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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Plume
작가 : 별하랑
작품등록일 : 2019.9.10

(오후 11시~00시)"신이 되어야만 해." "싫습니다." 단호히 거절한 소녀를 보며 높은 신은 비웃는다. 어차피 소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네가 나고. 내가 너야.]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살려주세요." 울부짖는 아이.

"너에게 기억을 잊을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매혹적인 신은 소녀에게 속닥거렸다.

"자, 어때? 결정은......

네 몫이야."

 
1부- 1회
작성일 : 19-09-17 23:48     조회 : 242     추천 : 0     분량 : 9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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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칙칙하게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여인이 한참 말 없이 그 자세를 유지했다. 흔들렸던 동공조차 멈춰버린 연두빛 소녀를 바라보는 연두색 눈동자는 위 아래로 천천히 굴러갔다.

 

  "대답 할 생각 없나 봐? 그럼 내 마음대로 할게."

  "예...? 아, 아니 잠깐만요."

 

  꾹꾹 누른 한숨을 깊게 내쉬고 진희의 입을 벌린 르레이스비가 그제서야 답답함이 풀린 듯 입꼬리를 올렸다. 당황함에 계속 통 알 수 없는 외계어만 남발하는 진희를 빤히 응시하다 피식 웃으며 티세트에 손을 가져갔다.

 

  진희의 식성 쯤이야 안 봐도 알 수 있었기에 가장 조그마한 통의 뚜껑을 열어 조그만 찻잎을 찻잔에 툭 던져놓았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르레이스비의 동작을 말 없이 빤히 지켜보다 찻잎을 발견하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거 무슨 차......"

  "홍차. 너 홍차 좋아하잖아."

  "안 좋아하는데요."

  "... ..."

 

  아차.

 

  이미 흩뿌려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르레이스비가 찻잎을 빼내었다.

 

  난 이제 죽었구나. 이 연진희, 주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저 찻잎과 함께 내 영혼도 빼내어지겠지, 그리 생각하며 덜덜 떨리는 손을 마주한 진희의 동공이 이리저리 돌아갔다.

 

  지금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식은땀을 닦아내며 긴장한 진희의 생각과는 다르게 르레이스비는 태연했다. 자신이 진희의 취향을 못 맞춘 것에 아쉬워할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그럼 뭐 좋아해?"

  "잘못했......! 에?"

  "어떤 차가 좋냐고."

  "어, 어어...... 녹차......"

 

  왜 어떻게 죽여줄까, 라고 묻는 것 같을까.

 

  분명 차갑던 물이 르레이스비의 손짓 하나에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로 변했다. 녹찻잎을 담은 고풍스러운 찻잔에 물을 쪼르륵 붓는 것마저 위협스러워 보인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몸을 틀어 소파에 코를 박은 진희의 모습이 불투명한 눈동자에 담겼다.

 

  "뭐 해."

  "예, 에? 죄송합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다시 돌린 진희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모든 게 두렵다. 처음보는 세계도, 처음보는 신이란 작자도.

 

  "됐다, 싶으면 마셔. 무슨 내가 흉악한 범죄자도 아니고 매번 그런 반응 보이니까 기분이 좀 그렇다. 그만 좀 놀라."

  "아... 네, 죄송합니다."

 

  너 같으면 안 놀라겠냐, 라는 생각조차 꾹꾹 눌러 구석으로 버린 진희가 찻잔을 내려다 보았다.

 

  제 생각조차 다 읽어 버리는 신의 앞이니 무엇 하나 편하지 않았다. 정말 제 앞에 있는 자가 생각만으로도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뜬금없이 신이 되라는 제안도 당황스러움 뿐.

 

  눈을 위로 들어 힐끔 르레이스비를 바라보는 녹색 눈이 애처롭게 떨렸다. 유독 아름답게 번쩍이는 찻잎을 제 찻잔에 넣은 르레이스비가 물을 부었고, 이내 찻잔 위로 오로라가 떠올랐다.

 

  형형색색의 빛들이 얽히고 얽히며 아름답게 일렁이는 비단은 그야 말로 절경이었지만, 고아한 빛들의 결합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불만을 품었다.

 

  "차 되게 예뻐보이네요."

 

  왜 나만 어? 그냥 차 주고 너는 멋있는 거 마시냐.

 

  괜히 괘씸해져서 대놓고 들으라고 툭 던진 말에 오히려 르레이스비가 생글생글 웃으며 미소로 화답했다.

 

  "응? 아, 너가 보기에도 그렇지? 이건 여기에서만 자라는 잎으로 만든 거야. 신계에서 지내는 신족들만 마실 수 있어."

  "아......"

 

  지금 이거 마시고 싶으면 신하렴, 하고 유혹하는 거 맞죠, 그쵸.

 

  치사하게 먹을 거 갖고 저러네. 안 들리게 툴툴거리고는 고개를 휙 돌려버린 진희를 보던 불투명한 눈동자가 반달처럼 곱게 접혔다.

 

  "신계에서 거주하는 이들이 아닌 다른 자가 마시면 죽는단다."

  "에......?"

  "몸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아주 끔찍하게 죽고 말테지. 아아, 가여워라."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비꼬듯 옹알거린 르레이스비가 비죽 웃어보였다. 겁을 주려는 의도는 확실했지만, 르레이스비의 저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기에 녹색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 너 다 처먹어라.

 

  르레이스비가 제 생각쯤은 바로 읽어낼 수 있다는 걸 잠시 망각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르레이스비는 제 찻잔을 진희에게 슥 내밀었다.

 

  "마셔볼래?"

  "예? 아, 아뇨. 마시면 죽는다면서요."

  "아니야. 넌 마실 수 있어. 넌 특별하니까."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통 알 수 없는 르레이스비의 의도에 잠시 머뭇거리던 진희가 찻잔을 들었다. 이런 곳에서 씨름하면서 신 같은 거 할 바엔 여기서 죽는 게 나을 것이다.

 

  꿀꺽.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목으로 넘긴 차에 녹색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이거 뭐야...

 

  "아무 맛도 안 나는데요?"

  "응. 원래 그런 차야."

 

  따뜻한 물 마시는 맛에 잠시 의문을 품었다. 저 신이라는 작자가 사기를 친 것인가. 당당하게 그런 차라고 외친 르레이스비가 살짝 쥔 주먹을 입가로 가져가며 웃음을 터트렸다.

 

  찻잔을 손에 꼭 쥔 채 놓지 못하는 진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조용히 꿈뻑였다. 도대체 자신이 전생에 뭘 잘못했기에 하루만에 이상한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는가. 이젠 신이라는 작자가 겁이란 겁은 다 줘놓고는 깔깔 웃는다.

 

  지금 장난이나 칠 때인가. 살짝 기분이 상한 진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저 놈은 분명 이런 식으로 질질 끌고 갈 것이다, 라 예상한 진희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르레이스비의 입가에 번젔던 미소가 모두 거둬졌다.

 

  "그래, 그래서 생각은 해봤니?"

  "뭐가요."

  "신. 할 생각 있냐고."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다. 딸각. 유리 테이블에 찻잔이 내려짐과 동시에 앵두 같은 입술이 벌어졌다.

 

  "없습니다."

 

  제법 단호한 말투에 르레이스비의 눈이 꿈뻑였다. 그럴 거라고 예상을 못 했었던 건지, 아니면 일부로 연기라도 하는 건지.

 

  어떤 경우 간에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지다. 후폭풍이 어떻든 간에 진희는 신 같은 거 할 생각 따위 없었다. 거지 같은 필르야티엘 졸업하고 나서 세계정부에 마나 팔아다 번 돈으로 어머니와 오순도순 살 생각이었다.

 

  재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하늘에서 보면서 잘 사는 걸 지켜봐주길 바랐다. 신 같은 거 할 생각도 없다. 3년만 있으면 필르야티엘 졸업이라 이 악 물고 버티고 있었건만 신이 웬 말인가.

 

  "으음... 그래, 그럴수도 있지. 그런데 이유 좀 들어봐도 되겠니?"

  "굳이 말 안 해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건 그래. 답변을 한 르레이스비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두 손으로 턱을 괸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딱딱했다. 묘하게 느껴지는 위협에 몸을 움찔거린 진희가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신 같은 거 할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주세요."

  "흐음? 뭘?"

  "이러는 거요. 집에 갈 수 있게 해주세요."

 

  꽤나 긴장한 듯이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보며 르레이스비가 피식 웃어 보였다. 참 가소롭다는 듯이.

 

  "그럼 신이 될 생각이 들게끔 해줘야지."

  "아무리 노력하셔도 제 생각은 변함 없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르레이스비가 치맛자락을 쥐고 사뿐히 일어나곤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훅-

 

  천장에서 아른거리는 빛을 내뿜던 샹들리에가 꺼진다. 긴 유리 테이블 양끝에서 아른거렸던 촛불도 파장을 맞이했다.

 

  "......?"

 

  제 눈가를 무언가가 가리는 게 느껴져 손으로 더듬거리며 무언인지 알아내려고 하기도 전에 시야가 밝아졌다.

 

  "자, 눈 떠보렴."

 

  무언가를 유혹하는 듯한 낮은 톤의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인 르레이스비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녹색 눈동자가 꿈뻑이며 제 눈 앞에 펼쳐진 장소를 하나하나 뜯어본다. 아까 방에서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눈부신 샹들리에가 가장 위에서 제 빛의 조각들을 불썽사납게 내리는 비처럼 떨어뜨리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된 기둥들이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고 거울인 줄 알았던 깨끗한 대리석 바닥들이 샹들리에 빛을 머금었다.

 

  천장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붉은 휘장이 단 번에 시선을 끌었지만 이 상황에 구경할 틈은 없었다.

 

  "멋있네요."

  "그렇지? 신이 되면 원하는 공간쯤은 네멋대로 만들 수 있어. 너가 꿈에 그리던 장소들을 만들 수 있다고."

  "그건 굳이 신이 아니라도 만들 수 있는데요."

 

  마나를 계속해서 주입해야 하지만 마나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더 이상 저 신이라는 작자가 두렵지도 않다. 죽일 거면 죽이고 말 거면 말아라.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는 진희를 가만히 바라보던 입이 비죽였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거 아니?"

  "뭐가요."

  "너가 원하는 세계도 네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어. 이런 거는 신계에서 제법 일한 자라면 만들 수 있다지만, 세계는 신들만이 만들 수 있지."

 

  세계라는 단어에 눈이 휘둥그레진 진희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저가 그려왔던, 환희로 적셔진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참으로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이 있기에 유혹에 끌려가지 않았다.

 

  신은 소멸당하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좋지만 어찌보면 잔인했다. 죽지 않고 끝없는 세월을 살아간다는 건 자신에게 고통으로 다가올 것임이 틀린없었다.

 

  "그래도 싫습니다."

 

  높은 계단 가장 위에서 우뚝 서 있는 르레이스비를 올려다본다. 훨씬 험악해진 표정으로 말 없이 진희를 내려보았지만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신이면 다야?

 

  그래, 죽여볼 테면 죽여봐라. 오직 이 문장 하나로만 정신줄을 잡은 진희의 녹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생각이 바뀔 일은 절대 없을 거란 확신에 찬 눈동자에, 연두색으로 물들어가던 불투명한 눈동자가 천천히 꿈뻑였다.

 

  "그래...... 싫다는 거구나. 그런데 이를 어쩌지."

 

  르레이스비가 천천히 의자에 기댄 채 저를 노려보는 녹색 눈동자를 맞이했다.

 

  "넌 신이 되어야 해."

  "싫습니다."

 

  단호한 말투와는 달리 콩닥콩닥 뛰는 긴장한 심장박동에 르레이스비가 입꼬리를 들어 비웃었다.

 

  "너에게 선택권은 없단다."

 

  머릿속이 새하얀 종이처럼 비워졌다. 그럼 왜 여지껏 제 생각을 물은 것인가. 어차피 끝은 이것이면서. 희망고문이라도 한 것인가.

 

  "차라리 죽이세요."

 

  넋이 한참 나가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곱씹으며 내뱉었다. 신이 될 바엔 여기서 혀 깨물로 죽을란다.

 

  그 말에 르레이스비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신이 될 바엔 죽을게요."

  "아니, 안 된다니까?"

 

  어째서?

 

  정말 진심으로 저를 신으로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자결이 답이다,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굳히려 하는데 르레이스비가 뜬금없이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풉...... 크흡......"

 

  뭐야, 왜 저래. 약이라도 했나.

 

  계속해서 떨리는 어깨를 보던 진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진짜 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푸흡... 아학학!"

 

  엄마, 쟤 이상해.

 

  이쯤되면 병이다. 은근슬쩍 뒤로 조금씩 빠지는 진희의 발목을 바로 다음 말이 붙잡았다.

 

  "푸흡... 넌 이미 신이거든."

  "...... 예?"

 

  이건 무슨 멍멍이 소리야.

 

  일단 진정하고 상황파악을 해보려 했으나 그럴 가치도 없었다.

 

  저것이 지금 나를 이미 신으로 만들었다, 이거지?

 

  그래, 그 차를 마시게 할 때부터 이상했다. 혹시 그 차를 마시면 신이 되는 걸까, 괜히 마신 자신을 원망하면서도 벽을 짚고 미친듯이 웃어대는 르레이스비를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아학학학학! 큽...! 푸흡...!"

  "...... ."

 

  진짜 왜 저러고 살까.

 

  졸지에 신이 되어버린 제 마음은 모른 채 깔깔 웃어대기만 하는 게 원흉이라니. 지금 무릎 꿇고 제 발치에서 싹싹 빌어도 용서해 줄까, 말까인 상황이다.

 

  비틀리는 입매를 확인하지 못하고 르레이스비를 주시하는 녹색 눈동자가 화르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카를을 상대하는 게 몇 배는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람 속을 이렇게 긁어놓을 줄이야.

 

  "그만 웃으시죠. 양심이란 게 존재는 하는 건가."

  "큽... 미안... 너무 웃긴 걸 어떡해."

 

  시발.

 

  평소 욕을 쓰지 않던 진희의 마음속에서 찰진 욕이 흘러나왔다. 그냥 평범한 능력자 1이었던 자신이 신이 되었다.

 

  제 동의도 없이 순식간에 신이 되어서 맛 하나도 없는 차 마시고 사기 당하고, 정말 힘들게도 사는 자신에게 위로의 치얼스라도 할까 생각하며 가상의 눈물을 훔쳤다.

 

  ***

 

  "여기야."

 

  몇 십분을 웃어댄건지 아직도 입꼬리가 씰룩대는 르레이스비가 애써 차분한 척하며 진희를 안내했다. 온통 희고 아무것도 없는 방, 정말 무늬 하나 없고, 어디가 끝인 지도 모르게 그림자 하나 늘어지지 않은 방이었다.

 

  여길 꼭 들러야 한다면서 대략 12시간을 걸어왔는데 텅 빈 방이 등장해 눈을 의심했다. 신이라는 놈이, 여기서 몇 십억 년을 있었다는 놈이 길을 열심히 헷갈리신 덕에 3시간이면 도착할 거 4배나 더 걸리는 결과를 낳았다.

 

  좋은 거 선물해 준답시고 그렇게 걸어서 데려온 곳이 여기인 지라 짜증을 넘어선 허탈의 경지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이곳은 텔레포트 금지구역, 신들이 머무는 성임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를 침입에 대비해 텔레포트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진희의 상식으로는 도대체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하지 못 했다.

 

  "내가 꼭꼭 잘 숨겨놨으니까 알아서 찾으렴. 난 일이 있어서 이제 가 봐야 겠다."

  "예?"

  "안녕. 잘 찾아봐! 참고로 그거 찾기 전엔 여기서 못 나가."

  "예?"

 

  저... 저......

 

  저 미친 신이!

 

  약오르게 손을 붕붕 흔들며 휙 떠나버린 르레이스비를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에 생기가 날아갔다. 르레이스비의 말대로 문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결론은 그 선물인지 똥인지를 찾기 전에는 못 나간다는 뜻이다.

 

  "하... 하하......"

 

  헛웃음만을 흘린 녹색 눈동자가 끝없어 보이는 흰 공간을 응시했다. 온통 흰 공간이니 분명 선물이 눈에 잘 보일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선물은 개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혹시 보호색으로 하얀 포장지를 썼을까, 생각해봤지만 길게 늘어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음으로 패스.

 

  샹들리에나 조명 하나 없이 초롱초롱한 불빛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음에도 도드라지는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흠......"

 

  무작정 걷기엔 이미 대부분의 체력을 소모했다. 사기꾼, 아니, 신이란 놈이 12시간 동안 걷게 하는 바람에 다리가 미친듯이 후들거렸다.

 

  심하게 깨끗한 나머지 신발 자국이 나버린 바닥에 풀썩 주저앉자마자 녹색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와...... 뭐야."

 

  걸을 땐 분명 딱딱했던 바닥이 침대 마냥 푹신해져서 정말 눕고 싶게 만들었다. 이미 체력은 바닥이고 피로도 쌓였겠다.

 

  한 숨 자자.

 

  지친 몸을 바닥에 풀썩 눕고 나서야 머릿속이 천천히 정리되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좋은 방법으로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본 신은 총 두 명. 르레이스비, 렌나.

 

  특징은 둘 다 개념 팔아먹음.

 

  "음음."

 

  혼자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천재임이 틀림없었다.

 

  살포시 감겨있던 눈이 떠지고 녹색 눈동자가 빛을 받아 신비롭게 꿈뻑였다. 선물이고 나발이고 관심없으니 그냥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을 생각이 담긴 꿈뻑임이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불효녀는 오늘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졸지에 신이 되어버렸어요. 신으로 살 바엔 죽으렵니다. 엄마, 집 잘 뒤져보면 제가 남긴 마나들이 많을 거예요. 갖다 팔고 엄마 친구들이랑 행복하게 살아야 돼요. 저 기다릴게요.

 

  "하아......"

 

  이게 뭔 쓸데없는 짓인지.

 

  신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 한숨이 터져나왔다. 혹시 선물이 다른 선물인 건 아닐까. 혹시 선물이 엿이라도 되는 것일까.

 

  "르레이스비 개새끼."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말에 헙! 하며 입을 막았지만 어차피 여긴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피식 웃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혹시 이게 선물인가. 마음껏 욕하라고?

 

  녹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동안 꾹꾹 눌러 왔던 모든 욕들을 개방할 시간이 왔다. 날뛰어라, 비속어여.

 

  "르레이스비 이름 뿐인 신......?"

 

  신나서 외치던 진희의 입이 굳었다.

 

  "이건 또 뭐야."

 

  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꿈뻑였다. 경악이 나올 정도로 몽롱하면서도 신비로운 빛의 결합을 조각조각 모아둔 것 같은 빛덩어리가 쪼르륵 다가왔다.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팽창하는 덩어리가 뿜어내는 빛의 줄기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영롱한 푸른색, 보라색, 연두색 등 형형색색의 빛들이 서로 얽히며 제 자태를 뽐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낯익음에 잠시 의아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톡-

 

  몸을 일으켜 한 걸음에 다가가 덩어리에 손가락으로 살짝 건들인다. 꽤나 비쌀 것 같은 로션을 살짝 만진 느낌에 감탄하며 다시 만져보려 손을 뻗은 순간.

 

  쩌적......

 

  사방곳곳에 퍼져있던 빛들이 옆으로 천천히 흩어지며 흰 색뿐이었던 공간을 다채롭게 꾸며나갔다. 덩어리에 금이 가며 생긴 흔적들을 감추려 달려드는 빛들의 수고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게 뭔......"

 

  삽시간에 절반 이상 금이 간 빛덩어리가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너 이 자식, 푹신한 건 알아가지고. 빛 주제에 통하는 게 있다며 속으로 뿌듯해 하던 진희에게 빛줄기가 응답했다.

 

  "악!"

 

  도망칠 틈도 없이 진희를 감싼 빛줄기가 투둑 끊어지고, 빛들을 지탱하던 덩어리도 마침내 파장을 맞이했다.

 

  와장창!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깨진 유리파편 사이로 눈부신 광망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있으면 실명될 것임이 분명하다. 눈을 질끈 감은 진희의 귓가로 뚜벅뚜벅, 하는 나지막한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

 

  빛이 흩어짐과 동시에 게슴츠레 떠진 진희의 녹색 눈동자로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성인 남성의 외형을 띤, 어딜봐도 수상한 사람이었다.

 

  빛을 녹여 만든 것같은 찬란한 금발에 짙은 녹색 눈동자. 결혼식이라도 하는지 쫙 빼입은 하얀 정장에 포인트로 금빛 줄을 배치해놨다.

 

  동화 속 왕자님도 아니고 뚜렷한 이목구비와 큰 키에 당황한 것도 잠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고는 뒷걸음직 쳤다.

 

  인... 인형이 다가온다.

 

  주춤 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기어코 벽에 닿은 걸 확인하자마자 눈만 힐끔 돌려 제 코앞까지 다가온 자를 응시했다.

 

  "저... 그 누구세......"

  "인사가 늦었네요."

 

  한껏 경계한 상태로 온몸을 방어하려 한 것도 잠시, 갑작스럽게 제게 한 쪽 무릎만 꿇은 자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신종 고문이야, 뭐야. 나한테 왜 그래, 부담스럽게.

 

  신 됐다고 경호라도 붙여준 걸까,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던 진희의 생각을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당신의 천관 자리를 맡은...... 알프레도스 키미안이라고 합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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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부- 13회 2019 / 10 / 14 231 0 5658   
20 1부- 12회 2019 / 10 / 5 208 0 4990   
19 1부- 11회 2019 / 10 / 2 224 0 7241   
18 1부- 10회 2019 / 10 / 1 221 0 7569   
17 1부-9회 2019 / 9 / 30 226 0 6857   
16 1부- 8회 2019 / 9 / 28 214 0 6773   
15 1부- 7회 2019 / 9 / 27 225 0 7439   
14 1부- 6회 2019 / 9 / 24 235 0 7383   
13 1부- 5회 2019 / 9 / 23 243 0 7521   
12 1부- 4회 2019 / 9 / 21 232 0 7314   
11 1부- 3회 2019 / 9 / 20 243 0 7837   
10 1부- 2회 2019 / 9 / 18 231 0 9713   
9 1부- 1회 2019 / 9 / 17 243 0 9012   
8 [서장] 7회 2019 / 9 / 17 218 0 9529   
7 [서장] 6회 2019 / 9 / 16 225 0 7482   
6 [서장] 5회 2019 / 9 / 15 238 0 8138   
5 [서장] 4회 2019 / 9 / 14 229 0 6505   
4 [서장] 3회 2019 / 9 / 13 235 0 10377   
3 [서장] 2회 2019 / 9 / 12 268 0 9178   
2 [서장] 1회 2019 / 9 / 11 250 0 9868   
1 prologue 2019 / 9 / 10 379 0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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