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는 서란에게 연락하려고 들었던 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내려놓았다. 벌써 이런 고민에 시달린 지 며칠째이다. 서우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하고 숨겨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게 숨기는 것보다 좋은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계속 서우를 괴롭혔다. 민우와의 데이트가 끝난 후 서우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 자기 물건이라곤 옷 몇 벌이 전부인 서란의 오피스텔에서 서우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일단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생각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욕조에 물이 채워지는 사이, 서우는 멍하게 허공을 쳐다보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잠시 여유만 생기면 자꾸만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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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갑작스럽게 맞닿은 민우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깜짝 놀라 민우의 품을 벗어나려 했으나 평소와는 다르게 민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항상 부드러웠던 민우에게 거친 면이 있을 줄 몰랐던 서우는 민우에게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벗어나기 싫었다. 민우의 품은 따뜻했고 서우를 향한 열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거칠어져오는 숨소리에 서우의 정신도 점점 아득해져만 갔다. 서우는 이미 민우의 숨소리 말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짧았던 키스 뒤에도 민우는 평소처럼 태연했다. 놀랐냐고 묻기는 했지만 사과하지는 않았다. 또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을 테니 익숙해지라는 말도 덧붙였다.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한 민우의 눈빛에 서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첫 키스였는데…’
‘콸콸콸’
그때, 욕조에서 물이 넘치는 소리를 듣고 서우는 현실로 돌아왔다. 서우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입술을 만지고 있었다. 자기가 손으로 만질 때와 실제 닿은 입술의 감촉은 너무나도 달랐다.
‘정신 차려야지 이서우’
서우는 자신을 자책하며 서둘러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갔다. 민우의 숨소리가 계속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느꼈던 눈빛, 숨결 모두 서란이를 향한 거잖아’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에서 서우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했다. 동생의 남자친구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무리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서란이 이 일을 이해해줄까. 이 모든 고민은 서우가 평소에 고민하던 일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답이 나지 않는 물음에 서우도 이제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우는 점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지. 아무리 서란이 돕는다고 해도 거짓말을 해서 나한테 내려진 벌인가 보다’
사실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건 민우의 대한 마음이 점점 변하고 있는 점이었다. 처음 마주칠 때만 하더라도 냉담하고 사무적인 민우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서우의 차가운 반응에도 계속해서 다정하게 대해주는 민우의 모습은 서우의 맘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민우의 바라볼 때의 마음이 딴 사람들을 바라볼 때와는 달라진 것을 느꼈다.
‘ 내가 견딜 수 없는 일을 수락한 건 아닐까’
서우는 자꾸만 끌리는 자신을 부정하려 애썼다. 동생의 남자친구니 대표님이니 그런 걸 떠나서 민우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서우에게 애정이란 견딜 수 없는 사치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할수록 커지는 기대감을 서우는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런 감정들을 피해 산지 25년, 서우는 이제 누군가에게 기대는 방법마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왜 나는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
오늘만큼은 뜨거운 물도 서우를 위로해주기가 쉽지 않았다. 서우는 맘이 수면처럼 일렁였다. 서우는 그냥 이대로 물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머릿속에는 계속 민우와의 일이 맴돌았다.
‘띵동’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웅크렸던 서우의 몸이 활짝 펴졌다. 서우는 대충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밖으로 나가 인터폰을 확인했다.
민우였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사실 민우의 연락을 며칠간 피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간의 행동으로 봤을 때 충분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민우의 등장에 상반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문득 이렇게 계속 끌려다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혹시 놀랐으면 그냥 돌아갈게."
확실히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문은 민우의 평소 행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우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시죠?”
수건으로만 대충 가린 서우의 모습에 민우는 잠시 놀란 듯했다.
“일단 들어오세요”
서우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큰 소리로 말했다. 뒤에서 민우의 시선이 휘감기는 게 느껴졌다.
“ 저도 할 얘기가 있어서요. 마침 잘 된 것 같네요 “
갑작스러운 서우의 말에 민우의 표정이 변했다.
“…어떤 얘긴데?”
“일단 소파에 잠시 앉아계세요. 옷 좀 입고 올게요"
민우는 사라지는 서우를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곧 소파에 순순히 앉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서우는 머리의 물을 닦으며 민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 갑자기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
“아, 놀랐다면 정말 미안. 그냥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어.”
“마침 잘 됐네요. 저도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서우의 말에 민우는 서우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먼저 얘기해”
“이젠 제 말을 믿는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모르겠어”
“ 저한테 또 어떤 확인이 필요해서 이렇게 오신 거죠? 제가 증명할 만큼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요.”
마음과는 다르게 말투가 날카롭게 돼버리고 말았다. 서우의 맘은 지금 그만큼 복잡했다. 서우의 추궁하는 듯한 질문에 민우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했다. 민우는 가끔 서우를 아주 차갑게 바라볼 때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랬다.
“…내가 여자친구 집에 찾아오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 아뇨. 이상한 게 아니라 제 말을 하나도 못 믿으시면서 해야 될 건 다 하시는 거 같아서요.”
이건 아니다. 서우는 자신의 불안함을 민우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한번 삐딱하게 흐른 감정은 이성의 경고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내 행동이 불쾌하기라도 했단 소린가?”
“불쾌라기보단 갑작스러웠죠. 원래 여자친구한테 그렇게 행동하세요?”
“이해가 안 가는데. 그럼 키스할 거야 하고 허락 맡고 해야 되나?”
민우의 질문에 서우의 말문이 막혔다. 아무튼 이런 종류의 말싸움은 자신이 없었다. 서우는 일단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왜 저를 아직까지 못 믿겠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왜냐면 너는 내가 아는 이서란이 아닌 건 확실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그래, 네가 말한 그 이상한 기억상실증이라는 이유밖에는 나도 떠오르지 않아. 하지만 이상하게 너를 그대로 믿기엔 왠지 모르게 불편한 분위기가 있어. 나는 그 분위기가 뭔지 알고 싶어”
“그런 자신만의 직감을 가지고 저를 테스트해보시는 거예요 지금?”
“안될게 뭐가 있지. 이 직감으로 회사도 성공 시켰는데.”
서우의 페이스에 민우는 도통 넘어오질 않았다. 아니 애당초 민우와 서우는 서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우는 어떤 방식으로든 오늘은 결론을 짓고 싶었다.
“저는 대표님이 이렇게 갑자기 저를 찾아오신다거나 대화 중 갑자기 돌변하시는 모습을 신뢰할 수가 없어요.”
“아하. 궁지에 몰리니까 갑자기 대표님으로 바뀌었군. 사실 그게 나를 생각하는 진짜 모습 아냐?”
“저에게서 도대체 어떤 모습을 찾으시는 거예요? 사기꾼?”
“갑작스럽게 돌변한 건 너야. 이서란. 나는 아직도 너의 정체가 정말 궁금해”
말을 마친 민우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서우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까워지는 그림자에 서우는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야. 좀 더 확인하고 싶다는 얘기”
다가오는 민우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어느새 서우를 가두며 다가오는 민우의 숨결을 느끼며 서우의 심장이 요동을 쳤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서우는 민우와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매듭짓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 오빠는 자기에게 되게 자신이 없나 봐요? 제가 오빠를 좋아한다는 걸 그렇게 믿기 힘드세요?”
그순간, 서우는 자신도 모르게 진심을 고백해버렸다. 생각보다 말이 더 빨랐다. 몇 초 후 자신이 한말을 깨닫고 서우가 너무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서우는 자신보다 훨씬 더 당황하는 민우를 쳐다보며 깜짝 놀랐다. 민우는 돌연 갑자기 집을 나가 버렸다. 서둘러 나가는 민우의 빨간 귀가 보인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