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손님들로 가득 찬 자미스 PC방엔 유독 화나 보이는 얼굴이 입구에서부터 도드라지게 보였다.
"키미안, 키미안, 거기 막아!"
"예? 어디요?"
"거기이!"
엉거주춤하게 마우스와 키보드에 손을 얹은 키미안의 표정엔 당황함이 묻어난다. 옆에서 답답함을 호소하며 알려주는 진희가 원망스러우면서도 게임하는 게 나름 재미있긴 했다.
이상한 단축키들을 외워가며 헤드셋을 착용한 키미안의 동작은 매우 뻣뻣했다. 온 몸이 경직된 상태로 정신 사납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화면을 바라보자니 어지러움을 이길 수 없었단 키미안이 헤드셋을 내려놓았다.
"저... 진희 님, 저 도서관 가면 안 될......"
"아싸아! 이겼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하는 진희를 보던 키미안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붙잡힌다. 한 손은 마우스를 쥐고 한 손은 키미안의 소매를 잡은 진희가 눈을 번뜩였다.
"키미안, 한 판만 더 같이 해보자, 한 판만."
"...... 그 소리만 지금 다섯 번째입니다."
한숨을 푹 내쉰 키미안의 앞으로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핫도그가 내려진다. 바로 고개를 들은 키미안의 눈동자엔, 힘내라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는 자미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떠나갔다.
"아, 이번엔 진짜라니까?"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진희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아는 키미안이기에 신뢰성이 없었다. 진희의 간절한 외침을 뒤로 하고, 핫도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입 베어문 키미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건 뭡니까."
"한 판만 하... 그거? 핫도그잖아. 핫도그 몰라?"
손에 묻히지 말라고 핫도그를 감싼 종이를 쥐며 눈을 크게 뜬 그를 보던 진희가 혀를 내둘렀다. 핫도그 빵 사이로 껴진 소세지와 피클, 양파, 다양한 소스들이 키미안에겐 익숙치 않은 음식이었지만, 진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간식 중 하나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문화 충격을 주고 있는 둘이 안쓰럽다는 듯이 턱을 괴고 바라보던 자미스가 내친김에 하나 더 만들어 가져갔다.
"자, 우리 신 님도 드세요."
"와아! 고마워요, 자미스. 엄... 그런데 자미스."
"네?"
좋아하는 것도 잠시, 머뭇거리던 진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미스라고 부르는 거 좀 그렇지 않아요? 그냥 이름만 부르니까 버릇 없는 것 같아서."
"어휴, 버릇이 없다뇨. 신 님께서 하찮은 저한테 반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도......"
푸근하게 웃는 자미스를 보던 녹색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간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기분이 안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진희만의 생각이었다. 웬 핏덩어리가 신이 되어 자신의 이름을 막 부르는 거 생각하면 치가 떨릴 것 같았다.
"제 이름만 빼면 저에게 존대해주고 계시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제... 제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음... 자미스 님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자미스가 피식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죠. 신 님께서 신경 쓰이신다면... 어디보자... 아, 그래요. 자미스 부인이라고 불러주세요. 진희 님이 살던 곳과는 달리, 제가 사는 곳에선 아줌마 이상은 다 부인이라 불렸거든요."
"아아, 그렇군요. 알겠어요, 부인."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부른 진희가 핫도그가 식기 전에 한 입 베어 물었다. 두 볼이 빵빵해지도록 입에 넣어 우물우물 씹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흘러나와, 바로 뒤돌아 본 자미스가 함박 웃음을 지었다.
"거기 직원! 여기 레몬에이드 하나만 갖다주쇼!"
하지만 자미스의 얼굴이 금방 딱딱하게 굳었다. 늘 오는, 흔히 진상이라 부르는 이들의 익숙한 목소리에 한숨을 푹 내쉰 자미스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선불입니다. 3백 라스빌 지불해주세요."
라스빌?
그게 뭐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키미안을 응시하자, 키미안은 그에 답해주는 듯 입모양으로 뻐끔거렸다.
신. 계. 화. 폐. 단. 위.
그걸 유심히 보다 뒤늦게 알아차린 진희가 마저 행복하게 핫도그를 베어무는데, 하필 타이밍이 안 좋았다.
"아줌마, 달라면 그냥 줄 것이지, 말이 많아요. 저기 컴퓨터는 그냥 줬잖아. 내 말이 틀려?"
저 미친 년은 뭐야.
먹던 핫도그를 내려놓은 진희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진다. 신계에 저런 게 어떻게 있는지, 지옥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지, 의문을 품고 키미안에게 텔레파시를 보냈을 때 돌아온 답변은 허탈함을 불러왔다.
'지옥까지 갈 정도의 약한 죄라서 봉사 몇 년하고 끝난 이들입이다. 허나 지금 하는 정도는 지옥에 가도 되는 정도네요. 지금까지 발각 안 된 게 신기합니다. 운도 좋죠.'
'그래? 쟤네 이제 운 더럽게 없는 놈들 된 거네?'
진희의 한 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그 말대로 저들은 운이 없어도 정말 없었다. 신을, 그것도 생명을 담당해 서류를 판결의 신에게 보내는 역할을 하는 신을 마주했으니.
"이 분들은 선한 사람들입니다. 당신들과는 다르게."
"아, 선하고 나발이고. 우리도 달라고. 그게 그렇게 어렵-"
"자미스 부인."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른 진희가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진상 패거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보기 좋은 그 표정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던 진희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왜 그래. 마저 해 봐."
"아니... 그......"
"왜? 막상 해보라니까 못 하겠어? 혹시 너 입이 없니?"
보란듯 비웃는 진희의 말에 아랫입술만 세게 깨물고 있는 여자 아이가 눈을 부릎 뜨며 올려다 본다. 아무리 바보라 해도,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본능적으로 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저것들을 어떻게 지옥에 처넣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진희의 눈동자가 푸른 빛으로 물들며 시린 빛을 토해낸다. 어둡지 않으면 볼 수 없을 것 같은 약한 빛에 잠시 움찔하던 이들도 마음을 살며시 놓았고, 그에 보답하듯 그들의 몸에서 서류가 빠져나왔다.
와씨. 뭐야.
겉은 평정심을 유지하나, 속에선 소스라치게 놀란 진희가 날아온 서류를 손에 집어들자, 그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흐음......"
가는 손에 잡힌 여덟 장의 서류가 팔락팔락하는 불길한 소리를 내며 넘어간다. 청록색 눈동자에 들어온 이름들을 하나하나 또박또박 곱씹어 읽어내려갔다.
"김지원, 하예원, 박지안, 권승빈, 차세현, 원온우, 박지훈, 임유나."
모두의 이름을 호명한 진희가 키미안을 힐끔 보며 괜찮냐는 신호를 보냈고, 그에 답하듯 키미안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앞으로 두 시간 뒤에."
다 죽었어.
진희의 눈이 게슴츠레 떠지며 청록색 눈동자가 더욱 도드라진다. 시옷 자로 내려간 입꼬리가 그녀의 기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재판소로 옮겨질 거니 그리 알고 있어."
"네? 재판소라뇨. 저희가 뭘 했는데요."
"그건 본인이 더 잘 알겠지."
뻔뻔하기 짝이 없네.
억울해 하는 그들을 보며 혀를 내두른 진희가 컴퓨터 전원을 껐다. 그렇게 원하던 게임이었지만 할 마음 싹 가신 지 오래였다.
"무슨... 야!"
야?
누군가 진희를 향해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치자, 그를 제외한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희번뜩 떠진 진희의 눈과는 달리, 낮게 뜬 눈을 한 키미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의 서류에 무언가를 적어내려갔다.
"자기 스스로 제 죄를 추가하다니."
쯧. 가볍게 혀를 찬 키미안이 모든 서류를 챙기곤 진희를 이끌며 PC방에서 나선다. 문앞까지 나가다 잠시 멈춘 키미안이 손가락을 가벼이 튕겼고, 그와 동시에 여덟 명의 아이들의 몸 주위로 가벼운 빛이 흐르며 그들의 육체를 공중에 띄웠다.
"어... 어어?"
"꺄아아악!"
재밌겠네.
뒤돌아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희가 콧방귀를 뀐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기세등등한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는지.
"이거 놔요!"
놓으라며 빽빽 소리쳐도 키미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길가에 흩뿌려진 작은 돌들을 보듯 무덤덤하게 힐끗 보고 말았다.
이야아......
자신도 그들에게 험하게 대하긴 했으나 키미안을 보니 뭔가 너무하다, 라는 느낌이 아주 살짝씩 들었다.
복도를 지나 수피아 궁에서 나온 지금까지도 그들을 공중에 아찔하게 띄워놓고 심지어 이리저리 흔들며 가고 있었다. 쌤통이라고 생각되긴 하나, 이젠 걱정이 되어 청록색 눈동자가 서서히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잘 걷고 있다가도 금방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는 진희가 황당함에 바로 고개를 돌린다. 누군가는 울고 있고, 누군가는 자신만 믿으라며 무슨 자신감인지 모를 말을 지껄이고 있고, 누군가는 영혼이 빠진 것처럼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혀를 내두르던 그때.
솨아아-...
"......!"
마치 회오리처럼 바람이 빙빙 돌더니 그 자리에서 사람의 형태가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흰 제복을 잘 차려입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중단발에 달빛을 녹인 것 같은 은색이 도드라진다. 또 금방이라도 누구 하나 씹어 먹을 것 같은 황금빛 눈동자가 또렷하게 둘을 바라보았다.
뭐야, 누구야.
어리둥절하며 당황해 하는 진희와는 다르게, 이미 익숙한 얼굴인 듯 덤덤한 키미안이 다가가 가벼운 악수를 나눴다.
"오랜만이네요, 키미안."
"네, 오랜만입니다, 셀릭스."
저기, 둘만 얘기하지 말아줄래.
정겹지만 어쩐지 비즈니스 같은 둘을 보며 멀뚱멀뚱 서 있던 진희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금안을 꿈뻑거리던 이가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제 2대 신의 천관인 셀릭스 아르벨이 제 4대 신이신 연진희 님을 뵙습니다."
"앗, 괜찮아요, 셀릭스."
"...... 존대하지 말아주십시오."
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단호히 말한 셀릭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이내 진희의 뒤로 위압감 있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자 같은 금안에 여덟 명의 아이들이 들어오고, 키미안의 신력이 다시 되돌아감과 동시에 셀릭스의 신력이 그들을 속박했다.
"이런 자들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게 수치스럽군요."
셀릭스의 입매가 비틀린다. 척 봐도 살기가 느껴지는 금안에 여덟 명의 아이들이 흠칫 놀라며 입을 앙 다물었다.
"당신들은 지금부터 제가 직접."
손가락을 가벼이 까딱하자 모두가 줄줄이 끌려왔고,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셀릭스가 그들을 내려다본다.
"재판소로 이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