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이한이 혁준의 질문에 선선히 웃으며 대답해준다. 못마땅한 얼굴을 가리느라 고개를 숙이고 듣던 서경은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든다. 이한에게 살짝 말을 건넨다.
“이 선생님! 저 좀 뵈세요!”
“무슨 일로?”
의문스레 보는 이한을 이끌어 서경은 계단을 올라간다.
“지난번 시장에서 우연히 박동지를 봤거든요.”
아지트의 살림방에서 서경은 심각한 얼굴로 이한에게 말을 꺼낸다.
“시장 식당에서 도박 마작을 하는 거 같더라구요.”
이한의 얼굴이 대번 흐려진다.
“그래요?”
“깡패들에게 위협을 당하는 것 같았어요.”
“음...”
이한의 얼굴이 굳어진다.
“뭐라고 안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할 수도 없고. 오랫동안 의열단 동지인데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의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한은 신중하게 말을 잇는다.
“... 그렇긴 하죠. 하지만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네. 그러도록 하죠.”
“또 무인도에서 실험할 때 같이 가지 않았으면 해요.”
“그럽시다.”
서경과 이한은 서로 눈을 마주친다. 긴장된 눈빛들이다.
세미는 폭탄을 만드는 데 너무 열중해서 서경과 이한이 지하실을 나갔다는 것도 몰랐다. 폭탄 제조는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마자르가 작업을 정리하자고 한다. 다들 주섬주섬 기구들을 챙기고 입었던 작업복을 벗고 토시도 벗는다.
세미가 마자르와 뒷정리를 할 테니 종희와 혁준에게 먼저 나가라고 말한다. 세미는 마자르에게 자신의 심정을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종희가 세미의 마음을 알아채고 세미에게 씩 웃어준다.
계단을 올라간 종희와 혁준이 지하실을 나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린다. 지하실이 다시 아주 고요해진다.
“마자르! 너 나 아직도 사랑해?”
세미가 마자르를 지그시 보며 말을 꺼낸다. 마자르는 좋아서 눈이 커진다. 알아봐 줘서 고맙다는 표정이다.
“응.”
“나는 너 안 사랑해! 아이 던트 러브 유.”
세미의 단호한 말에 마자르가 실망해서 얼굴이 흐려진다. 몸에서 힘이 빠진다.
“하지만 니 곁을 떠나진 않을 거야.”
세미가 말을 하지만 마자르가 못 알아듣는다.
“왓?”
세미는 답답해진다. 몸동작을 시작한다. 손으로 마자르를 가리키고는,
“니 곁을”
마자르를 떠나는 듯 걸어나가며,
“떠나지”
두 팔로 엑스자를 크게 그리고는,
“않을 거야. 드 유 언더스탠드?”
세미가 말을 마치고 눈을 크게 뜨고 마자르의 반응을 기다린다. 마자르가 잠시 얼은 듯 몸이 굳더니 겨우 입을 뗀다.
“예스.”
여전히 흐린 얼굴이다. 그러자 세미가 갑자기 마자르에게 다가가 손을 잡는다.
“나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세미의 말에 마자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하게 변한다. 세미가 마자르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본다.
“사업적 관계로. 비즈니스 관계. 오케이?”
“비지니스?”
마자르가 되묻는다.
“댓츠 라이트. 비즈니스 관계.”
“그럼 나중에 나 사랑할 거야?”
마자르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세미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
종희와 혁준이 살림방으로 들어가자 서경과 이한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다 멈춘다.
“둘이 뭐하셨습니까?”
종희가 장난스럽게 서경에게 얼굴을 들이대고 묻는다. 서경과 이한이 종희를 보며 동시에 정색한다.
“뭐하긴 뭐해? 그냥 얘기했어.”
“아 그러세요?”
서경이 발끈하자 종희가 평소 하는 대로 서경의 팔을 가볍게 친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이한이 정색한 얼굴 그대로 예의 바르게 인사한다.
“이 선생님!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서경이 화들짝 급하게 이한을 잡는다.
“아닙니다.”
“왜요? 선생님. 서경이 요리 잘... 아니다. 그냥 가세요.”
이한이 거절하자 종희가 서경의 요리할 거라는 얘길 하려다 멈춘다. 이한의 의문의 눈으로 보며 묻는다.
“무슨 말 하려고 하셨습니까?”
그러자 서경이 옆에 바싹 붙어 선 종희의 팔을 꼬집는다. 말하지 말라는 거다.
“아얏!”
종희가 일부러 과장되게 비명을 지른다. 서경이 종희를 노려본다. 이한이 두 사람을 무슨 일이냐는 듯 본다.
“아뇨. 아무 말도 아닙니다. 더 말을 하면 제가 온전치 못하겠네요. 호호.”
종희가 표정을 바꿔 정색하더니 마지막에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서경의 감정쯤은 벌써 옛날에 눈치챘다. 지금 놀려 먹어야 하는데 못 해서 안타깝다.
서경은 이한의 눈길을 종희의 장난으로부터 돌려야 한다.
“어디로 가시는데요?”
“저 머리에 60만원 달린 남잡니다.”
이한의 장난스런 말에 서경은 피식 웃고 종희는 의문스레 본다.
“이 동지 정말 비싼 목숨 되심둥. 당최 만날 거처가 바뀌니까니 오데 계신지 아는 사람이 없습네다. 하하.”
혁준이 실실거리며 말하다 이한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묻는다.
“내레 가르쳐 주시디요?”
이한은 얼굴이 굳어지며 입을 다문다. 서경은 이한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얼른 말을 돌린다.
“어디 가시더라고 먹을 건 잘 챙겨 드세요.”
“그럼요. 서경이 이제부터 요리 배울 것 같아요.”
종희가 끝까지 장난을 치며 히히거리지만 이한은 여전히 정색한 얼굴이다.
“무슨 말이신지?”
“아닙니다. 하하하.”
종희가 웃어넘기자 서경이 종희를 째려본다. 종희는 서경에게 윙크하며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다음날 세 여자와 이한, 마자르는 혁준이 알려 준 황포강 무인도로 사격 훈련과 폭탄 실험을 나간다. 내일이 거사날이다. 서경과 이한은 서로 얘기한 대로 혁준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황포강은 너무 넓고 커서 강이라기보다는 바다 같다.
일행은 작은 배를 빌려서 노를 저어 무인도로 향한다. 작은 배 옆으로 누런 물결이 넘실거리며 천천히 흘러간다.
다들 훈련과 실험에 편하도록 서양식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이한은 총이 든 가방을 세미와 마자르는 폭탄이 든 가방을 소중하게 챙겼다.
이한과 마자르가 노를 젓고 여자들은 가방을 열어 총과 폭탄을 확인한다. 가방 안에는 이한이 준비한 장총 1개, 권총 1개 그리고 마자르가 준비한 수류탄 모양의 폭탄이 1개 들어있다.
서경과 종희가 신기한 듯 보고 세미가 세심하게 점검한다. 한참을 가자 멀리 앞에 무인도 섬이 보인다.
무인도에 배를 대고 일행은 내린다. 섬은 수풀만 무성하고 황량한 풍경이다. 이들들은 먼저 사격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나무 막대로 지지대를 세우고 표적으로 쓸 사기그릇을 노끈으로 단다.
이한은 가져온 가방을 열고 먼저 장총 1대를 꺼내더니 세 여자를 둘러보며 말을 꺼낸다.
“장총 쓰실 분?”
서경과 종희가 동시에 장총에 손을 대고는 동시에 외친다.
“저요!”
이한이 멈칫하며 둘을 번갈아 본다.
“어느 분이?”
이한이 묻자 서경이 먼저 나선다.
“언니! 내가 할게!”
“아니다! 힘이 좋은 내가 한다.”
종희도 나서자 이한이 두 여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종희에게 장총을 건넨다.
“아무래도 장총은 무게가 나가서. 권총도 있으니까...”
서경이 아쉬워한다. 이번에는 권총을 꺼낸다.
“권총 하실 분?”
서경이 낼름 권총을 잡는다.
“저하고 잘 어울리네요.”
“하하. 쏘실 줄은 아세요?”
이한이 묻자 서경이 잠시 당황한다.
“어떻게 되겠죠. 전에 저 이렇게 잡아 본 적 있어요.”
하더니 서경이 이한의 머리에 권총을 댄다. 홍석원 경감이랑 경성에서 작전할 때 그 포즈이다. 다들 긴장해서 쳐다본다.
“기억나시죠?”
“하하. 무섭습니다. 내려 주세요.”
이한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서경이 이한의 머리에서 권총을 내리더니 씩 웃는다.
“정말 좋네요.”
서경이 권총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미소짓자 다들 긴장을 푼다. 마자르가 마지막으로 가방에서 폭탄을 꺼내 들어 보인다. 폭탄 끝에 안전핀이 꽂혀있다.
마자르가 영어로 설명한다.
“디스 밤브 헤즈 도 파워 투 익스플로드 어 휴즈 카.”
“이 폭탄은 자동차 한 대쯤 폭파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어요.”
서경이 통역해준다. 마자르가 세미를 보며 다정하게 묻는다. 역시 반말이다.
“세미가 할 거야?”
“응.”
마자르가 세미에게 폭탄을 던져준다. 세미가 폭탄을 받으며 결연하게 말한다.
“다들 알겠지만 폭탄은 내 전문 분야지.”
다들 피식 웃는다. 종희가 먼저 장총으로 사격 훈련을 시작한다.
작은 나무로 세운 지지대 사이에는 노끈으로 묶은 사기그릇이 매달려 있다. 좀 떨어진 곳에 종희가 서서 장총을 들어 표적을 향해 드는 법을 이한에게서 배운다.
“몸에 힘을 빼고 표적물에 눈을 고정시킨 체 손가락에 힘을 주세요.”
종희가 이한이 가리키는 대로 자세를 취한다. 이한이 옆에서 종희의 자세를 이리저리 고쳐준다. 종희는 처음이지만 자세가 좋다. 말을 많이 타 봐서 균형을 잘 잡는다.
“잘 하시네요. 그럼 쏴 볼까요? 준비 발사!”
종희가 손가락을 움직여 총을 발사한다. 탕.
종희는 처음 세 번 정도 목표물을 못 맞췄지만 네 번째 시도에서는 사기 그릇을 맞춘다. 쨍그랑. 종희가 펄쩍 뛰며 좋아한다.
“난 역시 명사수야! 타고났어”
종희가 장총을 흔들며 기뻐한다.
“언니! 나이스!”
서경이 엄지척해 보인다. 이번엔 서경 차례다.
“그럼 임동지도 해 볼까요?”
이한이 먼저 서경에게서 권총을 받아 들더니 자세를 취해 포즈를 보여준다.
“이렇게 몸이 흔들리지 않게 다리에 힘을 주고 서서 총구 위에 눈을 맞춰야 합니다. 표적물을 향해 눈의 초점을 맞추구요. 자 해보세요!”
이한이 서경에게 권총을 넘겨 주고 서경이 자세를 취한다. 서경의 몸이 조금 기우뚱한 것 같아 이한이 서경의 뒤에 서서 자세를 고쳐준다.
서경의 어깨를 잡으며,
“다리를 어깨만큼 벌리시고”
서경의 팔을 펼쳐 주며,
“총이 흔들리지 않게 팔에 힘을 줘서 쭉 내뻗고”
서경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에 힘을 주세요.”
서경이 이한이 이리저리 몸의 자세를 잡아주자 긴장한다.
“이제 됐어요! 총을 쏴 보시죠!”
이한이 요구하자 서경은 총부리에 댄 손가락에 힘을 주며 침을 꼴깍 삼키고 눈에 힘을 줘 목표물을 바라본다.
“준비! 발사!”
이한이 외치자 서경이 총부리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고 총알이 튀어 나간다. 퓽.
하지만 총알은 표적물을 맞추지 못한다. 휙.
총알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만 난다. 서경은 아쉽다.
“뭐야!”
“어떡하니? 역시 이 언니를 못 쫓아오는군.”
종희가 혀를 낼름거리자 서경은 속상해서 얼굴을 찌푸린다.
“하하! 처음 하시는데 잘 할 수 있나요? 지난번에 날 겨눈 건 자세만 좋은 거였나 봅니다.”
이한도 놀리자 서경이 정색을 한다.
“아닙니다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자세만 잡은 거였어요.”
서경이 실토하자 이한과 종희가 웃겨 죽겠다는 듯 웃는다. 세미도 한술 더 뜬다.
“서경이 너 연습 많이 해야겠다.”
“우리 세미는 잘 한다.”
세미 옆에 선 마자르가 한마디한다.
“어떻게 아세요?”
서경이 눈이 동그래져서 마자르에게 묻는다.
“쉬 메이드 밤브 베리 웰. 앱솔루틀리 쉬 드로우 더 밤브 베리 웰.”
“폭탄을 잘 만드니까 잘 던질 거라는 매우 단순한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군요.”
서경이 통역하며 덧붙인다.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논리라고 합니다.”
종희도 거든다.
“놉! 매우 논리적인 논리지. 내가 하는 걸 잘 보라구.”
세미가 마자르 편을 들며 마자르에게서 폭탄을 넘겨받더니 폭탄에 꽂혀있는 안전핀을 뽑고는 소리친다.
“다들 뒤로 물러서요! 나 갑니다.”
세미가 과장된 자세로 폭탄을 치켜들자 다들 뒤로 물러선다. 마자르가 세미에게 소리친다.
“비 케어풀! 세미!”
세미가 마자르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투포환 던지듯이 폭탄을 한손으로 어깨에 들고는 몸을 빙글빙글 돌려 슬로우 모션으로 폭탄을 멀리 던진다. 휙.
펑! 폭탄이 땅으로 떨어지며 커다란 흙먼지를 만들어낸다. 큰소리와 흙먼지에 눈이 커진다. 성공했다!
다들 손을 올려 만세를 부르며 기뻐한다. 세미가 손을 털며 큰소리친다.
“역시 내 전문 분야야!”
모두에게 눈을 찡긋한다. 다들 세미에게 엄치척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