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어둠 속에서도 금빛으로 확연하게 빛나는 그리핀의 착지는 고요하고도 우아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쁨에 찬 날갯짓은 여전했다.
그녀는 포모나가 내려앉자마자 부리를 콱 잡아챘다. 놀란 듯 포모나의 동공이 세로로 길어졌다.
그녀는 싱긋 웃었다.
[쉿, 반가운 건 알겠지만 조용히.]
포모나는 화닥거리던 날개를 재빨리 접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포모나의 턱을 몇 번 간질였다.
포모나는 그녀의 손길이 기껍다는 듯 낮게 울며 머리를 기울였다.
[그 애...... 키론을 좀 불러주겠니?]
포모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알았다는 듯 커다란 머리통을 끄덕였다. 포모나는 몇 번 날개를 퍼덕이다가 이내 날아올랐다.
그녀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현재의 눈높이가 어색한 듯 눈을 깜박였다가, 팔다리를 한 번씩 들어보면서 웃었다.
한동안 '혼자서도 잘 놀아요' 놀이를 하는 것 같던 그녀는 곧 지루한 듯 주희의 옆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불가사리는 이제 정크 푸드 반대 포스터에 등장해도 좋을 법한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심지어 체모도 증가했다.
다행히도 포모나는 충분히 빨랐다.
정글짐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혹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녀의 등에는 키론이 타고 있었다.
그는 드물게도 당황해보였고, 더더욱 흔치 않게도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재촉하듯 몸을 흔드는 포모나의 등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포모나,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누가 나를......"
키론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
키론은 약간 넋을 잃은 것 같았다. 그녀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갈색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당신은......"
쪽.
가벼운 마찰음에 불과한 소리는 키론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키론은 그녀가 입 맞춘 뺨을 감싸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녀는 조금 슬프게 웃었다.
[안녕.]
그리고 사라졌다. 키론은 더는 그녀의 의식을 느낄 수 없었다.
공윤의 눈에서 오팔색 광채가 가시고, 그녀는 앞으로 휘청 기울어졌다.
키론은 얼떨결에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공윤의 어깨를 확인하듯 꽉 쥐었다.
눈에 새겨뒀던 골격과 피부, 분명한 공윤의 몸이었다.
공윤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연한 갈색 눈을 깜박이다가, 놀란 듯한 숨소리를 내면서 그를 밀쳤다.
평소의 공윤과 똑같았다.
"뭐, 뭐, 뭐예요? 언제 왔어요?"
"방금......"
키론은 멍하니 대답했다. 오랜 세월을 거친 정신은 혼란 속에서도 일말의 이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공윤은 잠깐 혼돈을 느낀 것 같았지만, 금방 초점을 되찾고 그를 붙들었다.
"일단 저거...... 부터 어떻게 좀 해야겠어요."
공윤이 가리킨 쪽을 보자 이제는 몸집이 놀이터만 해진 불가사리가 보였다. 그는 익숙한 두통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정말로 욕하고 싶었다.
***
휴가 첫날부터 사장님을 호출하게 될 줄이야.
진짜 현실에 환멸이 난다.
공윤은 진저리를 쳤지만, 그래봤자 눈앞의 풍경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정글짐을 모조리 먹어치운 불가사리는 확실히 그들을 인식한 것 같았다. 하지만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입가에 침처럼 연기를 흘려대는 불가사리는 이제 시소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미(蛾眉). 달이 밝네요. 이런 날에 과식하면 별로일 것 같은데.”
키론은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공윤은 그 활기가 꾸며낸 것임을 확신했다.
사실 키론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서비스직은 정말 힘들다니까.
그나저나 갑자기 달 얘기를 꺼내다니, 진짜 할 말 없었나 보다.
“배가 많이 고픈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이런 걸 먹으면 안 돼요. 사람들이 당황해한다고요. 제가 다른 식사거리를 드릴 테니까......”
불가사리는 키론의 말을 무시했다. 사실 제대로 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시소에 온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며칠을 내리 굶은 사람이 오성급 호텔 뷔페에 입성하면 저런 꼴이 될까. 공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죠?”
키론은 공윤을 보고 순간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공윤은 눈썹을 찡그렸다. 뭐야?
“사실 저런 상태가 되면, 설득으로 해결될 단계는 지나갔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 약간 거친 수단이 필요할 것 같은데.”
거친 수단이라.
공윤은 불가사리와 키론을 번갈아봤다. 불가사리가 깔아뭉개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출 듯한 체급 차이였다.
공윤은 미심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19.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게 조심해요. 저걸 맡으면 거의 즉시 꿈을 꾸게 되니까.”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쓰러져서 잠드는 거죠. 그 와중에 깔리거나 연기에 계속 노출될 수도 있고.”
음, 좋은 결말은 아니네.
공윤은 방독면을 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위험해요. 불가사리의 꿈은 원하는 걸 보여주고 가끔은 현실로 이루어지지만, 과용하면 기면증을 앓게 되거든요.”
“이루어진다고요? 실제로?”
“네.”
키론은 공윤을 지긋이 봤다. 행여나 할 생각 말라는 듯. 공윤은 말을 돌렸다.
“기면증이라면......”
“경계가 무너지는 거예요. 불가사리의 꿈은 무의식을 넘보고 그걸 밖으로 끌어내 현실로써 그려내죠. 그 와중에 의식과 무의식이 뒤섞여 버려요. 이 작용은 프로이트의 이론과도 관련이 있는데......”
공윤의 표정이 급격하게 멍해지는 걸 보고 키론은 설명을 그만뒀다.
공윤은 고개를 흔들어 집중력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불가사리나 잡죠. 어떻게 할 거예요?”
“일단 먹은 걸 토해내게 만들 거예요. 그래야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 그리고 이거.”
키론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공윤에게 건넸다. 그것은 표면이 울퉁불퉁했고, 검푸른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미가 작아지면, 이걸 먹여요. 그러면 어느 정도 이성을 찾을 거예요.”
“이게 뭔데요?”
“블루링(Blue ring)이라고, 저택 주변에서만 채취되는 일종의 광물이에요. 예전에 만났을 때 좋아했거든요.”
비*라늄 같은 건가......? 공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블루링을 꼭 쥐었다.
키론은 그녀의 팔을 잡으려는 듯 손을 올렸다가, 결국 잡지 않고 내렸다.
그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웃었다.
“조심해요.”
공윤은 자기도 뭐라고 격려의 말을 해줘야 할까 고민했다. 그녀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복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