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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언하모닉 베네딕투스
작가 : 대홍수
작품등록일 : 2019.9.22

제국의 멸망 이후 120년. 전란 속에서 사람들은 황제의 귀환을 꿈꾼다.

 
EP.2 거북곰과 하디(7)
작성일 : 19-10-12 00:43     조회 : 210     추천 : 0     분량 : 8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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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그게 뭐가 문제야? 마을에는 지금 하디가 있어. 넌 못 봤지만 주리틀씨 한 마디에 거북곰이 모조리 도망쳤다고.”

 

 리운이 말했다. 리운 역시 힌돌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헐떡이는 참이었다.

 

 “네가 말했잖아. 마을을 지켜달라고 했다고. 굳이 찾아서 거북곰을 쓸어버리는 건 안 하겠지만 거북곰이 습격했는데 마을 사람들 다 죽게 두고 혼자서 살아남을 정도로 냉혈한 같지는 않았는데.”

 

 리운의 말에 힌돌이 속도를 늦췄다. 노아는 생각했다.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간 것처럼 소름이 돋는데 그 이유가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뭐가 이상하지?’

 

 노아는 생각을 정리했다.

 주리틀이 있으면 마을은 안전하다.

 아니다.

 

 노아는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

 주리틀이 마을을 지켜준다면 마을은 안전하다.

 주리틀이 마을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마을은 안전하지 않다.

 그렇다면 마을이 안전하지 않은 이유는 주리틀이 마을을 지켜주지 않기 때문인가?

 

 노아는 주리틀과 자신의 대화를 복기했다. 주리틀은 노아에게 호의를 보였다. 주리틀은 노아를 구해줬다. 주리틀은...... 그리고 나는......

 주리틀이 우연히 마을에 오지 않았다면?

 

 “맙소사.”

 “왜! 뭐! 왜! 또 뭐야! 뭐가 또 새로운 사실인데!”

 

 힌돌이 조바심이 나 외쳤다. 노아는 힌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득한 우주적 어지러움에 몸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 속에서 노아가 나직이 말했다.

 

 “주리틀은...... 나를 데리러 왔어요.”

 

 *****

 

 내린은 초랭이가 죽은 지 사흘째 되는 아침이 되는 날 마을 밖으로 나갔다. 내린의 손에는 아버지 몰래 꺼낸 활이 쥐어졌고, 등에는 화살 열두 자루가 담긴 전통이 걸려 있었다.

 마을에서 충분히 멀어진 내린은 화살을 꺼내 시위에 매겼다. 과녁 같은 건 없었다. 내린은 별다른 조준 없이 그저 힘껏 시위를 당기고 놓았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은 20여 미터 떨어진 나무에 박혔다. 내린은 다시 시위를 당겼다. 두 번째 화살은 그 옆의 나무에 박혔다. 내린은 다시 화살을 집었다.

 내린은 일곱 번째 화살을 잡았다. 마음속에 진 응어리가 너무 버거워 화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린은 팔을 물린 상태에서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거북곰의 머리를 밟고 소리를 지르던 초랭이를 떠올렸다.

 내린은 화살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 나를 구하고 싶으면 빨리 도망쳐서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했을 때 내린은 초랭이가 죽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끔찍한 모습에 결국 어른들은 내린의 눈을 가리고 초랭이의 시신을 보여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린은 도망쳤다.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포기하고 달렸다.

 

 내린은 숨이 거칠어지자 나무에 어깨를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굳어 내린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었다.

 내린은 눈물 대신 비명을 질러보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내린의 입 근처에서 맴돌 뿐이었다.

 

 “아, 아아......”

 

 비명보다는 넋두리에 가까운 무언가를 내보낸 내린은 입을 다물었다. 내린은 화살을 주워 일어났다.

 일곱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고 손을 놓으려던 내린은 팔 끝까지 시위를 당긴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소리...... 무슨 소리지?’

 

 팔이 저려 후들거리지만 내린은 손을 내릴 수가 없었다. 기묘한 공포심이 내린의 다리를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풀숲을 스치는 불길한 소리의 행진에 내린은 움직임을 멈춘 채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거북곰이다.’

 

 내린은 천천히 몸을 돌려 땅에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맡는 거북곰을 겨누었다. 하지만 내린은 시위를 놓을 수 없었다. 내린은 시위를 당긴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백여 마리의 거북곰이 마을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

 

 마을 앞에 도착한 노아는 백여 마리의 거북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을을 습격하는 동물들의 행동으로서는 터무니없이 비효율적인 모양새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저마다 활과 농기구를 들고 거북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마을에도 치명적인 피해를 주겠지만 거북곰은 몰살당할 것이었다.

 마을 안에서는 젊은이들이 창이나 무기로 쓸 수는 있을 법한 농기구들을 들고 거북곰과 대치하고 있었다. 검돌이 수백 미터 밖에서도 들릴 위협적인 고함을 질러댔다. 고함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맨정신을 유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지만, 거북곰의 공격을 막는 데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허공에 투명한 무언가에 걸터앉은 듯 앉은 주리틀이 다리를 휘적거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주리틀은 팔을 내려 공격을 명령하기 전 노아를 발견하고 들어 올린 손 그대로 흔들었다.

 

 “노아! 빨리 왔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리운이 주리틀에게 활을 겨누었다. 주리틀은 자신의 말을 끊은 리운을 불쾌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리운의 시위가 목에 감겼다.

 

 “한마디라도 더 하면 그대로 목이 날아갈 줄 알아.”

 

 당장이라도 목을 부러뜨릴 듯 파고드는 시위에 숨이 막힌 리운이 벌게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네 친구와 할 말이 있어. 그렇지? 박노아.”

 

 노아는 이를 악물었다.

 인간에게는 14개의 성씨가 있다. 하지만 각자의 성씨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같은 눈씨여도 사말은 약제사이고 파말은 사냥꾼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두 개의 성씨만은 예외가 된다. 하나는 태어나면서 암살자로 길러진 탐 가문이다. 다른 하나는......

 

 “오래 찾아다녔다. 박씨 제국의 핏줄. 수비대로 들어갔으니 찾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그건 120년 전에 사라진 제국의 이야기요. 지금 와서 그 성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힌돌이 놀란 얼굴로 자신의 등에 매달린 황족의 후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아가 한 번도 자신의 성을 공개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노아는 충격적인 비밀을 당연한 일상을 꺼내듯 말했다.

 

 “내 증조부도 귀족답게 살지 못했을 거요. 할머니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부모님은 산적들에게 살해당했소. 그것도 무슨 대단한 보석도 아니고 소 한 마리 때문에. 이제 와서 내가 박씨인 게 당신들에게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오.”

 

 주리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아는 그 이유를 짐작했다. 거북곰 무리가 노아를 바라보며 위협적으로 울었다.

 주리틀이 원한다면 밤중에 노아의 머리를 터뜨릴 수도 있었다. 아니, 거북곰을 통제할 수 있다면 그저 사흘 전에 거북곰과 싸울 때 구경만 하는 것으로 노아를 조용히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주리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주리틀의 행동으로 노아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총 3개였다.

 첫 번째, 주리틀은 노아를 죽일 생각은 없다. 오히려 살려두려고 한다.

 두 번째, 주리틀은 노아가 주리틀이 자신에게 호의적이라 믿게 만들고 싶어한다.

 세 번째......

 노아가 대답을 정했다.

 

 “지금 대륙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군요. 전국시대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제국을 재건하려는 자가 있어.”

 “‘자들’이다. 전쟁으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땅은 황폐해졌어. 사람들은 이제 전쟁을 멈추고 대홍수가 있기 이전의 제국 체제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황좌에 자기 궁둥이를 붙인 제국을 원하지.”

 “하지만 바로 자신이 앉기에는 명분이 부족하오. 그렇기에 자신이 앉기 전에 그 자리에 잠깐이나마 앉아서 의자를 따뜻하게 데워 줄 괜찮은 박씨 엉덩이를 찾고 있다는 거군.”

 

 주리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흥미 섞인 얼굴로 노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노아는 그게 긍정이라 생각하고 계속 말했다.

 

 “알아들었소. 나는 제국이 불타던 순간을 기억하오. 내 나이가 아직 삼십 줄인데 120년 전을 ‘기억’하는 건 웃기는 소리지. 내가 어릴 때 당신들은 내 가족들의 요청대로 내 머리를 헤집고 억지로 기억을 담았소. 내가 분노하길 원했겠지. 당신께서는 내가 제국이 무너져서 분노하고, 더 강한 제국을 건설하기를 원했겠지.”

 

 수많은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지거나 잊히지만, 황궁이 무너지며 사람들이 타죽는 그 광경만큼은 불티 하나하나, 검게 그을리는 인간 하나하나가 문신처럼 기억에 새겨진 채 지워지지 않았다.

 

 노아는 힌돌의 등에서 내려왔다. 다리의 상처가 쓰려 잠깐 비틀거린 노아는 곧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칼자루에 손을 댔다.

 

 “거북곰이 마을을 공격한 이유가 있었어. 마을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악화하면 나와 마을 사람들이 산을 떠날 거로 생각한 모양이오? 필요한 건 나뿐이니 다른 사람들이 죽어도 알 바 아니었겠고. 빛 가지고 장난질하는 것 이상의 볼거리를 보이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야. 짐승이라 해도 백여 마리를 상시 조종하고 있으려면 힘에 부칠 거요. 당신이 조종하고 있었으니 말 한마디에 도망치게 만들 수 있었겠지.”

 

 거북곰이 주리틀의 정신 조작 능력을 과시하듯 일제히 짧게 울었다.

 주리틀이 땅에 내려섰다. 거북곰 무리를 가르고 전면에 선 주리틀이 양손을 붙잡고 문질렀다. 맞닿은 주리틀의 손바닥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당신이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가 있소. 그러니 내게 호의적인 모습을 유지하면서 마을을 파괴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 거야. 당신이 나를 그 자 앞에 데려다줘야 하니까.”

 “세부적으로 조금씩 빗나가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추리군. 어떻게 알았지?”

 “거북곰이 부자연스러웠소. 당신이 나타날 무렵부터.”

 “그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는 수준이야.”

 “까마귀가 날개로 배를 직접 때리면 배가 떨어지겠지. 속일 필요가 없어 거짓말이 서툰 당신네 종족은 알지 못하는 허술함이 있소. 무엇보다 그 빌어먹을 것을 먹고 거북곰이 멀쩡하다면 그건 신이나 마법이 개입한 거겠지. 너무 허술해서 속임수가 아닌 우연의 연속이라 생각했지만, 문득 떠오르더군. 하디는 원래 거짓말이 서툴러.”

 “그거참 안타깝네. 역시 그냥 하던 대로......”

 

 주리틀은 말을 끊고 몸을 옆으로 몸을 날렸다. 주리틀이 있던 자리에 주리틀보다 큰 바위가 날아가 박혔다. 힌돌이 콧김을 뿜으며 분개했다.

 

 “네가 내 마을을 건드려? 네 뒤통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준다!”

 

 인간이 이렇게 말했으면 눈알을 뽑겠다는 의미였겠지만, 웅퉁몸이 이 말을 하면 얼굴의 전면부를 통째로 뜯어낸다는 의미다. 힌돌이 던진 두 번째 바위가 주리틀을 스치고 거북곰 무리 한복판에 떨어졌다.

 또다시 땅바닥에 거북곰이 먹이 되고, 바위가 붓이 된 추상화가 완성되었다.

 힌돌이 세 번째 바위를 들어 올렸다. 몸을 한껏 뒤로 젖힌 힌돌보다 한 박자 빠르게 주리틀이 힌돌에게 팔을 뻗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힌돌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힌돌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팔을 휘적이며 하늘 높이 날아갔다.

 

 “여보!”

 

 검돌이 애처로울 정도로 작은 괭이를 들고 힌돌에게 달려가려다 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쓰러졌다. 한순간에 웅퉁몸 둘을 제압한 주리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말했지? 아니, 어차피 잡담이었겠지. 본론으로 돌아가지.”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이 마을을 두고 돌아가겠소?”

 

 주리틀이 오른손 검지를 관자놀이에 대고 왼손으로 오른 팔꿈치를 받쳐 삼각형을 만든 뒤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너무 진심으로 묻는 것 같아서 당황스럽네. 네가 박씨라는 증표. 그게 있지 않아? 물론 나는 다른 하디의 마법적 정신 시술의 흔적을 볼 수 있지만, 그보다 보편적인 증표가 필요해.”

 “말했지만 난 황제가 될 생각이 없소.”

 “걱정하지 마. 시골 마을에서 빈둥대던 놈 다짜고짜 그런 높은 자리에 앉혀 줄 멍청이도 없어. 한두 해 정도만 앉아있다가 의문의 독살을 당할 거야. 황좌가 딱딱하고 차가워도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잖아?”

 “제국이 있었을 때도 하디는 그 안에 소속되지 않았소. 그런데 인제 와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황제를 세우려고 누군가를 지지하며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뭐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주리틀의 말에 노아는 카브에트를 떠올렸다. 인간은 사회적이고, 하디는 폐쇄적이지만, 카브에트나 주리틀처럼 예외는 늘 있기 마련이다.

 거북곰 두 마리가 갑작스레 노아에게 달려들었다. 노아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검을 뽑았다.

 이틀 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이번에는 반대로 거북곰의 기습이었고, 수도 거북곰이 한 마리 더 많았다, 거기에 노아는 부상까지 입었다.

 그리고 노아에게는 검이 있었다.

 

 주리틀은 물론이고 마을 주민들도 선명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노아의 검은 극도로 느렸다. 하지만 두 마리의 거북곰은 노아의 검으로 자살하듯 검날에 자신의 머리를 박고 나 바닥에 떨어졌다.

 화살과는 다른, 가까운 거리에서 두 손으로 생명을 끊어내고 그 피를 뒤집어쓰는 느낌에 노아는 몸을 떨었다. 오랜만이다.

 

 주리틀이 깜짝 놀란 얼굴로 손뼉을 쳤다.

 

 “뭐야! 되게 후진 녀석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꽤 싸우네?”

 “네게 이런 미친 짓을 부탁한 놈이 누구냐.”

 “미친 짓? 미친 짓이라니?”

 

 이번에는 세 마리 거북곰이 노아에게 달려들었다. 노아는 앞으로 걸어 나가며 한 걸음에 한 번씩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제대로 보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세 마리 거북곰이 차례로 머리가 떨어졌다.

 

 “검을 들고 오랜만에 손맛을 봤다고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니야?”

 

 주리틀이 양팔을 모아 앞으로 뻗었다. 노아는 앞으로 질주해 순식간에 검을 휘둘렀지만, 노아의 검은 주리틀의 새끼손가락 바로 옆에서 그쳤다. 다리만 멀쩡했으면 한발 먼저 손목에 닿을 수 있었을 속도에 주리틀이 휘파람을 불었다.

 몸을 움직이려던 노아는 당황했다.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정신과 몸이 차단된 듯 부르르 떠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자, 이제 우리 알아볼까? 그 증표는 어디로 갔을까?”

 

 주리틀이 다시 두 팔로 삼각형을 만든 채 허공에 앉았다. 텅 빈 공간에 의자에 앉듯이 엉덩이를 걸쳤지만 주리틀은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증표는 어떤 식일까? 기본적으로 ‘이걸 가지면 박씨다!’ 하는 정해진 무언가가 아니라 급한 대로 들고나온 물건일 테니 반드시 비싼 물건이라는 보장은 없지. 그러면서 박씨인 것을 알 만한 것. 족보 같은 물건일까?”

 

 주리틀이 노아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노아는 팔다리에 힘을 줘 보이지 않는 속박을 끊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 그래. 질문에 답을 하려면 입을 풀어야지.”

 

 주리틀이 손가락을 튕기자 막혔던 노아의 입이 열렸다.

 

 “흐어!”

 “흐어 같은 소리는 나중에 편히 하고, 말해. 사람들에게 네가 황제의 씨임을 알릴 수 있는 증거가 어디에 있지?”

 

 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주리틀은 수명이 긴 종족다운 인내심으로 태연히 노아를 기다렸다.

 잠깐의 신음과 생각이 끝난 노아가 말했다.

 

 “없소.”

 

 주리틀이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건 네가 잃은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열쇠야.”

 “내가 잃은 게 아닙니다. 난 얻어본 적도 없는 물건이니 잃을 수도 없소. 그 빌어먹을 족보는 내가 가진 가족을 모조리 죽이고 내가 원치도 않는 끔찍한 기억을 새겨준 악마 같은 물건이요. 마을에 들어올 때 이미 그것은 내 몸을 떠났소.”

 “뭐라고!”

 

 주리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강렬한 붉은빛에 노아는 침을 삼켰다. 주리틀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뒤틀리며 노아를 위협했다. 노아는 땅이 흔들린다고 느꼈다.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서는 마을 사람들이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은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주리틀의 표정이 순식간에 평온해졌다.

 

 “하는 수 없지. 어차피 나도 황제로 만들어준다고 하면 옳다구나 하고 따라올 멍청이가 필요했으니까. 넌 잃어버려도 별로 아쉽지 않겠어. 좋아, 한 가지만 약속하면 순순히 물러가 줄게. 어때?”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차마 지워지지 않은 공포에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주리틀의 제안은 고개를 끄덕일 만 한 내용이 아니었다.

 

 “너랑 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조용히 죽어 줘야겠어. 내 친구가 결벽증이라.”

 

 주리틀이 마침내 자신의 배후를 언급했지만, 노아는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주리틀이 노아가 쭉 뻗은 검 끝을 손가락으로 퉁겼다.

 

 “걱정하지 마. 너희들이 다 죽고 나면 마을은 두고 떠날게. 그리고 함께한 정이 있으니 널 먼저 죽여 주겠어. 네가 나중에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죽는 걸 보면서 슬프겠지만, 네가 먼저 죽으면 너 있는 곳에 친구들이 하나둘 오니까 기쁘지 않겠어?”

 

 주리틀이 노아의 검을 잡아당겼다. 노아는 양손에 힘을 줬지만 검은 기름칠한 검집에서 빠지듯 매끄럽게 노아의 손에서 벗어났다.

 주리틀이 그 무게에 몸을 휘청였다. 익숙하지 않은 무기 사용에 어설프게 검을 들어 올린 주리틀은 노아의 목을 노리고 검을 수평으로 세웠다.

 노아는 죽음을 직감했다. 죽음은 밤중에 비 내리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눈먼 칼에 맞아 죽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보는 환한 대낮에 주리틀은 검을 뒤로 당겼다.

 

 주리틀의 몸이 갑자기 옆으로 무너지며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노아의 몸이 다시 움직여졌다. 노아는 땅으로 떨어지려는 검을 잡은 뒤, 크게 휘둘렀다.

 

 “아아악!”

 

 노아의 검이 주리틀의 방어에 막혀 옆구리에 약간의 찰과상만을 남기고 멈췄다. 주리틀은 비명을 질렀다. 노아가 마지막 일격의 실패에 절망하며 주리틀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주리틀은 양 뺨을 관통당한 화살을 움켜쥐고 고통에 울부짖었다.

 

 노아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 사이에 줄곧 숨어있던 내린이 거친 숨을 내쉬며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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