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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Netwalker
작가 : HudmentJhinRaker
작품등록일 : 2019.9.6

프로급 마피아 조직원 르미데안느 드 블랑. 사이버 해킹 보안국 특수 요원 고준혁. 세계적인 대기업 제타 그룹의 회장 최문호. 가족을 잃고 사이버 킬러가 된 소년 서지환. 깊은 곳에서 부터 꼬이기 시작한 그들간의 과거가 기어코 실체를 드러낸다.

 
NetWalker - 9
작성일 : 19-10-14 21:33     조회 : 215     추천 : 0     분량 : 8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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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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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십칠 년 전, 열한 살이었던 블랑이 공원에서 놀다 집에 돌아온 그날, 어머니의 병세가 매우 나빠진 그날, 아버지가 술에 젖어 들어온 그날이었다.

 

 그때에도 블랑은 활발한 성격과 훌륭한 미모, 풍부한 사교성 덕분에 동네에서 그녀를 모르는 남자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나쁘지 않은 부모님의 벌이로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라 앞으로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예정이었지만, 불행은 어머니가 병상에 드러누우시면서 시작됐다.

 

 부모님은 양쪽 다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어머니가 집안의 돈벌이를 거의 도맡아 왔다고 해도 될 정도로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벌이가 훨씬 더 좋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병상에 누우셨으니 어머니의 투병생활이 길어질수록 집의 가세 또한 기울어질 수 밖에 없었다.

 

 보다못한 아버지가 결국 하시는 일의 양을 배로 늘리셨지만, 날이갈수록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질은 나빠지고, 옷장에 걸린 옷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꾸역꾸역 두달이 흐르고 아버지는 더욱 무리를 해가며 돈벌이를 하였지만, 결국에는 지쳐 알코올 중독에 빠져버렸다. 평소 웃는 얼굴만 보이던 아버지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손찌검을 하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 하지만, 블랑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늘 술에 젖어 있는 동안은 그녀를 미친듯이 미워했지만, 정신이 멀쩡할 때엔 그 사실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블랑이 동네 아이들과 놀고 저녁에 들어온 날이었다. 아버지는 여느때처럼 술에 취해 TV 앞 나무 의자에 앉아 계셨고, 어머니도 안방 침대에 골골대며 누워계셨다.

 

 정신 없이 놀고와 배가 고팠던 블랑은 식탁에 놓여 있는 빵을 뜯어먹었다. 그런데 블랑은 그것을 한입 베어무는 순간 빵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최근에 들어서 아버지의 벌이로 먹을 수 있는 빵이라고는 스프에 찍어먹어야 겨우 씹을 수 있을 정도로 딱딱한 것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뜯어 먹고 있는 빵은 지금 형편으로써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질 좋은 빵이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먹는 맛있는 빵을 정신없이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리고, 스르륵 잠에 들면서 그녀의 행복은 막을 내렸다.

 

 그날따라 유난히 깊은 잠에 들지 못해 잠들어 있는 동안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잠든 그녀의 앞에서 ‘미안하다'라고 연신 사과하며 고개를 떨구는 아버지, 그 뒤에 나타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 흔들리는 차 안, 누군가에게 들려 어딘가로 옮겨지고, 그 안에서 들리우는 불행의 기척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한순간처럼 느껴졌다.

 

 잠시후 정신을 차린 블랑은 차 안에 있는 다른 아이들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는 자신이 팔려나갔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사형수들만으로 그득한 것처럼 차안의 적막한 분위기와 최근들어 더 나빠진 어머니의 병세, 영 시원찮은 아버지의 벌이, 그 벌이에 어울리지 않는 어제의 고급진 빵, 모든 것이 그녀가 팔렸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좁은 밴 안에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족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후련했다. 어머니의 치료비만으로도 아버지의 벌이로는 한계에 가까웠다. 그러니 아버지에게 빌붙어 있을 바엔 차라리 사라지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된다고 전부터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블랑은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팔려나가 무슨 일을 당할지 두려워서가 아닌, 다시는 가족을 못 보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펐다.

 

 마침내 밴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안에 있는 블랑과 다른 일곱 명의 아이들은 어둑한 건물 안으로 끌려갔다. 건물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나기도 했고, 오물 냄새가 나기도 했고, 혹은 둘이 합쳐진 끔찍하고도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도 했다. 수년 전에 음식을 배불리 먹고 쓰러져 죽은 거인의 부패한 뱃속에 들어온 듯 불쾌하고, 역겹고, 더러웠다.

 

 깊이, 더 깊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건물 안으로 두려움에 떨며 한참을 끌려가다 마침내 빛이 존재하는 공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우둔해 보일 정도로 뚱뚱한 남자부터 온 몸의 뼈마디가 다 보일 정도로 삐쩍 마른 건강미 없는 여인, 신경질적으로 시가를 빨아대는 잘 빼입은 신사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냥 사람이 팔려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제대로된 명칭으로 그곳은 노예를 경매하는 암시장이었다.

 

 블랑은 이곳에서 운명이 갈릴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잔뜩 긴장했다.

 

 앞의 네명이 팔려가고 마침내 블랑의 바로 앞 순서였던 여자아이도 목에 개목줄이 걸리며 탐욕스럽게 생긴 뚱뚱한 남자에게 질질 끌려갔다. 블랑은 마침내 자신의 차례가 되어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는 경매장의 중앙에 섰다.

 

 뒤편에서 힐끗 본 것보다 훨씬 협소한 공간이었다. 빙 둘러 주변에 앉아 있는 구매자들 한명한명의 얼굴이 전부 뚜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 거의 전부가 블랑을 탐내고 있다는 것을 표정에 보였다. 미인데에다 밝은 인상의 어린 여자아이. 덧붙여 금발. 상품성으로는 최고였으리라.

 

 1000유로, 2000유로. 그녀의 몸값은 거침없이 올라갔다. 갈 데까지 간 마지막 두 신사의 치열한 경쟁 끝에 찌그러진 중절모를 쓴 땅딸막한 남자가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고, 블랑은 그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는 뒷골목에서 제법 유명한 서커스단의 단장이었다. 그는 블랑을 돈주고 구매하기는 했지만, 그 값만큼 일하고 난 후에는 그녀를 자유롭게 풀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서커스단에 합류시켰다.

 

 평소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손재주도 좋았던 블랑은 저글링부터 쟁반돌리기 까지 여러가지 간단한 기술들을 비교적 쉽게 배우고 익혔다.

 

 반년 정도만에 정식 단원 못지않은 실력을 키워낸 그녀에게 그는 점점더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쟁반 위에 불을 얹어서 돌려봐라, 곤봉 끝에 칼날을 달아서 저글링을 해봐라, 칼을 던져서 동료의 머리 위에 얹힌 사과를 맞혀봐라. 블랑은 겁도없이 그의 요구에 모두 응했고, 놀랍게도 실제로 이행한 결과는 늘 성공이었다.

 

 그럴수록 서커스단장의 기대는 더욱 커져 블랑을 정식 서커스 공연에 내보이고는 돌발 미션을 쥐여주기까지 했다. 신출내기인 그녀를 모두가 얕잡아 봤지만, 블랑은 그 난해한 미션들을 모조리 소화해내며 관객들의 환호성을 자아내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몇달 후, 뒷골목에서 제법 인기인이 된 블랑은 단내에서도 으뜸이 되었다. 그런데 블랑이 주역인 그녀의 다섯번째 공연에서 기어코 사고가 터졌다.

 

 단장은 그날에도 그녀에게 돌발 미션을 주었다. 미션의 내용은 ‘칼을 던져 코끼리 위의 단원이 들고 있는 수박에 꽂아라.’였다.

 

 과녁 앞 단원의 머리 위에 얹힌 귤을 단검으로 맞히는 미션도 소화해낸 전적이 있는 그녀에게 비교적 쉬운 미션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코끼리가 계속 움직여대는 탓에 난이도는 그것과 비슷하거나 더 어려운 정도였다. 블랑은 움직이는 물체를 맞춰본 적이 없었지만, 당시의 그녀는 오만하게도 자신감에 차있었다.

 

 블랑은 왼팔을 뻗어 잠시 포물선을 계산 하고는 힘껏 던졌다. 그리고, 던져진 그 칼은 수박을 들고있는 단원의 팔을 멋지게 끊어냈다.

 코끼리를 몰고 있던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등 위에서 떨어졌고, 기수를 잃은 코끼리는 날뛰었다. 팔이 끊어진 단원을 포함한 세명의 단원이 코끼리에 짓밟혀 희생당하였고, 그날부로 그녀의 찬란했던 명성은 바닥에 떨어졌다.

 

 화가 잔뜩난 단장은 그녀와의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다른 곳에 몰래 팔아 넘겼다. 당시 나이는 열 두 살로, 입단한지 약 일 년 반 정도 지난 상태였다.

 

 다음으로 팔려나간 곳은 스페인의 한 고급 바였다. 그곳은 어린 블랑에게 아빠뻘 되는 거물들의 접대를 시켰다. 다행히 그곳은 성접대가 이루어지는 곳은 아니였기에 팔려나간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취급을 받으면서 수준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이전 서커스단에서 배운 겸손의 중요성 또한 한 몫하여 그들이 아무리 예쁘다고 칭찬하고, 혹은 이유없이 욕을 하더라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블랑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의 일반 성인 여성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손님들에게 극진하다며 높이 평가받았다. 혜성처럼 등장한 그녀의 존재에 실제로 발걸음을 옮기는 손님의 수가 늘어나기도했다. 그렇게 무난한게 이 년 정도 그곳에서 정을 들여가며 일을 하였지만, 쫓겨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루는 방문객들 중 감기에 걸린 사람에게 전염되어 고열이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팔려온 것이 아니였기에 휴식이 자유로웠지만 블랑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날 점주가 자리를 비운 탓에 그녀는 쉬지 못하고 일을 하였다.

 

 고열에 비틀거리던 블랑은 결국 뜨거운 차를 옮기는 도중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어두컴컴한 차 안이었다. 블랑의 손과 발, 입 어디하나 구속된 부분 없이 모두 자유로웠는데도 운전석은 막혀 있지 않았다.

 

 블랑은 벌떡 일어나 어디로 가는 것인지 검은 양복을 차려 입고, 선글라스 낀 근육질의 운전자에게 물었다. 그의 차림은 옛 집에서 자신을 끌고 간 남자들이 생각나는 차림이었다.

 

 정장의 말로는 블랑이 쓰러지면서 차를 손님에게 쏟았고, 그 손님은 인신매매업계 거물이었다. 그는 지금 왼다리의 반 이상이 삼 도 화상을 입어 치료 중이며, 점주가 그에게 자신을 넘겼다는 것까지 모두 들은 블랑은 입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블랑은 다시 정장에게 물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사실 비밀로 해야하는 내용이었겠지만, 정장은 온통 사막 뿐인 바깥을 보고는 도착지가 머지 않았는지 그냥 알려주었다.

 

 ‘넌 지뢰제거반이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직후 블랑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사건이 벌어진 날의 고열 속에 흐릿한 기억을 잠시 뒤적거렸다.

 

 한참을 고뇌하던 블랑은 쓰러지기 전에 차를 서빙하기 위해 들어갔던 방 안의 사람들이 지뢰 제거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블랑은 ‘아!’하고 한마디 뱉었지만, 자세한 내용을 듣기도 전에 쓰러진 탓에 그닥 도움되는 기억은 아니였다.

 

 잠시 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는지 차가 멈추었고, 양복을 입은 남자는 황폐한 사막 한가운데에 블랑을 내려주고선 그냥 돌아가버렸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도 없었다. 사막에 홀로 버려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저쪽 언덕 너머에서 군용 헬멧을 쓴 키 큰 군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잠시 살펴보더니 이내 그녀를 데려갔다.

 

 낮은 모래 언덕 하나를 건너면서 블랑은 이내 그곳이 사막이 아닌 드넓은 해변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해변 앞에 몸에 맞지도 않는 사이즈의 군복을 입은 어린 아이들이 약 스무 명 정도 나열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군인은 발을 멈춘 블랑을 재촉하며 그리로 데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블랑은 제법 지위가 있어보이는 군인에게서 즉시 군복을 받아들고 지시대로 막사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막사에서 나온 다음은 짧은 설명이 이어졌다.

 

 ‘기어다니면서 쇠막대로 바닥을 비스듬히 찔러보고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 모양에 맞춰 주변을 파내고, 지뢰의 뚜껑을 열어 폭약을 꺼내 통에 보관할 것’

 

 그리고는 즉시 세번의 모의 훈련을 거쳤다.

 

 쇠막대로 바닥을 쿡쿡 찌르며 기어다니다가 걸리는 것이 있으면 조심스럽게 파내고, 뚜껑을 열어 폭약을 꺼내 통에 담았다.

 

 서커스에서 고난이도 묘기를 펼칠만큼 섬세하고도 노련한 손놀림을 가진 그녀에게 지뢰제거는 제법 쉬운 일이었다. 단지 일의 위험도가 다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을정도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감독을 보던 조교는 그녀가 노련하고도 신속하게 모형지뢰를 찾아 제거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상관에게 귀띔을 하였다. 그로부터 잠시후 조교의 상관이 다가오더니 블랑을 즉시 실전에 투입하였다.

 

 블랑은 처음 팔려나간 이후 무심을 유지한 채 삼 년을 살아왔지만, 지뢰가 가득한 뙤약볕 밑의 해변에 엎드리는 순간 그 동안의 잃어버린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조개 껍질이 살을 긁고,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쇠막대기가 바닥을 찌르는 소리만이 쿠석쿠석하고 미련하게 퍼지고 있었으며,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모래와 먼지가 코와 입을 들낙거렸다. 숨쉬기도 힘든 이 상태로 약 4시간 정도 지뢰를 찾아 없애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고통스러웠다. 처음에는.

 

 블랑은 꾸역꾸역 지뢰제거일만 삼 년을 하였다. 그녀는 세 곳의 해변을 이동하여 지뢰를 제거하였으며, 그동안 다양한 신입들이 들어왔고, 또 죽어나갔다.

 

 개중에 어떤 녀석은 무식하게 삽질하듯 지뢰를 퍼내다가 세 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고, 어떤 녀석은 도망을 치다 지뢰를 밟고 폭사하기도 하였고, 어떤 녀석은 꼼수를 부리다가 해체도중 지뢰가 터지기도 하였으며, 어떤 녀석은 일사병에 쓰러져 죽기도하였다.

 

 그러나 블랑은 이리저리 팔리고, 넘겨지는 순간마다 지혜라는 거대한 재산을 굴려나가며 지뢰제거라는 위험한 일을 여태까지 하면서도 살아남았다. 서커스를 하며 노련함과 과감함을, 쫓겨나면서 겸손을 배웠고, 바에서 윗사람을 대하는 법과 깔끔한 일처리를, 쓰러지면서 몸이 안 좋은 날은 더 큰 불상사를 내기전에 미리 알려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지뢰제거를 할 때에도 이 모든 배움을 활용했다. 노련함과 과감함으로 신속하게, 정확하게 삼 년 동안 몇 만개의 지뢰를 제거하였지만, 절대 그것을 자만하거나 지뢰제거 작업을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또 몸이 도저히 아픈 날에는 군인들에게 잘 굽실거리며 상태를 설명하고는 종종 쉬기도 하였다.

 

 팔려온 주제에 쉴 권리가 어디있냐 싶겠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블랑은 인재상이나 다름 없었다. 남들은 삼십 분에 걸쳐 제거할 지뢰를 십오 분만에 제거하는 그런 인재. 순식간에 일을 처리하는 블랑이 그들의 눈에는 마냥 예뻤을 것이리라. 그 과정에서 블랑은 한 가지를 더 배웠다, 신뢰는 싸게 먹힌다는 사실을.

 

 어느날 군인들의 우두머리가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몰래 그녀를 자신의 막사로 불러들였다. 블랑은 삼 년 동안 개인적으로 자신을 막사에 불러들인 적이 없었던 그의 돌발행동에 덜컥 겁이났지만, 이 잔혹한 해변 내에서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그녀는 밤중에 우두머리의 개인용 막사로 들어갔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다행이 그는 굵직한 시가를 빨면서 자신의 과거를 들려줄 뿐이었다.

 

 우두머리의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인이었고, 어머니는 아랍계열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고 돌아가시고 몇년뒤 그는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었고, 몇번의 진급 후에 그는 지뢰 제거 감독관을 맡고 싶다고 청원하였다. 그의 청원은 받아들여지고 마침 공석이었던 이곳에 파견되어 칠 년 째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블랑은 그가 왜 그렇게 지뢰에 집착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다. 어머니도 지뢰와 악연이 있으셨던 것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목구멍을 꾹 틀어막고 참았다.

 

 그는 한참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는 본론을 말해주었다. 열심히 지뢰를 제거하는 블랑의 모습이 자신의 아버지의 한을 대신 풀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이제 삼 년을 일했고, 그녀를 사들인 값은 이미 먼 예전에 치뤘으니 자신의 인맥을 통해 한가지 길을 제시해 주겠다 말했다.

 

 그리고, 그날 제시된 길이 지금의 듀마르트와 잇게 해준 길이었다.

 

 “난 아직도 그 사람한테 감사하고 있어. 비록 삼 년간 지옥을 맛보여주긴 했지만, 그 사람덕에 널 만났잖아?”

 

 블랑은 목메이는 소리로 듀마르트에게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블랑을 꼬옥 껴안아 주었다.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품이 너무도 편안하게 느껴져 가만히 있었다.

 

 듀마르트의 침묵이 이어질수록 블랑은 점점 목구멍을 타고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토할 것 같은 역함이 아닌 치솟는 감정의 여운이었다. 육 년 간의 긴 여정 끝에 도착한 따뜻한 곳에서 또 사 년을 일하면서 만난 첫사랑, 그리고 그로부터 칠 년이나 지나고서야 겨우 그의 품 속에 자신이 안겨 있다는 것을 떠올리니 울컥하는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참아야해. 여기서 내가 울면 안되지. 듀마르트가 아직 아무 이야기도 안 해줬는데, 혼자 제 말만 지껄이고 혼자 짜는건 꼴사나운 짓이야.’

 

 서커스단에서도 울지 않았고, 바에서도 울지 않았고, 험악한 지뢰밭 위에서도 울지 않은 그녀였다. 수년간 무심을 유지해 왔고, 어떠한 불만도 후회도 없이 앞만 보며 걸어왔다. 그동안 강하게 굳힌 마음이 이렇게 허무하게 흐트러지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듀마르트의 다음 말에 블랑은 안심하고 울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어서와, 르미데안느, 네가 있을 곳은 여기니까 편하게 울어도 돼.”

 

 듀마르트는 떨리는 블랑의 몸을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고는 양나빈의 마음에 깊게 공감하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곳에서 그 육 년 간의 지옥 같았던 나날들과 그것을 또 버텨온 자신을 되돌아보며, 힘들었던 일들을 살살 떠올렸다. 서커스단에서 칼 달린 곤봉에 손가죽이 찢어졌지만 이를 악물고 공연을 하였던 것부터 바에서 손님에게 엉덩이를 만져졌을 때와 지뢰밭에서 지뢰를 해체하던 바로 옆 라인의 친구가 산산조각이 났을 때, 그런 아픔의 방울이 하나하나 터지면서 마음 속에 맺힌 수많은 고통을 쏟아내었다. 하나 둘 떨어지는 잔여물은 모조리 눈꽃처럼 흩날려 눈물의 바다에 실려 흘러갔다.

 

 그날은 블랑 자신의 인생에서 그녀가 가장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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