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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Netwalker
작가 : HudmentJhinRaker
작품등록일 : 2019.9.6

프로급 마피아 조직원 르미데안느 드 블랑. 사이버 해킹 보안국 특수 요원 고준혁. 세계적인 대기업 제타 그룹의 회장 최문호. 가족을 잃고 사이버 킬러가 된 소년 서지환. 깊은 곳에서 부터 꼬이기 시작한 그들간의 과거가 기어코 실체를 드러낸다.

 
NetWalker - 8
작성일 : 19-10-14 21:32     조회 : 203     추천 : 0     분량 : 1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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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호는 소년에게 로그아웃하는 방법을 알려주고는 꾸벅 인사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내 허리를 숙인 그의 몸은 푸른 빛의 결정체가 되어 하늘에 생긴 푸른 관으로 빨려들어갔다.

 

 ‘접속 종료 현상도 깔끔하군. 미리 감염시켜두는 것만으로도 이리 큰 적응차가 생기다니.’

 

 최문호는 처음 사이버 세계에 녹아들면서 고문보다 끔찍한 현상을 겪었다. 파일이 일그러져 머리가 발뒤꿈치에 붙은 채 업데이트 되기도 했고, 오감에 혼선이 생겨 코로 숨을 쉴 때마다 손바닥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에반해 방금 그 소년은 어떤 이상도 일절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고, 멀미도없이 멀쩡하게 전송되어왔다. 게다가 그는 완전한 접속 종료에 걸리는 시간이 다섯 시간 이상 걸리는 문호와는 달리 단 오 초도 안 걸리고 즉시 접속 종료 현상을 마쳤다. 그것도 깔끔하게, 아름답게.

 

 “허허, 참. 나도 일찍이 숙주화를 마치고 코드화 과정에 돌입 할 걸 그랬군.”

 

 코드화 중 내용이 꼬여 손금하나 없는 손을 내려다 보았다.

 

 감염은 리얼리티 드롭머신 연구와 동시에 진행했던 전자파 증폭 바이러스를 뜻하는 것이었다. 전자파 증폭 바이러스는 전자파에 섞여들어 환각과 환청, 어지럼증을 미미하게 유발하는 치명적이지는 않은 바이러스였다.

 

 문호는 제일 우수한 연구팀에게 제타늄의 일부를 건네면서 위와 같은 내용의 바이러스를 만들라 요청했을 뿐이기에 이게 어떤방식으로 실현된 것인지는 바이러스 연구에 참여한 이들만이 알고 있었다.

 

 소스 제공자 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극비밀이라는 장막을 펼친채 만들어진 이 바이러스는 그를 사이버상의 첫번째 주민이자 신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는 현실에서도 유효한 이야기였다.

 

 문호의 메인 컴퓨터에 연결된 리얼리티 드롭 머신은 이 바이러스의 프로그램 샘플에 접근 할 수 있는 관리자 권한으로 접속이 되어있어 그의 네트워크 망에서 연결된 전자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전자파량을 증폭시켜 바이러스를 한순간 퍼뜨리는 것이 가능케되어 있었다.

 

 범위 한도는 그의 네트워크 망 내 뿐이라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으나 그의 메인 컴퓨터는 제타 그룹의 메인 컴퓨터이기에 그의 네트워크 망의 한도는 사실상 인터넷이 보급된 국가들 전부나 다름 없었다. 그 말은 즉, 전파가 닿는 곳이라면 어느 누구든 바이러스에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바이러스는 감염도중 숙주의 면역력이나 물리적인 무언가로 인해 방해를 받지 않는 특수한 종으로, 감염을 막을 수는 없으며 오로지 숙주의 정신력에 준하여 조종 가능한 그 정도가 정해지는 것이 전부였다.

 

 바이러스에 대해 아이디어를 낸 것은 문호 그 자신이었으나 만들어낸 것은 그가 아니었기에 그도 처음에는 부작용에 확신이 없어 다소 두려웠다. 그러나 그 비서 나부랭이가 슬쩍 선물해주고 간 마약으로 시험해본 결과 마약보다는 뇌손상이 덜한 바이러스가 자신에게 무해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었고, 용감하게 첫 실험체로써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얼굴에 옅은 조소를 띄우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안정성을 확인한 문호는 설렘과 긴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장희의 아들을 감염시켰다. 첫 감염시에는 신체에서 내보이는 거부 반응으로써 약간의 울렁증을 동반한다는 것으로 그는 알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엘리베이터에 탄 비장한 표정의 소년은 아무런 신호도 보내오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을 가진 소년의 모습이 겹쳐 보일 뿐이었다.

 

 어째서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는 소년에게서 연민이 느껴지는 것인지 문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마음과 과거 이론으로써는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최문호라는 한 명의 자아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소년을 보는 관점과 다른 누군가가 소년을 보는 관점이 공존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불가해한 현상에 당황한 문호는 제법 긴 시간 혼란을 겪었다. 하나의 자아, 두 개의 관점, 두 개의 감정, 분노와 슬픔. 그는 소년이 70층까지 다다를 때 까지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었다.

 

 먼저 전자파 증폭 바이러스는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즉, 감염은 이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하는 것이고, 다운로드를 마치면 모두 메인 컴퓨터, 문호의 뇌와 연결된다는 것이며 연결 매체는 전자파이다. 게다가 현재 그의 뇌는 프로그램 서버 관리자 권한이 할당되어 있는 메인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프로그램 서버의 심연 끝까지 뜯어 볼 수 있었다.

 

 다시말해 이 바이러스가 숙주의 뇌에 다운로드 되어지면 삽시간에 숙주의 정보를 데이터화하여 전자파를 통해 그 데이터를 서버, 메인컴퓨터로 날려보낸다. 그리고 관리자 권한을 가진 문호는 프로그램 서버 파일을 통해 그 숙주의 모든 데이터를 열람할 수 있는 것이다.

 

 문호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데이터를 열람하여 그의 감정을 함께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믿기힘든 가설이기는 하였으나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유일한 가설이었다.

 

 그리하여 문호는 그의 안에서 느낀 잠재적인 분노를 일깨워주기 위해 충격 요법이랍시고 전과 같은 환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다만 그것은 뇌에 손상을 입힐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짓이었고, 그만큼 무모한 짓이었다. 다행히 운좋게도 그는 잘 버텨내 주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런 위험한 짓을 왜 저질렀는지 문호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어쩌면 그 소년의 의지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서장희의 아들이니까 그와 같은 열정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건가?”

 

 그는 가렵지도 않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총명함이 묻어나오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안 봐도 뻔했으나 그는 이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안 돌아볼래야 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역시나 그곳에는 서장희가 밝은 미소와 함께 서 있었다. 문호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뭉클했다.

 

 문호가 향수에 젖어갈 무렵 서장희가 물었다.

 

 “박사님은 이 세계로 넘어 오면서 자신의 성격이 바뀐 이유를 아십니까?”

 

 “내 성격이 바뀌었다고?”

 

 뜬금없는 그의 말에 문호는 방금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것 같지는 않네만?”

 

 문호가 아리송 하다는듯 말했다.

 

 “아니요, 바뀌셨습니다.”

 

 서장희가 고개를 저으며 쐐기를 박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면이 바뀌었다는겐가?”

 

 “글쎄요… 저도 정확히 뭐라고 짚어드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미묘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느껴져요. 뭔가 변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방금 말씀드린 이 세계에 들어오면서 바뀌신 것 같다는 말도 확신이 들지 않네요. 최근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지, 혹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제가 오 년만에 보는 박사님의 모습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어색함일지도 모르겠네요.”

 

 늘 확답을 내놓던 서장희의 그 답지 않은 갈팡질팡한 대답에 문호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치면 나도 자네가 반갑기는 하지만, 조금 낯설구먼. 물질 안에서 성격도 변화하고 있던게냐?”

 

 “그걸 어떻게 아셨죠?”

 

 서장희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최문호 회장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저 얼굴을 보는 것이 몇년만인지 모르겠군.’

 

 지금 보인 그의 표정은 문호의 아이디어를 들을 때마다 보였던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며 자신을 치켜세워주던 과거의 그를 떠올렸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는거죠?”

 

 흥분한 서장희가 눈을 크게 뜨고 최문호에게 물었다.

 

 “허허, 이정도야 뭐, 별 것 아니라네. 단지 책에서 본 걸 토대로 한 번 떠올려 본 것 뿐이니까. 그러는 자네도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잖나? 나는 그 편이 더 훌륭하다고 보네만. '노망난 노인네의 헛소리를 현실로 만든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나.”

 

 그는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 말씀하시는 박사님이야말로 아이디어만 내도 그 결과물이 절로 나오는 연구소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시잖아요.”

 

 그가 싱긋 웃어보였다.

 

 “자네는 말이야… 똑똑한건 좋은데 대화할 때마다 의도치 않게 남을 상처준다네..”

 

 “제가 말실수라도 했나요?”

 

 서장희가 깜짝놀라 물었다.

 

 “아니, 됐다. 그다지 큰 상처는 아니였고, 내 사정이 우라질 것 같을 뿐인걸 누굴 탓하겠나. 난 괜찮으니 신경쓰지 말게나.”

 

 “그치만…”

 

 “괜찮대도. 그나저나 얼른 내 아이디어를 모두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

 

 문호의 말을 들은 서장희는 ‘아!’ 하더니 급히 방을 나가 동료들에게로 달려갔다.

 

 그 시절의 서장희에게서는 끌어오르는 열정과 문호를 향한 확고한 존경심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사이버상에서 재회한 지금의 그에게서는 일절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열정도, 존경심도. 긴 세월에 시간과 함께 풍화된 것처럼.

 

 “박사님도 피곤하실테니 오늘은 이만 주무시죠.”

 

 변해버린 지금의 서장희가 말했다.

 

 “그래야지. 이 세계로 건너오면 항상 충분한 수면 뒤의 네 시간 이후처럼 쌩쌩할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보군.”

 

 “여기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점차 피로는 사라지실겁니다. 지금은 정신적 피로가 많이 쌓여 있을 뿐이겠지요.”

 

 그의 말에 최문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저쪽에서도 피곤했던 적이 없었던 내가 이제와서 피로를 느낀다니 영 어색스럽구먼.”

 

 이 말을 끝으로 문호는 드넓은 초원의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어디 있는지 모를 새의 지저귐, 살랑살랑 목을 휘감는 바람, 달달한 봄의 잔디 향, 하늘을 수놓는 태양빛, 그리고 끓어오르는 생명의 기운이 잠을 방해했지만, 피로했던 그는 기분좋게 잠에 들었다.

 

 ‘현실의 뒤안길도 나쁘지 않구먼…’

 

 이 생각의 뒤에 누군가 '아닐걸?’ 하고 토를 다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피로감에서 온 환청이었는지 서장희의 참견이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블랑은 보스가 내어준 방 침대의 이불 속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미용인가 건강인가 어디에 좋다는 정보를 들은 기억이 있어 벗고 자는 습관을 들여놓았더니 무언가 걸치고 있으면, 불편해서 통 잠이 오질않았다. 그덕에 남자와 공동임무로 외박을 하게되면 그녀의 습관탓에 꼭 트윈침대 방이 아닌 작은 두 개의 방을 빌려야했다.

 

 블랑은 목 끝까지 이불을 덮고 있자니 낮의 일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사 년 간의 심리전 끝에 본직이 까발려지고, 시원찮은 늙은이에게 농락당하고, 결국은 내쫓기는 굴욕적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머릿속에서 그 기억의 다섯번째 반복 되어갈 무렵 블랑은 답답함에 숨이막혀 이불을 까뒤집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문하나 없이 아담한 방 안은 어둠 속에 고즈넉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녀는 혼자 흥분에 붕 떠올라 방 안에서 홀로 발광하는 야광처럼 어둠에 어우러지지 못했다.

 

 “영악한 늙은이! 이제는 꿈에라도 나타나시겠다? 잘 됐네, 나오라 그래! 아주 그 여리여리한 목을 그냥!”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부러뜨리는 시늉을 했다. 그때였다.

 

 끼익 하고 신경이 곤두서는 소리와 함께 방 문이 열렸다. 문너머에는 가운만 걸친 듀마르트가 들어오고 있었다. 블랑은 보기드문 그의 모습을 넋놓고 쳐다보다가 그가 전등을 키려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에게 소리를 쳤다. 하지만, 듀마르트는 그녀의 외침에 놀라 오히려 움찔거림과 동시에 전등을 덜컥 켜버렸다.

 

 가슴을 다 드러낸 채 앉아 있는 블랑과 듀마르트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 몸을 숨겼다.

 

 “어떡해, 나 이제 시집 못가"

 

 블랑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 이럴 때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임무에서 만났던 녀석이 가르쳐줬는데…”

 

 듀마르트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 그래, 기억났어. 잘 먹었습니다.”

 

 블랑은 그의 얼빠진 농담에 풋하고 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하지만,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그를 째려보는 시늉을 했다.

 

 “미안, 농담이야.”

 

 듀마르트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 생각하였는지 사과하며 말했다.

 

 “그런데 시집 못 간다니? 너 나한테 시집 올 거 아니였냐?”

 

 “그러니까 결혼까지는 아직 생각 안 했다고요, 야망 덩어리 아저씨.”

 

 블랑의 말에 그는 시무룩해했다. 적들에겐 공포의 살육마나 다름 없는 그가 자신의 앞에서는 꾸중을 듣는 초등학생처럼 한없이 작아진다는 사실이 제법 재미있었다.

 

 “뭐, 지금 당장 고백을 받아준다면 결혼도 고려해볼 수 있지.”

 

 블랑의 튕기는 듯한 말투에 그는 저것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빨리 안 정하면 기회 날아갑니다? 삼, 이, 일…”

 

 블랑이 그를 재촉했다.

 

 “그치만, 일에 방해가 되는걸. 결혼은 은퇴하고 나서 하자, 응?”

 

 “또 그소리.”

 

 듀마르트는 주로 선봉에서 적을 섬멸하는 역할을 맡지만, 본성은 겁쟁이였다. 블랑도 처음에는 그가 단순한 워커홀릭인 줄만 알았으나 실상은 달랐다. 선두에 서는 그의 역할은 몰래 잡임해 공적인 지위를 얻고 타겟을 암살하는 블랑의 역할보다 몇배는 더 위험한 일이기에 사귀거나 결혼을 하면, 자신이 죽었을 때 블랑이 매우 슬퍼할 것이 걱정되어 그러는 것이었다.

 

 블랑은 그의 생각을 예전부터 알고 한 번은 누구하나 죽으면 크게 슬플만큼 이미 다들 친숙하기 때문에 자신이랑 사귀어도 그게 그거라고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화를 버럭내며 절대 그렇지 않다고 면박을 줄 뿐이었다.

 

 “보스가 방을 잘못 준 것 같으니까 가서 물어볼게. 잘 자.”

 

 “잠깐만!”

 

 블랑은 이불을 뒤집으며 그의 뒤통수에 소리쳤다. 가슴골과 어깨가 다 드러났지만,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다.

 

 “그… 오늘은 여기서 같이자자… 그러니까 내 말은, 눈 감으면 자꾸 안 좋은 기억이 떠다니니까 수다라도 떨다 자자고.”

 

 ‘말했다!’

 

 언제 한 번 그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이 소원이었던 블랑은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뒤를 돌아본 듀마르트는 놀란 얼굴로 눈을 몇 번 끔뻑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블랑, 사귀는 거랑 결혼하는 거랑 애를 가지는 거랑 별개로 생각하면 안되지.”

 

 블랑은 순간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다가 그의 뜨거운 시선을 보고는 뜻을 알아차렸다.

 

 “그런거 아니거든! 오늘 기분도 적적하니까 그냥 옆에 있어달라는 소리였거든요! 이 욕정왕 아저씨야!”

 

 블랑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를 쳤다. 그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감돌았다.

 

 “네, 죄송합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지금 침대로 들어가?”

 

 그가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 왔다.

 

 “잠깐만! 속옷은 입어야지! 뒤돌아 서 있어봐!”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즉시 벽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블랑은 슬며시 이불에서 나와 바닥에 널부러진 옷가지들 사이에서 속옷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속옷이 보이지 않았다.

 

 “저… 듀마르트씨?”

 

 잠시 기억을 더듬고는 침대 너머에 서 있는 듀마르트 쪽에 속옷을 벗어 던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블랑은 잠시 망설이다 그를 불렀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제법 요염하게 들렸는지 그의 어깨가 한순간 움찔거렸다. 블랑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장난끼가 생겨났지만,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포기했다.

 

 “그쪽에 제 속옷이 있는 것 같은데요?”

 

 블랑은 수줍게 말했다.

 

 듀마르트는 덤덤하게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허리를 숙여 하얀 레이스가 달린 속옷을 집어올려 보였다.

 

 ‘왜 하필 난 오늘 저런 걸 입고 왔지?’

 

 듀마르트는 속옷을 쳐다도 보지 않고 뒤로 휙 던져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그녀는 얼굴로 속옷을 받았다.

 

 “이씨 똑바로 안 줄래?”

 

 “미안.”

 

 잠시 궁시렁 거리던 블랑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레이스가 많이 달린 속옷을 입었다. 단지 속옷을 입는 것만으로 큰 배덕감이 느껴졌다. '어째서 자신은 하필 오늘 이런 공주님 같은 속옷을 입은 것일까' 하고.

 

 “그… 위쪽 것도 좀 던져 주실래요?”

 

 이번에도 듀마르트는 같은 방식으로 찾아내 집어 올리고는 지체없이 휙 던져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블랑은 망부석처럼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착용했다.

 

 ‘한 번쯤은 힐끔 돌아봐도 용서해줄텐데.’

 

 블랑은 그에게 텔레파시라도 보내듯 그 말을 떠올렸지만, 당연히 전해질리 없었다. 속옷을 다 입은 블랑은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기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듀마르트는 그녀가 침대에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듣고는 마침내 뒤를 돌았다. 놀랍게도 평소에는 창백하기만 한 그의 얼굴이 제법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를 본 블랑도 괜스레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불끄고 올게.”

 

 잠시 뜨거운 시선을 교환한 두사람 중 듀마르트쪽이 먼저 문으로 다가가 소등했다.

 

 방 안은 다시 칠흑같은 어둠에 감싸였지만 침대 옆으로 들어오는 다른사람의 기척이 있으니 적막하기만 했던 아까와는 달리 만족스러운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혼자 침대에 드는 블랑은 듀마르트가 걸치고 있는 가운이 살결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숨이 조금씩 막힐 때마다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는 것만으로 심장은 오두방정을 떨었고, 그럴수록 마음은 한 결 편안해졌다. 어둠속에서 찾은 단 하나의 여명을 안고 있는 듯 따스했다.

 

 블랑은 무심코 가운 속을 파고들어 그의 두드러지는 뼈와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가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전해졌다. 팔뚝을 통해서 그의 심장또한 미친듯이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기쁨. 그것만이 하나의 결정체처럼 마음에 자리잡았다. 자신이 두근거리고 있는 만큼 그 또한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랑은 몸을 틀어 그를 한쪽 팔로 꼬옥 껴안고 가슴에 머리를 대었다.

 

 낮에 그를 안았을 때처럼 때처럼 과거의 기억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여태까지 살아온 시간 중 가장 마음을 울렸던 순간이자 기억. 이따금씩 그날을 떠올릴 때면 피에 흠뻑젖은 그의 모습은 완전히 배제된 채 멋지게 블랑을 구해내는 왕자님으로 미화되곤 했다.

 

 그 뿐만이 아닌 그날 방에 널부러진 시체들도, 딱딱한 침대도, 싸늘한 방 온도도, 어두컴컴한 창문 너머도, 험악한 무기들도 모두 향기로운 꽃으로, 포근한 안락의자로, 상쾌한 봄의 기운으로, 따사로운 햇살로, 그리고 행복한 허수아비들로 가득한 고향의 시골 동네처럼 미화되었다.

 

 어느새 그녀는 그리운 고향, 프랑스의 평화로운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블랑에게 듀마르트의 품 속은 이렇게 모든 것을 잊고 좋은 기억들을 회상할 수 있을 만큼 안락한 곳이었다.

 

 블랑은 이내 그리운 추억 속의 향수에 빠져 그 평화로운 나날로 돌아갔으면 하는 나약한 마음이 들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아버지가 술기운에 빚대신 자신을 팔아넘기지만 않았어도, 어머니가 돌연 병상에 드러눕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조금만 더 어른스러웠어도하는 안타까움이 덜컥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블랑은 행복했던 과거의 회상은 늘 아픔과 함께 막을 내린다는 것을 잊은 채 기분에 휩쓸려 그나날들을 떠올린 자신을 원망했다. 그녀의 몸이 폭풍우의 들창처럼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픈 기억 속에서 길을 헤매이는 어린 소녀처럼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블랑은 더이상 괴로움이 싫었다. 괴롭기 싫었다. 괴로워지는 게 싫었다. 괴로웠던 것도 싫었다. 눈물이 흘렀다.

 

 비통의 그늘 밑에서 벌벌떨고 있는 그때 누군가가 가느다란 팔로 그녀를 감싸주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블랑은 고개를 들어 듀마르트를 올려다 보았다. 어둠속에서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 또한 자신과 함께 같은 슬픔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네게 어떤 과거가 짊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할 줄은 알아. 나 또한 그런 아픔을 겪었고, 우리 조직의 프로들은 그런 사연이 하나씩 있지. 너한테는 비밀로 하려 했지만, 양나빈과 공동임무에 나갔을 때 한 침대에서 잔 적이 있다.”

 

 “뭐어?”

 

 정신이 퍼뜩 든 블랑은 그의 얇은 팔뚝의 가죽을 손톱으로 꼬집었다.

 

 “아니 잠깐만 들어봐.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겠다만, 그런건 아니야. 성적인 접촉은 없었어.”

 

 “조직의 명예에 맹세코?”

 

 “맹세한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거짓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 보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영원히 식물인간으로 살기로하지.”

 그의 말에 그나마 화를 가라앉힌 블랑은 투덜거리며 일단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듀마르트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을 때 양나빈이 내 침대에 기어들어오더군. 나는 그 기척에 눈을 떴고, 그녀를 내려다봤지. 처음부터 들킬 작정으로 들어온 것이었는지 나랑 눈을 마주치고도 별로 놀란 것 같지는 않더군. 아, 옷은 똑바로 입고 있었다. 지금 너처럼 속옷만 입고 있었던 것도, 얇게 걸치고 있었던 것도 아닌 꽁꽁 싸맨 차림이었다. 구두까지 신고 있었지.”

 

 “자세히도 보셨네? 아쉬우셨겠어?”

 

 “크흠, 어쨌든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지. 그러자 양나빈이 내게 역으로 물었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그저 돈벌이 좋고 대우도 괜찮은, 그러나 조금은 더러운 일이라고 답했지. 그런데 갑자기 막 울더라고. 내가 뭔가 실수했나 싶어 사과하려 했더니 갑자기 자기 이야기를 막 하던데, 들어보니까 모두가 그렇듯 그녀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었어. 힘든 시기에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부터 뒷골목에서 더러운 일이나 하며 입에 풀칠하고 살다가 어느날 납치되서 쓸만큼 쓰여지고 길바닥에 버려진 자신이 보스에게 주워진 것까지 다 말해줬지.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왜 하냐고 물었어. 그녀가 말하길 골목에서 생포해야할 타겟과 마주쳤는데 자신의 과거와 너무 비슷한 모습의 여자가 인질로 잡혀 있었다더군. 너도 알다시피 양나빈은 너처럼 가녀린 여자지만, 프론트 슈터인 나보다 더 앞에서 진입하는 프론트 어태커가 주요 역할이다보니 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타겟과 마주쳤던거지.”

 

 “듀마르트.”

 

 “그리고… 응?”

 

 블랑이 한숨을 쉬었다.

 

 “간추려서 말해봐.”

 

 “이미 다 끝나가.”

 

 “그래? 계속 말해.”

 

 구는 잠시 숨을 돌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일에 회유감이 들기 시작했더래. 인질로 잡힌 여자나 다름없었던 과거의 자신이 지금와서는 그녀를 보고도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고, 인질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타겟과 동류가 된 것 같다고, 복수라는 명목 하나만으로 시체들의 산 위에 선 자신이 너무나 두렵고 후회스럽다더라고.”

 

 “그래서 넌 뭐라고 답해줬어?”

 

 “’어쩌면 너는 네 말대로 복수라는 명목을 가지고 학살자라는 가죽을 뒤집어 쓴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봤을 때 너는 단지 총검을 든 가녀린 여인일 뿐이다.’ 라고 달래줬어.”

 

 “너 치곤 제법 멋진 소릴 해줬네?”

 

 “양나빈은 자기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고뇌한 것이었으니까 내가 관점에서의 그녀의 가치를 가져다 붙여준 것 뿐이야.”

 

 블랑은 ‘흐응’하고 호응했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어버렸어. 내 침대에서 한참을 울다가. 그게 다야. 너한테는 비밀로 하려했는데, 이렇게 되니까 말해야 할 것 같더라고.”

 

 “왜?”

 

 “넌 내가 지켜줘야하는 두번째 여자니까.”

 

 “에? 지금 고백한 거야?”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둠에 익숙해진 덕분에 그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듀마르트는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고백한 거지? 맞지? 그런거지? 야호 라고 외쳐도 괜찮은거지?”

 

 그는 신음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건 네 마음대로 생각하고, 이번에는 네 차례야. 왜 방금 눈물을 흘린건지. 내 비밀을 말해줬으니까 이제 네 비밀을 말해줘, 블랑.”

 

 기쁨도 잠시 그의 말을 듣고는 아픈 기억을 살며시 더듬기 시작했다. 과거, 지뢰 제거를 위해 뙤양볕 밑에서 사포같은 모래사장을 기어다니며 바닥을 더듬던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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