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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죽지 마
작가 : 이른
작품등록일 : 2019.9.18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순간 유령이 된다.
악마들에 꼬임에 빠져 유령이 된 소녀는 악마들이 창궐하는 천사들의 세계로 불려가 그들의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어떤 예언을 이루어주게 되는데. 그 예언의 결과는.....

 
2.악명높은 남자
작성일 : 19-09-19 05:26     조회 : 206     추천 : 0     분량 : 8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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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악명 높은 남자.

 

 

 -이그라 (세계의 세상 중 첫 번째) -

 

 

 “모르드.”

 

 문 쪽에서 단정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언제 왔는지 궁의 상임비서 구아나가 문 밖에서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로를 바라보고 있다.

 

 “오늘은 차크만의 날입니다.”

 

 모로는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맞춘 뒤 손을 들어 알고 있다는 뜻을 전한다.

 

 “세안을 도울 시종을 들일까요?”

 

 늘 같은 질문.

 

 “혼자 하겠네.”

 

 늘 같은 대답. 그녀는 문 뒤로 조용히 물러난다.

 

 모로는 몸을 씻고 침실의 반대쪽 문을 통해 가증스럽도록 새하얀 신성의 홀로 들어선다.

 

 구아나가 의전대들을 데리고 그 문 앞에서 발을 멈춘다. 그들을 멀리서부터 지켜보던 경비병들이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철문을 연다.

 

 열린 문 사이로 강렬한 빛과 백색의 아우라로 가득 찬 홀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모로가 보인다.

 

 “들라.”

 

 모로가 하얗고 정갈한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채우며 명한다.

 

 구아나는 경건하지만 익숙한 태도로 머리를 조아린 뒤 벽과 천정, 바닥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새하얀 방안으로 들어선다.

 

 순간 모로를 처음 보는 어린 궁녀 하나가 긴장해서 발을 헛디딘다. 그 바람에 그녀의 팔에 놓인 백색의 의례복이 손아래로 반쯤 흘러내린다.

 

 ‘릴리!’

 

 구아나가 예기치 못한 실수에 놀라 그녀를 돌아보며 눈으로 불호령을 친다.

 

 살벌한 분위기에 소녀는 당장 울 것 같은 얼굴로 의례복을 정리하고는 얼른 자세를 고친다.

 

 이그라의 1급사도 중 가장 사납다고 소문이 자자한 모로였다.

 

 징벌의 대천사. 용서를 모르는 천사장. 미친 타락 천사.

 

 소녀는 그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들을 떠올리며 실수를 들키지 않으려고 허리를 바짝 곧추세우고 숨을 삼킨다.

 

 “착복식을 시작하지.”

 

 모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릴리는 현기증을 느끼며 겨우 숨을 내쉰다.

 

 구아나가 성물대에 놓인 종을 한 번 친다. 손가락 세 마디 정도의 작은 종에서는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린다. 그녀는 종의 미세한 울림이 끝나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위대한 모르드와 그 제사장의 힘으로 유일신의 성역이 영원하기를 비나이다.”

 

 그녀의 기도가 끝나자 다시 릴리의 차례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백색의 의례복을 모로의 어깨에 걸쳐주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다.

 

  그 사이 아리안타의 제1 성문 앞에는 흰 손수건을 든 시민들의 행렬이 끝없이 모여든다.

 

 긴 행렬은 성문 앞은 물론이고 아리안 왕국의 상징인 방사선 모양의 도로를 완전히 뒤덮은 상태다.

 

 서로 등이 떠밀리는 번잡한 상황 속에서 같이 온 일행을 잃어버리고 이리 저리 떠밀리는 라그들도 흔하게 보인다.

 

 *

 

 

 “주인. 대체 이게 무슨 난리야?”

 

 메이가 떠밀리는 게 지겨운 얼굴로 투덜대더니 급기야 얼굴을 가린 망토를 내리며 언성을 높인다.

 

 금발 머리가 흐트러져서 이마위에 엉켜있고 곱상한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다. 행렬 속에서 얼마나 시달렸는지 온통 땀범벅이다.

 

 “매달 12연방을 돌아가면서 열리는‘차크만’이야. 연방 대제사지.”

 

 당체 방향을 잡지 못하는 메이를 덩치 좋은 데라모타가 힘껏 잡아당기며 말한다.

 

 “대제사? 그걸 하면 뭐 돈이라도 생기는 거야?”

 

 메이가 자리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앞에 있는 라그의 등을 팔꿈치로 거칠게 밀며 묻는다.

 

 “돈보다 나은 게 생기지.”

 

 “돈보다 나은 것도 있어?”

 

 메이는 돈보다 나은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얼굴로 두 손을 치켜든다. 그때 아수라장 속에서 한 여성이 손에 흰 손수건을 들고 믿을 수 없이 차분한 태도로 메이를 향해 경건하게 두 손을 모은다.

 

 “신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 하기를.”

 

 메이는 여자의 축복에 기겁을 하며 데라모타의 곁으로 바짝 붙는다.

 

 “설마 지금 신의 축복 따위가 돈보다 낫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

 

 메이가 잘 다듬은 눈썹을 치켜뜨고 귓속말을 한다.

 

 “차크만은 성역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의식이야. 차크만의 대제사가 성령을 불러 성역의 결계를 굳건하게 하지.”

 

 “성령이라니....말도 안 돼.”

 

 메이가 손가락 하나를 입에 넣고 구역질난다는 시늉을 한다.

 

 그때 커다란 성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회색 옷을 입은 의전대와 흰옷을 입은 사도들이 제사장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 행렬이 웅성거리며 경비병들의 가이드라인 바로 앞까지 밀고 나간다.

 

 질서를 유지하려는 경비병들의 호령과 휘파람 소리가 최고조에 이르자 11대의 윈더(중형 비행체)가 줄지어 도착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각 연방의 모핸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그라 최상위 계층인 1급 사도들이다.

 

 라그들은 그들을 외부로부터 지켜주는 파시아의 힘을 숭배하는데 그 힘이 바로‘모핸’이라고 불리는 1급 사도들에게서 나온다.

 

 모핸들은 보통 지배자인 동시에 몰케논이라는 강력한 군대의 일원으로 그들의 지휘관인 모르드는 대천사라 찬양받으며 연방을 다스리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차크만의 날에는 그들의 강력한 힘이 제사장들의 한마디 말보다 약했다. 12연방의 제사장들이 윈더에서 내리자 대형 화면에 그들의 얼굴이 하나 둘 잡히기 시작한다.

 

 제사장들은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기품과 윤기가 흐른다.

 

 “아무래도 제사장을 신앙심이 아니라 미모로 뽑는 모양이군.”

 

 메이가 중얼거린다.

 

 “제사장은 연방 모르드의 부인들만이 맡을 수 있는 신성한 의무야.”

 

 데라모타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밝은 갈색머리의 여인을 가리키며 말한다. 대중을 압도하는 아름다움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다.

 

 “라리카스 연방의 케신 코나 여제야. 12제사장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지.”

 

 함성 속에서 케신 대제사장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서더니 마이크를 잡으며 대중들을 향해 진정하라는 손짓을 한다.

 

 그 작은 손이 보내는 신호에 환호하던 라그들이 거짓말처럼 숨을 죽인다.

 

 “신의 성역에 거하는 신성한 종족 라그 아르들이여! 우리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는 그녀의 우월감에 찬 목소리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모로의 눈이 싸늘해진다.

 

 그의 악명이 다시 한 번 높아질 만한 표정이다. 사방을 날아다니는 드론이 그 날선 표정을 절묘하게 잡아내 방송을 타게 한다.

 

 “우리는 태고로부터 차원의 문과 신의 섭리를 지켜온 위대한 신의 종족입니다.”

 

 연설을 듣고 있던 메이가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작은 웃음을 터트린다.

 

 차원의 틈이 벌어져 괴물들이 넘쳐나는 성역 밖의 상황을 조금만 안다면 그게 얼마나 웃긴 소린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아지악에 넘쳐나는 서트를 보고도 연방의 제사장들은 느끼는 게 전혀 없나봐?”

 

 데라모타가 닥치라는 표정을 짓자 메이는 휘파람을 불며 잽싸게 케신이 서있는 연단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차원의 문을 지키겠노라 신에게 맹세한 수호의 언약! 우리는 그 언약의 대가로 긍지와 더불어 놀라운 힘을 가진 신탁의 사도들을 허락받았습니다.”

 

 케신의 말에 대형 브라운관의 화면에는 각 연방의 모핸들이 차례로 잡히더니 마지막에 모로의 얼굴이 다시 화면을 채운다. 사납고 사나운 얼굴.

 

 “모핸들은 신탁의 수호자인 동시에, 신탁의 힘을 이루는 근원으로 성스러운 힘‘파시아’의 주인이며 우리의 연방에 그 무엇보다 견고한 결계의 힘을 허락한 신의 선물입니다.”

 

 그 대목에서 우연찮게 아킬라의 또 다른 모핸, 에렌 카지모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자 여기저기서 그에게 수건을 흔드느라 술렁거린다.

 

 그는 아킬라의 남신이라 불리는 미남자였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자 참았던 환호가 터진다. 어수선해진 상황에 케신이 잠시 말을 멈춘다.

 

 그녀는 언짢아하며 분위기가 다시 잡히기를 기다렸다가 주위가 조용해지자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거만한 태도로 천천히 입을 뗀다.

 

 “그러나 이 성역을 지키는 그 어떤 위대한 힘도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만을 믿고 오만하게 굴었던 사드연방이 어떻게 몰락했는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모로가 그녀를 노려본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만한 남자. 그것은 모로의 또 다른 별명이다. 케신이 12연방이 지켜보는 연단에 서서 그 별명을 비꼰 것이다.

 

 “우리는 연합 위원회를 중심으로 단결되어있으며 12제사장의 모시는 신탁의 위엄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케신의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메이는 화면에 비친 모로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다.

 

 ‘전쟁을 꿈꾸는 미친 천사장이라고 했던가?’

 

 결계를 넘으며 그에 대한 평판은 한결 거칠어진다. 외부자들에게 타락 천사라는 말은 너무 교양 있는 표현이었기에 ‘미친’이라는 말을 그의 이름 앞에 붙이곤 한다.

 

 메이가 그가 소문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살피려는 사이 케신의 연설은 거의 막바지를 향해서 가고 있다.

 

 그녀는 차크만을 허락받은 것이 곧 연방의 자격을 얻은 것이라는 진부한 설명을 덧붙이더니 마지막으로 모로를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한마디를 던진다.

 

 “나는 오늘 차크만의 날을 맞아 아킬라의 모핸들이 세운 결계의 정당성을 검증하려 합니다.”

 

 

 *

 

 케신 여제의 연설이 거슬려 앞뒤 가리지 않고 테라스를 내려온 모로는 사나운 걸음으로 아리안타의 백색 복도를 걷는다.

 

 갑작스런 모로의 행동으로 아킬라의 다른 사도들까지 그를 따라 황급히 테라스를 떠나야했다.

 

 “모르드, 연설이 끝난 대제사장에게 노고도 치하하지 않고 자리를 뜨시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훤칠한 키에 세련된 외모가 돋보이는 에렌이 모로의 곁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말한다.

 

 

 “공은 케신이 하는 말을 듣고도 그런 말을 하시오? 한낮 라리카스 연방의 제사장에 불과한 주제에 감히 우리의 정당성을 검증하겠다고 하지 않소.”

 

 “모르드, 그것은 차크만의 형식적인 연설일 뿐입니다.”

 

 에렌이 모로를 어떻게든 달래보려 하지만 씨도 먹히지 않는다.

 

 “형식? 난 그 형식에 구역질이 나오!”

 

 모로는 거칠게 언성을 높일 뿐이다.

 

 “신께서 제사장들에게 신탁을 맡겼을 때는 신도 뭔가 계획이 있었겠지만, 결국 모든 게 신의 계획대로 되진 않은 것이오!”

 

 “차크만의 날에 제사장이 결계를 살피는 것은 이그라의 오랜 전통입니다. 아킬라에는 아직 제사장이 없으니 대제사장이 그 일을 대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모로는 막무가내다.

 

 “전통? 제사장은 신탁을 검증하는 게 아니라 신탁에 제사를 지내 결계를 축복하는 것이 진정한 전통이오. 그러니 오직 제사만 지낼 생각이 아니라면 당장 이곳에서 떠나라 하시오!”

 

 “허나. 이미 그들의 힘은...”

 

 “그대도 잘 알다시피, 나는 그 힘을 인정하지 않소!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모로가 질색을 하며 소리친다.

 

 “모르드. 그런 말씀은 삼가시는 것이 좋습니다.”

 

 에렌이 주위를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조언한다. 그러나 그 행동이 모로를 더 화나게 만들어 길길이 날뛰게 만든다.

 

 “공은 저들이 두려운 모양인데, 나는 아니오! 저 연단 위에 있는 쓰레기들은 우리를 검증할 자격이 없소! 그리고 아킬라와 라리카스는 결코 하나가 아니오! 결코!”

 

 옆에서 걷던 타니야의 모핸 나단이 건드릴수록 일만 커진다는 눈짓을 보내지만 에렌도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 물러서지 않는다.

 

 “모르드, 케신 여제의 뒤에는 코나 가문이 있고 그 가문의 뒤에는 연합 위원회와 라리카스 연방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대할 때는 말을 아끼셔야 합니다.”

 

 에렌이 자신을 거듭 설득하려 하자 모로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에게 다가선다.

 

 “모핸, 경고하는데, 나를 가르치려 들지 마시오!”

 

 모로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거칠게 찌르며 소리친다.

 

 “모르드....”

 

 “그만하시오! 저들에게 기가 눌려 언제나 뒤로 물러나기만 하는 공의 말은 더 이상 단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소!”

 

 모로는 에렌이 케신과 한 통속이라도 되는 듯 노려보더니 그대로 회색 복도를 가로질러 사라져 버린다.

 

 

 *

 

 

 차크만의 대제사는 아리안타의 지하에 있는 신탁의 방에서 거의 반나절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 동안 아리안타에 입성한 사도들은 그곳을 떠날 수 없다.

 

 사도들은 어떤 신분이라도 청아한 종소리가 올리면 제사가 끝날 때까지 모두 신탁이 모셔진 성지에 갇히는 것이다.

 

 차크만을 기념해 1년 만에 아리안타를 찾았다가 그곳에 갇혀버린 모핸 훈은 지겨운 회색 성을 빙빙 돌다 그 시간을 의미 있게 쓰기 위해서 모로를 찾아 소회의실로 향한다.

 

 그의 성질을 달랠 수 있는 라그는 온 이그라를 다 털어 오직 자신뿐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모로를 다룰 줄 아는 유일한 남자, 그의 정확한 이름은 훈더스키로우다. 하지만 다들 그를 그냥 훈이라고 부른다.

 

 그는 회색 복도를 걸어가다 자신을 알아보는 라그들을 만나면 반갑게 눈웃음을 치거나 장난스런 윙크를 던진다.

 

 그럼 다들 예외 없이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한다. 1급 사도가 생글거리고 돌아다니는 것은 모로가 다스리는 아리안에서는 상당히 이색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 가득한 문신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문신들은 검은 늑대와 언약의 서를 새긴 것들로 그가 베르 출신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이그라의 남서부에 있는 베르에서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보통 문신을 새긴다. 주로 애도가 필요한 사건들이다. 아끼는 부하가 죽거나 친구나 가족이 죽을 때처럼.

 

 훈이 다스리는 베르는 아킬라 연방의 대표적인 군사 지역이자, 차원 수호 의무를 가지고 있는 일드발퀼의 근거지로 죽음을 애도할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자꾸 문신이 늘어나는 것이다.

 

 *

 

 “도대체 왜 그래?”

 

 훈은 회색의 소박한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앞 뒤 없이 대뜸 묻는다. 턱을 괴고 앉아 있던 모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다지 반기는 기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은 기색도 없다.

 

 “내가 뭘?”

 

 “늘 악당처럼 굴잖아. 자꾸 그러면 평판만 더 나빠진다고.”

 

 “평판 따위는 관심 없어.”

 

 훈이 고개를 젓더니 시종을 불러 술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

 

 신성한 차크만의 날에 술을 가지고 오라는 주문에 남자 시종은 적잖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아주 작은 병에 담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해 온다.

 

 훈은 성미에 차지 않는 약한 술을 잔에 가득 따르더니 한 잔을 모로 쪽으로 건넨다. 모로는 잔을 받아 마시지 않고 그대로 내려놓는다. 차크만의 날은 금주가 미덕이다.

 

 “다들 보이는 대로 믿는다는 걸 잊어선 안 돼.”

 

 훈이 미덕을 무시하고 잔을 비우며 말한다.

 

 “아리안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형이 살아야 할 곳은 아리안이니 이제 이곳에 익숙해져야지.”

 

 모로가 아리안타로 온 것은 불과 5년 전, 모르드 즉위식 때였다.

 

 그 전까지 그는 훈과 함께 베르의 일드발퀼에서 지냈다. 그러니 모로에겐 훈은 친동생 이상이었다.

 

 “그리고 에렌에게 제발 적당히 해. 틀린 말도 아니잖아?”

 

 훈은 조그만 술병을 툭툭 털어 남김없이 잔에 붓더니 시종을 불러 술을 큰 병으로 가져오라며 말한다.

 

 “자고로 모든 게 변하는 거야. 제사장이 차크만의 날에 결계를 검사하고 연합위원회가 승인을 한다고. 그게 지금의 전통이야. 그리고 12연방은 그런 차크만의 전통을 지지하고 있어.”

 

 모로가 거슬린다는 한숨을 뱉는다.

 

 “성역의 밖은 라겐의 족속인 서트와 망자들의 혼으로 썩어가고 있어. 그게 뭘 의미하는지 다들 정말 몰라? 그건, 대제사장과 연합 위원회가 검증한 라리카스 연방의 결계가, 무너졌다는 뜻이야. 그들은 그걸 알면서도 라리카스 연방의 결계를 승인해줬어!”

 

 “모로, 모로.”

 

 훈이 고개를 저으며 시종이 새로 가지고 온 술병을 받아든다.

 

 “제발 그만해. 지금은 정의보다는 평화가 우선인 세상이야. 모두 문제를 원치 않아. 그리고 성역의 밖의 일 따윈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훈은 모로에게 잔을 비우라는 듯 병을 들고 그를 바라본다. 모로는 마지못해 잔을 든다.

 

 “그들이 썩었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근거도 없이 라리카스 연방을 걸고넘어지면 아킬라는 외톨이가 된다고.”

 

 “두렵지 않아.”

 

 모로가 빈 잔을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한다.

 

 “연방의 백성들은 두려워할 거야. 공국의 다른 모핸들도 마찬가지고. 게다가 성역 밖이 괴물들이 라리카스의 결계를 지나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심지어 그들에게는 스올의 표식도 없지.”

 

 훈이 자신의 목에 V자를 그리는 시늉을 하며 말한다.

 

 바아르가 신탁의 힘을 이용해 라겐의 문을 열자 라겐의 기생충이 쏟아져 들어오며 라그들을 전혀 다른 생명체로 바꾸어 놓았다.

 

 스올의 표식은 그 기생충이 목을 파고들어간 V자 모양의 흉터였다. 그 흉터를 가진 자들은 외면상으로는 흡사 라그와 같았지만 본질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쉽게 죽지 않았고 피에 굶주려서 닥치는 대로 살육을 일삼았다. 그런 통제 불능의 괴물들을 사드의 영토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도록 결계를 세운 것이 라리카스였다.

 

 “라리카스가 해낸 일을 생각해 봐. 그들은 사드의 방어선을 세웠어. 그 방어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12연방의 막강한 군력과 지지를 받고 있지. 연합 위원회 대표와 대제사장도 배출해냈다고.”

 

 훈이 모로의 잔에 술을 채우며 타이르듯 말한다.

 

 “그러니 심증만으로 절대 그들에게 반감을 표시해서 안 돼. 그건 12연방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야. 결국 미친 모르드란 평판만 자꾸 쌓이는 거지.”

 

 “난 미치지 않았어.”

 

 “알아. 하지만 미친 것처럼 보이게 됐지. 그 덕에 다들 에렌이 아킬라 연방의 모르드가 됐어야 한다고 수근 대고 있어.”

 

 “그랬으면 차라리 모든 게 편했겠지.”

 

 모로가 거칠게 잔을 내려놓으며 중얼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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