방랑벽이 있는 충희는 배를 못 타게 된게 마냥 지루한 것 같았고, 징집을 피한 동네 한량들과 어울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리 출신과 외부인을 가리지 않고 장병 징집이 시행되었고, 건강이 좋지 않은 큰 아들 역시 학도병으로 끌려갈 뻔했으나 종의의 기지로 겨우 막을 수 있었다. 더 멀리 피난 간 사람들도 많고 어딜 가나 고생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종의는 군산이 그리웠다. 이 와중에 장독 뚜껑을 못 닫고 온 것도 마음에 걸렸다. 바람을 쐬어주려다가 그만...올해 장을 망쳤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충희와 자주 어울리던 한량 중 한 명이 충희에게 보급품이 오는 날 기차역으로 가서 연초를 좀 챙겨보자는 제안했다. 더운 여름,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었던 충희는 선뜻 동의했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나가려는 찰나, 충희의 등에 대고 "오늘 같은 날은 좀 집에 있어 보랑께. 아들네미도 아프고, 숙희도 배앓이를 하는 구먼." 하고 종의가 중얼거렸다. 자신을 기다리던 동네 벗에게 머쓱해하며 "지붕을 좀 고쳐야 한다는 구먼." 하자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량이 떠나갔다. 그러나 그날 종의는 충희의 평생 은인이 되었다. 미군이 이리역을 폭격해 기차역에 있던 기차는 물론 기차역 주변 50채 민가가 모두 쑥대밭이 되었던 것이다. 충희에게 연초를 챙기러 가자던 한량은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기차역 근처에서 열리는 장에 갔던 아낙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이리역에서는 거리가 꽤 있었던 충희네 친척집 동네는 폭격에서는 무사했으나, 기차역이나 그 근방에 업을 둔 어른들 모두 살아돌아오지 못했고 순식간에 고아가 넘쳐났다.

 

 왜 이리역을 폭격해야 했는지,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에 대한 미군의 설명은 없었고, 이리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충희 가족은 이리를 떠나 전주로 갔다. 종의가 유곽의 빨래를 맡아 하던 시절 알고 지내던 한 유곽 마담이 마침 전주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인편을 통해 소식을 주며 흔쾌히 내려오라고 한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가족만 안전하다면 종의도 다시 피난민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던 차라, 소식을 받은 다음 날 채비를 해서 전주로 내려갔다. 그간 신세를 지고 있던 친척집 식구들에게도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으나, 죽어도 이리에서 죽겠다는 충희의 당고모님 고집 덕분에 소용이 없었다. 남편이 장병으로 징집된 후 홀로 쓸쓸히 지내던 동생 종숙에게도 전보를 넣고, 혹시 몰라 이리에 머물던 친척집에도 편지를 남겨놓았다. 삐뚤삐뚤한 글씨지만 그래도 붓을 잡을 줄 알았던 충희가 간단히 전주의 주소를 남겼다.

 

 종의는 이리에서보다 전주에서 더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종의가 피난민을 돕는 일에 나서면서 충희 역시 자연스럽게 가정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고, 이리에 있을 때는 어쩐지 안색도 더 나쁘고 먹는 것도 시원찮던 아들이 전주에 와서는 조금씩 기력을 회복한 것도 마음이 놓였다. 전쟁 통에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딸아이들에게 충희가 글을 읽고 쓰는 법이라도 가르쳐 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군산이 그리운 마음은 늘 한 켠에 있었는데, 북한군을 상대로 하는 작전이 군산에서 일어난다는 소문이 있어 쉽사리 전장 쪽으로 발을 옮기지는 못했다. 유곽 마담과도 마음이 잘 통해, 드물게 벌어지는 술자리가 있을 때는 부엌 일을 도와주기도 하며 의지하고 지냈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을 수복한 후 평양까지 진격했다는 기사가 나고, 여기저기서 드디어 북진통일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이때, 종의네 가족은 다시 군산으로 가기로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고향이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배가 뜰리도 만무하지만, 다시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싶다는 충희의 의사도 크게 반영되었다. 전주에서 군산까지, 아이 셋을 데리고 짐을 꾸린 후, 마담이 알아봐 준 보급품 수송 차량의 트럭 뒷자리를 얻어타고 다시 고향길에 나섰다. 트럭 운전사는 피난을 가려면 부산으로 갔어야지! 하며 핀잔을 주었지만,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던 종의와 충희는 개의치 않았다. 종의는 고향에서의 삶이 그리웠고, 충희는 전쟁이 끝나는 대로 외항선을 타고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10월의 마지막날, 한 가족이 따로 또 같이 꿈을 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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