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향기 - #13. 저마다의 사정은 존재한다.
새벽이 그렇게 가버리고 성원은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성원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이처럼 울어버리던 새벽의 얼굴로 가득했다.
새벽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 것이 확실한데, 자신은 그래서 그냥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뿐인데, 그 말들이 새벽에게 큰 상처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새벽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새벽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성원은 자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가게의 불을 껐다.
그리고는 카페 밖으로 나와 카페의 문단속을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성원이 돌아보자 그곳에는 순신이 서 있었다.
순신은 성원의 얼굴을 보고는 말했다.
“근심이 가득해서 어쩌질 못하는 표정이 분명하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그런 거. 이 시간에 웬일이냐?”
순신은 성원의 말을 듣고는 성원에게 핸드폰을 들어 보여줬다.
핸드폰에는 주희가 새벽이란 여자가 짜증 난다며, 막 오빠를 꼬시려고 울고불고 난리라며 순신에게 보낸 카톡이 가득했다.
성원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순신에게 말했다.
“정보력이 아주 뛰어나시네요.. 쓸데없기는..”
“이 정보력이 나를 이 자리까지 만들었지. 어떻게? 오늘 형이랑 술 한잔할까? 나도 술이 쫌 땡기는데..”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간단하게 맥주를 몇 캔 사와 편의점 앞에 앉았다.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마시기 좋은 날씨였다.
볼에 닿는 공기의 차가움이 기분 나쁘거나 못 견디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 느낌을 모두 아는 건지 편의점 앞에는 두 사람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맥주를 마시다가 순신이 먼저 말 문을 열었다.
“아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내용은 못 들어서 모르겠고.. 네가 이유 없이 사람 울릴 놈도 아니고..”
“.....”
순신은 말없이 맥주만 마셨다.
답답한 순신은 성원에게 말했다.
“말을 하라고. 그래야 알 거 아니야.”
“몰라.. 나한테 커피향이 난데. 자기가 스트레스 때문에 후각이 마비돼서 아무 향도 못 느끼는데 나한테는 커피향이 나서 자기가 후각이 마비된 걸 치료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하더라고..”
“그래..?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나? 당연히 말도 안 되는 말 하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접근하시는 거면 그냥 카페 안 와주셨으면 좋겠다고..”
순신은 성원의 말을 듣고는 성원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딱’
“아!!! 머 하는 짓이야? 죽을래?!”
“으휴.. 네가 그래서 문제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생각이란 걸 하고 말하란 말이야.”
“야. 내가 생각 없이 말했겠냐? 후각이 마비가 됐는데 나한테서만 향기가 난다는 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뭐가 사람이 상식적으로 통하는 말을 해야 생각을 하지..”
“야.. 어휴.. 너 실수한 거 맞는 거 같은데..”
“뭐?”
순신은 자신의 앞에 있는 맥주를 쭉 들이켜고서는 다시 성원에게 말했다.
“내가 사실 얼마 전에 병원에서 새벽 씨를 만났거든..”
“무슨 병원?”
“그 새벽 씨 친구 민아 씨가 다니는 병원.”
“네가 거길 왜? 결국 갔냐?”
“아이씨..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암튼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거 진짜인 거 같던데?”
“응? 네가 어떻게 알아.”
“그날 새벽 씨 이비인후과 진료가 아니고 정신과 진료받으러 왔던데.. 그러면서 말하더라고. 진짜로 후각이 마비되었다고. 스트레스받고 그래서 그렇다고 하던데...”
성원은 순신의 말을 듣고 생각하다가 순신에게 말했다.
“야. 근데 그게 말이 되냐? 너한테도 그냥 그렇게 말한 걸 수도 있는 거잖아..”
“하아.. 야.. 너는 나이가 몇 갠데 사람이 진심으로 말하는 거랑 거짓말하는 거랑 구분을 못하냐?”
“그게 무슨 구분이 된다고 그래. 무슨 점쟁이냐.”
“야.. 점쟁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거거든? 정 못 믿겠으면 민아 씨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던가.”
“아.. 됐어.. 뭐 그렇게까지..”
“너 만약 새벽 씨 말이 사실이면 엄청난 실수를 한 건데 괜찮겠냐? 네가 엄청 상처 준거라고 븅신아.”
“.....”
성원은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는 새 맥주를 한 캔을 뜯어 마시고선 순신에게 말했다.
“민아 씨한테 전화 좀 해줘. 네 말대로 물어보는 게 맞는 거 같다.”
“난.. 전화 못 해.. 엄청 까였거든..”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엄청 까였다고.. 다시 얼굴도 못 볼 것 같은데.. 네가 해 그냥..”
“으휴.. 그새 드리뎄냐?”
“그게 아니고.. 그냥.. 나는 보고 싶어서 병원에 갔는데.. 너무 예쁜 얼굴로 너무 예쁜 미소로 다른 남자를 바라보더라..”
“에휴... 무슨 짝사랑 전문가도 아니고... 너도 참 답 없다..”
“그게 아니라고.. 진짜 이번엔 그냥.. 뭘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진짜 보고 싶어서 간 건데..”
“아씨.. 모르겠고.. 부탁 좀 하자. 너 까인 게 아니고 너 혼자 그렇게 생각한 거면 전화해도 되겠네..”
순신은 고민했다.
그때 자신이 민아를 만나기 위한 핑계를 찾았던 것처럼 오늘도 성원이 새벽에게 한 실수라는 핑계를 만들고 싶었다.
순신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맥주를 한번 쭉 들이키고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민아는 희형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대화도 하고 함께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민아는 희형의 이야기에 즐겁게 웃었다.
희형은 그런 민아에게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응.. 그냥 선물 하나 샀어..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아서.”
“안 그러셔도 되는데.. 고마워요. 선배.”
“그 선배 소리 좀 그만하자.. 언제까지 선배 선배 할 거야..”
“아.. 뭐라고 부를지 몰라서..”
“그냥 오빠나 뭐 자기 이런 걸로 부르면 되지 않을까?”
웃으면서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희형을 보며 민아도 같이 웃었다.
희형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민아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그때, 민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민아는 핸드폰을 확인했고, 순신이라고 적혀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민아는 급히 통화 거부를 눌렀다.
희형은 그런 민아에게 말했다.
“누군데? 괜찮아. 받아도 돼.”
“아니에요..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래? 아.. 좋다. 민아랑 이러고 있으니까.”
“저도 그래요..”
“여기 위에 호텔이 있는데 방에서 보면 서울 야경이 진짜 멋있더라고. 여기서는 여기까지만 마시고 위에 올라가서 한 잔 더 할까?”
“네..?”
“아니. 그냥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쉽고, 한잔 더 하고 싶은데 여기 너도 불편하고 그렇잖아. 그래서 그냥 편하게 올라가서 한잔하자는 거지.”
“아...”
민아는 희형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민아 정도의 나이면 이런 대사의 뜻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아는 오늘 희형과 함께 있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희형에게 대답을 하려는 순간 희형의 핸드폰이 울렸다.
희형은 핸드폰을 확인하고 민아에게 말했다.
“잠시만, 엄마한테서 전화가 와서, 잠깐 받고 와도 될까?”
“네.. 그럼요. 다녀오세요.”
“응. 미안.. 잠시만 있어.”
희형은 그렇게 말하고 급하게 전화를 받으러 테라스로 향했다.
민아는 테라스에 있는 희형의 표정을 살폈다.
뭐가 즐거운지 어머니의 전화를 행복하게 웃으며 받고 있었다.
그때 민아의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민아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순신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는 것을 봤다.
민아는 이 타이밍에 전화가 온 것도 짜증 났지만, 도대체 왜 전화를 한 건지 궁금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이순신이라고 합니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다름이 아니고.. 그때 새벽 씨를 집까지 엎고 갔던 친구 기억하세요? 최성원이라고..”
“그런데요?”
“아.. 성원이가 새벽 씨랑 조금 문제가 있었는데 민아 씨한데 뭔가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요.”
“지금은 좀 곤란할 것 같은데..”
민아는 그 말을 하며 희형을 쳐다봤다.
희형은 여전히 신나게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때 통화기 너머로 성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그때 인사드렸던 최성원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길래..”
“다름이 아니고...”
성원은 민아에게 새벽과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민아는 성원에게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쉬면서 성원에게 말했다.
“후우.. 새벽이.. 후각이 마비된 상태인 거 맞아요. 그리고 성원 씨한테서 특정 향이 난다고 이야기도 들었었고요..”
“아.. 네..”
“의학적으로 뭔가 뚜렷하게 설명해드릴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없는 문제도 아니라고 봐요. 그리고 새벽이는 자기 일이 전부이던 친구예요. 지금 아마 뭐라도 해보고 싶을 거예요..”
“아..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네요..”
“제가 우선 새벽이 한테 전화해볼게요.. 충분히 그렇게 오해하실 수 있는 부분이었네요..”
“네.. 제가 직접 사과를 하고 싶은데.. 새벽 씨에게 이야기 좀 잘 부탁드립니다..”
“네.. 그럴게요.”
“혹시 가능하시다면 한번 만나 뵙고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새벽 씨가 카페에 두고 간 짐도 있으시고요..”
“제가 새벽이한테 물어볼게요. 너무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는 그렇게 울고 하는 애가 아닌데 요즘 그 일로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아.. 네.. 부탁 좀 드릴게요.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아닙니다.. 네.. 들어가세요..”
민아가 전화를 끊자 희형도 때마침 테라스에서 테이블로 돌아왔다.
희형은 자리에 앉아 민아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민아야. 어떻게 하지?”
“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어머니가 급하게 일이 생기셨다고 해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쩌지?”
“아.. 괜찮아요. 얼른 가보셔야겠어요. 저도 친구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친구? 누구?”
“아.. 선배한테.. 아니.. 그.. 진료받았던 친구요..”
민아는 선배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느꼈지만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구나. 그럼 얼른 나가자. 오늘은 미안해 민아야. 다음에 우리 같이 가자.”
“네..”
두 사람은 그렇게 밖으로 나왔다.
희형과 헤어진 민아는 새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민아는 전화를 받지 않는 새벽이 걱정돼서 택시를 잡아서 새벽의 집으로 향했다.
새벽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민아는 새벽이 받았을 상처의 무게를 알았다.
민아는 조금 막히는 이 길이 야속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